35.일본학 연구 (책소개)/3.일본근대사

이토 히로부미

동방박사님 2021. 12. 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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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에서는 근대의 기획자
한국에서는 침략의 원흉
상반된 이토 히로부미의 실상을 파헤쳐본다

농민 출신으로 수상에 올라
‘제국 헌법 체제’를 구축한 정치가

2018년 150주년을 맞아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도 그 주역의 하나로 ‘근대 일본의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침략자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행동과 업적의 한 측면을 부각하여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추적하여 균형 잡힌 이해가 가능하도록 돕는다.

목차

머리말·‘근대 일본의 기획자’ 이토의 생애 실증적 탐구

제1장 존양양이 지사(志士)

제2장 메이지정부의 유력자로

제3장 입헌정치체제의 수립

제4장 메이지 천황과 이토

제5장 입헌정치 지도자에서 원로(元老)로

제6장 한국침략의 실행

제7장 이토의 사망과 한국 강제병합

맺음말·약소국에 피해 강요한 제국주의자의 얼굴
 

저자 소개

저 : 방광석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석사과정을 마치고, 일본의 릿쿄(立敎)대학교에서 일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사학회 전임 회장이며 현재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본 근대 정치사·외교사·대외교류사를 전공하고 있다. 저서로 『근대 일본의 국가체제 확립과정』, 공저로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한국 근대국가 수립과 한일관계사』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 『동아시아 역사 속의 여행』 『근대 ...
 

책 속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농민 출신으로 수상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무사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무사신분을 얻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라는 점도 이토가 출세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번벌(藩閥)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그가 젊은 나이에 메이지정부의 고위 관료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p.6

이토는 쇼카손주쿠를 통해 요시다 쇼인을 만났고 이후 평생의 스승으로 떠받들었지만, 요시다는 이토가 근대일본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p.9

이토가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켜가는 과정에서 그의 정치적 지향을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된 것은 천황 측근들이 일으킨 이른바 ‘천황친정’운동이었다. --- p.16

이토는 유럽 입헌제도 조사를 통해 입헌제 수립의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두 선생으로부터 국가조직의 큰 틀을 이해하게 돼 체제구상의 전망을 충분히 세웠을 뿐만 아니라 영국·미국·프랑스의 자유과격론자의 저술을 금과옥조처럼 잘못 믿는 일본의 현 상황을 타개할 방도와 수단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는 전제군주에 대항해 입헌제를 쟁취한 구미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자유과격론에 이끌려 입헌제를 도입할 것이 아니라 천황제를 중심으로 기존의 여러 국가기구를 입헌적으로 바꿈으로써 입헌체제의 수립이 가능하다는 확신이었다. --- pp.45~46

이토는 헌법제정자의 임무를 마치자 입헌정치의 운용의 책임도 맡게 되었다.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맡은 이토는 헌법 심의과정에서 1888년 4월 새로 설치한 추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헌법 발포 후 정부 일선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제1회 의회 개설 당시 수상 야마가타의 요청으로 귀족원 의장을 맡게 되었다. 헌법제정자로서 실제 입헌정치의 정착과정에도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 p.84

1880년대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정부의 지도자이면서 대한정책 결정의 핵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시기에 이토는 입헌제도 조사차 유럽에 파견되어 있었으나 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자신의 의견을 일본정부수뇌에게 전달했다. 1884년의 갑신정변 시기에는 참의(參議) 겸 궁내경으로 대청교섭을 주도해 톈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제한하고 조선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 p.89

이토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3월 13일 ‘위문특파대사’로 대한제국 왕실을 방문한 이후 1905년 11월에 다시 찾아와 무력시위하에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며 ‘을사늑약’을 강요하였으며, 일본으로 돌아간 이토는 직후 한국통감을 자청하여 다시 한국으로 부임하여 3년여에 걸쳐 ‘보호정치’를 지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 p.90

병합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파탄에 이른 ‘보호통치’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결국 고무라의 안에 순순히 동의했고 이렇게 해서 1909년 7월 6일 한국병합에 관한 일본정부의 공식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의 한국병합 방침은 확정되었고 이토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던 것이다. --- p.94

일본정부에서 한국병합이 논의된 것은 ‘안중근의거’ 이전부터이며, 이토가 만주로 떠나기 전인 1909년 7월 각료회의에서 결정한 대(對) 한국방침 및 시설대강에서 병합 방침이 확정되어 있었다. --- p.98

이토는 40년 가까이 일본정부의 핵심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쌓아 ‘근대일본의 설계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 p.107

이러한 이토의 업적이 반드시 긍정적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행한 많은 근대적 개혁은 민중을 억누르고 지배층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국헌법체제’가 정치적 민주화를 가로막고 1930년대 이후 군부의 독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 p.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