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서양철학의 이해 (책소개)/1.서양철학사상

성의 정치학 (케이트 밀렛)

동방박사님 2021. 12. 1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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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제도화된 남성 중심 지배 이데올로기인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교묘한 형태로 “내면의 식민화”에 빠지게 된다고 진단하며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끈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 초판 출간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국 독자를 찾아왔다. 이 책은 ‘정치’를 정당을 중심으로 한 협소한 개념으로 보지 않고 “권력으로 구조화된 관계와 배치”로 정의해 가부장제에서 성(性)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분석했다. 이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여성 참정권을 쟁취한 이후 반동적 상황을 겪으며 두 번째 페미니즘 운동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난 당시 미국의 상황은 일견 현재 한국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하다. 밀렛의 말처럼 호주제 폐지와 함께 표면적으로는 “성차별이 해소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가부장제는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이자 “근본적인 권력 개념”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혁명의 전투장은 인간 제도라기보다 의식”이기 때문이다. 2009년 출간되었던 한국어판이 절판된 후에도 많은 독자가 애타게 찾으며 재출간되기를 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성 정치학』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읽히고 있다. 밀렛은 2017년 9월 세상을 떠났지만, 가부장제를 향한 도전의 메시지는 지금도 이 책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가부장제의 위험과 억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미래는 가부장제를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 여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말이다.”(15쪽, 2000년 일리노이 출판사 서문 중에서)

목차

서문 - 일리노이 출판사(2000)
서문 - 터치스톤 출판사(1990)
초판 서문 - 더블데이 출판사(1970)

1부 성 정치학

- 01 성 정치학의 사례들
- 02 성 정치학의 이론

2부 역사적 배경

- 03 성 혁명 제1기: 1830~1930
- 04 성 혁명 반동기: 1930~1960

3부 문학적 고찰

- 05 D. H. 로렌스
- 06 헨리 밀러
- 07 노먼 메일러
- 08 장 주네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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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명)

저 : 케이트 밀렛 (Kate Millett)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운동의 원동력이 된 기념비적인 저작 《성 정치학》의 저자. 동성애자, 정신 질환자, 노인, 정치적 억압에 의한 희생자의 복종을 폭로하기도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겸 예술가이기도 하다. 케이트 밀렛은 1956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1958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여자 단과 대학 세인트 힐다스 칼리지에서 미국 여성 최초로 1...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M.C. 에셔 : 무한의 공간』『그는 지도 밖에 산다』『강조해야 할 것』『성 정치학』『별에서 온 아이』『그렌델』등이 있다.
 
 

책 속으로

여기에서 ‘정치’라는 단어는 주로 양성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데, 일차적으로 양성의 상대적 지위가 보여주는 진정한 본질을 역사와 현재의 시점에서 개괄하는 데 아주 유용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정치학이 제공하는 프레임을 넘어서 권력관계에 대한 더욱 타당한 심리학과 철학을 발전시키는 연구야말로 오늘날 적절한 일인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낯설고 비관습적인 근거에서 권력관계를 다루는 정치학 이론을 정립하는 일은 실로 긴요하다. 따라서 나는 인종, 신분, 계급, 성처럼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는 일련의 집단들 사이의 개인적 접촉과 상호작용에 근거해 정치학을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특정 집단은 기존의 수많은 정치 구조들 속에서 재현되지 않으므로 그들의 지위는 매우 안정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 억압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인종 간의 관계가 하나의 정치적 관계, 즉 출생에 의해 정의되는 하나의 생득적 집단성이 또 다른 생득적 집단성을 지배하는 정치적 관계라는 사실을 결국 인식할 수밖에 없다. 생득권만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집단은 급속하게 사라지는 추세나 그 유서 깊고 보편적인 지배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성의 영역을 지배하는 구조다.

양성 간의 관계 체제를 편견 없이 검토해보면, 현재뿐만 아니라 전체 역사를 통틀어 양성 간의 관계가 보여주는 상황은 막스 베버가 지배와 종속 관계라 불렀던 지배의 현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사회 질서 안에서 거의 검토되지 않을뿐더러 인식되지 않았음에도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생득적 우월성은 제도화되어 있다. 이러한 양성 간의 체제를 통하여 가장 교묘한 형태의 ‘내면의 식민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그 어떤 형태의 인종 차별보다 강고하고, 그 어떤 형태의 계급 차별보다 완강하며 더욱 획일적이고 분명 더 영속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지금 성차별이 해소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의 지배는 우리 문화에 가장 널리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가장 근본적인 권력 개념을 제공한다.
--- p.69~72

오늘날처럼 ‘성 혁명’이라는 말이 대단히 유행하는 시기에는 아주 하찮은 사회적?성적 행동 양식을 설명할 때조차 이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순진한 적용밖에 되지 않는다. 성 정치학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진정 혁명적 변화는 앞서 ‘이론’이라는 맥락에서 개괄한 바와 같이 양성 간의 정치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가부장제라고 정의된 상태가 너무나 오랫동안 보편적 성공을 거두어왔으므로 그것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할 근거는 매우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가부장제는 변했다. 아니, 최소한 변하기 시작했다. 성 혁명 제1기의 대략 100여 년 동안 가부장제라는 인간 사회 조직은 지금까지 역사에 알려졌던 그 어떤 조직보다 더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은 듯 보였다. 문명의 가장 기초 통치 기제였던 가부장제는 이 시기에 이르러 붕괴 직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강하게 논박되면서 수세에 몰렸다. 물론 붕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 혁명 제1기는 개혁 도중 중단되어버렸고 이후 반동의 물결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그 혁명적 동요 속에서 아주 실질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성 혁명은 무엇보다 전통적 성적 금기를 종식하는 일이 될 것이다. 특히 가부장제적 일부일처제를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동성애와 ‘사생아 출산’, 청소년의 성행위, 혼전 성행위, 혼외정사 등에 대한 금기를 종식해야 한다. 성행위에 부여되는 부정적 분위기 역시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성에 대한 이중 잣대와 매춘 또한 마찬가지로 사라져야 한다. 성 혁명의 목표는 성적 자유에 대한 유일하고도 관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그 기준은 전통적 성적 관계가 보여주는 어리석고도 착취적인 경제적 기반에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 p.135~136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 몇백 년 동안 인류학을 괴롭힌 기이한 논쟁 하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간단히 가부장제 기원학파라 부르는 학파는 가부장제 가족이 인간 사회 조직의 원초적 형태이며, 부족이나 국가 등은 그것에서 진화되었거나 그것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러한 주장이 가져오는 효과는 가부장제를 사회의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형태로 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형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 형태는 남성의 육체적 힘과 출산으로 ‘나약해진’ 여성의 상황이라는 생물학적 근거를 갖는다. 이는 수렵이 필요한 환경에 부합한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여성의 종속은 합리적이며 필연적이기까지 한 환경의 산물이 된다. 이러한 이론적 가설은 필연적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한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사회적?정치적 제도는 일반적으로 육체적 힘에 근거하지 않으며 다른 사회적?기술적 힘의 형태들과 연합된 가치 체계로 뒷받침된다. 또한 수렵 문화 다음에는 대체로 농경 사회가 뒤따랐는데, 농경 사회는 수렵 문화와는 상이한 환경과 요구를 가졌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은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조직되므로 육체적으로 나약해지는 사건도 아니며 열등한 육체의 원인이 되지도 않는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양육이 이루어지는 풍요 숭배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형태이므로 다른 인간 제도와 마찬가지로 그 기원을 자연 바깥에서 찾는 게 합당하다. 우리는 가부장제의 기원이 가진 원초적 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의 제도이므로 가부장제 또한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추론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는 특정 상황의 산물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가부장제에 선행하는 다른 사회 조건 또한 존재했을 것이다.
--- p.224~225

1930년에서 1960년 사이 보수적 경향이 경제와 교육에서 미국 여성의 지위를 얼마나 악화시켰는지를 보여주는 많은 연구가 나왔다. 이 연구자들은 보수적 경향이 득세한 이유를 전후(戰後)의 반동적 분위기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반감 탓으로 돌리고 있다. 또한 여성이 주기적으로 노동 시장에서 대규모로 쫓겨나면서 예비 노동력으로 착취당하고, 다시 노동 시장으로 진입한다 하더라도 미천한 직종에 종사하게 되는 경제 상황과 “더 고귀한 가정 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탓으로 돌렸다. 이는 이미 어느 정도 입증된 현상이므로 여기에서는 문학과 학문 분야에 확산되어 나타난 여론의 흐름과 반혁명 시대의 지적 기원과 분위기에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물론 반동의 시대는 실로 종교 부흥 시대였으며, 특히 신망이 두텁고 영향력이 있는 문학과 학제의 영역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부장제 사회 질서와 성 역할, 남성과 여성에 대한 기질적 차별화 등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종교에서 나오지 않았다. T. S. 엘리엇의 경건함과 옥스퍼드 대학과 신비평에서 유행하는 신정통주의의 신성함 등은 사회 전체를 위한 구명정 역할을 하기에 부족했다. 합리성으로부터 나와 신화라는 어두운 동굴로 도피한 작가와 비평가 또한 그러한 역할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낡은 태도가 새롭게 정식화된 것은 과학, 특히 심리학과 사회학, 인류학과 같은 새로운 사회 과학에서부터였다.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데 유용한 권위를 지닌 학문 분파였다. 조금이라도 덜 공격받기 위해서는 아무리 수상하다 하더라도 생물학이나 수학, 의학과 같은 좀 더 실증적인 과학과 연계를 맺어야 한다. 보수적 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혁명적 변화를 수행하는 데서 (특히 가족과 같은 기본 단위에 대한 철저한 변화를 실천하는 데서) 난처해하고 꺼리는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과학이라는 최신식 언어로 별개 영역이라는 낡은 원칙을 다시 포장해야 했다.

이들 중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프로이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당대 성 정치학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강력한 반혁명적 힘이었다. 프로이트의 성 이론은 로렌스 시대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 매우 대중적이었지만 미국만큼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한 곳도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미국에 끼친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미국은 또한 성 혁명이 일어난 최초 중심지였던 만큼 프로이트의 이론을 간절히 필요로 했다. 일반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은 성적 자유를 향한 자유로운 충동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며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통적 청교도주의의 금기를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추종자들 그리고 그를 대중적으로 알린 사람들의 작업은 양성 간의 불공평한 관계를 합리화하고 전통적 성 역할을 승인하며 기질적 차이를 확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p.354~356

출판사 리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페미니즘의 정전(正典)
제2물결 페미니즘의 살아 있는 역사, 『성 정치학』

1970년 초판 출간 50주년 기념 한국어판 출간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제도화된 남성 중심 지배 이데올로기인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교묘한 형태로 “내면의 식민화”에 빠지게 된다고 진단하며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끈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 초판 출간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국 독자를 찾아왔다. 이 책은 ‘정치’를 정당을 중심으로 한 협소한 개념으로 보지 않고 “권력으로 구조화된 관계와 배치”로 정의해 가부장제에서 성(性)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분석했다. 이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밀렛의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1970년 출간된 이 책은 미국 사회를 뒤흔들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당시 미국은 여성의 참정권을 쟁취했지만, “혁명이라기보다 개혁으로 끝난” 첫 번째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이 잠잠해진 이후 다시금 두 번째 거대한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성을 향한 노골적인 혐오는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심리학과 사회학 등 사회적 통제를 유지하는 데 유용한 학문의 뒷받침을 받은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가 견고하게 유지되던 당시 상황에서 낭만적으로만 여겼던 남녀의 사랑을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관계로 정의한 주장은 반대 세력을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밀렛의 초상화를 표지에 장식하며 페미니즘 운동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1970년 8월 31일 발행된 『타임』에는 밀렛의 논문을 지도한 조지 스테이드 교수의 다음과 같은 평이 실려 있다. “호두까기 인형에 고환이 물린 채 앉아 있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다.” 그의 한마디는 이 책을 둘러싼 당시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 참정권을 쟁취한 이후 반동적 상황을 겪으며 두 번째 페미니즘 운동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난 당시 미국의 상황은 일견 현재 한국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하다. 2005년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가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은 이후 개정된 민법이 2008년부터 시행되면서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질서가 불합리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 현대사에 기록될 큰 변화를 맞이했다. 하지만 30대 기혼 여성이 처한 현실을 그려낸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에게도 공감을 받으며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밀렛의 말처럼 호주제 폐지와 함께 표면적으로는 “성차별이 해소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가부장제는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이자 “근본적인 권력 개념”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혁명의 전투장은 인간 제도라기보다 의식”이기 때문이다. 2009년 출간되었던 한국어판이 절판된 후에도 많은 독자가 애타게 찾으며 재출간되기를 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성 정치학』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읽히고 있다. 밀렛은 2017년 9월 세상을 떠났지만, 가부장제를 향한 도전의 메시지는 지금도 이 책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가부장제의 위험과 억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미래는 가부장제를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 여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말이다.”(15쪽, 2000년 일리노이 출판사 서문 중에서)

가부장제의 근원을 파헤친 치밀한 분석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평등의 완전한 실현을 위하여


케이트 밀렛은 『성 정치학』을 총 3개 부로 구성하고 있다. 1부는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 장 주네의 작품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관계 속에 내재된 지배와 권력의 개념을 분석하고 성 혁명과 관련한 이론을 제시한다. 2부는 미완으로 끝난 첫 번째 성 혁명과 이후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는 보수 반동 세력의 역사적 사례를 조명한다. 마지막 3부는 D. 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로 대표되는 반 페미니즘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며 가부장제가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 장 주네의 경우는 앞서 소개된 작가들과 달리 동성애라는 금기에 대항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성 정치학』이 불러올 두 번째 물결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다.

헨리 밀러의 『섹서스』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성애 묘사로 시작하는 1부는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첫 장을 연 역사적인 저술로 독자를 이끈다. 친구의 아내를 유혹해 성관계를 갖는 모습(헨리 밀러, 『섹서스』)을 통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자랑하듯 보여주거나, 아내를 살해한 후 하녀를 성폭행하면서 지배 욕구를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노먼 메일러, 『미국의 꿈』). 이처럼 철저하게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혐오하는 모습을 넘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치 ‘사육’하려는 모습을 통해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하고, 독자의 욕망을 채워주며, 결과적으로 현실에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옴을 보여준다. 반면 장 주네의 작품을 통해 사회가 만들어낸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명하고 성이 문제의 핵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고 설명한다. 밀렛은 이어서 완벽하게 사회화 체계를 갖춘 가부장제의 권력 작동 방식을 이데올로기, 생물학, 사회학, 계급, 경제?교육, 폭력, 인류학, 심리적 측면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체한다. 이를 통해 왜 성을 ‘정치’의 범주에서 고찰해야 했는지 증명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제도와 체제로는 변화를 이룰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2부에서 제1물결 페미니즘 운동 과정과 반동기를 세밀하게 돌아보며 진정한 혁명적 변화는 남녀 간의 정치적 관계의 근본적인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제1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참정권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개혁의 성과를 평가하고 있다. 다만 “지나치게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 참정권 쟁취처럼 자체의 불완전함으로 운동이 와해되고 반동기를 불러옴을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결과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여성으로부터 도전을 받은 가부장제는 “과학이라는 최신식 언어”를 동원해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정당화하고 여성의 기질적 열등함을 증명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남근 선망 이론’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동원한 프로이트 꼽으며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영문학자인 밀렛은 3부를 통해 대표적인 반 페미니즘 작가 3인(D. 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작품에 내재된 가부장제 부활에 대한 욕망을 낱낱이 파헤친다. 여성을 ‘제물’로 여기며 살해 행위로서의 성관계를 묘사한 로렌스, 이상적인 여성이란 창녀라고 생각하며 “절대적 음부”라는 기능으로 여성을 한정한 밀러, 진정한 남성성을 폭력과 전쟁의 이미지로 다룬 메일러까지 “위협을 받으며 궁지에 몰린” “남자다움”을 지키기 위해 하나같이 성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이며 여성을 공격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밀렛은 현대 작가 중 유일하게 장 주네만이 억압당하는 집단으로 여성을 그리고 있다고 말하며 앞선 작가와 주네를 대비시키고 있다. 이것은 주네가 성 역할을 통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라는 금기에 대항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밀렛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자신의 분석을 따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자신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성 의식은 물론이고 주변의 문화와 우리 문학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또한 방대한 자료에 대한 치밀하고 과학적인 분석은 『성 정치학』이 단순히 페미니즘 문학 비평을 넘어 어떻게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는지 깨닫게 한다.

“우리의 투쟁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쉽지는 않아도 늘 흥미롭다.”

1964년에서 1965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여성은 해방되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에 참석하면서 훗날 “페미니즘 운동의 대제사장”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매우 평범한 미국 자유주의자”였던 케이트 밀렛이 눈을 뜨게 된다. “여성 해방은 곧 나의 삶이다”(『타임』)라고 말하며 『성 정치학』으로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던 밀렛이지만 이성애적 가정을 무너트리려 한다는 등의 반 페미니즘 진영의 거센 반격과 그의 성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은 밀렛을 끌어내렸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 운동이 동력을 상실하면서 잊히는 듯했으나 제2물결 페미니즘에 대한 재조명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와 『성 정치학』은 다시금 빛을 보게 된다. 반복되는 반동의 역사 속에서도 출간 후 50년이 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부장제의 근원을 파고 들어간 밀렛의 통찰과 완전한 혁명의 완성은 근본적인 사회 변혁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제2의 성 혁명 물결은 마침내 인류의 절반을 태곳적부터 계속되어온 예속에서 해방하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를 인간애로 훨씬 더 가깝게 갈 수 있도록 인도할 것이다. 심지어 가혹한 현실 정치에서 성의 범주를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지금 사는 사막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때만 가능하다.”(711쪽,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