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낙성대 : 강감찬장군 생가터

동방박사님 2022. 1. 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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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星垈, Nakseongdae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로 77 (봉천동).

고려-거란 전쟁의 영웅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명신 인헌공 강감찬이 탄생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落星垈)이다.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도 있었는데,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집을 가리켜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개경 낙성대는 본 항목에서 설명하는 서울의 낙성대와는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내부는 강감찬의 사당인 안국사와 공원으로 되어있으며, 공원 가운데에 강감찬 동상이 있다. 예전과는 달리 재정비되어 꽤나 갈만한 곳으로 변했다. 낙성대로 올라가는 큰 길에는 강감찬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강감찬(姜邯贊)장군

강감찬(姜邯贊) 또는 姜邯瓚 (948년 음력 11월 19일 ~ 1031년 음력 8월 20일)은 고려의 문관이다. 본관은 금주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가 되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졌다. 1030년(현종 21)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생애 초

강감찬은948년12월 22일(음력 11월 19일)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강궁진의 아들로금주(지금의서울특별시관악구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고. 어릴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강감찬으로 남았다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시흥군(始興郡)으로 이주하여 금주(衿州)의 호족이 되었다.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요나라 1차 침입

993년요나라(거란)의성종은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차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여소손녕(蕭遜寧)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였다.서희(徐熙)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요의 땅도 다 고려 땅이라고 주장,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내쫓고 옛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말에 설득된 소손녕은 물러갔고, 고려는서희의 담판 결과로써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요나라 2차 침입

1010년(현종1년) 요나라 성종이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서경(西京)을 침공하였다. 현종은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하공진(河拱辰)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양규(楊規)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이듬해인1011년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였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요나라 3차침입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자주(慈州)와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이후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문하시랑[3]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4]에 봉해지고식읍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5]에 봉해져 식읍 3백 호를 받은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현종 사후 사망하였다. 고려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가 되었다.

 사후

문종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향년 84세.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충청북도청주시옥산면 국사리에서 묘지석을 발굴해 1968년충현사가 건립되었다. 그의 저서로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출처: 위키백과]

 

낙성대 3층석탑

낙성대 3층석탑은 원래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동 218-4)에 위치하고 있었어요. 탑의 3단에 "落星垈 姜邯贊"(강감찬 낙성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곳이 강감찬장군의 탄생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1970년대에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인 낙성대공원 안국사 경내로 옮겨 복원하였고, 탑이 있던 원애의 자리에는 2m 높이의 유허비를 세워 사적임을 표시해 두었어요. 강감찬 생가터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호, 낙성대 3층석탑은 서울 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상

1997년부터 낙성대공원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감찬장군상 입니다. 갑옷에 투구를 눌러쓰고, 매서운 눈매를 한 채 말에 올라 타 있어요. 왼손으로는 말을 다루고 오른손에는 검을 들어 흡사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장수의 모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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