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문학의 이해 (책소개)/3.한국문학

염소를 모는 여자 (1996: 전경린)

동방박사님 2022. 2. 13.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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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어째서 삶에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이토록 희박한가
우리 안의 생명 감각을 일깨우는 전경린 첫 소설집


태양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와 강렬한 빛으로 살아 있음을 유독 실감케 되는 여름, 문학동네가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1996)를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염소를 모는 여자』는 전경린이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출간한 첫 소설집으로 등단작 「사막의 달」을 비롯하여 총 여덟 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집에는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중편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가 실려 있어, ‘전경린’이라는 신인 소설가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단숨에 각인시켜낸 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마침 출간된 신작 소설집 『천사는 여기 머문다』와 함께, 독자들은 햇수로 등단 20주년을 맞이하는 작가의 시작과 현재를 아울러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18년 만에 다시 펴내는 첫 소설집이다. 과거, 이 책을 읽으며 ‘일그러진 진주’를 떠올렸다는 어떤 이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약간 엉뚱하게도,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품고 있는 ‘바로크’라는 문예사전적 용어였다. 그녀의 소설은 일그러진 진주가 상징하듯 불균형한 아름다움 혹은 파격의 미학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이 내장돼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그러한 불균형 내지 파격을 낳게 만든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모든 규범과 금기를 넘어서 끝간데까지 가보고자 하는 모험에의 의지일 것이다. _남진우,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진주가 제 속에서 뽑아내는 신비한 빛은 일그러진 표면의 곡선을 따라 휘고 굽으면서 어쩐지 위태로운 우아함을 자아낼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면서, 그 경계를 끊임없이 흐트러뜨리는 빛. 그 빛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도도하고 또 아름답다.

목차

염소를 모는 여자 _007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_077
봄 피안彼岸 _113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_135
남자의 기원起源 _171
만월滿月_197 (*초판 출간시 제목은 ‘낯선 운명’)
새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 _225
사막의 달 _253

해설|황현산(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운명 만들기 또는 만나기 _321
작가의 말 _335

저자 소개 

저 : 전경린 (全鏡潾, 본명:안애금)
 
흔히 '귀기의 작가' '정념의 작가'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전경린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화려한 문장으로 기억된다. 서른 세 살. 아이와 피와 심지어 죽음조차 삶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느낀 작가는 허구가 아닌 삶의 실체를 갖고자 소설을 쓰기로 시작했다. 1993년 작가의 가족은 마산 옆 진양의 외딴 시골로 이사를 갔다. 꽤나 적적한 곳이었지만 여기서 전경린은 `뭔가가 ...

출판사 리뷰

어째서 삶에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이토록 희박한가
우리 안의 생명 감각을 일깨우는 전경린 첫 소설집

태양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와 강렬한 빛으로 살아 있음을 유독 실감케 되는 여름, 문학동네가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1996)를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염소를 모는 여자』는 전경린이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출간한 첫 소설집으로 등단작 「사막의 달」을 비롯하여 총 여덟 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집에는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중편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가 실려 있어, ‘전경린’이라는 신인 소설가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단숨에 각인시켜낸 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마침 출간된 신작 소설집 『천사는 여기 머문다』와 함께, 독자들은 햇수로 등단 20주년을 맞이하는 작가의 시작과 현재를 아울러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시차時差 때문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진실이 있다. 전경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함께 떠올려지던 수식어들 ‘정념情念’과 ‘귀기鬼氣’의 의미를,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 물론 그것들은 작품으로부터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온도와 촉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삶이 저 깊숙한 곳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향해 작가가 내뿜던 기이할 정도로 뜨거운 에너지다. 하지만 그렇게 도달한 자리에는 이미 예감했던 것처럼 텅 빈 무無가 놓여 있을 뿐. 어쩌면 그 에너지는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함이 아니라 태어난 그 자리에 다만 생생히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발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토록 뜨겁고 눈부셨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정념과 귀기의 내면은 생명의 본질이라고 토로하고 싶다”고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살아 있음’을 절박하게 느끼고자 하는 모험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기어코 읽는 이들에게 전달되어 역시 그 무모한 모험에 동참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18년 만에 다시 펴내는 첫 소설집이다. 과거, 이 책을 읽으며 ‘일그러진 진주’를 떠올렸다는 어떤 이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약간 엉뚱하게도,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품고 있는 ‘바로크’라는 문예사전적 용어였다. 그녀의 소설은 일그러진 진주가 상징하듯 불균형한 아름다움 혹은 파격의 미학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이 내장돼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그러한 불균형 내지 파격을 낳게 만든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모든 규범과 금기를 넘어서 끝간데까지 가보고자 하는 모험에의 의지일 것이다. _남진우,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진주가 제 속에서 뽑아내는 신비한 빛은 일그러진 표면의 곡선을 따라 휘고 굽으면서 어쩐지 위태로운 우아함을 자아낼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면서, 그 경계를 끊임없이 흐트러뜨리는 빛. 그 빛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도도하고 또 아름답다.


소설쓰기의 다른 말인 이 염소 몰고 가기와 일상의 수챗구멍을 덮는 오물들과 싸우는 일 사이에는 앞에 “숲”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밖에 없는데, 당도해야 할 숲은 아직 우산 하나 넓이의 “자신의 숲”일 뿐이다. 꿈이 일상의 밑바닥에서 화석이 되지 않고, 그 구질구질한 폐허를 자양으로 삼아 성장할 때만 숲도 클 것이다. _황현산(고려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훌쩍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 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_「염소를 모는 여자」

문계장은 피아노를 친 후에 꼭 손을 씻고 내게도 양은대야에 물을 담아주었다. 나는 문계장이 가랑파 같은 희고 연한 손을 씻을 때면 밤마다 동전을 세어 묶다가 잠드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으레 동전을 쥔 채로 졸다가 다 못 센 동전들을 장롱 밑에 밀어넣고 잠들어버리곤 했다. _「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나는 다시 한번 눈으로 꽃을 센다. 내 인생에 이제 다시는, 나이 숫자만큼의 꽃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여자에게 흔히 주어지는 부당한 암시의 일종으로 느껴지며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서른 이후 나는 나이를 휘저어버렸다. 나는 아주 늙은 할머니일지도 모르고 작은 여자아이일지도 모르며 아직 처녀 아이일 수도 있다. _「봄 피안彼岸」

언제까지 나는 떠돌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마주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려는 것처럼 허무한 음모.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모르는 곳으로만 떠나갈 수가 있을까…… _「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나는 갓 서른을 넘겼고,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자율적이다. 나는 세속의 금들을 넘어서는 것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서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죄가 되는가 안 되는가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고, 때로 죄책감 따윈 완전히 사양할 수도 있다. _「남자의 기원起源」

그해 뒤뜰에는 꽃도 피지 않았다. 저절로 터져 흩어졌다가 저절로 싹틔우고, 출석 부르듯 순서대로 피어나던 큰언니의 뒤뜨락은 묵정밭처럼 잠들어 있었다.
“미물이 먼저 아는 게야…… 한스런 마음에는 꽃이 피지 않지. 꽃씨들이 다 떠내려가버렸는갑다.”
엄마가 혼잣말을 했다. _「만월滿月」

“사랑해.”
남편이 연기를 훅 뿜으며 말한다.
“나도.”
나는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우며 말한다. 쓸쓸하다. 이 많은 사랑으로 무엇을 하나…… 소금밭에 생명이 자라지 않듯, 이 많은 사랑이 불모의 황무지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하다. _「새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

“난 말이야, 사랑이 문제야. 정말이지 잘사는 건 안 부러워. 한번 그렇게 살아봤거든.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이야. 세상일은 좀 거짓말 같애. 내가 이야기를 해도 그때 일이 거짓말 같거든. 지금 이러고 사는 것도 거짓말 같고…… 젊었을 때처럼 꼭 필요한 것만 등에 메고 캠핑을 떠난 기분이야. 아주 작은 텐트 속에서 하루하루 떠날 일정을 미루고 사는 연인들처럼…… 물론 그래도 마음이 아픈 데는 있지. 비 오는 날 텐트 속에 갇혀 지내는 것처럼, 마음 아프고 적막한 데도 있어. _「사막의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