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의 이해 (책소개)/1.국가권력

총,경제,패권

동방박사님 2022. 2. 1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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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누가 세계 경제의 강고한 왕좌를 차지할 것인가?
지난 500여 년 동안 세계사를 쥐락펴락한 강대국의 흥망성쇠


중국 최고의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지난 500여 년 세계사 속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분석했다. 복잡한 세계사와 국제관계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표면적으로 이 세계는 제국의 부상과 제국 간 군사적 갈등 과정에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세계의 발전은 경제 자원을 개발하고 부를 축적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펼쳐진 치열한 경쟁이 이끌었다.

역사적으로 대영제국의 패권적 우위는 어떤 합법성에 기초했을까?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왜 동쪽의 러시아를 침략했을까?
중상주의는 뒤처져 있던 프랑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플라자 합의’는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였을까?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세계화 30년 동안 도전받은 적이 없을까?
지난 5세기를 지내오며 ‘강고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경쟁은 멈춘 적이 없었다.

목차

머리말 강대국 흥망의 경제 논리: 세계 근대사를 다시 보다 6

총론: 강대국의 흥망

경제사, 글로벌 역사와 글로벌 경제사 26
15세기 이전의 국제무역 31
신항로 개척: 경제 글로벌화의 시작 42
강대국의 흥망: 경제, 패권과 국제관계 50

1. 베네치아공화국: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

왜 중세 서구에서 상업이 발달했을까? 왜 이탈리아일까? 왜 베네치아일까? 62
베네치아는 왜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로 불릴까? 베네치아가 남긴 역사적 유산은 무엇일까? 69
베네치아와 이탈리아의 실패 80

2. 합스부르크제국의 패권 추구와 실패: 정치 경제와 지정학적 전략 배경

근대 국제체제의 기원: 민족국가 vs. 중세 제국 90
카를 5세의 패권 추구와 실패 103
펠리페 2세의 패권 추구와 실패 111

3. 네덜란드: 바다의 마부 황금시대

‘바다의 마부’는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126
네덜란드가 자유무역으로 얻은 성취 136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왜 끝났을까? 148

4. 프랑스제국: 중상주의의 대륙 강국

프랑스 근대화의 맥락과 중상주의의 진상 156
프랑스의 발전을 이끈 콜베르주의의 공헌 163
프랑스 역사의 단면을 통해 본 프랑스 근대화의 특징 172
여론餘論: 프랑스 역사를 통해 본 중상주의의 현대적 의의 186

5. 영국: 패권국의 균형 정책

19세기 영국과 유럽 194
유럽 대륙으로 다시 돌아오다 204
영국과 독일의 해군 경쟁과 유럽 대륙에 대한 영국의 ‘재균형’ 211

6. 독일: 석탄과 철의 나라가 세계 패권을 다투다

‘석탄과 철’ 위에 건립된 제국 226
독일제국: 선진 산업국가의 탄생 236
독일제국: 유럽 쟁패에서 세계 경쟁으로 245

7. 미국: 신대륙 국가의 세계 경제 패권의 길

‘구대륙’ 유럽과 비교할 때 ‘신대륙’ 미국이 가진 장점은 무엇일까? 258
‘주저하던’ 유럽의 채권자에서 자발적인 보호자로 266
브레턴우즈 체제와 달러 패권의 흥망 273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해 나온 ‘레이거노믹스’는 양약일까 독약일까? 285

8. 일본: 전후 성장과 잃어버린 20년

전후 일본 경제 발전의 원인 296
플라자 회의 과정 307
플라자 회의 이후 일본의 선택과 영향 328

9. 중국: 개혁개방 이후 40년간 중국 경제 발전과 미래

1978년 시장화 개혁 후 중국 경제의 신속한 발전 344
과거 40년 동안 중국 경제의 성장 동력 354
향후 중국 경제의 발전 방향 366

참고문헌 379
찾아보기 385
 

저자 소개

저 : 리보중 (李伯重)
 
샤먼대에서 중국 경제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칭화대, 홍콩 커지대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미국 하버드대, UCLA, MIT, 영국 옥스퍼드대, 런던 정경대 등에서 객원 교수를 지냈다. 국제 경제사학회 집행위원이자 현재 베이징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당대 강남의 농업 발전唐代江南農業的發展』은 제6회 베이징 철학사회과학 우수상과 1등상을 수상했으며 『강남의 조기 공업화江南的早期工業化1550~1850』로...

저 : 웨이썬 (韋森)

푸단대학 경제학과 교수

저 : 류이 (劉怡)
 
『산롄생활주간三聯生活週刊』 국제보도 주필
 

책 속으로

중국어에서 ‘경제’라는 말은 현재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수隋나라 왕통王通의 『문중자文中子』 「예악 禮樂」에 최초로 보이지만, 여기에서 말한 ‘경제’는 經國濟民(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다)의 줄인 말로 오늘날의 경제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oikonomia(집을 관리하다, household management)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일본인이 한자 經濟 로 맨 처음 옮겼고 만청晩淸 시기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가 이 명칭을 중국에 소개한 이후 중국도 ‘경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제학에서 ‘경제’는 사람과 사회가 희소한 생산 자원을 어떻게 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와 생산된 제품을 어떻게 사회의 각 성원이나 집단에게 분배하여 소비하게 할 것인가를 말한다.
--- p.26

도연명陶淵明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완전히 세속과 단절된 채 고립되어 있는 한 공동체를 묘사했는데, 하나의 촌락이 하나의 공동체였다. 이런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답은 긍정적이다. 경제사학자 리옌李? 선생은 『수호전水滸傳』 연구에서 송원宋元 시대 중원 일대에 이미 사방에 많은 장원莊園이 분포했다고 지적했다(‘삼타축가장三打祝家莊’ 중 축가장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장원은 약이나 비단 등 아주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을 외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마련해 충당했다. 심지어 술조차도 스스로 빚어 마셨는데 이런 외부 세계와의 경제적 절연은 그들이 보유한 자연경제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자연경제 아래에서 물질생활은 매우 단순했기 때문에 자급자족하기가 쉬웠다. 또는 생산 수준이 제한적이었기에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순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수호전』 속 장원 생활이 이러했다.
--- p.31~32

루쉰魯迅? 선생? 또한 ?“외국은 ?화약을 ?사용해 ?포탄을 ?만들어 ?적을 방어하는데 ?중국은 ?여전히 ?그것을 ?사용해 ?폭죽을 ?터뜨리며? 귀신을 섬기고?있다.? 외국은?나침반을? 가지고 항해를 ?하는데 ?중국은 ?풍수나 ?살피고?있다” 라고 ?했다.? 중국과? 유럽? 국가는 ?지식혁명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에 ?각자? 다른 ?발전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나는 ?이것이 ?여러?사람들이 ?이야기한? ‘니덤?난제’에?대한 ?하나의?답 이라고? 본다.
--- p.57

이탈리아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 포르투갈과 비교했을 때 이탈리아는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지 못했고 신대륙과 동방에서 큰 부를 획득하지도 못했다. 영국,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이탈리아는 새롭게 힘을 얻고 있던 대서양 무역에서 어떠한 이익도 얻지 못했으며 특히 상업과 국내 공업 발전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줄 중상주의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이탈리아는 자신들의 오랜 활동 무대이던 동방무역조차 지중해로 대거 남하한 네덜란드 상인과 영국 상인에게 넘겨주었다.
--- p.86

1588년 5월 대규모 스페인 무적함대가 리스본을 떠나 “골리앗이 다윗을 공격한”것처럼 곧장 영국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대결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돌아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거의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최대 강국의 패권적 지위가 이로 부터 급전직하했다는 점에서 이 해전은 세계 근현대사에서 다른 어떤 해전보다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듬해에 나바라의 앙리가 프랑스 왕에 등극해 앙리 4세Henry IV(재위 1589~1610)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이익을 종교 분쟁보다 우선했으며 몇 년 후 새롭게 통일된 프랑스로서 스페인에게 선전 포고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유 럽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고 영국과 네덜란드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또 하나의 큰 적수가 되었다.
--- p.119

세계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중상주의의 역할은 르네상스,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 종교개혁, 과학기술혁명, 산업혁명, 계몽사상, 정치혁명 등 익히 잘 알려진 역사적인 사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중상주의라는 새로운 가치를 추진하며 강력한 정책으로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아직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하지만 나는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상주의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근대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점검하고 나아가 세계 역사가 진행되어온 과정을 깊이 있게 인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p.158

1815년 이후 중상주의로 회귀하며 프랑스는 지속적인 성장기를 맞이했지만 1860년 영국과 다시 통상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 경제는 성장 동력을 잃고 전례 없는 침체기로 들어섰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말 재차 중상주의를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엎치락뒤치락 반복을 거듭한 프랑스의 발전 양상은 영국과 분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영국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관되게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19세기 초에 이르러 산업 분야에서 이미 세계에서 적수가 없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체계적으로 자유무역을 실행했다.
--- p.178

미국 문화인류학자 프랜츠 보애스Franz Boas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어떻게 선진 문명에 도달할 것인가는 본질적으로 그들이 다른 우수한 민족과 얼마나 접촉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므로 선진 문명, 우수한 국가와의 교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선진적인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프랑스가 아주 좋은 예다. 이 점은 중국 역사 속의 문제를 분석할 때나 현실 속의 발전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훌륭한 깨우침을 줄 것이다.
--- p.185

둘째 요소는 대륙에서의 ‘세력 균형’이다. 국제 정치에서 흔히 말 하는 ‘세력 균형’은 국가체제 내에서 어떤 국가도 절대적으로 다른 국가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국가보다 압도적 우위를 형성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 대외 정책의 방향은 어떤 국가가 유럽 대륙에서 독자적인 패권을 가지거나 유럽을 통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이 유럽 대륙 전쟁에 참전한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 p.196

빌헬름 2세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큰외손자로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빌헬름 2세는 영국에 집착했을 뿐만 아니라 해군에도 집착해 해군 제복을 입는 것을 좋아했으며 머핸의 저작을 즐겨 읽었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의 지위가 독일의 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독일의 힘을 과시하는 데 단점으로 작용하던 해군을 반드시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213

독일은 화학 산업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치를 차지했다. 이후 역사가들은 화학 산업을 일컬어 “독일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산업 성취”라고 했다. 이탈리아 경제사학자 카를로 치폴라Carlo M. Cipolla는 영국과 독일의 염료 산업을 비교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화학 산업에 있어서만큼은 영국이 후진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경제의 특성을 보였다. 즉 독일에 콜타르 원료 및 반가공품 등 원자재를 수출하고 독일에서 정제된 값비싼 염료를 다시 사들였다.” 신흥 근대 산업이 된 전기와 화학 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후발 국가 독일이 신흥 산업 국가로 발전하는 데 활발한 활력을 제공했다. 독일은 이들 신흥 산업을 기반으로 일약 세계 산업의 선진 국가가 되었다.
--- p.242

오늘날 우리는 글로벌 세계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현실은 근대 유럽의 부흥, 발전과 해외 확장에 근원을 둔 것이다. 1500년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지금까지 세계에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두 글로벌 강국이 있었다. 그들의 통치 범위와 영향은 전 방위적이었고,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아우르는 그들의 역량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화폐를 포함해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영국과 미국의 ‘특수한 유대’ 관계로 인해 세계 경제의 패권자인 미국을 이해하려면 대영제국 체제의 일부분이던 독립 이전의 식민지 시대를 추적해야 한다.
--- p.259

이 덕분에 미국은 자신의 제품을 아메리카 대륙, 카리브해 지역, 유럽과 극동에 이르는 세계 각지에 수출함으로써 19세기와 20세기 전환기에 더는 농업과 자원 수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도약할 준비가 된 신흥국이자 유럽에서 점차 인정받는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100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20세기 초, 1926년에 미국 총생산량이 유럽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런 현상은 1919년에 나타났다. 미국이 유럽의 지위를 이어받기까지 꼭 100년이 걸린 셈이다.
--- p.264

중국학자 딩이판丁一凡과 뉴원신?文新의 설명은 아주 재미있다. 그들이 함께 쓴 『달러 패권美元覇權』(2014)에서 미국인이 마음대로 환율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비아냥대듯 말했다.

“한 미국인이 10만 달러를 위안화로 환전할 때 환율이 1:6.5라고 한다면 65만 위안이 된다. 그가 1년 동안 중국을 여행하면서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난 후 50만 위안을 남겼고, 그 남긴 돈을 달러로 환전하려고 할 때 달러 대 위안화의 환율이 1:5라고 한다면 그는 10만 달러를 환전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미국인 한 명 혹은 몇몇 미국인, 아니면 전체 미국인이 중국에서 1년 동안 위안화를 흥청망청 써도 결국 1년 전과 같은 액수의 달러를 다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농담이지만, 미국이 마음대로 달러 환율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 p.281

한편 일부 정치학자들은 레이거노믹스와 미국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의 그늘에서 미국의 삶이 억압받던 것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레이건은 간단명료한 말로 복잡한 경제 이론을 설명하고 감정이 풍부한 연설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 위기에서는 정부가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가 문제입니다.” “정부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정부 예산도 규모를 초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을 싫어하고 기업 독점을 반대합니다. 시장에 더 많은 자유를 주어야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의 이러한 연설과 발언은 미국 중하층의 심리, 특히 막대한 정부 예산을 반대하는 미국인의 전통적인 심리를 사로잡는 데 큰 몫을 했다.
--- p.288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조용히 돈만 벌자’가 어떤 것인지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일본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시장 개방에 힘입어 발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제 사회에서 몸을 낮추어 ‘3S’라는 평가를 받았다. 3S는 Silent, Smiling, Sleeping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무역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일본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회라면 어떠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 p.305

플라자 회의 다음 날인 1985년 9월 23일,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재계와 무역업계 대표를 접견해 무역 문제에 관해 연설하며 ‘자유무역’은 반드시 ‘공정 무역’이어야 한다며 일본의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했을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이던 존 코널리John B. Connally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자유무역을 지지하지만 공정해야 한다.”
--- p.326

현대 세계 경제사 데이터 연구 및 분석 전문가 앵거스 매디슨 Angus Maddison의 추산과 추정에 따르면,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1800년까지는 동방과 서방 국가를 막론하고 1인당 GDP는 기본적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14~15세기 베네치아에서 비로소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16~17세기에는 네덜란드 경제가 산업혁명 이전에 성장의 길에 들어섰으며, 17~18세기에는 영국의 1인당 소득이 일정한 증가를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다 1820년대 후반 영국과 유럽 국가, 그리고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근대적 경제 성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 p.350

근현대 세계 역사를 배경으로 중국의 과거 70년간의 경제 성장 궤적을 살펴보면 비교적 분명해진다. 앵거스 매디슨이 『세계 경제 천년사The World Economy: A Millennial Perspective』(2001)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몇몇 세계 대국의 총 GDP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을 볼 때, 1500년 명나라 효종孝宗(재위 1487~1505) 홍치弘治 연간 중흥 시기에 중국 GDP는 세계 경제에서 대략 24.9퍼센트를 차지했고, 명나라 신종神宗(재위 1573~1620) 만력萬曆 28년인 1600년에 이르면 중국 GDP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9퍼센트로 상승했다.

그러다 청나라 성조聖祖(재위 1661~1722) 강희康熙 39년인 1700년에 이르러 22.3퍼센트로 하락했다. 청나라 선종宣宗(재위 1820~1850) 도광道光 연간인 1820년에 중국 GDP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최고 수준으로 상승해 전 세계 경제의 32.9퍼센트를 점유했다. 많은 경제사가들은 당시 중국 GDP가 유럽 모든 국가의 GDP를 합한 것보다도 높았다고 인정하고 있다.
--- p.351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아시아 국가, 특히 동아시아의 ‘후발 추격형’ 경제체제의 고속 성장 시기가 모두 이들 국가가 채택한 수출 주도형 경제 발전 전략과 관계있다는 점이다. 20~30년에 걸친 고속 경제 성장과 자국의 산업화를 완성한 이후 이들 추격형 국가는 거의 예외 없이 경제 성장이 둔화되어 심지어 절반으로 줄어드는 과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은 1974년부터 1992년까지의 경제 성장률이 3.7퍼센트에 불과했는데, 1950년에서 1973년까지 고속 성장 기간의 성장률에 비해 절반 이상 하락한 것이다. 또한 1993년 이후 2009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매우 크게 하락해 연평균 성장률이 겨우 0.8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 경제도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대략 4.3퍼센트에 불과해 1971년에서 1996년까지의 고속 성장 시기에 비해 성장률이 거의 절반가량 하락했다.
--- p.368~369

인류의 생존과 생활방식을 더욱 변화시킬 차세대 대기술혁명이 도래하기 전에 중국 경제는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과잉 생산, 성장 기회 감소, 제한된 시장 공간 및 성장 동력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중국 경제 성장률이 1973년 일본,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과 싱가포르처럼 하락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추세다.

그러므로 최근 중국 정부가 미래 경제 성장을 추진하기 위해 혁신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큰 방향에서는 옳다. 그러나 인류의 과학기술 지식 발달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인류의 생활 방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다음 과학기술혁명은 무엇일까? 인류 사회는 신소재, 신에너지, 나노기술, 생명공학, 새로운 통신 기술, 심지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까지 통합하는 제4차 과학기술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매우 불분명하다.
--- p.375

출판사 리뷰

자본주의 입헌제와 대의제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이와 관련해 현대인은 흔히 영국의 대헌장과 의회, 프랑스의 삼부회를 우선으로 꼽는다. 그러나 실제로 최초의 근대국가 정치 형태를 세상에 드러낸 것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다.

중상주의는 진정 터무니없는 학설이고 유해한 체제일까?

국가가 제한 없는 국제 자유무역을 수행할 만큼 강하지 않을 때, 특히 산업 발판이 불안정할 때 자유주의 정책은 산업 생산력 육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국가의 뿌리를 흔들기도 한다. 나폴레옹은 중상주의의 진정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발전된 산업이 뒷받침되어야 프랑스가 독립적으로 실력을 쌓아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은 왜 동쪽으로 진격해 러시아를 침략했을까?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에게 영국과 무역하지 말라고 요구할 때에는 전제가 필요했다. 바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얻는 물건을 프랑스가 모두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동쪽의 러시아를 침공해 토지를 빼앗고 유럽 국가에 제공할 식량을 얻으려 했다.

20세기 초 독일이 꿈꾼 헛된 망상은 무엇일까?

독일은 줄곧 영국과 더불어 어떤 의미에서 G2가 될 것이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곧 독일과 영국이 주도자가 되어 유럽은 물론 세계 관리 모델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핵심 이익을 오해하고 경시한 것에서 비롯된 환상이었다.

전후 미국은 달러 패권을 기반으로 전 세계 패권을 장악했을까?

달러가 전후 세계 질서에서 미국이 지배적 위치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련의 역할은 지정학적 안보, 이데올로기와 우주 기술에서의 일부 우세에 국한되어, 국제 경제체제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대외무역이 주도하는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수출 주도형 경제를 내수 주도형으로 순조롭게 변화시키려면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대외무역 주도 방식에서 벗어나면 성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장기 불황이 아니라면 낮은 성장 수준에서 안정세를 유지할 것이다. 정책은 이러한 규율을 바꿀 수 없다. 이 규율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적인 기술 혁신으로 글로벌 소비의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는 것이다.

머리말

강대국 흥망의 경제 논리
: 세계 근대사를 다시 보다


류이劉怡
『산롄생활주간三聯生活週刊』 국제보도 주필

많은 독자들이 역사가이며 국제관계 전문가인 폴 케네디Paul Kennedy의 베스트셀러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1987)을 읽었을 것이다. 나도 정식으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기 전 고등학교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 『강대국의 흥망』의 부제는 ‘1500년에서 2000년까지 군사적 충돌과 경제 변천’으로, 강대국 간의 전쟁과 군사적 충돌 위주로 세계사를 이해하며 전쟁을 실행할 능력의 기초는 의심할 여지없이 경제력에 있다고 했다. 특히 각국은 특정 기술을 토대로 부를 축적해 이것을 군사력 경쟁에 이용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케네디는 이런 각도에서 500년간의 세계 역사를 새롭게 정리했는데,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정확한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폴 케네디가 영국 출신이라는 것과 그가 이 책을 펴낸 1987년 무렵의 상황을 구체적으로는 모를 것이다. 『강대국의 흥망』이 세상에 나온 시대를 들여다보자. 잘 알고 있듯이 1970년대 말에는 냉전 상황이 중반기를 지나 후반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날 그 시대를 돌아보며 우리는 당시 군사 공업을 포함한 소련의 경제 성장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헤게모니의 성장 속도가 이미 정체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1970년대에 소련은 국제무대에서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핵무기, 우주 개발, 육상 재래식 무기 등의 방면에서 새로운 절정을 맞이해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마저 그 세력권 안에 두었다. 소련은 특히 미국과 전면적인 경쟁을 전개했는데, 심지어 소련이 전통적으로 약세를 보이던 해군 역량까지도 1970년대에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룩했다. 당시 미국의 정치, 군사, 학술계는 실제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미국은 과연 소련과의 전략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미국이 어떻게 해야 소련의 상승세를 억제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과 의심이 미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때 미국 정계와 학계의 고위층은 역사 속에서 답을 찾고자 했지만 전략사와 세계사를 연구한 미국 내 연구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영국에서 학문적 업적을 이룬 학자들이 초청되었다. 그들이 미국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이 중대한 문제를 미국인이 숙고하고 해결해나가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랐다. 미국에 온 학자 중에 콜린 그레이Colin S. Gray와 폴 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둘은 해군 역사와 해군 전략을 연구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강대국의 흥망』을 저술한 폴 케네디가 경제학자가 아니며 또한 그의 전문 분야가 세계 역사가 아니었다는 점이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다. 미국은 왜 해군 역사학자인 케네디를 초청했을까? 미국의 군부와 정계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벌이고 있는 전 세계 차원의 전략 경쟁을 해상 강국과 육상 강국 사이의 경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해상 대국이 된 미국의 권력 구성과 이 권력이 세계적인 범위에서 구현된 형식은 실제로 이전의 영국(대영제국)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영국은 4세기 가까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로 대표되는 유럽 대륙 패권 국가의 도전을 수차례에 걸쳐 물리친 강대국이었다. 그러므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미국은 해양 강국이 어떻게 해야 대륙 강국의 도전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영국의 해군 역사학자에게서 얻으려고 한 것이다.

『강대국의 흥망』은 이 문제를 다룬 폴 케네디의 대답이다. 이 책은 크게 산업화 이전 세계, 산업화 시대, 현대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단계마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해양 강국과 대륙 강국 간의 경쟁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흥망』은 시대마다 대표성을 지닌 해양과 대륙 국가를 선택했다. 예를 들면 해양 강국의 대표로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미국, 일본을, 대륙 강국의 대표로 스페인, 프랑스, 독일을 들고 있다. 이들 해양 강국과 대륙 강국은 과거 5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잇따라 발전을 이룩하며 세계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물론 이처럼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 사이의 대결로 세계 역사를 보는 것은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을 해양 경제, 해양 패권의 대표로, 소련을 대륙 경제, 대륙 패권의 대표로 설정하는 것을 두고, 소련은 동시에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해군력을 건설하지 않았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대륙 패권국으로 분류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이 영국과 충돌이 격화되어 마침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독일이 영국에 맞먹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 문제를 답하려면 반드시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강대국의 흥망』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시작점을 1500년 전후로 설정했다. 바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다가마Vasco da Gama 같은 유럽 항해가의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이 연결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15세기 말 이전에도 일정한 형식의 원거리 무역이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와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잘 알려진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는 고대 역사에서 일정 시간 동안 번창했다. 그러나 두 가지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 첫째, 빈번한 군사적 충돌로 인해 종종 길이 막혔다. 둘째, 당시의 선단船團이든 대상隊商이든 한 번에 운송할 수 있는 화물의 양이 제한적이었다. 이 힘든 무역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한 상인은 귀금속이나 사치품 등 부피는 작고 단위 단가는 높은 상품을 운송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물건은 각국 정부나 부자들만 관심을 갖고 구매할 수 있던 것이기에, 주류 소비자를 비롯한 전체 국가의 국민 경제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중략)

19세기 말에 이것이 가능했던 국가가 막 통일을 이룩한 독일이었다. 독일과 달리 당시 영국은 세 가지 측면에서 열세에 있었다. 첫째, 원가 요인을 고려하느라 영국 제조업은 응용 신기술과 신기계 측면에서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이로써 노동 생산율 면에서 독일에 뒤처졌다. 둘째, 영국 본토의 인구가 독일보다 적었다.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식민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효과적이면서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식민지 인구와 자원을 재빨리 전환시켜야만 독일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 셋째, 영국이 맡고 있던 전 세계적인 의무가 실제로 매우 중요하고 복잡해 상당 부분의 자원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두 가지 정책으로 독일의 도전에 대응했다. 우선, 1907년부터 영국은 오랜 기간 전략적 라이벌이던 러시아, 프랑스와 화해를 맺는 등 전 세계적 범위의 의무를 대폭 축소하고 유럽 대륙 주변으로 역량을 집중해 독일에 맞섰다. 그다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여러 차례에 걸친 노력으로 마침내 유럽 밖에 있던 강대국 미국을 유럽 정치에 끌어들여 전 세계 경제와 강대국 간의 경쟁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영국, 서유럽 대륙 국가와 비교했을 때 미국, 이후의 소련, 나아가 중국은 그 잠재력에서 완전히 다른 등급에 놓여 있는 국가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특히 서유럽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하고 인구도 가장 밀집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자연국경에 따른 면적의 제약으로 그들의 잠재 전략은 이미 상한선에 도달한 상태였다.

수천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영국, 프랑스, 독일이 선진국으로서 크게 앞서 있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해외 식민지를 제외하면 개발할 수 있는 잉여의 토지가 없고 공업 생산 규모와 노동력 모두 상한선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소련, 중국은 개발될 수 있는 유휴 토지가 많았고 인구 또한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중국 같은 국가의 잠재력은 서유럽 국가보다 우위에 있었다.

미국, 소련, 중국이 대륙급 강대국에 속한다면, 당시 서유럽은 설령 고도로 완비된 선진국이라 해도 중등 강국 정도로 볼 수 있다. 대륙급 강대국이 일단 중등 강국의 경기장으로 들어온다면 전 세계 경제에서 경쟁의 규모와 격렬함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940년 여름에 독일은 서유럽 대륙을 거의 점령해 그 세력이 정점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독일과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총발전량과 비행기 생산량은 소련에 비해 단지 20퍼센트 정도만 높았을 뿐이다. 그때 소련은 주요 강대국 가운데서도 산업화 정도가 비교적 낮고 경제력도 약한 국가로 여겨졌다.

또 다른 예를 보자. 1941년에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해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처까지 도달함으로써 독일군의 진공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마주하는 저항의 강도도 아주 약했다. 그러나 이 6개월 동안 탱크, 장갑차, 트럭, 병력 등 독일의 군사 장비가 개전 때와 비교해서 3분의 1이 손실되었다.

이 예는 대륙급 강대국이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넓은 영토 자체가 우월점으로 작용해 중등 강국이 특히 역량이 있다고 여기는 전략 자원을 천천히 소모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유럽이 다시는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 양대 대륙급 강대국이 세계무대를 좌지우지하게 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제 경쟁 역시 매우 전형적인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 사이의 대립이었다. 미국은 각자 보유한 천연 자원과 시장경제 원칙에 기초해서 분업하는 글로벌 개방 경제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했다. 반면 소련은 유라시아 대륙 내부에 폐쇄적인 세력 범위를 건설해 그 세력 범위 내의 토지, 인력, 원재료 같은 자원을 개발하는 중앙 통제형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 경쟁의 최종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 소련의 산출량이 예상보다 훨씬 적은 것에 더해 전략 자원과 서로 맞지 않는 너무 많은 의무를 소련이 맡게 됨에 따라 결국 국가 해체로 이어지고 말았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미국도 소련과 유사한 과오를 범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와 같이 전적으로 군사 역량에만 의존해서 잠복해 있는 안보 위협을 제거하려 시도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전략 자원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국가가 미국에 기대했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러면 중국은 어떠한가? 지난 40년 동안 이어진 중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은 사실 글로벌 시장 개방과 경제체제에 상당 부분 힘입었으며 중국은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 변화에 따라 중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경제 활동을 하며 경우에 따라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여하를 막론하고 폐쇄가 아닌 개방을 유지하는 것만이 중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이 책이 역사상 강대국의 흥망에 관한 깊은 인식과 중국 경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