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기독교-개신교 (책소개)/2.한국기독교역사

김교신 전집 (1~7권)

동방박사님 2022. 2. 1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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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김교신 전집』은 일제 시대 전국의 모든 독자를 검속(檢束)하고 기 간행물의 압수(押收)?소각(燒却)이라는 보기 드문 탄압을 받았던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1927년 7월부터 1942년 3월까지 158호를 간행)에 실린 글 중에서 김교신 선생이 집필하여 게재한 것을 내용에 따라 모아 엮은 것이다.
이 전집은 1964년부터 1975년까지 10여 년의 세월에 걸쳐 7권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한정본으로 만든 이 1975년판은 구하기 쉽지 않고 국한문 혼용의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또 원문(原文)의 한자어 상당수를 한글로 바꾸는 과정에서 원래 모습에 적지 않은 변형이 이루어졌고, 『성서조선』 영인본이 미간(未刊)된 상태에서 진행되어 소소한 오류가 있었다.
2001년판 『김교신 전집』은 그런 오류를 바로잡는 동시에 한자어를 원문 그대로 되살려 놓아 김교신 선생의 그 힘차고 명쾌한 문장을 온전히 맛볼 수 있게 하였다. 다만 세월이 변해 요즘은 잘 쓰지 않거나 알기 어려운 한자어는 말미에 뜻풀이를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목차

김교신 전집 1 인생론
김교신 전집 2 신앙론
김교신 전집 3 성서개요
김교신 전집 4 성서연구
김교신 전집 5 일기Ⅰ
김교신 전집 6 일기 Ⅱ
김교신 전집 7 일기 Ⅲ
김교신 전집 별권 김교신을 말한다
 
 

출판사 리뷰

100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 김교신

김교신 전집 1-7, 별권



『김교신 전집』은 일제 시대 전국의 모든 독자를 검속(檢束)하고 기 간행물의 압수(押收)?소각(燒却)이라는 보기 드문 탄압을 받았던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1927년 7월부터 1942년 3월까지 158호를 간행)에 실린 글 중에서 김교신 선생이 집필하여 게재한 것을 내용에 따라 모아 엮은 것이다.
이 전집은 1964년부터 1975년까지 10여 년의 세월에 걸쳐 7권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한정본으로 만든 이 1975년판은 구하기 쉽지 않고 국한문 혼용의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또 원문(原文)의 한자어 상당수를 한글로 바꾸는 과정에서 원래 모습에 적지 않은 변형이 이루어졌고, 『성서조선』 영인본이 미간(未刊)된 상태에서 진행되어 소소한 오류가 있었다.
2001년판 『김교신 전집』은 그런 오류를 바로잡는 동시에 한자어를 원문 그대로 되살려 놓아 김교신 선생의 그 힘차고 명쾌한 문장을 온전히 맛볼 수 있게 하였다. 다만 세월이 변해 요즘은 잘 쓰지 않거나 알기 어려운 한자어는 말미에 뜻풀이를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1. 김교신은 누구인가

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직접 보고 들은 바 없이 그저 글만으로 아는 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경우 우회적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김교신(金敎臣)이라는 인물에 대해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외솔회’에서는 이렇게 평했다.

수난과 순교의 시대를 살다 간 김교신 선생은 ‘한국의 흙으로 만들어져, 한국의 흙을 디디고 살고, 한국의 흙으로 돌아간 참 한국인’이다. 근세 한국의 전 민족이 부딪친 암흑과 수난, 모독과 시련의 죽은 민족사의 황야에서 모세가 그랬듯이, 그는 민족 구원의 복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인도했고, 드디어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생명을 묻어 단절된 민족사를 이어준 다리가 됐다. 선생의 신앙 생애?교육 생애?애국 생애는 죽은 민족사의 황야에서 신음하는 한국의 구원이었고, 한국의 그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었고, 한국이 품고 있는 순정으로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외솔회 발간 『나라사랑』 제17집(1974, 김교신 선생 특집호)에서

그런 인물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교신의 글을 후대에 남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제 시대 ‘성서조선 사건’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소각되고 말살되다시피 한 관련 자료를, 아는 이들의 서재를 모조리 훑다시피 하고, 청계천 헌책방을 샅샅이 뒤지다 못해 심지어는 검찰청 창고까지 연줄로 드나들면서 찾아내어,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 <성서조선 영인본>을 간행할 정도로 헌신적인 벗과 후배, 제자가 상당수에 달함에도 그토록 묻혀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김교신과 한 세대의 격차가 있는, 그래서 스스로 ‘김교신 선생님을 나는 한 번도 뵈온 일이 없다’고 말하는 김정환 박사(교육학. 전 고려대 교수, 한국교육학회 교육철학연구회장)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현대 한국의 종교계 인물 중에서 한용운과 김교신은 종교로 민족을 거듭나게 하려 한 종교개혁자다. 한용운이 불교계의 그 기수라면 김교신은 기독교계의 그 기수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용운은 널리 알려져 있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김교신의 경우는 일반인에게는 물론이요, 기독교계에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분은 ‘민족의 시인’이라는 좋은 인상 때문에 그 불교개혁론도 전적으로 공감?수용되었는데, 한 분은 처음부터 안팎에서 기독교의 ‘이단자’로 몰렸기 때문이다.
『김교신 - 그 삶과 믿음과 소망』(한국신학연구소, 1994) 머리말에서

여기서 ‘이단자(異端者)’라는 표현은 상당히 미묘하다.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략이나마 김교신의 생애부터 접해야 한다.

2. 김교신의 생애와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16년에는 함흥공립보통학교를, 1919년에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1922년 당시 중등학교 교사 양성기관으로 최고 명문이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나중에 벗이자 신앙 동지가 되는 함석헌과 함께 입학한다.
그런 그가 기독교에 접하게 된 것은 1920년 거리에서 설교를 듣고서였다. 하지만 다니게 된 교회에서 목사가 반대파에 축출되는 등의 병폐를 목격한 뒤 실망한 상태에서 무교회(無敎會) 신앙을 주창하는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의 청강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려 7년에 걸쳐 지속된다.
1927년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신앙 동지들인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류석동, 양인성과 함께 발간하기 시작한 동인지 『성서조선』의 간행을 돕기 위해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 이후 12년간 『성서조선』의 간행과 양정학교 교사로서의 생활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김교신은 1930년부터 『성서조선』의 간행 책임을 혼자서 전적으로 맡는다. 낮에는 교사, 그 외의 시간에는 『성서조선』 편집자이자 필자, 제작?발송?판매?경리 담당자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김교신은 또 그런 짬짬이 기독교 선교 및 무교회 신앙의 전파에도 적극 나선다. 김교신이 남강 이승훈, 기독교계 원로인 김정식, 다석 류영모,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당시 농촌 운동을 벌이던 김주항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다 동경대 교수직에서 쫓겨난 야나이하라 다다오(전후 동경대 총장 역임) 등과 교분을 두텁게 하게 되는 것도 이런 과정에서였다.
하지만 1940년 김교신은 양정을 사임하게 되고, 1941년에는 서울 경기중학교에 6개월간 머물렀다가 바로 개성의 송도중학교로 자리를 옮긴다. 이 모두가 김교신의 『성서조선』이 가진 민족적 색채로 말미암아 조선총독부에 요주의 인물이자 불온 인물로 낙인찍힌 탓이었다.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 벌어진 것은 김교신이 개성의 송도중학교에 근무하던 1942년 3월 30일의 일이었다. 근대 한국을 만든 명 논설 33편(『신동아』 1966년 1월호 부록 『근대 한국 명논설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성서조선』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문제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성서조선』 관련자 및 독자들이 검속되는 이 사건에서 『성서조선』 관련 자료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압수?소각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지기 7개월 전의 일이었다.
구속되고 만 1년만인 1943년 3월 29일 불기소로 출옥한 김교신은 이후 전국 각지는 물론 만주까지 순회하며 신앙 동지들을 격려하고 기독교 전파에 몰두하다 1944년 7월 함경남도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한다. 강제 징용당한 5,000여 한국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한국인 노무자들의 교육, 주택, 처우 개선에 골몰하던 김교신은 해방을 4개월여 앞둔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로 생을 마감한다. 장례는 평소 김교신을 존경하던 일본인 간부의 주장에 따라 최초로 공장장(工場葬)으로 거행됐다. 향년 44세 때의 일이었다.

3. ‘무교회’를 주창해 ‘이단’으로 낙인찍히다

이런 김교신의 생애에서 ‘이단’ 시비가 벌어질 소지가 있는가. 있다면 그의 ‘무교회’ 신앙일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에 의해 주창된 무교회 신앙은 기존의 기독교단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무교회 신앙은 형해(形骸)화된 교회 대신 갈릴리 호반의 어부들이 가졌던 초대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특정 공간이 아닌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교회이며, 성직자에게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니라 각자가 회심(回心)을 통해 영으로 받는 세례가 진정한 세례이고, 성서 해석은 성직자나 교회가 아닌 신자 각자가 하느님에게 받은 믿음의 분수와 은총의 분수에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는 근거에서이다.
한마디로 무교회 신앙은 기존의 교회 중심으로 이뤄지는 기독교 교회를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닌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과 같은 상황에 빠진 교회교(Churchanity)라고 비판한다. 그런 만큼 예배 방식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무교회 신도들은 예배 대신 성서연구 모임을 가진다. 거기서 감정적인 면은 대부분 배제된다. 모임에서 찬송가는 대개 한두 곡만 부르고 끝나며, 목사가 없으니 성찬식이니 세례니 하는 것은 아예 없다. 또 장로니 권사니 하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순번으로 사회를 정해 개회 기도와 성경 낭독을 하고, 헌금은 없고 청강료만 있다. 집회 장소 임대료로 쓰기 위해서이다. 예배 내용도 기존 교회와 완전히 다르다. 설교는 없다. 다만 로마서면 로마서, 마태복음이면 마태복음 하나를 정해 몇 년이고 주석을 해가면서 끝까지 공부하되, 가급적 원어로 성서를 읽도록 격려한다. 무교회 신도들의 모임에 희랍어 강좌가 많은 것도 그래서이고, ‘학자적인 모임’이라는 달갑지 않은 평판을 듣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파(敎派)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교파화될 가능성을 철저히 잘라냈다. 무교회 신앙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우치무라 간조의 경우에는 자신이 이끌던 성서연구회 모임의 해산을 유언으로 남길 정도였다. 그 모두가 자신들이 부정하는 교파화의 폐해를 우려해서였다.

4. 민족 기독교 대 일제 기독교

이런 무교회 신앙을 기존 기독교 교단에서는 철저히 배척했다. 모임을 갖기 위해 YMCA 강당을 빌리는 것이 거절되고, 교회 출입 자체를 금하는가 하면, 단순한 친교마저도 백안시하고, 심지어는 친일(親日)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무교회 신앙의 창도자 우치무라가 일본인이라는 점과 연관시켜 ‘일본식 기독교’로 몰아붙이면서 은연중 민족 감정을 부채질하는 식이었다.
피상적으로 보자면 무교회 신앙의 교회 비판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배경도 깔려 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사람의 증언 혹은 평가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송건호(전 한겨레신문 회장)는 아래와 같이 단언한다.

김교신은 … 참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일제에 저항하다 쓰러졌다. 그런데 교회측은 어떠했던가. … 오로지 신앙과 전통만을 간판으로 내걸고 민족 해방에 대해서는 방관자적 중립적 태도를 취했고, 현장의 참여 속에서 선교를 한다는 의식화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이 기독교를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에 순응하고 나아가서 전쟁에 협력하고 더욱 일본 천황을 또 하나의 신으로 모시는 군국주의 찬양 친일 기독교로 전락시켰다. ‘무교회’를 백안시한 배경도 바로 이것이다.
「일제하 민족 기독교」(『일제하 민족과 기독교』, 김용복 외 엮음, 민중사, 1981)에서

한편 임종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장로회 교육총무 정인과는 기독교가 국책에 순응하여 구미 의존성을 극복하고, 외국 선교기관을 철수시켜 ‘일본적’ 기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 했고, 조선감리교단 본부 주사 심명섭은 전시에 가장 필요한 사상의 통일과 신념의 강화를 위해 국책에 순응하는 진정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자 했고, 복음교회 감독 최태용은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했다.
『친일논설선집』(실천문학사, 1987)

이 모두가 1940년 전후, 즉 『성서조선』이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검열로 휴간, 속간을 되풀이하고 있던 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조정래(소설가)의 비판이나, 홍근수(향린교회 담임 목사)의 탄식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김교신 선생께서 외롭게 실천하신 일이 뭡니까. 이 땅의 기독교에 미국식 물량주의와 저돌성이 감염된 것을 치유해서 건전하고 건강한 민족 종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김교신 선생께서는 일찍이 그 저의를 간파한 겁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한민족을 뿌리에서부터 와해시켜 의식을 완전히 속국화시켜 버리려는 강대국의 저의를 말입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민족 종교화를 꾀했던 것은 그 음모에 맞서기 위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태백산맥』(조정래, 한길사, 1987) 제4권 242-243쪽에서

김교신이 죽은 지 벌써 반세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자랐지만 성숙 면에서는 하나도 성장한 것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김교신과 같은 선각자가 교회가 민족과 세계를 위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있는가를 오래 전에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전혀 귀머거리로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김교신 - 그 삶과 믿음과 소망』(김정환, 한국신학연구소, 1994) 338쪽에서

한마디로 무교회 진영은 일제 시대 기독교계에서 (가톨릭 측을 포함하여)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한 몇 안 되는 집단이다. 이 점은 감리교의 윤치호와 비교해 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두 사람은 실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길을 걸었다. 윤치호가 기독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로 친일로 귀착된 ‘좌절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반면,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은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바람직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으며, 윤치호가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요소를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제국주의에 자발적으로 순종케 하는 예속적 에토스를 심는 데 앞장섰다면, 김교신의 경우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민족 정체성의 재구성에 대한 자극 요인으로서 기독교를 활용했다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양현혜 저 『윤치호와 김교신』)

5. 진정한 스승, 김교신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제자들이 기억하는 김교신의 모습이 훨씬 더 감동적이다. 가령 김교신이 가장 총애했다는 제자, 100점 만점에 120점을 받았다는 류달영(농학박사. 서울대 명예교수)은 이렇게 술회한다.

당시 지리 과목은 대부분 일본 지리였고, 우리나라 지리는 두서너 시간으로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1년을 우리나라 지리만 배웠다. 대고구려를, 세종대왕을, 이순신을 배웠다. 식민지 교육 아래서 자신에 대해 소경이었던 우리 소년들은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국토가 넓지 못한 것을,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을, 백두산이 높지 못하고 한강이 깊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게 되었다.

윤석중(아동문학가, 새싹회 회장)의 기억은 교사가 아닌 스승으로서의 모습이다.

시험 보는 시간에 컨닝 하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는 선생이 계셨다. ‘아무개는 더럭더럭 내주는 졸업장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퇴짜를 놓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대는 어쩌자고 그 짓을 하고 앉았는고.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협잡꾼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이런 술회는 계속된다. 모든 학생에게 반드시 운동부와 학술연구부에 하나씩 들어가 자기를 알고 닦게 하였고(정태시), 일본이 조선 사람의 혼을 몽땅 먹어 버리려 하고 있다고 늘 경고하고(박춘서), 모두 창씨개명을 하였는데도 선생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고, 조례에서 출석을 부를 때 끝까지 우리말로 호명을 하였는데 배속장교가 항의하자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상관없다고 버티다가 문제화되자 다음부터는 아예 출석을 부르지 않았고(최남식),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공허해 못 견디는데, 이때 꼭 필요한 것이 이상적 인물에 대한 동경이라고 타일렀다(유희세)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교신의 제자들은 ‘교사’ 하면 김교신을 연상할 정도로 가장 인상 깊게 회상되는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교사로서의 김교신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6. 에세이스트 김교신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김교신 전집』의 미덕은,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에세이(Essay)’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에세이 유(類)는 적지 않다. 넘쳐난다고 해야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에세이와 김교신의 에세이는 그 힘이 다르다. 교과서적 용어를 빌리자면, 김교신의 에세이는 글자 그대로 에세이(중수필, 重隨筆)다. 작금에 넘쳐나는, 그때그때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끄적이는 식의, 감성적 글이 아니다.
일례로 조국, 교육, 학문과 직업, 이상과 현실, 가정 등을 논한 1권 『인생론』의 「조선 지리 소고(朝鮮 地理 小考)」를 보자. 김교신은 거기서 조선 땅의 면적과 인구, 산악과 평야, 해안선, 기후, 지구상에서의 위치를 세세히 논하며, 그것이 얼마나 천혜(天惠)의 것인지를 밝힌다. 인류 문명사 전반(全般)에서 그 화려한 꽃을 피웠던 국가들의 지리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세세히 밝혀 가면서. 그후 마지막으로 끄집어 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은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러나 조선의 과거 역사와 현장을 통관(通觀)한 이는 누구든지 그 위치의 불리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황해가 대서양만큼 넓거나 압록강 저편에 알프스 산맥 같은 고준(高峻)한 연봉이 둘러쌌더라면, 조선 해협이 태평양만큼이나 넓었더라면 좀더 태평하였을 것을, 그렇지 못하니 중, 일, 노 3대 세력이 개재(介在)*하여 좌충우돌하는 형세에 반만년 역사도 별로 영일(寧日)이 없이 지나왔다고 하니 듣는 자로서 과연 동정의 눈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비명인 것을 미면(未免)*한다. 약자가 한갓 태평을 구하여 피신하려면 천하에 안전할 곳이라곤 없다. 남미 페루국 에스파니아에 선주(先住)하였던 인디언족의 수도 쿠스코는 우리 백두산보다 휠씬 더 높은 곳에 있었어도 에스파니아인들의 참혹한 침략을 피할 수 없었고, 티벳은 해발 4,000미터 이상의 고원에 비장(秘藏)된 나라이었으나 천하 최고의 히말라야 산맥도 이 신비국으로 하여금 영인(英人)의 잠식을 피케 하는 장벽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다 - 겁자(怯者)에게 안전할 곳이 없고 용자(勇者)에게 불안한 땅이 없다고.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요, 무릇 범을 잡으려면 호굴(虎窟)에 가야 한다. 조선 역사에 영일이 없다 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 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는 이만한 데가 다시없다. 이 반도가 위험하다할진대 차라리 캄차카 반도나 그린란드도(島)의 빙하에 냉장하여 두는 수밖에 없는 백성이다.

게다가 세월에 조금도 퇴락한 기색이 없다. 60-70년에 달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읽고 있노라면 지금 이 순간으로 현재화된다. 가령 1권에 게재된, 교육 문제를 다룬 「최대의 우상」이 그렇다.

학교 교육은 현대인에게 최대의 우상이다. ‘이불 길이를 보아 가면서 발을 펴라’ 함은 동서양에 공통한 격언이다. 마는 자질(子姪)의 교육에 한하여서만 이불이 짧아도 발길만 펴고자 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세계에 비류(比類) 없던 조상 숭배의 열성은 이제 ‘자손 숭배’ 형태로 변하였다. 선조의 분묘를 위하여 아끼는 것이 없던 심정으로써 최후의 1평 전토까지 팔아서라도 학용품, 후원회비를 합하여 보통학교에 50여원, 중학교에 100여원, 전문대학에 수백 원씩 4월 1일에 헌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 교육을 위한 파산이 생긴다.
간이(簡易) 생활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이나 해마다 증가하는 교육비를 지출하기 위하여는 수입의 증액을 기도하여야 한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지출에 비하여 수입이 상반치 못할 때에 인간 비극이 시작된다. 본의에 거스르는 직무도 감수하여야 하려니와 승관(昇官)운동도 사양치 않으며, 부정행위도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에 달하려는 때에 생기는 것이다. 교육을 위한 비교육적 생활이 이에서 포태된다.
몸을 다하여 공직에 복무함을 ‘충’이라 일컬을 것이나, 자제의 교육을 위하여 도회로 전임할 때에 그 배임(背任)하는 모양이 마치 창기(娼妓)의 절(節)을 변함과 방불할지라도, 학교 교육을 위함이라 하면 자타가 서로 용인하려 한다. ‘악마는 도회를 건설하고 하나님은 향촌을 건설한다’ 하며, 농촌 진흥이 시급하다고 외치는 선각자가 있으나, 농민을 모집하여다가 서울서 농민 수양회를 개최하여야 하는 형편이니 교육의 비애가 없지 못하다.
평일에 엄정 공명하던 인사도 자질의 입학시험에는 파렴치하고, 청탁도 시(試)하니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 입학 후에는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진급하기를 기도한다. 한번 문제가 학교 교육의 결과에 미치면 노유(老幼)와 현우(賢愚)의 별(別)이 없이 혼돈이요, 망패(妄悖)*이다. 이렇게 하고라도 학교 결과에 무슨 소득이 있다면 용혹무괴(容或無怪)*하려니와, 오늘의 학교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외에 무엇이 남는가. 절대한 신뢰의 표적이 되면서 하등의 실효도 없는 것을 가로되 ‘우상’이라 한다. 현대와 같이 교육이 우상화한 때에 “행유여력즉 위학문(行有餘力則 爲學問)”*이라는 공부자의 말씀에 깊이 반성할 것이다.

7. 선비의 전범, 김교신

여기에 몇 가지 일화를 덧붙여 보자.
아는 이가 찾아오자 밭에서 일하다 집안으로 들어가 의관을 정제하고 다시 나와 맞아주는 모습, 한밤중에 조심스레 손님의 이불 밑에 손을 넣어 방이 식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문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가서는 군불을 때는 모습, 동경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동기동창 중에서 빠른 이는 장학관, 보통 교장을 하고 있는데 평교사로 있으면서도 학무국(오늘날의 교육부)의 관립 사범학교로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일거에 거절하는 모습, 300여 명의 독자뿐인데도 10여 년에 걸쳐 『성서조선』을 만들어가는 모습, 일제에 체포?수감된 상황에서 경찰의 ‘황국신민서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망국신민서사가 될 것’이라고 답하는 모습, 시집가는 딸에게 단도 하나를 내주며 ‘금일로써 친정과의 관계는 싹 끊어라, 길흉화복을 오로지 시댁과 함께 해라, 나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자르는 모습 …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로 집약된다. ‘선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선비는 조선 시대의 선비와는 달랐다. 최소한 친구 아버지를 통해 무교회 신앙을, 김교신을 알게 됐다는 석진영(시인, 찬송가 작사자, 미국 『복음의 전령(The Christian Ambassador)』 주필)에 의하면 그렇다.

격무 중에서도 가족을 위해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시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은 청빈만을 덕으로 삼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등지고 앉아 글만 읽으며 무기력한 생활인으로 자족하고 안거하며 처자를 희생시킨 우리의 선비들의 폐풍을 산 신앙으로 지양한 저에서 특이점을 찾을 수 있다.
『복음의 전령(The Christian Ambassador)』 제30호(1978)

그래서인가. 김교신의 벗 함석헌은 김교신을 추모하는 글에서 이렇게 외친다.

오늘에 와서 저를 생각함이 더 간절하다. 오늘에 저를 그리는 생각은 그 의미가 다르다. 나라의 미친 꼴을 보고, 썩는 꼴을 보고, 생명의 말씀을 가진 참 산 인물이 그리워서다. 저로 하여금 이 나라에 있게 하라. 있어서 말씀하게 하라.

결국 김교신은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리운 사람이다. 이것이 『김교신 전집』을 복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