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 160

남산 인권길 3 (옛 중앙정보부장 공관, 6국 취조실 기억공간)

과거 중앙정보부가 소유하고 있었던 부지 일부는 '인권숲'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다. 중정 부장의 공관으로 쓰던 집은 현재 문학의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소방재난본부 건물 인근에 있으며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지하에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민간의 방첩 활동까지 육군 특무대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인권 및 월권 문제로 말이 많았던 터라 순수하게 민간의 방첩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기관의 창설이 필요했다. 제2공화국 당시부터 이런 계획이 있었는데, 이는 5.16 군사정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쿠데타 며칠 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 제2공화국 하에서 이런 정보기관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이후락이다. 실제로 이후락은 5.16 군사정변 직후 체포되기까지 했다. 제..

남산 인권길 2 (기억의 터, 통감 관저 터, 위안부 할머니 기억공간)

구 통감관저 경술국치 이후 통감관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새 총독관저를 경복궁 옛 후원 자리(현재 청와대 자리)에 세운 뒤부터는 역대 통감과 총독들의 업적이라 쓰고 만행이라 읽는다을 기리고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시정기념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

남산 인권길 1 (수방사령부 터, 소릿길 터널,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을 근거지로 하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 군단급 기능/작전사령부. 애칭은 방패부대. 별칭은 충정대(忠正臺). 1961년 6월 1일 창설되었으며, 2개의 사단과 1개의 여단을 예하에 두고 있다. 2022년 현재 사령관은 김규하 육군 중장(육사 47기)이다. 수방사 창설 이전 이 수방사 이전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지키는 부대들은 당연히 존재했고, 첫 주자는 1948년 창설된 (구)수도경비사령부(지금의 수도사단)와 1949년 5월 12일 (구)수도사단으로 승격한 7여단(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구)수도사단이 그 명칭답게 경기도 동두천과 포천 전방 경계를 맡던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적의 보전 공격을 맞이했는데, 문제는 부실한 대전차 장비와 병력차[2]로 동두천과 포천에서..

남한산성 해공신익희선생 동상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1908년 한성 외국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동명 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 법률 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그 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 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

운산 장덕수의 묘

장덕수 (張德秀, 1894~1947) 한국의 친일파,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 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 후 체포되어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 유재 당하였다. 그 뒤 임정 외무부 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도한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 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사회계몽운동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했고,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시기에 친일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에 ..

도산안창호의 묘

도산 안창호의 묘 - 애국지사. 임시정부 내무총장 평남 강서출생, 평생을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로 건국훈장 최고의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895년 구세학당 (경신고)에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약관의 명 연설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에 전력하다. 을사조약 후에 귀국하여 1907년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105인 서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3.1 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국무총리서리를 지내며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에 크게 공헌했다. 1924년 도미하여 흥사단 조직을 강화한 후 192..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

화가 이인성 (1912~1950) 대구 출생, 보통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드러낸 그는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 아동 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하며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제국 미술전람회에 불과 19세의 나이에 수채화 [여름의 어느 날]로 입선해 천재화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24세 때는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1935년)을 수상했으며 1937년 제16회 선전에서는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에 불과 38세의 나이로 화려한 일생을 마감했다, ,1988년 2월호>은 고인을 근대 유화가 1위로 꼽..

망우리 역사전망대

역사의 전망대 풍수적으로 이곳 망우리가 배산임수의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역사적으로는 아차산에서 온돌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과 아차산 능선에 산재한 고구려의 보루 유적이 말해 주듯 한강유역은 중국과의 교역로이며 땅은 비옥하고 전쟁에 유리한 지형으로 삼국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백제와 고구려(475~553, 장수왕)에 이어 신라(진흥왕)가 이곳을 차지하여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고 조선시대의 외사산 (外四山)의 좌청룡의 자리로 한양을 병풍처럼 크게 둘러싸며 조선500년을 지켜왔다. 그리고 일제가 만든 시립공동묘지(1933~1973)의 어둠을 벗어나 아름다운 경관 속에 선진 한국의 새벽을 여신 분들이 모여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성지가 되었으니 이곳에서는 맞는 해돋이는 그 어는 곳보다도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