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 354

홍릉.유릉 역사문화관 (2024-03-10)

유네스코 세계유산 홍릉. 유릉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고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 (1897년~1910)의 황제와 황후 73면늬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햇습니다.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 명당에 왕릉자리를 정하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능을 만들었습니다. 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고 지금 각 왕릉에서는 해마다 제항을 지내고 있어 살아 있는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홍릉은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황제 고종과 대한제국 1대황제 고..

탑골공원 역사 특별전시

조선시대 탑골 현재 종로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는 엣날 한양 경행방 (慶幸坊) 이었다. 불교를 숭상하였던 세조(1455~1468)는 이곳에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고, 일명 백탑(白搭)이라고 일컫는 대리석 소쟁의 10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그 주변을 탑이 있는 동네라하여 탑골(塔골) 또는 탑동(塔洞) 으로 불렀다. 원각사는 왕실의 사찰로 번창하였고, 탑골 일대는 외국 사신들도 즐겨 찾는 한양의 명소(名所) 로 발전하였다. 세조 이후 원각사는 예전의 위상을 점차 잃었고, 결국 1504년 (연산군10)에 폐사 (廢寺)되었다. 임진왜란이후 원각사 터와 탑골에는 백성들의 민가가 빽빽이 들어서면서 과거 흔적을 찾을수 없었고, 10층석탑만이 우뚝 솟은 채로 옛 영광을 상징하고 있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공평동 룰 공평동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일반 서민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생활상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었다. 또 태화관, 종로YMCA등 민족운동과 관련된 근대유적도 다수 분포해 두터운 역사적 층위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1978년 총 19개 도심개발지구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6개 지구의 재개발 사업이 2010년에 완료 되었다. 제1.2.4지구는 재개발사업의 시행에 앞서 2010년 문화재 지표조사, 2014~15년 매장문화재 발국조사를 실시하였다. 그결과 조선시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108동건물지, 500여 년전 조선시대 골목길 등의 유구와, 1,000여점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 한양도성 내 전모를 간직한 조선시대 생활유적으로 '조선의 폼페..

영원 (의민황태자 : 영친왕 & 의민황태자비 : 영친왕비). 회인원 (이구)

영원 (英園) 회인원 (懷仁園) 영원 (英園)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1987~1970, 영친왕) 의민황태자비 (1901~1989, 영친왕비) 를 합장한 원(園)이고 회인원 (懷仁園)은 의민 황태자의 둘째 아들인 황세손 이구 (李玖: 1931~2005)의 원(園)이다. 1970년에 의민 황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홍릉(洪陵) 근처에 *원소를 조성하고 이름을 영원이라 하였다. 이 후 1989년에 의민황태자비가 세상을 떠나자 영원에 합장하였고, 2005년에 황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영원 동쪽에 원소를 조성하고 이름을 화인원이라 하였다. 영원은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여 재실,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배치하였고, 원침 (園寢)에는 남간석을 두르고 석양과 석호,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 ..

남양주시 금곡 (홍릉.유릉) 대한제국 황실 후궁들의 묘

사적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은 대한제국 1대황제 고종 高宗: 1852~1919과 명성황후 明成皇后閔氏 1851~1895의 능이고, 유릉은 대한제국 2대황제 순종純宗:1874~1926과 첫 번째 황후 순명황후 민씨 1872~1904, 두 번째황후 순정황후 윤씨 1894~1966의능이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과 다르게 대한제국 황제릉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황제릉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명나라 황제의 예를 참조하고, 기존 조선왕릉의 예를계승하여 조성한 능이다. 기존 조선왕릉과 다른 점은 크게 두가지이다 제향공간에 있던 정자각 대신 침전(寢殿)을 두었고, 침전 앞부터 홍살문까지 향로를따라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홍릉..

인천 영종역사관

조선 초기 자연도(현재: 영종도)의 삶 자연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자 조운수로 (漕運水路)의 역할을 수행하여 송의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객관 '경원정'이 있었다. 다라서 자연도에 주둔하던 수군과 말 목장 관리인, 소금을 생산하여 수익을 얻던 주민까지 적지 않은 수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한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후 조선초기까지 유배지로 쓰였다. 당시 섬 주민들은 주로 막집(幕室)이나 초가집에 거주했다. 그러나 조선초, 고려말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략으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고, 국영 말 목장을 설치하는 정책에 다라 적은 수의 주민들만이 살게 되었다. 수군(水軍) 목자(牧子) 염부(鹽夫)등의 집이 30여 호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리지에 전한다. 병인양요..

월미도 --> 영종도 유람선 (구읍뱃터)

영종진 화포 영종진(永宗鎭)은 국가 보장처였던 강화도의 방비를 목적으로 1653년 남양도호부의 영종진에서 자연도(紫燕島)로 이전 설치 되었다. 그리고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자연도가 영종진이 되었고, 현재의 구읍뱃터 일대에 포대가 배치되었다. 영종진 포대에는 자연도로 이설 할 당시의 화포와 1869년 훈련도감에서 보내준 지자총통, 대포, 불랑기 그리고 1874년 운현궁에서 별도 제작하여 강화, 김ㅁ포, 영종에 나눠 준 대포,중포, 소포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러나 1875년 일본의 포격에 의해 영종진이 파괴되고 화포 36문을 약탈 당하면서 현재는 그 실물이 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영종진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위해 이 곳에 목원하여 전시된 화포는 김포 덕포진 대포를 ..

인천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제물포 구락부 1891년 조직된 제믈포 구락부는 각국조계를 미롯한 개항장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친교를 위한 공간이었다.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이다. 189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에 거주하는 구미인은 해관이나 세창양행의 근무자들과 소수의 미국인 선교사에 불과 했는데,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수가 급증했다. 1900년 지금의 자리에 2층 조적조 건물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6월에 회관준공식을 거행했다. 회원은 60명까지 증가 했으며 매월 두 차례 친목 모임과 댄스파티를 열었다. 1914년 조계제도가 폐지되면서 구락부 회관은 여러차례 용도가 바귀었는데, 해방후에는 인천 사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07년..

인천 자유공원 (시민애 집) : 고노주택 터, 구)인천시장 공관

(현) 시민애 집 : (구)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제물포구락부 맞은편에 있는 인천역사관 자리에는 잡화상과 석유상을 운영하여 부를 쌓았던 일본인 고노다케노스케의 주택이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평양에서 잡화상을 열었던 고노는 1896년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조선에서 행상하는 일본인을 보호하고 연락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계림장업단을 조직하고 평양에 지점을 두었다. 그가 조직한 계림장업단은 사실상 일본 정부의 지원금을 받으며 활동한 무장행상단이었다. 이후 고노는 석유판매조합 조합장, 수입상 조합장 인천미두취인소 이사, 아사히 양조 이가, 월미도유원회사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경제 침탈의 선두에서 활동 했다. 고노주택은 풍광이 좋아 해방이후 송학장 이라는 사교홀로 사용되다가 1966년 인천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