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1.중국역사문화

미몽속의 제국 : 아편전쟁을 다시 쓰다

동방박사님 2022. 5. 1. 20:17
728x90

책소개

아편전쟁의 진짜 문제는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패배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고
그 후 20년이란 시간을 중국이 허비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러나 제국주의의 포화 속에서 한줄기 ‘자성’은 피어났다!

아편전쟁의 위대한 산물 “해국도지”
그리고 한중일 삼국에서의 엇갈린 운명의 결과는?


아편전쟁은 동아시아 역사의 물길이 고대에서 근대로 들어서는 관문이자 두 시대를 연결해 주는 전도체와 같은 사건이다. 그러므로 아편전쟁을 제대로 알아야 근대사의 퍼즐을 맞출 수 있다.

아편전쟁은 중국사도 아니고 영국사도 아니다. 이것은 세계를 아우르는 역사이다. 이 스토리는 시간적으로 유럽 대항해 시대에서 동북아 개항에 걸치며, 공간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심지어 아메리카까지로 넓혀진다. 이 책은 대항해 이후 서양은 왜 끊임없이 중국의 문을 두드렸는지, 중국은 왜 쇄국으로 일관했는지 통찰하며, 중국은 무엇을 잘못했고 서방은 무엇을 오해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은 현실의 문제를 통렬히 자각하고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미몽에 빠진 중국을 각성시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민족을 수호하는 임무를 받고 역사의 필연에 맞서야 했던 한 사람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감은 눈을 뜨고 대양 너머의 세상을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아편전쟁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 1부 | 갈등의 기원

1장 황제의 호출
황제의 호출
린쩌쉬, 광저우로 향하다

2장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해상 패권
두 동인도회사의 합병

3장 광저우 십삼(十三)행
정성공과 청의 해안 봉쇄 정책
타이완 점령과 강희제의 4구 통상 개방
광저우 13행의 탄생
청 정부 또 하나의 자금창구
두 거대 독점 무역회사의 창과 방패 싸움
외국 인력 조달의 창구

4장 차(茶) vs 아편
유럽의 대(對) 중국 무역적자
유럽인들의 차(茶) 사랑?
아편의 역사
급증하는 은 유출과 도광제의 아편 금지령

| 2부 | 닫으려는 자 vs 열려는 자

5장 쇄국의 시작
제임스 플린트 사건, 새로운 항구를 위한 동인도회사의 집요한 노력
다시 1 port 시스템으로! …… 쇄국의 시작

6장 메카트니 통상 사절단(Macartney Embassy)
중국에 온 최초의 유럽 국가 정부 사절단
메카트니의 미션
‘삼궤구고’ 문제
꼬일 대로 꼬여버린 사절단의 미션
미션의 실패
더 큰 충돌을 예약해 둔 메카트니 사절단 방문
또 한 번의 삼궤구고 거절과 에머스트 사절단 문전박대

7장 에머스트(Amherst)호 탐사 사건
에머스트(Amherst)호의 진짜 미션?
“상하이(上海)”에 진입하다

| 3부 | 경세파(經世派)

8장 린쩌쉬
린쩌쉬가 십 대를 보냈던 당시 중국은?
애국주의 계몽사상(경세치용)의 요람, 오봉서원
장스청의 막부로 들어가다
베이징에서 만난 계몽 인사들
“임청천(林靑天)”
최고 지방관에 오르다

9장 공즈쩐
관가로 나가기 전의 공즈쩐
경세파
세상이 포용할 수 없었던 공즈쩐
린쩌쉬와 공즈쩐
『기해잡시』

10장 웨이위엔(魏源)
웨이위엔(魏源)
‘강건성세’에 가려진 실상을 목도하다
『경세문편』
호남(湖南) 인맥
린쩌쉬와 다시 만나다
순탄치 않은 과거 시험의 길
린쩌쉬와의 황금시기
투자가적 안목
『묵고』

| 4부 | 아편전쟁

11장 호문 아편 폐기
흠차대신
외국 상인들의 저항과 광저우 이관 봉쇄
호문 아편 폐기

12장 전쟁의 방아쇠는 누가 당겼나?
무역상들의 로비
엘리엇의 대책 없는 백지수표
린웨이시 사건과 영국인 추방 조치

13장 아편전쟁
전쟁의 발발
천비초약의 체결과 파기, 그리고 강대강으로 돌아선 국면
광저우 함락
영국의 2차 북상과 닝보 함락
난징으로의 진격
전쟁의 득실

14장 해국도지(海國圖志)
피끓는 웨이위엔
린쩌쉬, 유배 명령을 받다
『해국도지』의 탄생
엇갈린 『해국도지』의 운명

15장 역사의 필연과 비운의 충신
노(老)대신의 자살
“변방을 향해 떠나면서 가족에게 몇 마디 읊다”

에필로그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김상규
 
1972년생. 연세대학교 졸업, 대외경제무역대학교 석사 졸업. 현재 베이징 거주. 1996년부터 중국을 오가기 시작했고 14년 동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였다. 대우 인터내셔널에서 상사맨으로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LG전자, 도시바삼성의 해외 영업부서에서 중국 관련 업무를 하다가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2008년에 주재원으로 중국에 왔다. 2013년 그간의 대기업 생활을 마치고 회...
 

책 속으로

황제의 정식 임명을 받고 그는 부랴부랴 가까운 지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 중 내각중서로 있던 공즈쩐은 린쩌쉬를 존경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아편에 대한 엄금을 주장해 왔던 열혈 진보인사였다.

공즈쩐은 비록 평생 낮은 관직에 머물렀지만 청 왕조 후기의 개량주의, 경세치용(실학) 사상의 선구적 인물로, 당대에는 물론이고 청 말의 개화사상과 조선의 개화정치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공즈쩐은 떠나는 린쩐쉬를 배웅하면서 『흠차대신 후관侯官 임공을 보내는 글』이라는 장문의 글을 써서 주었다. 후관은 린쩌쉬의 고향으로 후관의 임공이란 ‘린쩌쉬’를 뜻한다. 린쩌쉬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이 글을 읽었다.

이 글에서 공즈쩐은 린쩌쉬에게 열 가지 항목을 제시하면서 주의를 당부했는데 핵심은 아편을 완전히 금지하고 막을 것, 화기에 신경을 쓸 것, 관리들의 기강을 다잡을 것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특히 군사 충돌에 대비를 하라는 것이 눈에 띈다. 공즈쩐은 “우리가 육지전에서만 대포를 썼을 뿐이지 해상전에서 우리가 가진 대포가 효력을 발휘할지 모르겠습니다.”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 p.24

광저우 13행의 설립 취지를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소금 산업에서 량화이 염상과 같은 존재를 만든 것은 소금 산업을 정부가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청 정부는 대외무역을 확실히 자신들의 컨트롤하에 두고 싶었고 그러자면 항구를 단일화시키는 것이 그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전산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던 당시에 여러 곳에서 무역이 일어나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가 중국과 무역을 함에 있어서 광저우 13행은 그들의 유일한 창구이자 유일한 무역 파트너였다. 13행들이 담합을 했으니 사실상 하나의 바이어, 하나의 공급선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거대 시장을 등 뒤에 둔 이들은 서양 무역상들에게 언제나 갑이었다. 무엇을 구매하고 안 할 것인가, 얼마에 구매할 것인가가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모두 이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광저우는 청 정부의 보호무역주의의 상징이었고 13행은 청 정부 보호무역주의와 무역통제주의의 하수인이었다. 적어도 이들 서양인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졌다.

또한 한곳으로의 독점과 특약은 필시 횡포와 비리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광저우의 해관 관리들은 통관비, 검사비, 선물, 내비게이션비 등 각종 비용을 요구했고, 서양 상인들은 이런 비용을 얹고 팔리는 자신들의 물건이 적정한 가격에 내지에 소개될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또한 13행으로부터 구매하는 차와 비단, 도자기는 괜히 바가지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산지와 가까운 데서 구매하면 더욱 신선하고 질 좋은 상품을 더 좋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합리적 의심과 기대를 하게 된다.
--- p.51~52

1755년 제임스 플린트(James Flint)가 탄 영국 동인도회사의 화물선이 광저우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저장성 띵하이(定海)13)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비단과 차 무역을 하고자 했다. 띵하이 지현(현의 행정장관)은 이 배의 무역허가증이 광저우인 것을 확인하고는 입항을 거부하였으나 플린트를 비롯한 영국인들은 닝보가 무역을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한다는 명성을 듣고 왔다는 둥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자신들과 무역을 하자고 설득하였다. 띵하이 지현은 듣고 보니 이들과 교역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 배를 닝보에 들어오게 한 후 닝보의 양행 사장들에게 이 배를 소개해주는 편지를 보냈고 이렇게 무역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 후로 영국은 닝보를 통해 무역을 증대시켰고 이는 광저우의 수입 감소를 초래했다. 광저우 해관에서 닝보에 항의했고 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싸웠다. 무역은 지방정부에 큰 이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광저우는 “황제가 정한 전통 항구”라는 깃발을 높이 들며 “영국의 요구에 편승하여 무역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라고 했고, 닝보는 “영국과의 무역을 그리 겁낼 것 없으며 이들에게도 황제의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할 이유가 뭐가 있나!”라며 응수했다.
--- p.75

만약 여기서 직접 홍차를 구매해서 영국으로 운반해 간다면 광저우를 거치는 것에 비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남기고 비용이 절감되겠는가? 헤밀튼은 ‘에머스트호’가 푸젠성 해군의 감시를 받긴 하지만 이들은 과도한 간섭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에머스트호에는 현지 주민들이 몰래 들어와서 치료를 받거나 장사를 하고 갔고, 영국인들은 뭍으로 나와 정찰 활동을 하였다. 푸저우 관원은 그들이 당장 간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헤밀튼은 듣지 않고 버텼다. 결국 푸저우 당국은 헤밀튼에게 약간의 물품을 파는 것을 허락하고 빨리 떠나도록 했다.

헤밀튼의 차 구매는 푸저우 당국에 의해 거절되었다. 그러나 현지 상인들은 무역을 원했고 심지어는 몰래 들어와 차를 팔고 아편을 사갔다. 어떤 이는 영국인들더러 푸저우의 장군을 찾아가 관세를 낮춰달라 요청해보라고 했고, 자신이 진사라는 어떤 사람은 푸젠성 내하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자신이 과거 시험을 위해 북경에 올라갈 노자를 달라고 하기도 했다29). 헤밀튼은 그에게 원조를 했는데 이 사람이 후에 ‘영국 배들을 막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로 목이 날아간’ 푸젠성 안보 좌영도사 천센셩이다.
--- p.113

장쑤성 남부와 저장성 북부는 장강의 지류와 호수가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쑤저우, 자싱과 같은 아름다운 수상도시들이 발달해 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홍수에 매우 취약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1824년 7월 린쩌쉬는 이 지역의 고질적인 범람을 해소하는 물길 트기 공사를 장쑤성과 저장성 순무에게 제안하였다. 부근에 있는 세 개 강의 물길을 서로 트는 이 프로젝트는 두 개 성(省)에 걸치는 대규모 공사였고, 곧 황제의 재가를 받아 발족되었다. 린쩌쉬가 공사 준비를 진두지휘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중, 7월 17일에 고향으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이제 막 준비 중인 공사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이때 그의 부친 린삔르는 ‘나라 일이 먼저다’라며 아들로 하여금 일을 마무리하고 오게 하였고, 이렇게 린쩌쉬는 프로젝트의 중요한 단계에 대한 지휘를 끝낸 후 고향으로 떠날 수 있었다. 모친의 거상 기간이 끝나는 1827년 5월부터 그는 다시 섬서성과 장쑤성의 안찰사, 포정사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그해 10월 부친 린삔르가 별세하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2기 공직 생활인 1820~1829년 동안 여러 업적을 이루긴 했지만 6년간의 거상 기간을 제외하면 그가 실제 지방관으로서 활약했을 시기는 1820년 정월에서 1824년 7월의 4.5년에 불과하다. 그는 이 중 1년 반가량을 수상 도시인 장쑤성 쑤저우에서 근무했다.
--- p.148

웨이위엔의 베이징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830년 타오슈가 양강 총독으로 승진했고 이듬해에 웨이위엔은 그의 콜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앙 하급직으로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느니 양강 총독의 막부로 들어가 능력을 발휘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그는 총독부가 있는 난징행을 택했다. 양강 총독은 상하이를 포함한 장쑤성, 장시성, 안후이성을 관할하였다.

비슷한 시기 린쩌쉬 역시 허난 포정사, 하도 총독(산동) 등으로 발령받아 지방을 돌았다. 그리고 다시 1년 후인 1832년 6월에 린쩌쉬는 장쑤성 순무로 승진·발령 받아 산동성에서 운하를 따라 장쑤성 쑤저우로 이동하였다. 때는 에머스트호의 상해 입항 사건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중이었고, 타오슈와 웨이위엔은 린쩌쉬와 대처 방안을 상의하기 위해 30㎞를 한 걸음으로 마중 나가 장강과 대운하가 만나는 곳인 쩐장이라는 곳에서 재회했다.

“양이를 절대 내륙으로 들이지 말고 빨리 쫒아내라.”라는 황제의 엄명도 있었고 또한 이들이 아편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타오슈와 린쩌쉬는 에머스트호 입항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했다.
--- p.185

재미있는 것은 엘리엇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체결했다가 도광제에 의해 다시 파기된 《천비초약》은 영국에 있는 그의 상관에 의해서도 기각(reject)되었다는 것이다. 이 조약은 청 조정이 파기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영국 정부에 의해 파기되었을 운명이었다. 매파 외무장관 팔머스톤은 ‘협상을 이거밖에 못 하냐’며 엘리엇을 경질하고 본국으로 소환시켰다. 그리고 강경파 헨리 포팅어(Henry Pottinger)를 신임 전권대표로 보냈다. 《천비초약》이 영국의 더 센 대장을 부른 셈이었다.

포팅어가 홍콩에 도착하고 10일밖에 안 된 1841년 8월 21일, 그는 함선 37척과 육군 2,500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푸젠성 샤먼을 함락시켰다(8월 26일). 이들은 다시 매서운 기세로 북상하여 10월 1일에는 저장성 쩌우산(舟山)를 다시 함락시켰고61), 10일에는 닝보 북동쪽의 쩐하이(镇海)를, 13일에는 닝보를 함락시켰다. 저장성 동부가 영국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도광제는 모든 걸 걸고서라도 수복하겠다고 결전을 선포하였다.
--- p.231

마지막 질문은 “왜 『해국도지』는 정작 당사국인 중국과 인접국인 조선에서는 별 반향을 얻지 못한 채 잊혀졌고 한참 후에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을까?”이다. 특히, 조선은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로 철저하게 외국에 대해 무관심과 외면으로 일관했다.

당시 중국은 《난징조약》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영토를 크게 잃은 게 없으니 무승부로 끝난 전쟁이야.’라고 정신 승리에 빠져 있었을 수도 있다. 아편전쟁 이후에 서양의 군함과 대포를 모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한두 번 난관에 부딪치자 그만 곧 포기를 하고 마는데, 이는 그러한 시도들이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기술 근대화 프로젝트가 아니라 산발적이고 충동적인 시도들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추진하는 조직 같은 건 있지도 않았고, 외국과의 근대적 외교 사무를 보는 ‘통리기무아문’은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1860년 이후에나 생겼다. 베이징의 통치그룹은 아편전쟁을 겪고도 충분히 위기감을 갖지 못하였다. 위기감이 없으니 수천 년 동안 이들이 가져온 전통 방식을 개혁할 동력과 의지가 부족했고 경세파들의 열정은 묵살되고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각성보다는 오히려 경세파 인사들이 정계로 진출하지 못하면서 중국은 아편전쟁 후 20년을 허비하게 된다.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을 겪고, 2차 아편전쟁으로 베이징이 함락되고 원명원이 불에 타자 그제서야 자각하기 시작했다.
---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