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사회학 연구 (책소개)/5.노동문제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30년

동방박사님 2022. 8. 2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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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내부자 시각으로 대기업노조 문제 드러내다

20대 청춘이 ‘하고 싶은 일’ 대신 ‘해야 될 일’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들어간 후 달달한 낭만, 개인적 성취를 위한 공부 대신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공장 들어가서 기름밥 먹는 걸 선택하는 거라면 더 쉽지 않다.

이 책 저자 이범연은 1962년 태어나 1981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전형적인 386세대다. 하지만 이 책에는 386세대라는 표현이 한 번도 안 나온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청춘들의 통상적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80년대 학번’은 그에게 의미가 없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현장의 한 후배 노동자가 내게 물었다.
“형은 서울대 나와서 왜 공장 일을 해요?”
입사 후부터 정말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야, 서울대는 졸업도 못하고 겨우 3년 다니고, 노동자로 30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그놈의 서울대 타령을 듣고 살아야 하냐?” - 본문 중에서

저자는 마찌꼬바(작은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후 대우자동차(현 한국GM)에 입사한 지 어언 30년이 됐다. 두 번 해고되고 두 번 구속됐다. 노동조합 간부 일도 몇 차례 했다. 이제 정년을 몇 년 앞둔 ‘늙은 노동자’가 된 그는 “회한은 많지만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세상을 좋게 바꾸는 든든한 진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30년을 살아 온 그가 지금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전망과 많이 다르다. 노동조합은 취업 비리 등 각종 비리에 노출돼 주요 간부들이 해고되고 구속됐고, 단기 경제적 이익 확보에 매몰됐고, 노동자들은 사회의 진보적 발전이라는 노동조합 운동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보수화됐다. 또 정파는 무리한 경쟁에 찌들어서 노조 활동가들은 멀리 길게 보는 방법을 잃어버린 ‘구조적 근시안’이 됐다.

저자는 평론가적 입장이 아니라 ‘내부자’의 시선으로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정조준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노력의 다른 측면이다. 현 단계 대기업(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 실상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다양한 문제점과 문제점이 발생하는 원인을 심층적으로,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와 함께 노조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활동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목차

책을 내면서 흔들리는 나를 다잡기 위한 ‘무모한 도전’

0장. 늙은 노동자의 짧은 ‘자소서’
두 번이 해고와 구속, 회한 많지만 후회는 없어

수줍음 많던 아이, 노동자가 되다
몰래 올린 결혼식
“형, 대학 나와서 왜 공장 일해요?”
아직 나의 열정은 살아 있다

1장. 노동자, 50대에 길을 잃다
방황하는 또 다른 나에게 보내는 편지

“귀족노조에 계시네요.”
“아빠, 그게 얼마 후 내 모습일지 몰라”
어긋남, 그리고 노동운동의 보수화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
관료적 관성에서 벗어나기
낯설게 만들기

2장.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
한국GM 노동조합 경험을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꿈을 닫히게 만든 것
대기업 정규직은 보수화되었나?
투기적 욕망, 자본의 덫에 걸리다
정리 해고의 정치경제학 1 : 죽은 자들의 이야기
정리 해고의 정치경제학 2 :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한국GM 사무직 노동자운동
심야 노동 탈출기
시간에 대하여 : 돈과 삶의 부등가 교환
두 개의 삶 : 돈 버는 맛과 노는 맛
회사 인간 : 비어 버린 나의 삶
부러워할 삶의 양식

3장. 대공장 노조는 왜 쇠락했나?
남성 중심?전략 부재?폐쇄적 정파 벗어나 수평적 네트워크로

남성주의 : 권위와 비리의 뿌리
독이 든 선물 : 권력화된 노동조합
시야는 좁아지고 정신은 마비되고
논쟁?소통 사라지고 오로지 선거 승리만
대공장 노조, 단기 경제적 이익에 매몰
노동운동의 ‘공유지’를 넓히자

4장. 균열된 노동, 배제된 노동자
노조 바깥 90%,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 여는 주체

노동운동,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 것인가?
배제된 노동자와 새로운 주체 사이
두 개의 균열과 문턱
보이지 않는 가난, 보이지 않는 노동자
‘기업가적 개인’의 파산과 새로운 각성
‘고용 없는 삶’의 가능성
자기 목소리 없이 자기 권리 없다

5장. 미완의 촛불, 노동의 꿈
제2의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기 위해

열린 촛불, 닫힌 촛불
정치 소비자에서 정치 생산자로
시민 또는 깃발 없는 노동자
촛불, 일상에서 타올라야

6장. ‘만남의 조직학’ 개론
엇갈림의 골목길에서 만남의 광장으로

노동조합, 인간 존엄 지켜주는 무기
노동조합의 태생적 한계
두 개의 민주노총이 있다
만남의 조직론

7장. ‘만남의 조직학’ 각론
만남을 통한 새로운 주체 만들기 : 조직화 방식에 대한 제안

가난, 공감과 당당함
일상의 연대 : 소비자인 노동자, 노동자인 소비자
만남의 공간 1 : 지역
만남의 공간 2 : 대학
‘눈먼 두더지’가 절실할 때다
지식, 문화, 예술 노동자와 만남

8장. 물길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활동가론 : 공부 안 하는 진보…생각하는 노동자라야 산다

고민하는 당신, 전태일을 새로 읽자
“소중한 것 먼저 하라”
‘공부 안 하는 진보, 공부만 하는 진보’
가족은 운동의 핵심
‘조합원을 위해서’를 넘어서 : 대중성의 함정
배치 바꾸기
진보진영 혁신, 왜 계속 실패할까?


저자 소개

저 : 이범연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1년 대학에 들어갔지만 강의실보다는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거리에서 최루가스 마시고 짱돌을 던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노동자가 되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간 지 어언 30년이 되었다.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두 번 구속에 두 번 해고, 수차례 노동조합 간부를 맡으며 숨 가쁘게 살아왔다. 지금은 한국GM 부평공장 도장부에서 생산직...
 

책 속으로

내가 잘 아는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실형, 집행유예, 벌금형을 받았고, 회사 인사위원회에서 해고되어 회사를 떠났다. 그 여파로 노동조합 집행부는 총사퇴하고 지부장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내 마음의 뿌리가 흔들렸다. 내가 모든 것을 바쳐 일하고 활동했던 한국GM 노조가 늙고 병들어 가고 있었다. 이전에도 부패는 있었지만 그것은 작은 일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넓고 깊게 퍼져 바로 내 발밑까지 와 있다.

누군가 물었다.
“어디 다니세요?”
“한국GM에 다닙니다.”
“귀족노조네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을 뿐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귀족노조라는 비난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전에는 수구?보수언론과 일부 집단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입에서도 귀족노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벌어지고,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됐기 때문이리라.

우리 모두는 길을 잃었다. 나는 길을 잃은 또 다른 나, 하지만 길을 찾고자 하는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뜨거웠던 투쟁의 기억들,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을 그저 과거의 것으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픈 또 다른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배제된 노동’을 새로운 주체로 세워야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운동의 혁신과 함께, ‘배제된 노동’과 ‘만남의 조직학’이라는 개념이다. 배제된 노동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면서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범주만으로는 중소기업, 여성, 청년,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모순을 담아내지 못한다. 물론 중소기업 노동자, 여성 노동자, 청년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비정규직과 다를 바 없는 노동조건에서 있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과 모순 못지않게, 남성과 여성, 대기업과 중소기업,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내국인과 외국인 간의 차별과 모순도 심각하다. - 본문 중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역할은 한계에 봉착했으며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 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배제된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 방안을 제안한다.

조직 방식도 과거 공장 중심, 노동자 밀집 지역 중심이 아니라 생활공간으로서의 지역과 인터넷 같은 사이버상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연봉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과 가난한 수많은 배제된 노동자들이 현실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양한 만남의 공간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현실의 모순과 차별을 극복하자는 제안이다. 여기서 만남은 공간적 차원과 함께 시간적 차원도 함축하고 있다. 기존 노조운동과 미래 노동자들의 공간이 대학 간의 만남도 ‘만남의 조직학’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현장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해 이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저자는 이 책에서 대공장 노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 새로운 노동운동 주체로서의 ‘배제된 노동자’들과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한 ‘만남의 조직학’에 대한 내용과 함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태를 분석한 결과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아파트 값이 올라갈 것 같아서 박근혜를 찍는 노동자들, 높은 수준의 연봉이지만 행복하지 못한 노동자들, 돈과 삶의 질의 ‘부등가 교환’ 현장,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자기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지 못한 채, 설령 그런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의 실상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회사 동료 노동자들과 술을 마시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세상 참 살기 퍽퍽한데 우리는 대기업 정규직이어서 참 다행이야.”
그때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돈은 받을 만큼 받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그 순간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마도 모두의 머릿속에는 ‘과연 나는 행복한가’라는 의문이 강하게 솟아오른 것이리라.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해방’, ‘인간다운 삶’을 외쳐왔던 노동자들의 꿈은 실현되었나? - 본문 중에서

돈 버는 맛도 중요하지만 ‘노는 맛, 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다 ‘이기적’이 되고,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대공장 정규직 중심성을 극복해 ‘진보적’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에서 내 나름의 멋진 꿈을 꾸었다.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함께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꿈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