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4.동양역사문화

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동방박사님 2022. 12. 25.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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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난 두 세기 동안 아시아의 지식인들이 나눈 대화를 면밀하고도 섬세하게 읽어내고, ‘서구와 나머지 세계’라는 진부한 이분법에 맞서 역사의식 측면에서 ‘대륙적 변화’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역사서이다. 오늘날 서구가 편협한 신경증에 빠져들고 있다면, 아시아는 한층 더 외향적이고 자신만만한 낙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난 현재 수십 년간 서구의 안보 우산 아래 웅크리고 있던 터키와 일본은 그 우산 밖으로 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과 이웃나라 간의 오래된 영토 분쟁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은 군사적, 외교적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동향은 이미 이와 딴판이다. 이처럼 근대 세계의 책은 역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며, 폭넓은 학식으로 일본, 중국, 터키, 이란, 인도, 이집트, 베트남이 뒤얽혔던 역사적 사건들을 능숙하고 매혹적인 서술로 펼쳐 보인다. 또한 량치차오, 타고르,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쑨원 같은 아시아의 주요한 개혁가와 지식인, 혁명가들이 나눈 생생한 대화를 담았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종속된 아시아
이집트―‘잇따른 역경의 시작’|서서히 얻어맞는 인도와 중국|세계의 새로운 위계질서

제2장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의 기이한 여정
남루한 행색의 하찮은 사람|유럽의 ‘병자’와 위험한 자가치료|이집트―떠오르는 논객|자강을 넘어서―범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의 기원|유럽에서의 막간|페르시아에서의 절정기|금으로 만든 옥사―이스탄불에서 보낸 알아프가니의 마지막 날들|기나긴 여파

제3장 량치차오의 중국과 아시아의 운명
부럽지만 모방하기 어려운 나라, 일본의 대두|개혁의 첫 충격|일본과 ‘추방당한 위험분자들’|의화단 운동―패배에서 얻은 더 많은 교훈|범아시아주의―세계주의의 기쁨|량치차오와 미국의 민주주의|전제정과 혁명의 유혹

제4장 1919년, ‘역동하는 세계사’
미국과 민족자결 약속|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인가,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인가|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세계 만들기|서구의 쇠퇴?

제5장 동아시아의 타고르, 망국에서 온 사람

제6장 아시아의 재형성
뜻밖의 사태―범아시아주의와 전투적 탈식민화|지적 탈식민화―신전통주의자들의 대두|이슬람 세계의 반근대인들|국민국가의 승리―기운을 되찾은 병자, 터키|“중국 인민은 일어섰다”|‘나머지’의 대두

맺음말―모호한 복수
감사의 말|옮긴이의 말|참고문헌 해제|주|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판카즈 미시라 (Pankaj Mishra)
 
인도의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 1969년 북인도에서 태어나 알라하바드 대학을 졸업하고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에는 '인디안 리뷰 오브 북스', '인디아 매거진' 등의 잡지와 '파이오니어'에 에세이와 서평을 기고하기 위해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마을 마쇼브라로 거주지를 옮겼다. 2007~2008년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UCL에 방문연구원으로 머물렀던 그는 '뉴욕타임...
 
역 : 이재만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역사를 중심으로 인문 분야의 번역에 주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문명과 전쟁』(공역), 『몽유병자들』, 『정치철학 공부의 기초』, 『번역』, 『성서』, 『신』, 『유럽 대륙철학』, 『종교개혁』, 『정복의 조건』, 『세계제국사』, 『철학』, 『역사』,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공부하는 삶』 등이 있다.
 
 

책 속으로

대부분의 유럽인과 미국인은 여전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와의 오랜 핵 교착 상태가 대체로 20세기의 역사를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 인구 과반수에게 지난 세기의 중심 사건은, 아시아가 지적?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일이라는 것이 이제는 한층 분명해 보인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를 오늘날 존재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구의 이미지보다는 한때 종속되었던 사람들의 염원과 열망에 맞추어 세계가 어떻게 계속 재형성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 p.20

이 책은 동양의 가장 지적이고 예민한 사람들 일부가 그들의 사회를 (물리적?지적으로) 잠식하는 서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폭넓게 살펴보려 한다. 나는 이 아시아인들이 그들의 역사와 사회적 존재를 어떻게 이해했고, 잇따라 일어난 유별난 사건과 운동―인도의 세포이 반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 러일전쟁, 중국의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 파리 강화회의, 일본의 군국주의, 탈식민화, 식민 시대 이후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기술할 것이다. 이들 사건과 운동은 아시아가 오늘날의 꼴을 갖추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p.22

이 책의 형식을 일부는 역사적 에세이, 일부는 지식인의 전기로 정한 주된 이유는, 물론 개인의 삶마다 고유한 양상과 계기가 있지만, 역사의 여러 갈래들은 결국 개인의 삶으로 수렴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현대 초기의 아시아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다른 사회들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권력의 부패, 공동체의 쇠퇴, 정치적 정통성의 상실과 서구의 유혹에 대해 숙고하면서 두루 돌아다니고 글도 왕성하게 썼다. 오늘날 돌이켜볼 때, 그들의 열렬한 탐구는 겉보기에 무관한 사건과 지역들을 하나의 의미망으로 엮는 실로 보인다.
--- p.24

무엇을 했건 간에 이 아시아인들 모두는 근대 세계에서 서구가 인간 행위의 거의 모든 면을 압도적으로 좌우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마치 아시아의 방대한 제국들, 존경할 만한 전통, 유구한 관습이 목적이 분명한 유럽의 상인, 선교사, 외교관, 군인 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듯했다. 이집트인, 중국인, 인도인은 서구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근대 세계, 즉 합류하지 못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에는 허약하고 너무도 부적합하다는 것을 차례차례 드러냈다. 아시아가 유럽에 종속된 것이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차원에 그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적?도덕적?정신적 차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구의 정복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복이었다. 서구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분개하면서도 정복자들을 부러워했고, 결국에는 거의 마법처럼 보이는 그들 힘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기를 열망했다.
--- pp.70-71

알아프가니는 체계적인 사상가가 아니었으며 자신의 사상을 급하게 전개한 듯하다. 그가 시종일관 견지한 유일한 입장은 반제국주의였고, 이 대의를 위해 다양한 자원을 축적했다. 그는 민족주의와 범이슬람주의를 둘 다 옹호했고, 이슬람의 불관용을 한탄했고, 과거의 위대한 영광을 상기시켰으며, 무슬림의 단결을 요청했고, 그 자신처럼 무슬림이 힌두교도, 기독교도, 유대인과 연합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서구가 이룬 과학적 성취에 경탄했으나 이슬람에도 합리성이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가 알아프가니에게서 받는 인상은 깊은 사유보다는 어마어마한 기운과 열정, 즉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데에는 실패한 활력이다.
--- p.175

마침내 ‘아랍의 봄’이 중동에까지 대규모 대중운동을 몰고 왔다. 그러나 전제정의 앞잡이들이 주기적으로 쫓겨났다가 새롭게 모습을 바꾸어 계속 되돌아온다면 어떨까? 전제정의 토대가 온전히 남아 있다면 어떨까? 외부의 개입과 내부의 허약함 때문에 민족주의적 대중 동원의 성과가 상쇄되고, 친서구 전제군주들이 끈질기게 권좌를 지키거나 주기적으로 권력을 잡는다면 어떨까? 알아프가니가 스스로 정한 과업이 얼마나 중대한지는, 그가 다룬 문제들이 지금까지도 기가 질릴 만큼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문제들의 파장이 그가 돌아다닌 무슬림 나라들뿐 아니라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도 미치는 오늘날의 현실로 가늠할 수 있다.
--- p.181

1906년에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1862~1913)는 이렇게 썼다. “터무니없는 황색 공포를 외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유럽의 제국주의는, 아시아도 백색 재앙이라는 잔인한 현실에 눈뜰지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파리 강화회의 이후 동양의 많은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과거에 매료되었던 서구의 정치적 이상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근대화는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근대화와 서구화가 동일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근대화를 위해 전통을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서구를 똑같이 모방해야 한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혁명적 공산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처럼 과거의 잔해를 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약속한 신생 이데올로기들이 매력적으로 와 닿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민족의 자강에 꼭 필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 p.301

(중국에서 젊은 급진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깊이 동요한 타고르는 나머지 강연을 취소했다. 마지막 공개석상에서 타고르는 자신의 중국 방문으로 촉발된 논쟁을 거론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서구에 이끌리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일방통행인 “이념의 소통”이 “상업과 정치의 노름판으로, 군사적 광기라는 영역에서 맹렬한 자살 경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우리는 나약한 사유라는 난장판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오늘 일어서서 서구를 심판해야 한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우리는 목소리를 내서 서구에 말해야 한다. ‘너희는 우리의 집에 너희 것을 강요할 것이고, 우리 삶의 전망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를 심판한다!’”
--- p.336

영국과 프랑스를 모방한 유럽 국가들에도 이 속담을 적용할 수 있었다. 자원과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국가를 팽창해야 한다는 19세기의 논리는 20세기 들어 전에 없던 경쟁으로 귀결되었다. 네루,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토착 주민들에게 자행한 만행―강제수용소, 독가스 공격, 조직적 살인이 1930년대에 어떻게 유럽의 심장부에 이식되었는지, 그리고 생활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유럽인 스스로 어떻게 그런 만행을 부추겼는지를 관찰했다. “서구의 진보와 힘을 향한 근대의 특별한 열의”를 씁쓸한 어조로 경고하는 일에서 타고르는 가장 날카로운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필연적으로 그 열의는 서구의 제국주의를 애처롭게 흉내 내는 근대화로 귀결되었다.
--- p.357

서구에서 수입된―그런 뒤에 서구에 대항하는 데에 이용된―이데올로기 가운데 더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민족주의였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에 옛 제국들이 무너지고 민족자결 사상이 유행하면서 민족주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초기에 민족주의를 수상쩍게 여겨 “서구의 자살”이라고 비난하고 알아프가니의 범이슬람주의 쪽으로 기울었던 이크발 같은 사람은, 결국 민족주의의 정치적 논리에 굴복했다. 1930년대 초에 이크발은 “당분간 모든 무슬림 국가는 살아 있는 공화국 가족을 이룰 만큼 강력해질 때까지 일시적으로 자국만의 비전에 초점을 맞추어 자국 안으로 더 깊이 침잠해야 한다”라고 인정했다. 이 점에서 지역별 민족주의를 촉구한 알아프가니는 선견지명을 보여준 것이었다.
--- p.369

이처럼 서구가 도덕적 위신을 잃고 동양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최근의 현상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었듯이, 일찍이 19세기부터 아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은 서구의 인종적?제국적 위계질서와 국제정치의 규칙을 정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덜 불공평한 세계질서가 형성되고 있음을 감지하고서 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논했다. 때때로 폭발해서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충격을 주었던 비서구 사회들의 역사적 분노와 좌절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정치 생활에서 중심에 놓여 있었으며, 아시아인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훼손한 과거의 종교적?정치적 위엄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 pp.414-415

개개인으로는 무력했던 그들은 희망과 절망, 정력적인 헌신과 허무감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식은 놀랄 만큼 일치한다. 그 이유는 이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전통주의자 혹은 인습을 타파하는 급진주의자로서 같은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란 내부의 쇠퇴와 서구화를 겪으면서 점점 움츠러드는 그들의 문명을 그들 스스로 어떻게 납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지,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백인의 관점에 서서 어떻게 다시 동등한 위치와 존엄성을 회복할 것인지였다.
--- pp.420-421

근대화 과정은 줄잡아 말 하더라도 극적인 충격을 주었다. 그 과정은 오래된 농업과 수공업, 물물 교환과 교역을 파탄냈고, 청년들을 새로운 도심지의 불결한 거주지로 데려갔으며,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는 종교와 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거나 약하게 만들고 그들의 약점을 극단주의적인 정치에 노출시켰다. 이 모든 과정은 서구에서조차 행복과 안정이라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곧장 나아가지 않았으며, 대중 교육과 값싼 소비재, 대중 언론과 대 중 오락을 창출하긴 했으나 넓고 깊게 퍼진 혼란과 아노미, 뿌리를 잃은 상실감을 크게 완화하지는 못했다.
--- p.422

권력의 정점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내딛을 때 개개인이 맞닥뜨리는 엄청난 물리적 저항. 개개인은 어떤 좋은 의도로 활동을 시작하지만, 한 달 뒤, 1년 뒤, 3년 뒤에 보면 그 활동은 어느덧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수렁에 빠져 진행되지 않고 있다. 수 세기나 뒤진 후진성, 원시적인 경제, 문맹, 종교적 광신, 부족들의 맹목, 만성적인 굶주림, 정복당한 이들의 인격과 활력을 떨어뜨리는 피식민 경험, 제국주의자들의 수탈, 부패한 이들의 탐욕, 실업, 적자 상태 등 모든 것이 방해물이다. 이런 노선에서 진보는 엄청난 역경을 수반한다. 정치가는 있는 힘껏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는 독재를 통해 길을 찾는다. 독재는 반대 세력을 낳는다. 반대 세력은 쿠데타를 준비한다.
--- p.426

오늘날 ‘부상하는’ 나라들은 고통스럽고 대개 비극적이었던 서구의 근대 ‘개발’ 경험을 불길하게도 서구보다 큰 규모로 되풀이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이 화려한 엘리트층을 창출했지만, 예전부터 우려되었던 사회적경제적 격차를 한층 더 벌려놓기도 했다. 더욱이 개발을 식민지 본국이 추진했든 주권 국민국가가 추진했든, 더 넓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나라의 영토 안에서마저 개발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 지 않는다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 p.430
 

출판사 리뷰

서양이 아닌 아시아의 시선으로 본 세계체제_1905년 러일전쟁에서 2003년 이라크전쟁까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거둔 승리는, 당시 세계인들에게 중세 이래 처음으로 비유럽 국가가 주요 전쟁에서 유럽의 열강을 격파한 사건으로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시아 지식인들의 감회는 더욱 남달라서, 네루는 쓰시마 해전 소식을 듣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고 하며, 배를 타고 귀국하던 쑨원도 그를 일본인이라 착각한 아랍인 항만 노동자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1905년의 일본 승리가 한 줄기 빛이었을 만큼,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침략은 아시아 대륙을 완전히 무력화했다. 영국이 이집트와 수단, 거대한 인도 반도를 점령했고, 프랑스는 모로코와 튀니지, 알제리, 베트남을 손에 넣었다. 네덜란드는 자바와 오세아니아 섬들의 전제적 통치자가 되었고, 러시아는 투르키스탄 서부와 트란스옥시아나, 캅카스, 다게스탄의 큰 도시들을 획득했다. 미국은 필리핀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몰아내고 다시 식민지로 만들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 서구가 편협한 신경증에 빠져드는 반면에 아시아는 한층 더 외향적이고 자신만만하고 낙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십 년간 서구의 안보 우산 아래 웅크리고 있던 터키와 일본은 그 우산 밖으로 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과 그 이웃나라들 간의 해묵은 영토 분쟁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 지역에서 미국은 군사적?외교적 선택권을 여럿 가지고 있으나, 경제 동향은 이와 딴판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을 우회하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뿐 아니라 브라질의 경제도 한데 묶이고 있다. 새로운 무역협정,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을 합한 세계 최대의 시장 같은 지역경제권, 브릭스(BRICS)와 G20 같은 비공식 기구, 그리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미국과 유럽에 종속된 전제적인 통치자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 등, 이 모든 사태는 아시아에 냉전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칸막이’를 치워버리고 미국과 서유럽에 덜 의존하는 국제질서를 만들어내려는 바람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세계는 이처럼 격변의 20세기를 헤쳐 나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규정되는 20세기사가 아니라 “인도의 세포이 반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터키와 아랍의 민족주의, 러일전쟁, 중국의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 파리 강화회의, 일본의 군국주의 탈식민화, 식민시대 이후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를 거치며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아시아의 역사이다.

문제적 사상가들의 고민과 분투_우리는 왜 서구에 중독되었는가

판카지 미슈라는 이 책에서 광대한 아시아 대륙 곳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상가들을 매혹적인 집단 전기 형식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회를 장악하는 서구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힘을 부러워하고 모방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근대 아시아가 처해 있던 깊은 딜레마를 드러내 보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아시아가 지적?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하는’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전통과 최초로 단절한 부류에 속했던 그들은 근대 세계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찾고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맞추어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에 직면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문명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대하고 자기충족적이었지만 이제는 활기차게 번창하는 서구 앞에서 나날이 무력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결과, 새롭고 고통스러운 역사적 상황에 다방면으로 적응하고자 했던 그들은 명백한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예를 들어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중국의 전통을 옹호하다가 배격했고, 결국에는 다시 전부 받아들였다. 알아프가니(Jamal ad-Din al-Afghani, 1838~1897)는 이슬람을 통렬하게 규탄하다가 입장을 바꿔 열정적으로 변호했다. 사이드 쿠틉은 타협을 모르는 이슬람주의자로 변모하기 전에는 열렬한 세속적 민족주의자였다.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이들―간디, 캉유웨이, 모하메드 압두―마저도 자신의 전통인 힌두교와 유교, 이슬람을 급진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삶이 저물어가던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절망했다. “팔자가 기박한 우리는 어디를 올려다보아야 하는가? 일본을 쳐다보던 시절은 끝났다.” 3년 뒤, 타고르는 죽었다. 타고르를 중국으로 초대했던 량치차오는 그에 앞서 1929년에 비교적 이른 나이인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보다 4년 전에는 캉유웨이가 죽었고, 량치차오는 옛 스승을 개혁의 선구자로 칭송하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베트남인 판보이쩌우는 프랑스에 체포되어 처형 직전까지 몰렸다가 정치적 거세를 당한 뒤, 1940년에 옛 제국의 중심지 후에에서 죽었다. 이들 대부분은 젊어서는 국내의 자강을 주창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냉철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자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처럼 량치차오, 타고르, 알아프가니 등 저자가 주목한 20세기 아시아의 문제적 지식인들은 희망과 절망, 정력적인 헌신과 허무감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식은 놀랄 만큼 일치한다. 그 이유는 이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전통주의자 혹은 인습을 타파하는 급진주의자로서 같은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란 내부의 쇠퇴와 서구화를 겪으면서 점점 움츠러드는 그들의 문명을 그들 스스로 어떻게 납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지,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백인의 관점에 서서 어떻게 다시 동등한 위치와 존엄성을 회복할 것인지였다. 결국 무분별한 서구 모방에서 벗어나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지적 탈식민지화를 향한 분투였다.

서구 중심 근대성 비판의 새로운 시각_21세기 지적 탈식민지화의 현주소

19세기 이후 오랫동안 서구는 동양 영토에 대한 물리적 소유권을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쓰시마 해전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는 정치적 탈식민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적 탈식민화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서구의 진보와 힘을 향한 근대의 특별한 열의”에 대한 타고르의 날카로운 선견지명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방법을 찾고자 서구의 근대성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량치차오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개개인의 도덕적?정신적 변혁과 집단의 덕행이 더 큰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에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무슬림 세계만큼 근대성의 맹공에 맞서 전통주의적 이상을 완강하게 고수한 지역은 없었다. 신이 사회를 인도하고 공동선 개념을 규정한다는 이슬람 세계의 믿음은, 개인의 이익에 입각한 사회경제 질서와의 대결에서 살아남았다. 더불어 서구에서 수입된 이데올로기로서 아시아가 서구에 대항하는 데 널리 받아들인 것은 민족주의였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에 옛 제국들이 무너지고 민족자결 사상이 유행하면서 민족주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영국을 극복하려 노력한 이집트인과 인도 무슬림, 프랑스에 맞서 투쟁한 시리아인, 영국과 러시아의 계획에 저항한 이란인, 네덜란드에 맹렬히 대항한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1922년에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인을 내쫓은 터키인까지, 이들 모두가 서구의 사상과 제도라는 무기를 차용했다.

두 차례의 파멸적인 세계대전과 대공황은 서구의 정치와 경제 모델에 심각한 구조적 결함이 있음을 드러냈다. 탈식민화는 서구 국가들의 정치권력을 한층 더 약화시켰고, 그 권력을 되찾으려는 절박한 시도―1956년에 수에즈에서, 그리고 알제리와 베트남에서―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정치적?도덕적 권위마저 싹 사라졌다. 특히 2003년 영국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자 전역의 무슬림들이 급진적으로 변했다.
이처럼 서구가 도덕적 위신을 잃고 동양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최근의 현상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찍이 19세기부터 아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은 서구의 인종적?제국적 위계 질서와 국제정치의 규칙을 정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덜 불공평한 세계질서가 형성되고 있음을 감지하고서 그에 대해 논박해왔다. 때때로 폭발해서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충격을 주었던 비서구 사회들의 역사적 분노와 좌절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정치 생활에서 중심에 놓여 있었으며, 아시아인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훼손한 과거의 종교적?정치적 위엄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모든 비유럽 국가가 환호성을 울리는 와중에 한 나라만은 기뻐할 수 없었다. 같은 해에 제2차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 등으로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한국에 있어 서구 열강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로부터 5년 뒤 8월 29일 대한제국이 막을 내렸다. 이러한 이유로 문제적 지식인들 속에 한국의 근대 사상가들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점령당한 근대의 한국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5년간 유지되어온 전후체제는 냉전 붕괴와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 속에서 봉인이 풀렸다.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개혁과 안보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책무에 당면하고 있다. 21세기 지식인들의 사상지도는 20세기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천평

판카지 미슈라는 지난 두 세기 동안 아시아의 비범한 지식인들이 나눈 창조적이고 대담한 대화를 면밀하고도 섬세하게 읽어내며, ‘서구와 나머지 세계’라는 진부한 이분법에 맞서 역사의식 측면에서 ‘대륙적 변화’를 발견하고 드러낸다.
하미드 다바시 (Hamid Dabashi, 컬럼비아 대학 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역저 ≪오리엔탈리즘≫을 잇는 ≪제국의 폐허에서≫는 근대 세계의 역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명쾌한 관점을 제공한다. 폭넓은 학식을 갖춘 명석한 저자 판카지 미슈라는 일본, 중국, 터키, 이란, 인도, 이집트, 베트남이 뒤얽혔던 역사적 사건들을 능숙하고 매혹적인 서술로 펼쳐 보이며, 량치차오, 타고르,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쑨원 같은 아시아의 주요한 개혁가와 지식인, 혁명가 들이 나눈 생생한 대화를 들려준다.

왕후이 (汪暉, 칭화 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