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교육의 이해 (책소개)/2.교육문제비평

학교없는 사회 (2009표지 / 2023책소개)

동방박사님 2023. 3. 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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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교육론
“학교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배움의 자유를 억압한다.”


“학교는 타고난 배움의 능력을 교육의 ‘필요’로 바꾸고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 판매하는 기업적 제도다. 많은 사람의 믿음과 달리 학교는 더 이상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수록 우리는 가난해지고 배움의 기회를 잃는다. 학교는 졸업장과 점수로 사람들의 등급을 매김으로써 사회적 기회를 차단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제도적 서비스에만 의존하는 무능력한 인간을 길러낸다. 교육의 문제는 학교교육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발생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불평등한 교육을 낳은 게 아니다. 학교에 원래 내재된 불평등이 사회를 더욱 불평등하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학교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교로부터 사회가 해방되는 것이다.”

진보와 끝없는 성장에 대한 기대가 팽배하던 1970년대 초, 『학교 없는 사회』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정반대되는 메시지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이반 일리치의 이 책은 지금 다시 읽어도 오늘의 교육 현실에 큰 울림을 준다. 배움의 가치를 교육이라는 이름의 ‘서비스 가치’로 바꾸고, 승리자보다는 패배자를 양산하며, 학교교육이 아니면 직업도 사회적 지위도 얻을 수 없는 극단적 독점을 실현한 곳이 학교다. 저자는 제도화된 가치만을 가치로 소비케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체제의 밑바탕에는 학교가 있다고 본다. 학교는 이 체제에 최적화된 인간을 길러내고, 그들의 소비 수준에 맞춰 구축된 계급 피라미드를 공고히 하는 곳이다. 학교는 참된 배움보다는 가르치기 위해 가르치는 교육으로 결국 교육전문가와 교사들의 필요에 봉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학교 없는 사회』는 이반 일리치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책으로, 후일 완성된 그의 반성장주의, 반제도주의, 생태주의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교육뿐 아니라 산업화된 서비스들에 꽁꽁 얽매임으로써 삶의 자율적 능력과 자기결정권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희망을 회복하는 길을 밝혀주는 책이기도 하다.

 

목차

머리말

1장 국교화된 학교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

가난의 현대화 / 가난을 심화하는 학교 / 끝없이 상승하는 학교 비용 /
첫 번째 착각 - 교육과 사회적 역할 배분의 동일시 /
두 번째 착각 - 배움이 가르침의 결과라는 오해 /
학교만이 배움을 제공할 수 있다? / 스스로 조직하는 교육 /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교육

2장 학교의 현상학

연령대 / 교사와 학생 / 전일제 수업

3장 진보라는 이름의 의례

대학의 어제와 오늘 / 제도화된 가치만이 가치라는 신화 /
측정될 수 있는 것만이 가치라는 신화 / 패키지로 묶인 가치라는 신화 /
끝없는 진보가 가능하다는 신화 / 의례 게임과 새로운 세계종교 /
다가올 왕국 - 기대의 보편화 / 새로운 소외 / 탈학교의 혁명적 잠재력

4장 우리가 선택해야 할 제도

조작적 제도 대 공생적 제도 / 가짜 공공시설 /
가짜 공공시설로서의 학교

5장 부조리한 일관성

6장 학습 네트워크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다리를 놓는 이유 /
새로운 교육 제도가 갖춰야 할 특징 / 네 가지 네트워크

7장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부활

판도라 신화에서 에피메테우스 신화로 / 현대 제도가 가진 모순들 /
변화의 기운들

옮긴이 해설
 

저자 소개 

저 : 이반 일리치 (Ivan Illich)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교황청 국제부 직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빈민가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인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다. 1956년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 부총장이 되었고, 1961~1976년에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일종의 대안 대학인 ‘문화교류...

역 : 안희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독일철학을 전공했다. 이후 출판계에 들어와 고려원, 김영사, 세종서적 등에서 편집장, 대표로 일했고 2009년 사월의책 출판사를 설립했다. 2000년대 초반 무렵 일리치의 사상에서 깊은 감화를 받은 뒤로 그의 책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미국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의 『모든 것은 빛난다』를 비롯하여 악셀 호네트, 브뤼노 라투르, 알랭 바디우,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책을...
 

책 속으로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 현재의 학교 형태를 기반으로 하는 그 어떤 대안적 제도에 의해서도 보편교육은 실현될 수 없다는 얘기다.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를 아무리 쇄신해도, 어떤 교육용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교실과 가정에 보급해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에 대한 교육자의 책임을 아무리 평생토록 연장한다 해도, 보편교육을 실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육의 새로운 ‘급수관’를 찾으려는 현재의 노력은 이 제도와는 정반대되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교육이라는 ‘연결망’이 사람들 각자에게 기회를 열어주어, 자기 삶의 매 순간을 배움과 나눔과 돌봄의 순간으로 바꿀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현재의 교육을 대신할 연구를 수행하는 이들, 그리고 기존의 서비스 산업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필요한 개념을 제공하고자 한다.”
--- p.11

“학교는 학생들을 ‘학교화’함으로써 배우는 과정과 배움 자체를 혼동하게 만든다. 이렇게 과정과 실질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새로운 논리가 등장한다. 즉 더 많은 처치를 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거나, 단계를 잘 밟아나가면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 이렇게 되면 학생의 상상력마저 학교화되어 진짜 가치 대신 서비스를 가치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즉 의료서비스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 개선으로, 경찰 보호를 안전으로, 무력에 의한 균형을 안보로, 무한경쟁을 생산적 활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 이 책에서 나는 이런 가치의 제도화가 필연적으로 물리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력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전 지구적인 퇴행과 현대화된 가난이 생겨난 과정에는 이런 세 가지 차원이 있다.”
--- pp.17~18

“학교는 성적에 따른 진급이라는 의례 게임을 그 구조로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신화를 효과적으로 창조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현대에는 이 도박적인 의례에 참가하는 일 자체가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되었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런 게임이며, 그것이 핏속까지 침투해 하나의 습관을 형성한다. 사회 전체가 서비스의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의례에 대한 마지못한 참여가 모든 곳에서 의무화되고 강박적인 것이 될 때까지 이 과정은 계속된다.”
--- p.97

“우리는 여기서 희망(hope)과 기대(expectation)를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다. ‘희망’이란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선함을 믿는다는 뜻인 데 반해, ‘기대’라는 말은 인간의 계획과 통제에서 나온 결과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희망이란 우리가 바라는 선물을 가져올 사람에게 바람을 갖는 것이다. 기대란 우리가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을 생산해주리라 예측되는 과정으로부터 만족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프로메테우스적인 기풍이 희망을 잠식해 버렸다.”
--- p.208
 

출판사 리뷰

■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교육론
“학교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배움의 자유를 억압한다.”


“학교는 타고난 배움의 능력을 교육의 ‘필요’로 바꾸고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 판매하는 기업적 제도다. 많은 사람의 믿음과 달리 학교는 더 이상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수록 우리는 가난해지고 배움의 기회를 잃는다. 학교는 졸업장과 점수로 사람들의 등급을 매김으로써 사회적 기회를 차단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제도적 서비스에만 의존하는 무능력한 인간을 길러낸다. 교육의 문제는 학교교육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발생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불평등한 교육을 낳은 게 아니다. 학교에 원래 내재된 불평등이 사회를 더욱 불평등하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학교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교로부터 사회가 해방되는 것이다.”

진보와 끝없는 성장에 대한 기대가 팽배하던 1970년대 초, 『학교 없는 사회』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정반대되는 메시지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이반 일리치의 이 책은 지금 다시 읽어도 오늘의 교육 현실에 큰 울림을 준다. 배움의 가치를 교육이라는 이름의 ‘서비스 가치’로 바꾸고, 승리자보다는 패배자를 양산하며, 학교교육이 아니면 직업도 사회적 지위도 얻을 수 없는 극단적 독점을 실현한 곳이 학교다. 저자는 제도화된 가치만을 가치로 소비케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체제의 밑바탕에는 학교가 있다고 본다. 학교는 이 체제에 최적화된 인간을 길러내고, 그들의 소비 수준에 맞춰 구축된 계급 피라미드를 공고히 하는 곳이다. 학교는 참된 배움보다는 가르치기 위해 가르치는 교육으로 결국 교육전문가와 교사들의 필요에 봉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학교 없는 사회』는 이반 일리치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책으로, 후일 완성된 그의 반성장주의, 반제도주의, 생태주의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교육뿐 아니라 산업화된 서비스들에 꽁꽁 얽매임으로써 삶의 자율적 능력과 자기결정권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희망을 회복하는 길을 밝혀주는 책이기도 하다.

■ 제도 비판의 서막을 알린 책

1971년에서 1976년 사이 이반 일리치는 현대 산업사회의 기본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주입하는 제도들을 비판하는 책을 연달아 펴냈고, 이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어 저자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다. 이 책 『학교 없는 사회』를 비롯하여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의료의 한계』(‘병원이 병을 만든다’로 번역), 『공생공락의 사회』(‘성장을 멈춰라’로 번역) 등이 그 책들이다. 일리치 사상의 밑그림이 완성된 시기의 책들로, 이후 일리치는 이 그림에 기초하여 근대 사회가 형성된 자본주의 초기의 역사를 탐구하고 현대인의 의식이 만들어진 역사적 조건을 탐색하는 저작들을 쓴다. 따라서 일리치 사상의 뼈대인 현대의 생태적, 사회적, 정신적 위기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저술들 특히 『학교 없는 사회』에 표현된 생각들을 읽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일리치는 처음부터 제도 비판에 몰두했을까? 교육, 의료, 교통 등의 기본 제도들은 인간의 자율적 삶을 근대 산업체제에 포획하는 대표적 제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서 자율적으로 얻고 누리는 ‘사용가치’를 시장의 ‘교환가치’로 바꾸어 공급하는 독점적 제도들이기도 하다. 이 제도들은 학교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병은 병원에 가야만 고칠 수 있으며, 차가 없으면 가까운 거리도 이동할 수 없다는 서비스 소비의 신화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런 상품과 서비스 생산체제에 사로잡혀 자율적 삶의 가능성을 전문가들에게 헌납하는 불구의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일리치의 진단이다. 특히 의무교육으로 강제되는 학교교육은 제도의 역생산성, 가치의 독점, 현대화된 가난과 같은 병폐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제도로 일리치의 첫 번째 타깃이 된다. 그렇다면 일리치가 고발하는 학교 제도의 병폐는 무엇인가?

■ 현대의 종교가 되어버린 학교

우선 일리치가 바라보는 학교는 가르침의 장소가 아니라 종교적 의례를 집행하는 곳이다. 즉 신앙을 종교적 의례로 대체한 교회처럼 학교는 교육과정 이수와 성적으로 배움을 대체한 현대의 종교기관이다. 헌법이 국교 설립(establishment of religion)을 금지했듯이 의무화된 학교교육을 폐지(disestablish)해야 한다고 일리치가 주장한 첫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을 양떼처럼 돌본다는 교회의 이념은 근대 들어 자본주의 산업체제에 표준화된 시민을 길러내는 국민교육 체제로 옮겨갔고, 그 결과 사람들은 신앙이 약해서 삶의 불행이 찾아온다고 믿었듯이, 이제는 인생의 실패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체화하게 되었다. 사회적 기회의 박탈이나 가난 역시 학교교육을 중단한 때문이고, 이런 믿음으로 인해 가난한 처지의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일궈갈 시간과 비용마저 학교에 빼앗기는 이중의 불평등을 감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바로 이런 점에서 “사회 전체가 학교화되었다(schoolized)”고 말한다. 학교교육은 졸업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지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교육’이나 ‘자기계발’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학교교육을 평생 지속하는 것도 그러하고, 실패의 이유를 학교교육의 부족에서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책 『학교 없는 사회』의 원제목인 ‘Deschooling Society’에는 이 같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저자는 단순히 학교를 개혁하자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사회를 ‘탈학교화’해야 한다는 근본적 주장을 이 책에서 펼치고 있다.

■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의 불평등 상품

학교는 우선 배움의 타고난 욕구를 교육의 필요(needs)로 바꿈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로 강제 소비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를 위해 학교교육은 ‘기회의 사다리’ 곧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필수적 통과 의례인 것처럼 선전된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이 학교교육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란 것이 부모의 부와 학력에 의해 결정되며, 학생의 능력이란 것 역시 부모의 능력 덕분임을 안다. 결국 학교란 졸업장과 성적이라는 가격표로 애초의 불평등을 추인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의례적 절차를 시행하는 곳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구나 학교는 교육과정(curriculum)이라는 이름의, 개인적 조건과 편차를 고려하지 않는 획일화된 패키지 상품을 강요함으로써 교육이라는 ‘의례’를 시행하는 곳이다. 학교 시스템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한순간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다. 학교가 집행하는 교육과정은 또한 전일제 수업, 교재, 학비, 교우관계까지 모든 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묶은 것이기도 하다. 이 상품을 소비하면 할수록 그 소비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더한 불평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교육과정은 사회에까지 연장되어 ‘숨은 교육과정’ 즉 교육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신화를 주입한다. 학교가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며, 여기에는 의무교육으로 짜인 교육 시스템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왜 국교의 수립은 법적으로 금지하면서 자발적 배움의 기회를 봉쇄하는 학교교육은 법으로 보장하는가? 일리치는 교육과정을 강제하는 데는 교육전문가와 교사 등 전문가적 이익이 걸려 있다고 본다. 교육과정은 전문가들의 도구이다. 삶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가르치기 위해 가르치는 교육, 천편일률의 교육과정이 진짜 가르침을 대신하게 된 이유이다.

■ 제도화된 가치에 대한 고발

이반 일리치가 학교를 제도 비판의 첫 번째 과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산업적인 서비스 제도의 생산양식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의 이런 기능을 ‘가치의 제도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학교는 학생들을 ‘학교화’함으로써 배우는 과정과 배움 자체를 혼동하게 만든다. 이렇게 과정과 실질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새로운 논리가 등장한다. 즉 더 많은 처치를 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거나, 단계를 잘 밟아나가면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 이렇게 되면 학생의 상상력마저 학교화되어 진짜 가치 대신 서비스를 가치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즉 의료서비스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 개선으로, 경찰 보호를 안전으로, 무력에 의한 균형을 안보로, 무한경쟁을 생산적 활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 이 책에서 나는 이런 ‘가치의 제도화’가 필연적으로 물리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력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전 지구적인 퇴행과 현대화된 가난이 생겨난 과정에는 이런 세 가지 차원이 있다.” (본문 17~18쪽)

학교는 제도를 통해서만 가치를 누릴 수 있고 그 바깥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는 점에서 ‘근본적 독점’을 구현하고 있는 오늘날의 가장 대표적인 제도이다. 이런 제도에 의존하여 유지되는 현대인의 삶은 결국 가치의 상품화로 인한 자원(자연) 낭비, 불평등, 정신적 무능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학교를 벗어날 수 있는가?

■ 배움의 네트워크와 ‘에피메테우스적 정신’의 부활

저자는 학교교육을 대체할 방법으로 일상의 삶에서 구축할 수 있는 ‘배움의 네트워크’를 제시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변의 사물, 친구, 어른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며, 마지막으로는 전문지식의 소유자로부터 깊은 지혜와 수준 높은 기술을 익히기도 한다. 사물, 동료관계, 기술교류, 전문적 스승은 배움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다. 일리치는 이런 자원들을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배움의 네트워크’로 엮음으로써 학교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보며, 학교 역시 이러한 배움의 네트워크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오늘날의 관점부터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로 상징되는 지식을 전하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질서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해준 상징적 존재로 꼽힌다. 그러나 끝없이 앞만 바라보는(‘prometheus’의 원뜻) 이런 삶은 결국 타인이 조작하고 가르쳐준 기대(expectation)에 의존하는 삶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일리치는 그러한 기대 대신 희망(hope)을 좇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일리치는 모든 재앙을 풀려나게 했지만 마지막에 희망을 붙든 판도라가 원래는 대지의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이었음을 밝히면서, 그의 남편 에피메테우스가 뒤떨어진 인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epimetheus’의 원뜻) 반성하는 정신을 상징한다고 강조한다. 이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야말로 주변과 동료를 돌아보고 함께 즐거운 세상을 이룩하는 희망을 간직한 정신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반 일리치가 이 책 『학교 없는 사회』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자율적 인간의 회복이다. 조작된 가르침과 제도화된 서비스의 세상에서 벗어나 함께 ‘자율적 공생’의 삶을 누리는 세상이야말로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미래일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
- [더 타임스 (The Times)]

“어느 곳에서든 현대 문명의 심장부를 겨냥한 사상의 저격수”
- [뉴욕타임스]

“전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
- [가디언]

“현대의 기술을 반대한 괴짜이면서 몽상가”
- [워싱턴포스트]
 

추천평

“가장 인간적인 래디컬리즘”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저자)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 위에서 현대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사상가”
- 피터 버거 (『의심에 대한 옹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