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기독교-개신교 (책소개)/2.한국기독교역사

한국전쟁과 기독교

동방박사님 2021. 11. 2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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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 ―
한국 기독교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다시 읽는다


과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형 교회의 상당수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책은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시작해, 박정희 정권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과정까지를 실증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또한 휴전회담을 둘러싼 논란, 승공 담론의 확산, 전쟁고아 사업과 가족계획 사업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이슈에서 한국 기독교가 남긴 자취를 재발견함으로써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역사를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불러내고,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만든 이념과 가치관의 근원에 한국 기독교가 있음을 밝힌다.

목차

제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제2장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 그리고 세력화
제3장 이승만의 WCC 공격과 KNCC

제2부 전쟁 이후

제4장 전쟁고아 사업과 한경직
제5장 서북청년회 출신들의 정치적 배제와 부활
제6장 반공의 재정의: ‘전투적 반공주의’에서 ‘승공’으로

사례 박정희 정권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연대: 가족계획 사업을 중심으로

저자 소개

저 : 윤정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교수.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일제시대 한국기독교여성운동연구”라는 주제로 2000년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부터 한국근현대사에서 여성사, 독립운동사, 개신교사 등의 연구에 전념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2003), 『19세기말 서양선교사와 한국사회』(공저, 2004), 『전쟁과 기억』(공저, 2005), 『종교계의 민...
 

책 속으로

한국전쟁으로 남한의 모든 전통이 일소되어버린 상황에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침투해 들어왔고,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빨리 이러한 환경에 적응했다. 한국전쟁을 기회로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박정희 정권과 결합함으로써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동력이 되었으며 핵심 주체가 되었다.
--- p.16

서북 지역은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다른 어느 지역보다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다시 말해 이 지역민들은 그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으며, 조선의 신분제 사회를 부정하고 근대 시민사회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 p.39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단 한 달 만에 지주제를 완전히 해체했다. 이로써 기독교인들은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에 반대하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체포 혹은 행방불명되거나 검거를 피해 월남했다.
--- p.63

재입국한 선교사들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과 밀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광복 전부터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것과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던 한경직의 통역을 통한 밀착된 관계, 영락교회와 이북신도대표회를 중심으로 한 관계망 형성 등에 있었다. 이와 같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교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과 밀착된 관계를 통해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113

미국 정부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이용해 세계의 지지와 미국인의 지지를 얻어내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더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WCC는 이를 위한 지지층을 만들어내는 데 앞장섰다. 이승만은 기독교라는 창구를 통해 세계 교회와 미국 교회로부터 전쟁 구호물자를 지원받고 세계와 정보를 교환하면서 자신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이승만은 WCC를 공격함으로써 미국 정부를 압박하고 한국의 기독교를 통제하려고 했다.
--- p.139

‘전쟁의 부산물’, ‘거리의 부랑아’로서 범죄 용의자 취급을 받던 전쟁고아들은 반공과 한미 혈맹의 상징물로 재발견되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의 신문, 잡지, 라디오, TV, 영화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 언론은 고아원을 경영하는 한국인에 대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부정적인 기사를 작성한 반면, 고아원을 지원하거나 경영하는 미군에 대해서는 “자애의 손”, “위대한 사랑의 사도”, “아름다운 인류애”라고 표현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미군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면서 미군의 자애와 사랑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다.
--- p.173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에는 박정희의 후원이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가 시애틀에 도착하자 어린이 합창단은 국제공항에서 그를 환영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어린이 합창단이 순회공연으로 미국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1961년 11월에 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합창단은 귀국 후 박정희를 찾아가 귀국 인사를 했다. 박정희는 이후 어린이 합창단을 계속 지원했으며, 육영수와 박근혜도 이들을 크게 지원했다. 어린이 합창단은 박정희 정권을 미국인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한 ‘꼬마 친선 외교 사절’이었다.
--- p.210

서북청년회는 결성되자마자 경찰과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활동하면서 어떤 청년 단체보다도 좌익 소탕의 전위대 역할을 수행했다. 서북청년회가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행동한 것은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948년 남한 단독의 총선거가 결정되었을 때 서북청년회 출신들이 이를 두고 갈등한 데서 알 수 있다. 이북학생총연맹은 김구의 경교장 경비를 담당하면서 남북 협상과 단선 반대를 지지했다. 이들은 북한 지역을 되찾을 것이라는 기대로 격렬히 투쟁에 나섰는데, 단독 총선거 결정은 잠정적으로 이 지역을 방기하는 정치적 결정으로 판단했다.
--- p.240

한국 기독교인들이 제기했던 승공 담론은 일반 군사정권 지지자들에 의해 널리 홍보되고 선전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던 유봉영은 승공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인데, 이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가 없이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보한 채 경제적 성장부터 먼저 달성해야 한다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 p.293

싸울 때는 무조건 적대적인 싸움이 아니라 적극적인 민주주의 선전과 실천을 통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 내부에서 정치적 부패 대신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천하고 사회적 빈곤을 제거하는 것만이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진정한 반공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반공의 재정의는 박정희 정권과 결합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적 명분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가족계획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 공산당보다 잘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 p.311
 

출판사 리뷰

“비행기를 타려면 ‘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제6공화국이 들어서고 1년이 지났을 무렵, 한 신문은 세간에 “비행기를 타려면 ‘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유행한다고 보도했다. 특정 지역 출신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기사였는데, ‘노스웨스트’는 과거의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는 40년 전에 해체되었지만, 서북 출신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색테러단’, ‘역겨운 단체’, ‘악의 그림자’ 등으로 기억되는 서북청년회의 활동이 짧지만 너무도 강렬했던 탓에 서북 출신들의 다른 활동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서북 출신들은 군과 언론계, 교육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무엇보다도 기독교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저자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시기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까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한국에서 ‘기독교’란 예수를 믿는 모든 종교를 지칭하기도 하고, 개신교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책은 후자의 의미로 기독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반도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물결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 서북 지역이었다. ‘서북’이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선교지 분할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담당했던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를 서북 지역으로 본다.

19세기 말의 서북 지역은 중앙의 차별을 받아 소외된 변방이었지만, 다른 지역보다 먼저 신흥 상공인층이 성장했고, 교육 수준이 높아 문맹률이 낮았던 덕택에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실제로 서북 지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평양대부흥운동 등을 거치며 기독교 색채가 가장 강한 곳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 등과 같은 기독교 계열의 지도자를 배출해 근대 민족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선도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그 뒤를 따라 김일성이 들어오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신이 주신 기회, 한국전쟁

기반을 잃고 고향을 떠나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구원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신이 주신 기회’였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맺어온 관계를 활용해 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분배하는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한국 기독교계 내부에서 벌어진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서북 출신 장로교 목사인 한경직이다. 한경직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영락교회로 결집해 세력화하는 한편,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경험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이끄는 인물로 떠올랐다.

한국전쟁은 전쟁고아라는 부산물을 남겼다. 초기에 전쟁고아는 거리의 부랑아나 범죄 용의자 취급을 당하며 환영받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과 미국의 언론은 전쟁고아를 반공과 한미 혈맹의 상징물로 재발견했다. 나아가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대외적으로 선전할 필요를 느낀 미국 정부와 교세 확장을 노린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전쟁고아 사업이 탄생했다. 밥 피어스가 월드비전을 창설했고, 뒤이어 홀트 부부도 전쟁고아 입양에 나섰다. 한경직도 월드비전과 손을 잡고 한국 선명회를 통해 전쟁고아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한국 기독교, 시대의 흐름을 읽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탁월한 눈이 있었다. 이승만이 휴전회담을 촉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 단체라며 공격하자,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던 한국기독교연합회(KNCC)는 그동안 긴밀한 관계였던 WCC의 뜻에 반해 이승만을 지지하고 휴전에 반대함으로써 반공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전후에는 군사력으로 북한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전투적 반공주의 대신 체제 경쟁을 통해 공산주의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승공 담론을 제시해 국내외 현실의 변화에 맞게 반공을 다시 정의했다.

한국 기독교가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을 연달아 지지한 배경에도 승공 담론이 있었다. 특히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박정희 정권과 결합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핍박으로 해산당한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중추에 들어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경직도 자신의 인맥과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승인을 받도록 지원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념과 가치관은 어디에서 왔을까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태생적으로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반공주의는 오늘날까지 한국 기독교를 규정하는 이념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북한이 전후 재건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한국 기독교가 제시한 승공 담론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끌어낸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생명 윤리를 중요시해야 하는 기독교가 천주교와 달리 가족계획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나선 배경에도 반공주의와 승공 담론이 있었다.

몇 년 전 강남에 있는 한 대형 교회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과 장관을 비롯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다닌다고 해서 유명해진 이 교회의 설립자가 유엔군 유격대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는 월남한 서북 출신 목사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 기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규정짓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념과 가치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고민해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