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2.한일과거사

거짓과 오만의 역사

동방박사님 2021. 12. 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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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졌다. 역사 왜곡에 있어 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근대사를 초점으로 하고 있는데, 저자는 근대사를 비롯하여 그 왜곡의 뿌리는 고대사에 있음을 지적한다. 일본은 군국주의를 정당화시키고, 중앙 권력을 장악한 세력의 정권 유지를 위하여 '천황'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다. 그리고 권위 확립을 위해 일본의 고대사, 특히 1.300년 전의『일본서기』에서부터 역사 조작과과 왜곡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시작된 일본의 역사 조작은 오늘날 식민사학이라는 왜곡된 역사관으로 이어졌고, 일본 사회의 사고 방식까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왜곡이 정당화되려면 또 다른 왜곡이 필요했고, 조작된 역사가 사실로 인정받는 일본사회의 풍토는 우리 사회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리고 황국사관에 젖은 일본 학자들의 연구방법론을 실증사학의 이름을 빌어 정당화시키거나, 고대사 연표를 조작하고, 일본 사학자의 연구를 베끼고 식민사학 극복을 논하는 경우까지 있음을 폭로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8세기 경의 『일본서기』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역사 왜곡의 전통, 식민사학의 기원과 현재, 광개토왕비와 관련된 논란의 진실, '임나'와 '일본부'에 대한 오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연표 조작 문제, 분국설과 백제의 요서 경략 등 한·일 고대사에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동시에, 우리 역사를 과대 해석하는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을 범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린다.

목차

1. 잘못 시작된 역사
거짓의 기원 - 『일본서기』
식민사학의 기원과 현재
일본 베끼기가 식민사학 극복인가?
식민사학 극복인가 조장인가?

2. 잘못 알려진 몇 가지 사실
『일본서기』의 가치에 대한 편견
광개토왕비는 조작되었나?
'임나'와 '일본부'에 대한 오해

3. 연표까지 조작하는 역사
사건 발생 시기까지 조작한 역사
타임머신 탄 『삼국사기』

4. 고고학은 도깨비 방망이
'왜'의 실체를 부풀린 고고학
한국 고대사와 고고학의 잘못된 만남
고고학이 만들어 낸 고대사의 신화
가야에 철갑옷이 있었다. 그래서?

5. 일본을 식민지로!
일본 진출의 시작 '분국설'
나라가 망한 이후에 파견된 사신
대마로도 옮기면 해결되나?
과장된 무령왕릉의 진실
나부 반남 고분의 충격

6. 한민족은 대륙의 떠돌이?
백제가 중국의 요서를 경략했다?
백제가 둘이었다?
 

저자 소개 (1명)

저 : 이희진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전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첫 번째 논문인 석사학위 논문을 현대사로 쓰면서 근현대 계통의 학회에서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근현대사연구》에 [미국의 한반도 진주준비와 38선 획정과정에 대한 검토]를, 《한국민족운동사연구》에 [미국의 對韓軍事援助政策과 한국전쟁]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맥아더의 북진의도] 등을 발표하며 근현대사 분야의 학술활동을 이어갔다. 저서로는 ‘살림지식...
 

책 속으로

이른바 '식민사학'으로 불리는 역사 해석이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 피해를 본 우리 나라에서 '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한다'는 구호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많은 노력도 했다.
한국의 공영 방송이 역사 전문 프로그램을 만들어 고대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데에도 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식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덕분에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일부 프로그램의 경우 식민사학의 시각으로 왜곡되어 왔던 사실들을 바로잡는 데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간혹 이런 노력을 무색하게 하는 내용이 방송을 타고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역사스페셜 임나일본부 편'이다. 이 프로그램은 시작부터 일본의 구석기 유물 조작 사건을 비난했다. 그 비난은 결국 이른바 임나일본부설로 대표되는 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규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법을 통한 식민사학 극복의 논리는 매우 간단했다. 알고 보면 임나일본부는 왜에서 온 사신이었는데, 스에마쓰로 대표되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이것을 왜의 한반도에 지배 기관으로 멋대로 해석했다는 논리였다. 즉 임나일본부는 사신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왜가 한반도를 지배하던 기관이라던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셈이고, 따라서 식민사학도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가 사신이라는 근거는 대충 이렇다. 『일본서기』중 6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긴메이천황때에 안라에 간 사신들을 가리켜 재안라제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들이 바로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증거는 임나일본부에 붙어 있는 『일본서기』의 주석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의 '부'자 옆에 미코토모치라는 주석을 붙여 놓았는데, 이 미코토모치는 천황의 명을 받아 지방의 제후들에게 파견되는 1회성 사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에 대한 『일본서기』의 주석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임나일본부가 사신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사족도 붙어 있다. 임나일본부는 기비노미이고 안라일본부는 기와치노아타이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가야계호족으로 보았다.
즉 기비노미와 가와치노아타이는 일본 열도로 이주한 가야인의 후손이었는데, 이들이 안라에 사신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들은 옛정을 잊지 않고 가야를 위해 활동했다. 그래서 일본부는 안라 국왕의 통제 아래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임나일본부가 안라 국왕의 통제 아래에 있는 사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일본서기』에도 나타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제시했다.

일본부는 안라에 대한 왜의 계획을 백제나 신라에 가서 들었다. (흠명 5년 - AD 544년 2월)
일본부의 가와치노아타이가 왜와는 별개로 신라와 통했다. (흠명 2년 7월)
일본부가 안라를 위해 고구려와 내통했다. (흠명 9년 4월)
일본부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아 오직 그들만을 따른다. (흠명 5년 3월)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나타난다. 아무리 출신이 가야라고 하더라도 기비노미와 가와치노아타이는 이미 왜의 요원이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옛정을 잊지 못한다 하더라도 왜보다 가야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방송에서는 이런 의문은 없이 달랑 답만 나온다. 당연히 기비노미나 가와치노아타이는 왜의 승인 하에 활동한 것이고, 따라서 왜는 그들이 가야를 위해 활동하는 것을 용납했다고 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왜가 안라에 철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4세기에서 6세기까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이다. 한반도와왜의 역사는 철과 선진 문물을 교류하던 역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가 한반도를 지배한 것처럼 왜곡된 역사는 가려질 수 없다.
--- pp.44-47

출판사 리뷰

 
1. '임나'와 '일본부'에 대한 오해와 진실
흔히 식민사학 극복이라고 하면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주장인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가 '임나일본부'라는 말에 집착해서 그 성격을 규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렇지만 저자는 '임나일본부'라는 말 자체가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특수한 용어임을 밝힌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말로 불과 5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임나'라고만 쓰이는 경우가 200번 이상, '일본부'라고만 쓰는 경우가 30번 정도로 압도적이다. 반면 '임나일본부'는 5번, '안라일본부'는 2번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임나'와 '일본부'라는 용어 대부분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에서도 '임나'와 '일본부'는 대개 별개로 쓰이고 있으며, 오히려 '임나일본부'라고 쓰여진 예가 드물다는 것에 주목한다.
임나와 일본부는 여러 문제와 연관되어 있어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임나일본부'라고 해서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렇지만 임나와 일본부는 서로 구별되어 쓰여진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점은 기록상으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임나와 일본부에는 각각 집사들이 있었다. 임나집사는 가야 제국 각각에서 파견한 요원들인데, 이들을 한데 묶어 임나집사로 부르고 있다. 반면 여기에 일본부집사는 항상 '임나집사와 일본부집사'라는 식으로 구별해서 기록했다.
임나일본부라는 말에만 집착을 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 임나일본부라는 말에 집착하는 것은 그만큼 비중이 적은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됨과 동시에 왜와 연계가 깊은 일본부의 역할이 과장할 수 있는 여지만 주게 되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고대 한일관계사를 임나일본부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어 정작 중요한 흐름을 놓치게 되고, 식민사학자들의 의도에 말려드는 결과를 낳았다.

2. 광개토왕비문의 진실
광개토왕비와 관련된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은 비문중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 방법고 비문의 조작 여부이다. 문장을 둘러싼 논쟁은 크게 나누어 보면 두 가지다. 일본측에서는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반면 정인보 이래 한국과 북한에서는 뒷부분을 다르게 해석한다. 즉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왜는 신묘년이 되어서야 바다를 건너가 파하고, 백잔,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둘러싼 논쟁의 진실은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어야 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신묘년조를 재평가하는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그동안 언론에서 지금까지 주로 시비가 걸렸던 부분은 글자조차 분명하지 않아 논란이 있었던 '신묘년에 왜가 운운'하는 뒷문장이다.
그런데 정작 처음부터 문제가 되었어야 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조작설에서도 별로 시비가 없는 문장의 첫 부분인데, 이 내용은 '백제,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는데'라는 정도로 간단하다. 글자도 비교적 분명하고 내용도 명확하기 때문에 조작설에서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동안 별 논쟁 없이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문장부터 거짓말이다. 백제나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적이 없었다. 쉽게 말해서 신묘년조는 첫 문장부터 있지도 않은 사실로 시작한 것이다. 앞문장부터 이렇게 거짓말로 시작했으니 뒷문장이라고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거짓말을 쓴 이유는 오히려 백제가 당시 고구려로서는 최대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광개토왕의 치적 중 대다수가 백제 정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백제가 고구려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가진 세력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해준다 다른 나라는 다 제대로 서주면서 유독 백제만은 굳이 백잔이라는 식으로 쓴 이유도 백제에 대한 적개심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정서 속에는 백제에 대해 자꾸 언급을 해서 상대적으로 백제가 얼마나 대단한 세력이었는지를 확인시켜 주기 싫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광개토왕 비문을 쓸 때에도 차라리 백제를 별 볼일 없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세력인 왜에게도 신민이 될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로 깎아내려 놓자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왕의 업적이나 고구려의 체면을 생각해서 백제를 깎아 내리면서 미지의 세력인왜를 고의적으로 과대평가 해놓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3. 『삼국사기』연표 조작에 대한 반론
『일본서기』가 후세에 남겨준 나쁜 선례는 역사가 조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사실은 어떤 역사 기록을 대하던지 '혹시 이것도?'하는 의심을 가질 만한 계기가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런 편견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의 신빙성을 깎아내리고 싶어하는 쓰다 소키치를 필두로 한 일본 학자들의 바람잡기에 말려들어 "『일본서기』가 그 모양이니까 『삼국사기』도"하는 식의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6세기 이전 기록들이 도마 위에 오른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런 논리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연표를 통째로 뜯어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도 몇 년 정도가 아니라 몇백 년 단위로 흔들어 놓는다. 급기야 신라는 3세기에 건국된 나라이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3세기는 대체로 4세기, 『삼국사기』의 4세기는 4세기 후반이라는 논리로까지 발전했다. 한마디로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기년은 수백 년에서 수십 년을 밀어내야 할 정도로 엉망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료를 하나 하나 검증하여 그 신뢰성을 평가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라를 중심으로 아예 연표 자체를 수백 년에서 수십 년씩 일괄적으로 조정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왕의 재위 기간만 옮겨 놓자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기사까지 옮겨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시기적으로도 초기 사료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이 복잡하게 얽히는 4세기 이후까지 거침없이 조정해 버리겠다는 의도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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