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서양철학의 이해 (책소개)/1.서양철학사상

군주론 / 전술론 (마키아벨리)

동방박사님 2021. 12. 1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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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박근혜가 이 책을 읽었다면 탄핵은 없었다!
마키아벨리 정치의 책략과 모략!
‘악마의 글’인가? 낙인이 찍힌 금서인가?
군주론에서 독재적 사상! 전술론에서 인간관계학!
인간통치 급소 찌르는 날카롭고 풍부한 현대감각!
21세기 살아나는 마키아벨리 최고 통치사상!

현실정치냐? 이상정치냐?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권력사용의 기술자이며 얼음처럼 차가운 합리주의자, 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타산적 현실가이다. 『전술론』에서는 코무네(자치도시) 피렌체를 어떻게 방어하면 좋을 지에서 출발, 차츰 군사훈련의 기본적이면서 변하지 않을 형식을 추구하며 나아가 그런 변하지 않는 성질을 지휘관과 병사의 인간관계학 속에서 찾아냈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인간을 지배, 관리, 통제하는 학문을 군주론과 함께 로마주의 위에 정립했다.

마키아벨리의 이런 시도는 시대를 뛰어넘은 의미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군주론』과 『전술론』의 이러한 성질은 그가 좋은 군주는 좋은 지배자이며, 좋은 총지휘관이어야만 한다고 바랐던 마음에 원인이 있다.

군주론이 겪은 역사는 그대로 유럽정치의 역사였으며, 마키아벨리즘을 설명한 악마의 책이라는 오해는 19세기가 되어서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국이든 복합국이든 또는 새로운 군주국이든 모든 나라에서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은 훌륭한 법률과 튼튼한 무력이다. 튼튼한 무력을 지니지 않은 곳에 훌륭한 법률이 있을 수 없다’ 고 하였다. 또 『전술론』에서는, 전쟁이라는 가장 긴장도가 높은 상황에서의 인간관계학을 토로했다.

목차

군주론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께 올리는 글 _ 19

제1장 군주국의 종류와 성립 방법 _ 22
제2장 세습 군주국에 대하여 _ 24
제3장 복합형 군주국에 대하여 _ 26
제4장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당한 다리우스 왕국이 대왕이 죽은 뒤 그의 후계자들에게 승복한 이유 _ 37
제5장 점령되기 전에 자치적이었던 도시나 군주국 다스리는 방법_ 41
제6장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지배하게 된 신생 군주국 _ 43
제7장 타인의 힘과 운수로 얻어진 신생 군주국 _ 49
제8장 사악한 방법으로 군주가 된 인물들 _ 58
제9장 시민형 군주국에 대하여 _ 62
제10장 군주국의 힘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나 _ 66
제11장 종교적 군주국에 대하여 _ 69
제12장 군대의 종류와 용병에 대하여 _ 73
제13장 외국 원군?혼성군?자국군 _ 81
제14장 군사에 대한 군주의 임무 _ 86
제15장 인간, 특히 군주가 칭송이나 비난받는 경우 _ 90
제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 _ 92
제17장 잔인함과 인자함, 존경과 두려움의 평판 중 _ 96
제18장 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켜야 하나 _ 101
제19장 경멸과 미움을 피하는 방법 _ 105
제20장 요새 구축 등의 군주가 하는 일들이 유익한가 _ 118
제21장 군주가 존경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_ 124
제22장 군주의 측근들에 대하여 _ 129
제23장 아첨꾼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 _ 131
제24장 이탈리아 군주들은 왜 나라를 잃게 되었나 _ 134
제25장 운명은 인간사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며,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_ 136
제26장 야만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권고 _ 140


전술론

제1장 시민군에 대하여 _ 149
제2장 시민군의 무기, 훈련, 전투대형 _ 184
제3장 군사훈련의 미래성 _ 219
제4장 지휘관 자세 _ 245
제5장 적중 행군 _ 262
제6장 진지 작전 _ 279
제7장 도시 방어 _ 303

마키아벨리에 대하여
마키아벨리의 시대 _ 335
마키아벨리의 생애 _ 364
마키아벨리의 사상 _ 407
마키아벨리가 끼친 영향 _ 442

니콜로 마키아벨리 연보 _ 454
 

저자 소개 

저 :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Niccolo di Bernardo dei Machiavelli )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탁월한 정치이론가. 이탈리아(피렌체)의 관료이자 외교관이자 군사 전략가였으나, 말년의 저술로 정치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서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기록은 많지 않은데, 변변치 않은 교육 환경에서 홀로 역사와 정치에 관한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청년 시절에는 말직으로 근무하다가 서른 살이 되어서야 80인회의 사무국의 서기에 임명...

역 : 황문수

 
고려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고려대와 한양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지냈다. 지은 책으로 『실존과 이성』, 『고균 김옥균』, 『동학운동의 이해』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명』(플라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이성과 실존』(야스퍼스), 『철학 이야기』(윌 듀렌트), 『역사철학』(윌리엄 드레이), 『실존철학』(프리츠 하...
 

출판사 리뷰

덕행용기의 『군주론』
마키아벨리는 인본주의자로 공화정 로마 숭배를 이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실천적 의도에 의해 그들과는 구별된다. 이를 ‘로마의 비르투’가 잘 보여주고 있다. ‘비르투(영어의 버튜, 라틴어의 비르투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덕’이나 ‘덕행’ 같은 보통의 윤리를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역량, 재능, 용기 같은 ‘인간의 능력’을 나타낸다. 이탈리아의 인본주의자들은 뒤의 의미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비르투는 ‘비르투-오르디나타(질서 있는 비르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정치가는 이 두 가지 비르투를 두루 갖추어야만 더할 나위없는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중세 때 덕은 그리스도적 윤리로만 해석되었으나,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윤리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르투의 자연주의적인 의미가 인정되었다. 즉 비르투만 발휘할 수 있다면 출생이나 가문을 내세우기보다는 자기 능력으로 운을 개척해가는 인간만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르네상스인의 자유와 활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에게는 비르투가 단순히 개인의 특성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생활이나 국가생활에도 해당된다. 이렇게 비르투의 유무가 한 국가의 성패를 좌우하기에 ‘비르투는 역사를 재는 척도이며, 역사의 경과는 비르투의 역사’라고 하였다.
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말한다. 자유국가를 다시 일으키려면 한 개인의 창조적인 ‘비르투’가, 즉 하나의 지배의 권력, 왕에 버금가는 권력이 국가를 그 손안에 넣고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는 것 말고는 어떠한 수단도 없음을 간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부패되어 더는 재생능력이 없는 자유국가에게 군주정이야말로 유일하고 나아가 가능한 정치체제라고 말했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비르투 개념은 공화주의적 경향과 군주주의적 경향사이에 내적인 다리를 만들고, 이것에 의해 그는 주의의 절조를 잃지 않고, 피렌체 자유국가 붕괴 뒤의 메디치가의 공국에게 기대를 걸고 메디치가를 위해 『군주론』을 저술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즘 실천사상을 깨어라!
마키아벨리즘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경영계에서의 사장의 축출에서 회사의 강제 합병, 신문기사의 사회면 기사를 장식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좁은 의미로는 정치세계에서 윤리적인 계약을 무시하고 권력을 획득 유지, 또는 증대하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권력정치적인 행동양식을 가리킨다. 수단은 반윤리적이었어도 그 수단으로써 목적이 완수되는, 즉 결과가 유효한 때는 반윤리적인 수단을 올바르다고 한다. 권력정치라든가 현실정치, 권모술수도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군주론』이 악명 높은 까닭은, 이러한 정치의 행동양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군주는 비록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두려움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간교한 술책을 써서 사람들의 두뇌를 혼란케 하는 군주가 오히려 커다란 사업을 이룩하고 있다. 군주는 야수의 성질을 적당히 익힐 필요가 있는데, 그 경우에 야수 중에서도 여우와 사자의 성질을 배워야 한다.’는 등 윤리의식에 거슬리는 말들도 있다. 즉, 정치가 영위되는 곳에서는 마키아벨리즘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키아벨리즘을 마키아벨리가 처음 쓴 것은 아니다. 성악설을 주장한 중국의 순자나, ‘군주란 형벌과 도덕에 의해 신하를 제어하기 마련’이라고 말한 한비자. 또 그리스의 소피스트나 소크라테스도 ‘정의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약한 자보다 많이 지니도록 되어 있다’는 등으로 실질적으로 마키아벨리즘의 선구자적 말을 하였다. 다만 공론화 되지 않은 것뿐이다. 그 뒤에도 19세기의 프랑스 혁명 때나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도 마키아벨리즘은 기세를 얻고 마키아벨리는 신격화를 띠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비스마르크 정책을 지지한 베를린 대학의 역사학 교수 트라이치케는 그의「정치학」에서, ‘마키아벨리가 국가를 독립시키고, 그 윤리를 교회로부터 자유롭게 한 것, 특히 그가 최초로 국가는 힘이라고 천명한 것은 영원한 마키아벨리의 영예이다’ 말했다.

전쟁과 평화 인간관계학『전술론』!
『전술론』은 『군주론』의 명성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연구할 때는 로마사론, 군주론, 전술론이 삼위일체 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볍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마키아벨리의 『전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코무네(자치도시) 피렌체의 방위기구 역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방위기구는 일반적으로 자치지배 확립이 얼마나 됐느냐에 따라 발전하는 게 역사의 흐름이었는데 피렌체 또한 예외가 아니다. 14세기가 되자 전쟁에는 점점 많은 돈이 들어갔다. 용병이나 배상금이 전쟁의 중심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용병과 군사비 문제는 마키아벨리 시대까지 이어졌다.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들지 않고, 코무네에 충성을 다하면서도 기병이 아닌 보병 집단으로 군대를 편성하려고 했다. 전술론의 주제는 바로 이 점이며 로마의 레기온(보병군단)에서 원형을 찾으려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서 전술론을 완성해 코무네 내셔널리스트 지위를 확립했다. 그 시절에는 전쟁을 학문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전술은 아직 학문 영역에 들어있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전쟁을 학문의 대상으로 다룬 첫 과학적인 도전자였다. 물론 그 무렵에는 브루니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군대 연구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마키아벨리가 처음으로 전술을 국가 논리와 결합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전술론이 국가학(Scienza dello stato) 생성을 자극하고 또한 군주나 최고회의에서 뛰어난 전략가(Politico militare)다운 자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뜻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썼지만 반드시 군주제가 정치제도의 가장 좋으며 변할 수 없는 모델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전술론에서 끊임없이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반드시 국가에 강대한 군사를 준비해 둬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마키아벨리가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마저 군대에 대한 기본자세는 늘 방어 위주였지 결코 공격의 성격은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필요할 때 발휘할 수 있는 유효한 전투력과 이를 위해 발휘하는 인간의 사람 조정법을 목표로 삼았다. 이점에서 전술론은 또 하나의 군주론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누구인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피렌체 시, 현재의 비아 귀차르디니에서 법률가인 아버지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와 어머니 바르톨로메오 데 넬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귀족집안이었으나 선조 가운데 피렌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집안의 생활은 건실했다.
그는 피렌체 공화정부에서 일하던 초기부터 군사제도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국가의 유지와 독립에서 군사제도의 개혁이 긴급하다는 것과 용병이나 외국 지원군의 폐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군주론』이나 『전술론』 및 『로마사론』이 군사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는 위의 저서 말고도, 필생의 대작인 『피렌체 역사』와 『가스톨루치오 가스톨라카니 전 』 등 문학작품도 있다. 또 희극 『만드라골라』는 그의 문학적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풍자희극으로 일품이다. 군주론이 그 무렵의 정치를 적나라하게 그렸다면, 이것은 피렌체의 세태풍속을 그린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위대함은 살아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하여 누추한 집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오늘날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을 찾는 사람은 마키아벨리의 묘비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을 것이다. “명성이 큰 이는 송사 없어도 충분하리니. 니콜로 마키아벨리 1572년에 돌아가다” 생전에 누구에게서도 송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피렌체인에 대한 가장 고귀한 송사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