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서양철학의 이해 (책소개)/1.서양철학사상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동방박사님 2021. 12. 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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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독일의 나치즘으로 충격에 빠져있는 유럽인들에게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적인 논의를 담아 샤르트르가 보냈던 "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메세지의 강연을 기록한 책이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그 구조를 단순화시키면 크게 다음과 같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실존주의를 개론적으로 이해시키는 부분, 둘째, 그 당시 실존주의에 가해지던 주요 비판에 맞서 반박하는 부분, 셋째,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전쟁 기간 동안 사르트르는 포로수용소(스탈라그)에서 겪었던 경험을 통해 휴머니즘을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그는 인간을 부동의 가치 속에 새겨진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존재로 보는 휴머니즘, 인간을 가치 만들기라는 멈추지 않는 기도로 보는 휴머니즘, 따라서 고전적 휴머니즘과 달리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을 결코 목적으로 취할 수 없는 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서는 고전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을 통해 전후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고 있다.

목차

강연의 상황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토론


 

저자 소개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역 : 박정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랭스대학에서 석사 학위(사르트르 전공)를 받았으며, 파리10대학 D.E.A.(베르그손 전공)를 거쳐, 파리8대학에서 바디우의 지도 아래 들뢰즈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에 귀국하여 대학에서 철학, 미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철학자 들뢰즈, 화가 베이컨을 말하다』(2012), 『마음과 철학』(공저, 2012), 『포스트모던의 테제들』(공저, 20...
 

관련 자료

-이 책은 사르트르가 1945년 10월 29일에 파리에서 행한 강연을 담은 것으로, 가독성을 돕고 강연의 현장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강연체로 번역을 하였다.

-이 책은 원저작권자인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으로 계약하여 처음으로 번역, 출판하는 책이다. 기존에 허술한 번역으로 국내에 출판된 해적판이 여러 권 있었으나, 이 책은 사르트르를 공부한 전문 학자가 완전히 새롭게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은 한 페이지를 두 단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강연의 내용을 담고 다른 쪽에는 소제목들을 달아놓았다. 이는 불어 원서의 출판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강연을 속기한 텍스트를 나중에 책으로 출판하면서 사르트르가 독자의 이해를 도울 목적으로 적당한 위치에 강연의 내용을 요약하는 중간 소제목들을 집어넣은 것으로 짐작된다.

-실존주의 용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이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을 감안해, 책의 말미에 이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옮긴이의 실존주의 용어 해설?을 넣었다

출판사 리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구조
첫 번째 부분에서 사르트르는 강연의 초반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그 당시 실존주의에 가해지던 주요 비판을 약식으로 소개한(23~28쪽) 후, 대략 강연의 중반 정도에 이를 때까지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둔, 그의 철학에 대한 개론적인 강연을 한다. 즉 그는 기독교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라는 두 종류의 실존주의가 있음을 설명하고(28~37쪽), 곧 이어 대중을 상대로 한 이 개론적 강연을 위하여 그가 특별히 추려낸 개념인 불안, 홀로 남겨짐, 절망을 간략하게 해설함으로써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대한 개요를 대중에게 전달한다(37~56쪽).

두 번째 부분에서 사르트르는 앞에서 행한 개론적 설명에 기대어서 그 당시 실존주의에 가해지던 주요 비판에 맞서 반박한다(56~83쪽). 즉 그는 실존주의의 도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앙가주망의 필연성을 지적하고 강조함으로써 실존주의는 정적주의와 무관하다고 반박하고(56~63쪽), 또 실존주의가 주체주의에 근거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이런저런 비판에 반박한다(63~83쪽). 특히 주체주의 때문에 받는 비판에 대한 반박은 보다 구체적으로, 실존주의적 선택은 독단적이 아니냐는 비판에 대한 반박(70~76쪽), 자기를 기만하는 선택은 어떻게 볼 것이냐는 비판에 대한 반박(76~82쪽),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의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한 반박(82~83쪽)으로 세분된다. 마지막으로 강연의 결론 부분에서 사르트르는 강연의 제목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청중에게 재차 확인시킨다(83~88쪽). 즉 그가 자신의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실존주의적 휴머니스트,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그의 이전 작품에서 안티휴머니스트로서의 그의 입장을 강하게 내비친 바 있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을 대자-즉자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이 욕구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환상일 뿐이다. 사르트르가 인간을 쓸모없는 열정, 고통, 결여, 존재의 구멍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많은 사람이 지적했던 것처럼, 사르트르의 인간관은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독트린으로서의 휴머니즘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으며, 또 이러한 판단은 분명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르트르가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으며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휴머니스트라고 칭하는 일이 일어난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성황리에 마치면서, 아주 강력한 실존주의적 휴머니스트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된다. 사르트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사르트르로 하여금 안티휴머니스트의 입장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가리켜 휴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입장으로 나아가게 한 것일까? 물론 사르트르에게는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이 시대적 논의에 직접 뛰어들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그 당시에는 휴머니즘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지적, 정치적 논의의 장에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휴머니즘을 거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단순히 의도만 가지고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사르트르처럼 이전에 안티휴머니즘의 입장을 견지했던 사람이 휴머니즘을 주장할 수 있으려면 그에 합당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사르트르와 휴머니즘을 연결하는 두 고리
첫째, 전쟁 기간 동안 사르트르 자신이 포로수용소(스탈라그)에서 겪었던 경험이 이러한 입장 변화에 크게 작용했다. 특히 이 경험은 우리가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에게서 볼 수 있는, 어찌 보면 니체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인주의적 입장을 이후에 사르트르가 부분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사르트르는 스탈라그에서 인간 공동체를 경험했다. 『구토』의 로캉탱과 반대로 개인은 공동체에 맞서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들과 더불어, 공동체와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 인간 공동체에 대한 경험은 분명히 다수의 개인을 가로질러서 그 어떤 공통된 인간-존재를, 따라서 그 어떤 휴머니즘의 가능성을 사르트르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둘째, 사르트르는 이 강연에서 휴머니즘의 두 의미를 구분하는데, 바로 이 두 의미 구분이 휴머니즘에 대한 사르트르의 입장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이 점을 이 책의 끝부분(83~88쪽)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선 고전적 휴머니즘이 있다. 그런데 이 고전적 휴머니즘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또 그것이 인간(인간의 본질 또는 본성)을 최상의 목적으로 취한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하는 실존주의와는 양립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구토』에 나타난 사르트르의 안티휴머니즘은 바로 이 고전적 휴머니즘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존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실존주의로부터 도출되는 또 다른 의미의 휴머니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을 부동의 가치 속에 새겨진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존재로 보는 휴머니즘, 인간을 가치 만들기라는 멈추지 않는 기도로 보는 휴머니즘, 따라서 고전적 휴머니즘과 달리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을 결코 목적으로 취할 수 없는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 또는 휴머니즘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바로 이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끊임없이 가치를 만드는 기도이자, 그 자신을 통해서 가치가 발생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은 이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존엄성을 부여받게 된다. 즉 새로운 의미의 휴머니즘,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 탄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