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한반도평화 연구 (책소개)/2.북한탐구

북한 생존의 길을 찿아서

동방박사님 2022. 1. 2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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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북한은 언제 무너질까?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지만, 1990년대 초에는 흔하게 만나는 질문의 하나였다. 그때는 북한도 머잖아 붕괴할 것이고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과 가깝게 지냈던 루마니아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지고 차우세스쿠 대통령이 처형되었을 때,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다음 차례는 북한인가?”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3대째 권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한·소수교와 소련 붕괴 이후 중국에 의지하려던 북한은 중국마저 남한과 수교하자 극심한 국제적 고립에 직면했다. 이 때 북한의 핵사찰 수용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주권 수호’를 외치면서 핵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핵확산을 방치할 수 없는 미국은 북한과 직접협상에 나섰다. 중국은 북한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대화를 통한 해결’을 내세워 북한을 감싸고 나서기 시작했다. 북·미관계와 중·북관계의 상호작용이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을 동맹에 붙들어 매놓는 한편, 미국의 압박에 성공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북핵문제는 사반세기를 넘어 우리 외교의 최대 현안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 책은 한반도 비핵화의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거두지 못한 만큼, 이제 한 번 쯤 “왜 그랬을까?”라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그 당시 일을 한번 복기해 보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북한외교의 변화과정을 추적했다.

목차

머리말

I. 들어가며

1장 서론
1. 1989-1994년이 왜 중요한가?
2. 연구 대상과 범위 및 책의 구성

2장 북·미·중 전략적 삼각관계
1. 삼각관계 이론의 효용성
2. 전략적 삼각관계 모델
3. 북·미·중 사이의 ‘전략적 삼각관계’ 성립 여부
4. 구조로서의 ‘전략적 삼각관계’와 역동성
5. 1989-1994년간 북·미·중 관계의 진화와 ‘전략적 삼각관계’의 역동성

II. 다가오는 위기 (1989-1992)

3장 북·중동맹의 약화 (1989-1992)
1. 북한의 소련 상실
2. 천안문 사건과 북·중동맹의 재확인
3. 북·중동맹의 약화와 한·중수교
4. 소결론 : 혈맹보다 중요한 이익

4장 북·미대립의 지속 (1989-1992)
1. 북한의 대미관계개선 모색
2. 일본과 한국을 통한 북한 압박
3. 소결론 : 모든 길은 핵문제로 수렴

III. 위기 탈출

5장 탈냉전기의 미·중관계 (1989-1994)
1. 냉전의 종식과 신국제질서
2. 탈냉전기의 미·중관계
3. 소결론 : 천안문 이후의 상호적응

6장 북·미직접대화관계 구축 (1993-1994)
1. IAEA 특별사찰 요구와 북한의 NPT 탈퇴 선언
2. 북·미고위급회담의 시작
3. 북·미직접대화관계 구축을 위한 북한의 노력
4. 북·미제네바합의
5. 소결론 : NPT 탈퇴 선언을 통한 정면돌파

7장 북·중동맹의 복원 (1993-1994)
1. 한·중수교의 후유증
2. 북·중동맹의 복구
3.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
4. 소결론 : 지정학의 재등장

VI. 나오며

8장 결론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조병제
 
37년간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한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석사를 취득하고, 늦깎이로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외교부에 들어간 후 북미국장,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 대표, 외교부 대변인, 주미얀마 대사와 주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냈고, 국립외교원장을 마지막으로 외교부를 떠났다.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초빙 석좌 교수이며, 현재 아시아정당국제회의...
 

책 속으로

1989-1994년의 전환기, 특히 1992년의 한반도는 평화정착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고 있었지만, 우리도, 미국도, 북한도 이 기회를 잡지 못했다. --- p. 11

북?중관계에서 동맹결속이 강화되느냐 또는 이완되느냐, 북?미관계에서 직접대화가 진전되느냐 또는 퇴행하느냐, 미?중관계에서 상호갈등이 심화되느냐 또는 상호협력이 확대되느냐에 따라 북?미?중 3국 간의 관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에 있다. 즉, 북?미?중 3국은 ‘전략적 삼각관계’에 있으며, 북한의 대미 및 대중외교 행태를 설명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 p. 36
북한이 정권수립 후 40년 동안 의지해 온 동맹이 사라졌다. 북한의 핵우산이 없어졌으며, 북한의 위협인식 수준은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 p. 59

무엇보다 중국 스스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하나의 조선」 원칙을 포기하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할 것을 권고한 것이 당시 북?중동맹 운영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 p. 100

한국에게 ‘남·북간 핵문제 논의는 양날의 칼’이었다. 한반도 안보문제의 핵심인 주한미군핵무기 철수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연계하여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핵무기 철수가 가져올 대북억지력 차원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NPT사 허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산업적 가치를 예측할 수 없는 재처리를 현 시점에서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고려도 있었다. --- p. 115

뿐만 아니라, 양측은 핵사찰 문제에 진전이 있을 경우, 주한미군 2단계 철수를 재개하는 문제도 논의했다. 당시 한미 양국은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토록 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 재조정 계획에 신축성을 보일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 p. 126

가장 큰 문제는 변화를 거부하는 북한이었다. ‘우리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북방외교의 성과를 상쇄하고 미국에 접근하려는 의욕에서 남한을 넘어 미국에 접근하려고 했다. 남한은 한반도 문제 논의의 주도권에 집착하여 북?미관계가 남?북관계를 앞지를까봐 경계했다. 미국은 비확산정책의 시각에서만 북한을 보고 있었을 뿐, 북한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을 추구할 동인을 찾지 못했다.--- p. 156

북한이 북?미직접협상 구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1994년 5-6월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겪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양측은 전쟁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성공했다. --- p. 241

당시 미국은 어느 정도까지 전쟁을 실천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까? 오버도퍼 기자는 양국 정부에서 정책결정체계에 가까이 있던 사람일수록 전쟁 발발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한국의 지도자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까? (본분 226

무엇보다 북한은 모든 역량을 미국과의 협상에 집중했다. 북한은 1992년 후반 북·일국교정상화 교섭이 핵문제로 좌초하는 것을 보았다. IAEA 임시사찰을 통한 핵문제 해결 돌파 시도도 미국의 벽에 막혔다.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협상과 관계개선을 사활적인 요소로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p. 239

김영삼 정부는 1994년 2-3월과 5-6월에 걸쳐 적어도 두 번이나 전쟁위기를 겪었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남한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p. 242

북한에 대한 안보리 제재조치가 논의되고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1994년 6월 6-10일간 최광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이 중국을 방문했다...... 장쩌민 총서기는 최광 면담에서 “피로 맺은 양국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의 흔들리지 않는 정책”임을 강조했다. --- p. 251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은 북한 핵문제에 대응하는 미국의 선택지를 제한했으며, 결국 미국이 북한과 직접협상을 통한 해결의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p. 278

북한이 갈구해 마지않던 미국과의 정책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박에 중국의 전략적 이익이 저항한 결과였다. 북한은 핵확산이라는 미국의 이익을 건드렸고,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중국이 제한했다. --- p. 285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은 어디까지나 대화와 협상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국제적 대응조치의 상한선을 결정했다. --- p. 289

탈냉전 초기에 개혁개방의 길을 포기했기 때문에 북한은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경제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지금까지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때 핵옵션을 남겼기 때문에 미국과 신뢰를 구축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 때 핵옵션을 남겼기 때문에 결국 핵무장의 길을 가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의 고립은 지금까지 심화해 왔다. 지금 북한에게 제재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북한의 대외활동은 지금도 제재에 막혀있고, 남북교류와 경제협력도 제재 때문에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 p.295
 

출판사 리뷰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갖고 지나간 날을 돌아보면, 동시대 사건을 대하는 것보다는 냉정한 시각에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다음 몇 가지 질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핵심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공동선언이 이행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한과 미국에게 각각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대화를 통한 해결’을 추구한다는 중국의 입장은 북한핵문제 논의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역사를 쓰고 읽는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오늘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함의를 갖는다. 자료를 수집하고 기억을 더듬는 지난 5년여 동안 당시 놓쳐버린 기회가 드러나 보일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아쉬움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다. 이 책을 통해 해묵은 숙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방안이 모색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