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국제평화 연구 (책소개)/2.국제정치외교

외교의 거장들

동방박사님 2022. 2. 1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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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세계를 뒤바꾼 외교 협상의 전략은 무엇인가?
“한국 외교의 길을 묻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을 두고 야당은 굴욕적인 사대외교라고 폄하하고, 여당은 최고의 정상외교라고 평가했다. 전자는 ‘혼밥 논란’, ‘기자단 폭행’, ‘홀대 영접’ 등을 이유로, 후자는 사드 보복 철회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4가지 원칙(한반도 전쟁 불가, 한반도 비핵화,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 남북관계 개선) 합의를 들어 실리외교라고 자평했다. 어느 쪽 말이 정확한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처럼 외교는 한 나라의 국익을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예부터 모든 국가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자기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대화하고 교섭하고 협상해왔다. 이를 외교라고 한다. 외교는 우리의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미국의 언론인 노먼 커즌스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암이나 불치병이 아니라 각국 정부의 외교정책이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 대한 통상외교를 잘하면 우리의 자동차를 미국에 많이 팔 수 있고, 미국의 값싼 쇠고기가 들어오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정부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방향으로 외교를 전개하느냐에 따라 주권의 중요한 부분인 군사작전권(전시작전권)을 우리가 확보할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 맡겨놓을 수도 있다. 북한과의 외교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가 좋아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남북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어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어난다.

우리에게 외교가 갖는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는 외교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동맹 강대국에 대해서는 ‘언제 나를 버릴지 모른다’는 방기 또는 ‘쓸데없이 강대국의 전쟁에 참여하게 될지 모른다’는 연루의 염려를 늘 하게 된다. 동맹이 아닌 강대국들에는 너무 동맹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게 동맹 관리도 하고, 동맹 없는 강대국과는 동맹 못지않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더욱이 작은 나라는 외교자원이 열악하다. 인력, 경제력, 군사력 등과 함께 문화적 힘인 연성 권력도 모두 외교자원으로 동원될 수 있는데, 이 모든 게 부족하다. 그럼에도 쉼 없이 주변국과 외교전을 벌여야 한다. 모든 게 부족한 작은 나라는 역사에서 배우고 얻지 못하면, 정보와 무한 자원으로 무장한 강대국 앞에 발가벗은 채 설 수밖에 없다.

『외교의 거장들: 한국 외교의 길을 묻다』는 외교의 관점에서 세계 역사를 관찰했을 때 시대별로 빛나는 별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골라 그들의 외교에 얽힌 삶을 조명했다. 그들의 외교에 대한 이념, 활동, 성과, 그러한 성과들이 나올 수 있게 된 배경 등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19세기 초에 활약한 오스트리아 총리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부터 20세기 말 독일통일을 이룬 한스디트리히 겐셔까지 외교사에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10명을 세계 외교의 거장으로 선정해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다루었다. 이들은 모두 세계 외교사의 중대한 변곡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국의 이익뿐만 아니라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불어 이들의 활동을 통해 한국 외교의 미래와 비전을 찾는다.

목차

머리말 _ 5

제1장 유럽 평화의 조율사 :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외교의 개척자 _ 16 | 철저한 보수주의자 _ 19 | 세력균형을 금과옥조로 여기다 _ 20 | 빈 회의의 전전후 조율사 _ 27 | 나폴레옹의 탈출과 프랑스에 대한 징계 _ 36 | 신성동맹조약과 4국동맹조약 _ 38 | 유럽의 자유주의_민족주의 운동 _ 42 | 프랑스 2월혁명으로 퇴진하다 _ 48 | 태생적 한계 _ 49

제2장 전략적 협상의 대가 :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
조용하고 냉정한 성격 _ 54 | 프랑스는 1792년 국경으로 _ 57 | 집단방위체제의 선구 _ 61 | 빈 회의에서 활약하다 _ 63 | 현실주의자의 전형 _ 69 | 불간섭과 간섭 사이에서 _ 71 | 탁월한 외교관, 그리고 노예제도 찬성론자 _ 74

제3장 현란한 동맹외교의 상징 : 오토 폰 비스마르크
교육열이 넘친 어머니 _ 78 | 독일연방 의장국 오스트리아에 맞서다 _ 82 |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유럽을 관찰하다 _ 86 | 철혈 재상이 되다 _ 88 | 독일통일의 시작을 알리다 _ 90 | 오스트리아에 승리하고 북부 독일연방을 완성하다 _ 93 | 프랑스를 물리치고 독일제국을 건설하다 _ 97 | 프랑스를 고립시키다 _ 101 | 베를린 회의를 주재하다 _ 103 | 오스트리아와 동맹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다 _ 105 | 삼제협정으로 러시아와 화해하다 _ 107 |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3국동맹을 형성하다 _ 108 |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체결하다 _ 109 | 철저한 보수주의자_독일주의자_현실주의자 _ 111

제4장 동양의 비스마르크 : 이홍장
재주가 크고 마음이 세심하다 _ 114 | 뛰어난 협상 능력 _ 117 | 농민 반란을 잠재우다 _ 119 | 이이제이의 외교 _ 121 | 이토 히로부미와의 담판 _ 125 |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 _ 127 | 청나라와 러시아가 밀약하다 _ 131 | 비스마르크를 만나다 _ 133 | 영토를 나누어주다 _ 135 | 기울어진 국운, 비운의 재상 _ 137 | 애국자인가, 매국노인가? _ 141

제5장 국제연맹의 창업자 : 우드로 윌슨
현실감을 갖춘 ‘학자 대통령’ _ 146 |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_ 151 | 멕시코 개입 실패 _ 156 |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국제연맹 구상 _ 159 | 국제연맹을 창설하다 _ 167 | 국제연맹 가입 실패 _ 173 | 시대를 앞질러간 생각 _ 177

제6장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의 총지휘자 : 윈스턴 처칠
낙제생에서 ‘위대한 영국인’까지 _ 180 | 아일랜드 독립 협상에서 보인 발군의 조정력 _ 186 |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키다 _ 188 | 대서양헌장을 공동선언하다 _ 192 | 소련과의 용의주도한 협력 _ 195 | 영국_미국_프랑스 공조 조율 _ 201 | 한국의 독립에는 무관심했다 _ 206 | 인내와 설득의 결과물, 노르망디 상륙작전 _ 208 | 드골을 지원하다 _ 211 | 이상보다는 현실을 _ 217 | 존경받는 보수주의자 _ 221

제7장 현대의 제갈량 : 저우언라이
행동하는 청년 _ 224 | 중국 혁명의 주역 _ 227 | 광풍을 중화하는 역할 _ 230 | 제2차 국공합작 성사 _ 234 | 스탈린과 우호조약을 체결하다 _ 237 | 한국전쟁에 참전하다 _ 239 | 제네바 정치회담과 중미 비밀채널 _ 242 | 반둥회의로 제3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하다 _ 246 | 자주성 견지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하다 _ 248 | ‘내 자리는 덩샤오핑에게 물려주세요’ _ 255

제8장 창의적인 국제분쟁 해결사 : 다그 얄마르 앙네 칼 함마르셸드
최고의 유엔사무총장 _ 260 | “사무총장은 독립기관이다” _ 265 | 유엔평화유지군 창설과 수에즈 위기 해결 _ 268 | 진공 이론 _ 273 |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다 _ 276 | 유엔사무총장의 롤모델 _ 280

제9장 현대의 메테르니히 : 헨리 키신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_ 286 | 닉슨을 비판하다가 그의 참모가 되다 _ 289 | ‘다극안정론’으로 중국에 접근하다 _ 292 | 중국 비밀 방문과 미중정상회담 합의 _ 293 |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하다 _ 298 | 방글라데시의 대량 학살을 묵인하다 _ 300 | 불완전한 평화협정 _ 301 |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다 _ 304 | 키프로스의 쿠데타를 방관하다 _ 306 | 동티모르의 학살을 묵인하다 _ 308 | 외교 영웅인가, 악의 전령인가? _ 309

제10장 독일통일의 설계사 : 한스디트리히 겐셔
동독 출신으로 서독 외교장관 되다 _ 314 | 헬싱키 협약의 주역 _ 318 | ‘중거리핵전력조약’을 중재하다 _ 319 | 통일에 대한 선지적 통찰 _ 321 | 동독인의 자유를 위한 담판 _ 322 | 겐셔의 투칭 구상 _ 326 | 동_서독 중심의 ‘2+4 회담’ 성사 _ 330 | 소련을 설득하다 _ 332 |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 문제 양보 _ 338 | 셰바르드나제_베이커와의 신뢰 관계 _ 340 | 메르켈을 작아지게 하다 _ 342

참고문헌 _ 344
찾아보기 _ 348

 

저자 소개

저 : 안문석
 
1965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요크대학교(University of York)에서 정치학 석사, 영국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KBS 통일부, 정치부, 국제부 기자를 거쳐 정치부 외교안보데스크를 지냈다. 2012년부터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북아 국제관계, 북한의 대외관계, 미국 외교정책 등에 대해 ...
책 속으로
메테르니히와 영국의 외교장관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가 주도하고 러시아의 외교장관 카를 바실리예비치 네셀로데(Karl Vasilyevich Nesselrode)와 프로이센의 총리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Karl August von Hardenberg)가 합세해 1814년 3월 9일 쇼몽(Chaumont)조약을 체결했다. 그 핵심 내용은 전쟁 후에도 프랑스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는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침략하는 경우 연합국이 공동으로 침략당한 나라를 돕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집단안전보장(collective security system)을 최초로 명문화해 유명한 조약이 되었다. 또, “유럽의 평화 유지는 정당한 세력균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규정해 세력균형론을 최초로 분명하게 언급한 조약이기도 하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유럽 평화의 조율사」--- p.25~26

9월 30일 총리로서 첫 의회연설에 나선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국력 강화를 강조했다. “(빈 회의 결과로 나온) 빈 의정서에 따른 프로이센의 경계선은 건전한 정치 생활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1848년에서 1849년의 큰 실수와 같이 연설 또는 다수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鐵)과 혈(血)로서만 결정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프랑스의 1848년 2월혁명 이후 확산된 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을 경계하면서 군사적 무장을 역설한 것이다. 철은 무기, 혈은 병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까지도 전해지는 ‘철혈 재상’이라는 그의 별명은 여기서 유래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현란한 동맹외교의 상징」--- p.89

이홍장은 주변국과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청나라의 이익을 실현하려 했다. 1882년 조선이 미국?영국과 통상조약을 맺도록 적극 중재해 성사시켰다. 이홍장은 먼저 미국과 통상조약을 거중(居中) 조정했다. 이를 본 영국의 요청으로 영국과의 통상조약도 조정해 체결되도록 했다. 이렇게 이홍장이 조선-서양 국가 사이의 통상조약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과 러시아가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하고 있었다. 1879년에는 류큐(琉球) 왕국을 점령해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바꿔 일본 지방행정체계에 편입시켰다. 이홍장은 미국?영국이 조선과 통상을 하도록 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의 우월한 지위를 낮추려 했다. 적으로 또 다른 적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이홍장: 동양의 비스마르크」--- p.122~123

미국은 헌법상 선전포고권을 갖고 있는 의회의 권한을 국제군이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은 국제군 창설에 적극적인 프랑스가 국제군을 주도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런 입장 차이 때문에 프랑스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윌슨은 주로 영국과 공조하면서 초안을 다듬어 나갔다. 이 작업은 자신의 보좌관 밀러와 영국 외교부 법률고문 세실 허스트(Cecil Hurst)에게 맡겼다. 이들이 만들어낸 안이 허스트-밀러 안으로, 국제연맹위원회는 이 안을 10회에 걸쳐 검토하고 수정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국제연맹규약은 1919년 4월 11일 국제연맹위원회에서 최종 승인되었다. 「우드로 윌슨: 국제연맹의 창업자」--- p.171

이 공동선언은 회담 후 세계 언론에 공개되었는데, 영국의 『데일리헤럴드(Daily Herald)』는 관련 내용을 보도하면서 여기에 ‘대서양헌장(Atlantic Charter)’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이름이 좋았던지 처칠도 의회에 보고하면서 이 이름을 사용해 이후 이 선언은 대서양헌장이 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 임하는 연합국의 공동목표가 되었고, 전후 국제연합을 창설하는 데에도 이념적 초석이 되었다. 그 내용 가운데 ⑥항에서 나치 폭정의 최종적 파멸을 언급한 것은 영국으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참전하지 않은 중립국이었다. 하지만 대서양헌장의 그러한 표현은 나치에 대한 공동퇴치 결의를 공식화함으로써 미국의 참전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의 총지휘자」--- p.195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와의 회담을 원만하게 이루어내 1972년 2월 닉슨-마오쩌둥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줄곧 적대관계이던 중국과 미국이 정상회담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우언라이가 회담에 임하는 태도와 입장이 어떠했을까? 당시 미국과 회담을 추진하면서도 저우언라이는 자주성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해나가는 데 주력했다. 사소한 일까지 챙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위한 구체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72년 1월 미국의 실무팀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세기적 사건인 만큼 미국은 홍보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현대의 제갈량」--- p.249~250

중국은 소련과 4,380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면서 국경 분쟁을 계속했다. 1969년 3월에는 우수리강 중류의 전바오섬을 놓고 무력 충돌까지 겪었다. 키신저는 이러한 중국과 소련의 지속적인 분쟁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회주의권을 양분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그 구상의 이론적 기반은 ‘다극안정론’이다. 하버드대학 박사논문의 바탕이 된 이론이기도 하다. 몇 개의 강대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세계 질서는 안정된다는 것이다. 키신저는 박사논문에서 나폴레옹전쟁 이후 빈체제가 안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5개국이 세력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형성한 메테르니히를 높이 평가했다. 「헨리 키신저: 현대의 메테르니히」
--- p.292
 

출판사 리뷰

세계를 뒤바꾼 외교 협상의 전략은 무엇인가?
“한국 외교의 길을 묻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을 두고 야당은 굴욕적인 사대외교라고 폄하하고, 여당은 최고의 정상외교라고 평가했다. 전자는 ‘혼밥 논란’, ‘기자단 폭행’, ‘홀대 영접’ 등을 이유로, 후자는 사드 보복 철회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4가지 원칙(한반도 전쟁 불가, 한반도 비핵화,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 남북관계 개선) 합의를 들어 실리외교라고 자평했다. 어느 쪽 말이 정확한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처럼 외교는 한 나라의 국익을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예부터 모든 국가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자기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대화하고 교섭하고 협상해왔다. 이를 외교라고 한다. 외교는 우리의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미국의 언론인 노먼 커즌스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암이나 불치병이 아니라 각국 정부의 외교정책이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 대한 통상외교를 잘하면 우리의 자동차를 미국에 많이 팔 수 있고, 미국의 값싼 쇠고기가 들어오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정부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방향으로 외교를 전개하느냐에 따라 주권의 중요한 부분인 군사작전권(전시작전권)을 우리가 확보할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 맡겨놓을 수도 있다. 북한과의 외교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가 좋아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남북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어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어난다.
우리에게 외교가 갖는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는 외교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동맹 강대국에 대해서는 ‘언제 나를 버릴지 모른다’는 방기 또는 ‘쓸데없이 강대국의 전쟁에 참여하게 될지 모른다’는 연루의 염려를 늘 하게 된다. 동맹이 아닌 강대국들에는 너무 동맹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게 동맹 관리도 하고, 동맹 없는 강대국과는 동맹 못지않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더욱이 작은 나라는 외교자원이 열악하다. 인력, 경제력, 군사력 등과 함께 문화적 힘인 연성 권력도 모두 외교자원으로 동원될 수 있는데, 이 모든 게 부족하다. 그럼에도 쉼 없이 주변국과 외교전을 벌여야 한다. 모든 게 부족한 작은 나라는 역사에서 배우고 얻지 못하면, 정보와 무한 자원으로 무장한 강대국 앞에 발가벗은 채 설 수밖에 없다.
『외교의 거장들: 한국 외교의 길을 묻다』는 외교의 관점에서 세계 역사를 관찰했을 때 시대별로 빛나는 별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골라 그들의 외교에 얽힌 삶을 조명했다. 그들의 외교에 대한 이념, 활동, 성과, 그러한 성과들이 나올 수 있게 된 배경 등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19세기 초에 활약한 오스트리아 총리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부터 20세기 말 독일통일을 이룬 한스디트리히 겐셔까지 외교사에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10명을 세계 외교의 거장으로 선정해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다루었다. 이들은 모두 세계 외교사의 중대한 변곡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국의 이익뿐만 아니라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불어 이들의 활동을 통해 한국 외교의 미래와 비전을 찾는다.

평화와 협상을 조율하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전쟁을 정리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의 의장으로 유럽 수십 개국의 이해를 능숙하게 조율해내는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유럽은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의 바람을 타고 있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럴수록 왕정을 지키고 자유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혁명 세력과 나폴레옹을 세력균형의 파괴자로 보았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영국 등 유럽의 왕국들이 비슷한 힘으로 균형관계를 유지하면서 질서를 유지해왔는데,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해 주변국을 침략함으로써 질서가 깨졌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유럽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연합을 형성해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캐슬레이는 힘의 위력을 철저하게 믿는 현실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세력균형에 의한 유럽의 평화를 지향한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세력균형은 현실주의자들이 평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메커니즘이다. 비슷한 세력이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안정된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캐슬레이도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힘을 줄이고 프로이센을 키우려 했다. 러시아의 성장도 어느 정도까지는 도와 프랑스가 다시 유럽 정복을 꿈꾸는 것을 막으려 했다.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따라 수에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유엔총회가 1956년 11월 1일 열렸다. 유엔 역사상 첫 긴급특별총회였다. 함마르셸드는 수에즈 위기 해결 방안에 대한 결의안에 대해 유엔 주재 캐나다 대사 레스터 피어슨과 긴밀히 협의했다. 협의 결과 해결 방안을 담은 결의안을 피어슨의 이름으로 총회에 올렸다. 총회는 11월 4일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통과된 결의는 휴전과 점령지에서 철군을 요구했다. 유엔사무총장에게는 이러한 요구의 이행을 확인하기 위해 ‘유엔긴급군’ 구성 계획을 48시간 이내에 제출하도록 했다. 유엔긴급군 조직을 위한 구체적인 사항과 이들의 활동 계획 등에 대해서는 유엔사무총장에게 일임했다.

세계 평화를 구축하다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해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고로 국제연맹을 제안하고 창설했다. 그는 주요국 지도자들에게 국제연맹 설립을 회의의 핵심 주제로 삼자고 주장했다. 쟁점 사항을 중심으로 5개 위원회를 먼저 구성했는데, 전범위원회, 배상위원회, 항구?수로?철도위원회, 노동위원회와 함께 국제연맹위원회도 초기 구성된 위원회에 포함되었다. 미국 대표단 내의 검토와 수정을 거쳐 2월 14일 초안이 공개되었다. 윌슨은 국제연맹규약 마련에 힘쓰는 한편 다른 전승국들의 욕망을 억제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렇게 윌슨은 국제연맹규약과 민족자결주의, 전쟁 없는 평화를 얻기 위해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이를 모두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것이 ‘승리 없는 평화’라는 모토와 민족자결주의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다른 강대국의 협조 없이는 현실 국제정치의 운영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도 일부 수용하면서 타협점을 찾아갔다.
중국의 총리 저우언라이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세계 질서에 비판을 제기해 비동맹세력의 결집을 이루어내는 데 기여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도 개선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는 데 공헌했다. 저우언라이에게 제네바 정치회담은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현실 국제사회에서 발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뛰어난 친화력로 미국 측과도 접촉할 수 있었고, 미중 실무급 회담을 네 차례나 가질 수 있었다. 거기서 양국 사이 대사급 비밀채널을 만들어냈다. 이 채널은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를 무대로 15년 동안 유지되면서 미국-중국 사이 중요한 소통 창구 역할을 했다. 또한 1955년 재미 중국 과학자들을 귀국시키는 데 미국과의 대화 창구로 활용되었고, 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냉전 가운데서도 이러한 비밀채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국은 차츰 긴장 완화로 수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를 만나 ‘평화 5원칙’을 공동으로 천명했다. 이 ‘평화 5원칙’은 1953년 12월부터 저우언라이가 중국 외교의 기본 방향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독일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오랫동안 외교장관을 했다고 해서가 아니다. 독일의 통일 전과 후를 합쳐 18년 동안 외교장관을 맡았던 겐셔는 세계 질서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 동서독의 통일문제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미국과 소련을 설득해 독일의 통일을 이루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독일통일의 설계사’, ‘통독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1989년 11월 9일, 28년 동안 동?서 베를린을 나누었던 장벽이 붕괴된 이후 겐셔는 ‘투칭 구상’, ‘2+4 회담’, ‘소련 설득’,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 양보’ 등을 통해 독일통일의 초석을 닦았다. 그리고 동?서독 사이 내부 문제를 정리하는 동?서독 통일조약이 8월 31일 체결된 뒤 9월 20일 서독 연방하원에서 비준되었고, 같은 날 동독 인민회의에서도 비준되었으며, 21일에는 서독 연방상원도 비준했다. 그렇게 대외 문제와 내부 문제에 대한 조약이 종결되고, 동?서독 통일조약이 10월 3일 발효되면서 독일은 역사적인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