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계사 이해 (책소개)/4.해양문명사

바다에서 본 역사 : 동아시아 700년의 문명 교류사

동방박사님 2022. 4. 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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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바다를 중심으로 다시 쓴 동아시아 700년의 역사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바다는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다에서 본 역사』는 동아시아의 바다가 고요하고 정체된 바다였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뜨린다. 동아시아의 바다는 상인과 해적, 승려, 선교사, 이주자 등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활발하게 경쟁하고 공존한 무대였다. 바다의 바람과 물결은 지식과 정보, 문화, 상품, 군대를 실어 나르며 교류를 촉진해 동아시아 세계를 하나로 연결했다. 바다를 육지와 동등한 역사의 공간으로서 조망한 이 책은 지난 700년간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펼쳐진 역동적인 드라마를 전 지구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동아시아 세계와 그 흐름을 만들어 낸 토대가 바다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목차

프롤로그 바다에서 본 역사로의 초대
1 우리의 바다 지도
2 바다의 환경과 배

1부 열려 있는 바다, 1250~1350년
1 시대의 구도
2 해역 교류의 무대 배경과 주역들
3 해상이 확장하는 해역 교류: 개방성의 확대
4 몽골의 충격이 가져온 것: 개방 속의 폐쇄성
5 물품과 기술의 왕래: 저변의 확대와 쌍방향성

2부 경합하는 바다, 1500~1600년
1 시대의 구도
2 대왜구 시대: 동아시아 무역 질서의 변동
3 해상들의 시대
4 다양하고 뒤섞인 문화의 전개

3부 공생하는 바다, 1700~1800년
1 시대의 구도
2 해상들과 ‘근세국가’의 ‘공생’
3 교류와 거류의 압축과 집중
4 바다를 넘나드는 물품과 정보

참고 문헌
책을 마치며
집필자·집필 협력자
옮긴이 후기
 

저자 소개 

편 : 하네다 마사시 (羽田正)
 
도쿄 대학 이사 겸 부학장.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역사학자. 이슬람 건축사와 근세 이슬람사를 전공했다. 1953년에 오사카시에서 태어나, 조부 하네다 도루(羽田亨)와 부친 하네다 아키라(羽田明)를 이어 동양사를 전공했다. 교토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서남아시아사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 파리 제3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신의 전공인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하는 책을 다수 펴냈...
 
공역 : 조영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학자(2003~2004)와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의 방문연구원(2004~2006)을 거쳐, 2006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대운하와 휘주상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중국 근세 시대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가 주된 연구 주제이고, 최근에는 북경 수도론과 동아시아 ...

 

공역 : 정순일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와세다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고대사와 동아시아 해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 『9세기 내항신라인과 일본열도(九世紀の 航新羅人と日本列島)』 등 다수의 책을 펴냈으며, 국내에서는 『제국과 변경』, 『삼국유사의 세계』 등을 공동 집필했다.
 

책 속으로

1630년에 네덜란드 상관선이 나가사키에서 두 척의 서양식 갤리언선을 목격했는데, 한 척은 중국 상인의 소유였고 다른 한 척은 일본인의 소유였다. 후자의 배는 중국 상인이 빌려서 항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배의 항해사는 태평양 항로의 에스파냐선을 오랫동안 타고 나가사키를 왕래하며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무역업에 종사했던 네덜란드인이었다. 이와 같은 배는 어느 나라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23~24

해역에 사는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귀속 의식과 ‘이방인’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은 육지의 사람들과 같았을까? ‘가족을 위해 땀을 흘리는’ 어부나 뱃사람들과 ‘살인을 일삼는’ 해적과 병사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해역을 중심으로 본 역사, 즉 ‘바다에서 본 역사’가 밝혀졌을 때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 p.26~27

1250~1350년의 동아시아 해역에서는 몽골이 군사 활동을 전개하는 중에도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과 남해 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군사 활동 자체가 남해 무역에서 통상 진흥책의 일환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를 통해 유라시아의 동과 서, 그리고 육지와 바다에 걸쳐진 거대한 교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원격지 간에 사람과 물품, 정보의 이동이 전례 없이 직접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 ‘개방성’이라는 기조는 이 시대에 정점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 p.130

은의 구매력이 큰 중국으로 일본 은과 신대륙 은을 나르고, 그 대신에 중국 상품을 해외시장으로 수출하면 그 이익률은 한층 높아졌던 것이다. (……) 1600년 전후로는 1년간 50톤에서 80톤의 일본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25톤에서 50톤의 신대륙 은이 마닐라를 경유해 중국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산되며, 인도양을 경유해 마카오로 운반된 은을 포함하면 1년간 중국으로 흘러들어 간 외국 은의 총량은 100톤에서 150톤에 달했을 것이다. --- p.212

남만 칠기에는 조선과 중국처럼 전통적으로 일본 미술 속에서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국가뿐 아니라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 지방의 공예품과 공통점이 확인된다. (……) 이러한 유사품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은 유럽인이 일본의 칠기에도 ‘인도적인’ 요소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친숙함이 없었던 데에 비해, 동방의 상징으로서 인도의 이미지는 대단히 친숙했기에 아시아에서 오는 물품에 그러한 요소를 요구했을 것이다. --- p.235~236

화인 이주의 확대에 따라 동중국해 연해 각지에서는 차이나타운이 급증했다. 현지의 화인 사회는 현지의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들의 지연 네트워크와 혈연 네트워크로 성립되었다. (……) 화인 네트워크와 경제적 영향력은 널리 남중국해 일대에 미쳤고, 의식주나 신앙 등 생활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 대부분은 복건과 광동 같은 중국 동남 연해부의 서민 문화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을 ‘중국화’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 p.352

사람과 사람이 직접적으로 교류할 기회가 줄어들고, 외국인이 관념화하거나 전형화해 가는 가운데 강하게 의식된 표식이 복장과 함께 두발을 비롯한 ‘털’이었다. (……) 특히 외국인과의 접촉이 줄어든 일본에서 서양인은 물론 근린의 조선인과 한인도 수염과 구레나룻이 수북한 ‘모당(毛唐: 털이 많은 당인)’ 등의 외견적 이미지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18세기를 통해 확대되고 심화되어 갔다.
--- p.361~362
 

출판사 리뷰

육지의 역사에서 벗어나 해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스물여덟 명의 역사가가 완성한 동아시아사의 마스터피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육지에 기반을 둔 국가를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기에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일국사의 관점에 머물기에 십상이고, 고개를 든다고 하더라도 몇몇 이웃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바다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는 다르다. 바닷길을 통해 연결된 수많은 이웃이 시야에 잡히면서 인식의 범위를 크게 확장한다. 『바다에서 본 역사』에서 바다는 육지의 부속물이나 자연의 경계가 아니라 ‘해역’이라는 주체적인 역사 공간으로 제시된다.

이 책은 여러 역사가가 모여 명확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함께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도쿄 대학 부학장인 석학 하네다 마사시를 필두로 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장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스물여덟 명이 참여했다. 각자 독립된 글을 쓰는 대신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글을 썼다는 점도 돋보인다. 저자들은 약 3년간에 걸쳐 모임을 거듭한 끝에 각자가 전공하는 한국사와 중국사, 일본사, 베트남사, 류큐사, 대외 관계사, 해역 아시아사, 회화사, 문학사, 문화사, 고고학, 군사기술 교류사 등을 아우르는 통섭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한·중·일 삼국에 그치지 않고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유럽까지 다룰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외교, 문화, 사상까지 망라하는 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집단 지성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바다에서 본 동아시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1부: 1250~1350년, 열려 있는 바다
2부: 1500~1600년, 경합하는 바다
3부: 1700~1800년, 공생하는 바다

한국어판의 번역에는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조영헌 교수와 정순일 교수가 참여해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고 전문성을 더했다. 기존의 역사관을 바꾸어 놓는 이 책은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설고 생소한 해역사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동시에 역사에 접근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함으로써 역사 서술의 영역을 확장한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방, 경합, 공생 - 세 가지 키워드로 보는 바다의 역사
“개방”: 세계 제국 몽골이 바닷길을 잇고 동서 교류를 촉진하다


서양의 도약은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바다로 진출한 서양과는 달리 문을 걸어 잠근 동양은 결국 뒤처지고 말았다는 논리가 뒤따른다. 이러한 통념을 『바다에서 본 역사』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동아시아에서 바다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미 당 제국 시절부터 중국의 대도시와 항구는 바다를 건너온 상인과 사절, 승려로 붐볐다. 바다와 그 건너편에서 온 사람과 물품은 익숙한 존재였다. 13세기에 등장한 몽골(원)은 동아시아의 바다가 지닌 개방성을 더욱 강화했다.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제국이 탄생하면서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평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바닷길 또한 전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와 모로코의 이븐 바투타는 이 시기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세계 최대의 항구인 천주의 번영에 관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원 제국의 개방적인 태도는 동아시아에 무역의 활황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군사적 긴장 또한 불러일으켰다. 원은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하고 동남아시아의 자와(자바)섬을 침공함으로써 바다까지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경합”: 유럽 세력이 등장하고 동아시아의 바다가 지구 전역과 연결되다

16세기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바다는 격변을 맞이했다. 명 제국의 해금(海禁) 정책과 조공 체제가 흔들리면서 전통적인 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랐다. 1571년에는 에스파냐가 필리핀에 마닐라시를 건설함으로써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연결되는 태평양 항로가 탄생했다. 『바다에서 본 역사』는 지구 전역을 연결하는 무역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경쟁의 양상에 주목한다. 1591년에 에스파냐령 필리핀을 다스리는 총독은 중국 의복 금지령을 반포했는데, 이듬해에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올린 보고에는 그 내막이 잘 드러난다.

유감스럽게도 화인(중국인)과의 무역은 유해합니다. 그들은 이 제도에서 대량의 은을 해외로 반출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금지해야 합니다. 주요한 무역품은 면포입니다만, 화인은 현지에서 원료인 면화를 수입한 후 그것을 짜서 수출하고 있습니다. (……) 그 외에 화인이 들여오는 것은 극히 조악한 싸구려 면입니다만, 생사와 방적(紡績)한 실도 운반해 옵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후자는 에스파냐 본국에서 수입하는 양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그라나다와 무르시아, 발렌시아(의 견직물업자)로부터 오는 왕실의 세수입에 손실을 입힐 것입니다.

총독이 경계하고 우려했는데도 필리핀의 은은 계속해서 중국으로 유출되었다. 바다를 건너 유입되는 중국산 물품의 홍수 앞에 당해 낼 도리가 없었던 탓이다. 중국산 물품은 페루에도 도달했다. 에스파냐에 정복당한 인디오 유력자들조차 중국산 물품을 쓸 정도였다. 싼값의 ‘메이드 인 차이나’ 때문에 현지 산업이 쇠퇴하는 현상은 400여 년 전에도 다를 것이 없었다. 중국산 물품은 필리핀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 그라나다에 있는 견직물업자의 시장도 빼앗았다.

“공생”: 육지의 정치권력 강화와 함께 해양 세력들이 자립성을 상실해 가다

중국에서는 명이 청으로 교체되고,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성립하면서 육지의 정치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성해졌다. 동아시아 각국은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해양 세력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 제국은 대만을 점령했고, 에도 막부 휘하에 있는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을 침공했다. 『바다에서 본 역사』는 육지의 정치권력이 바다를 어떻게 통제하고 활용했는지를 보여 준다.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에 패했는데도 멸망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사쓰마 번과 에도 막부의 속국이 되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복속된 사실을 숨기고 계속해서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일본은 류큐 왕국이 중국을 상대로 조공 무역을 하면서 얻는 이득을 노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당시에 청에서는 몰랐을까? 여러 정황을 볼 때 청은 류큐 왕국이 일본에 복속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류큐 왕국이 청에 고개를 숙이는 한 굳이 그 사실을 들추어내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실리를 중시하는 자세는 국가 간 무역에서도 발견된다. 조선과 일본은 큰 전쟁을 치렀는데도 쓰시마를 매개로 교류를 지속했다. 나가사키를 방문한 청의 상인들에게 일본이 무역 허가증인 신패(信牌)를 발급받으라고 요구했을 때도 청의 강희제는 외교 문제로 삼지 않았다. 청과 일본 사이에는 정식 국교가 없었지만, 강희제로서는 명분을 크게 해치지 않는 한 무역에서 얻는 이득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