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1.인천이야기

근대 제국과 만난 인천 : 충돌과 변화

동방박사님 2022. 5. 4.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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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수도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인천지역은 그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19세기 후반 근대제국과 부딪치는 최전선이었으며, 이에 한국사회의 ‘근대’ 전개의 순(順)ㆍ역(逆)을 결정짓는 주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 근대 문물이 흡입ㆍ변이되는 최전선이 또한 인천이었기에 그 변화 양상은 다대했다. 따라서 근대제국의 침략과 문명이라는 양면과 만난 인천 지역사회 및 지역민의 ‘충돌’과 ‘변화’를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은 매우 적절하다 할 수 있다.

목차

점령자의 시선과 주민의 반응 ― 이영호
: 19세기 후반 서양함대의 강화도 침공을 중심으로

인천 군관의 기록을 통해본 신미양요 ― 배성수
: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를 중심으로

뜻밖의 봉변, 운요호(雲揚號) 사건 ― 김흥수

개항기 서양 지식인들의 인천지역과 한국사회 인식 ― 김백영

개항기 경인로의 변천 ― 김종혁

개항기 인천의 화교(華僑) ― 김만수

일제강점기 일본식 지명의 생산과 장소의 정치 ― 전종한
: 원인천(原仁川) 지역의 사례

소통과 불통의 이중주, 병인ㆍ신미양요의 전적지 순례 ― 유창호
 

저자 소개

저자 소개
이영호 : 인하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이다.
배성수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이다.
김흥수 : 공군사관학교 인문학과 교수이다.
김백영 :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다.
김종혁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편찬실장이다.
김태웅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전종한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이다.
유창호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이다.
 
 

책 속으로

19세기 후반 프랑스와 미국함대의 강화도 점령사건에 대해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1866),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라 명명되어 왔다. 즉 ‘서양 오랑캐의 소란’이라는 뜻이며 조선은 서양 오랑캐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사건에 ‘전쟁’의 개념을 사용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전쟁을 위한 선전포고나 국가간 전면전쟁의 양상을 보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서양 함대의 침공’이라고 표현하였다.
서양함대의 침공이 ‘지역의 주민’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남겨진 기록은 지배자 또는 점령자의 것이 대부분이다. 지배자의 기록으로 민중의 실상을 파악하고 점령자의 기록을 통해 지역 주민의 태도와 반응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침 프랑스와 미국함대의 일원으로 강화도 전투에 참여한 점령자의 기록이 확인된다. 실제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은 외교적, 군사적 관점과는 다른 시선을 지녔을 것으로 보고 그들의 참전기를 읽어보려 한다. 프랑스군 장교후보 쥐베르(Henri Zuber, 1844~1909)의 체험기와 그림, 미국 해병대위 틸톤(McLane Tilton, 1836~1914)의 편지와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pp.12-13

개항기 한국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수도 서울을 향하는 관문인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우선 ‘제물포’와 ‘인천’이라는 지명에 대해 관심을 갖는데, “제물포는 ‘다양한 물건의 강둑’을 의미하며, 인천은 ‘인자한 하천’이라는 뜻으로, 일본어로는 ‘진센(Jinsen)’ 또는 ‘닌센(Ninsen)’이며, 중국어로는 ‘젠추안(Jenchuan)’이다.” 이어서 항구로서 인천의 첫인상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태고적 황량함’으로 요약된다. 개항 직후인 1883년 인천을 방문한 로웰에 따르면, 제물포는 “바다와 육지의 특성을 모두 갖춘, 초가지붕이 즐비한 조그만 섬”으로, “마을을 찾으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도이다. 제물포는 “해변과 진흙으로 된 평지가 있을 뿐, 항구로서는 부적당”하여 “선박들은 1마일 밖에 정박해 있어야 한다. 여기저기 산재한 언덕과 계곡 그리고 조수의 높낮이는 해안을 육지로 만들기도 하고 바다로 만들기도” 하는데, “바다 쪽으로 경사진 언덕 위에 일본인 거류지와 유럽식 건물인 일본영사관이 우뚝 솟아 있어, 크고 흰 이 건물이 먼 바다를 향한 하나의 이정표처럼 태고적 황량함을 지닌 제물포의 풍광을 희석시켜준다.” 조선인들은 “바다건 육지건 이웃한 나라와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는 민족의 기질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는 단절되어왔다”고 파악한다.
--- pp.120-121
 

출판사 리뷰

인문학시민강좌 그 세 번째 강좌! 인천학!
근대제국의 문물과 충돌하며 변화해 온 인천의 모습을 살펴본다!


수도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인천지역은 그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19세기 후반 근대제국과 부딪치는 최전선이었으며, 이에 한국사회의 ‘근대’ 전개의 순(順)ㆍ역(逆)을 결정짓는 주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개항 이후 서구 근대 문물(문화ㆍ문명)이 흡입ㆍ변이되는 최전선이 또한 인천이었기에 그 변화 양상은 다대했다. 따라서 근대제국의 침략과 문명이라는 양면과 만난 인천 지역사회 및 지역민의 ‘충돌’과 ‘변화’를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은 매우 적절하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근대제국과의 충돌’과 ‘개항 이후 인천사회의 변화’ 두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충돌’에서는 병인(1866)ㆍ신미(1871)양요(洋擾)에서 불(佛)ㆍ미(美) 두 점령자의 시선과 강화 주민의 반응(이영호), 인천 군관이 기록한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를 통해본 신미양요의 이모저모(배성수),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감행한 배경 및 의도(김흥수) 등을, 그리고 ‘변화’에서는 개항기 서양 지식인들의 인천지역과 한국사회 인식(김백영), 한국교통사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경인로(京仁路)의 개항 이후 변화 양상(김종혁), 개항기 화교(華僑) 사회가 인천에 형성되는 과정 및 변화 양상(김태웅), 개항 이후 일본식 지명이 인천에서 생성?확산되는 양상 및 잔재(전종한) 등을 담았다. 이밖에 ‘충돌’의 현장인 강화도를 답사한 유창호의 답사기를 이 책의 마지막 부문에 수록하였다. 이 글은 병인ㆍ신미 전적지인 강화도의 역사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