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인문교양 (책소개)/7.역사문화교양

홉스봄, 역사와 정치 (2012)

동방박사님 2024. 5. 16. 07:30
728x90

책소개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3권. 활동하는 최고의 맑스주의 역사가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의 면모, 그의 지적/정치적 여정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이 책은, 그의 ‘20세기 삶’을 다른 시각으로 묘사하며 전투적인 공산주의자이자 실천적인 역사가의 형성을 탐구한다. 교육받은 좌파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 『극단의 시대』 저자, 에릭 홉스봄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작업이 될 『홉스봄, 역사와 정치』는 그의 사유와 저술활동이 영국을 비롯한 세계 전반의 정치현실에 끼친 영향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검토한다.

목차

서문

1장_ 발달기 경험, 재형성의 순간
결정적인 때
단일한 동학?
무기를 든 지식인들
동쪽의 지진

2장_ 국제적 행로와 섬나라의 행로
진보의 드라마
관찰과 참여
노동 분화

3장_ 수수께끼 같은 변주
진보의 시대
프로메테우스의 선물, 판도라의 상자
곤경에 처하여
이성이 잠들다?
결론_ 세계의 길들

저자 소개

저자 : 그레고리 엘리어트(Gregory Elliott)
영국의 옥스포드 발리올 칼리지(Balliol College)에서 루이 알튀세르를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85). 이후 저술 및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Althusser: The Detour of Theory(국역본 『알튀세르: 이론의 우회』, 2009), Perry Anderson: The Merciless Laboratory Of History(1998), Ends in Sigh...
 
역자 : 신기섭
1990년 초 학교를 졸업하고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하여 2012년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2000년부터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당대, 2000), 『싸이버타리아트』(갈무리, 2004),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 등 몇 권의 책을 번역했다.

책 속으로

이 책은 최근 홉스봄의 맑스주의와 공산주의를 경시하면서 형식적으로 찬사를 보내는 행태에 대해 중도파와 우파에서 비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에 착수하게 된 훨씬 평범한 연구다. 여기서는 1991년 해산할 때까지 영국공산당에 남아 있었고 “과거 신념을 버리길 체계적으로 거부한” 인물로서 그가 “희귀한 것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도 흥미”를 갖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이 정당함을 증명할 것이다.---p.6

자서전 작가로서 자신을 묘사할 때의 초연함을 역사가로서는 덜 보여 주는 홉스봄은 “제 과거를 부인하는 걸 체계적으로 거부할” 뿐 아니라 그 과거의 상당 부분을 변함없이 자기 미래 속에 적극적으로 보존하기까지 했다. 『흥미로운 시절』을 읽을 때 드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넓게, 학생 홉스봄이 어른 홉스봄의 아버지였고 이는 변치 않았다.---p.54

홉스봄은 활동 경력의 상당 기간 동안 ‘새로운 종류의 노동당’, 사회주의 정당을 이뤄 가는 과정에서 공산당을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노동당을 바랐다. 1980년대에 그는 과거의 다양성을 회복한 노동당 정부로 눈높이를 낮췄다. 이런 형태의 정부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신자유주의를 준비시키고 벤의 파벌주의를 낳으면서 제 존립 기반이 되는 선거 연합을 망친 사회민주주의 행정부의 실패, 바로 그것이었음을 망각한 채 말이다. 199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 홉스봄이 보게 된 것은 상상할 수 없이 새로운 노동당 정부, 확실히 새로운 것만 좇는 노동당 정부였다.---p.93

『극단의 시대』의 연대기로 보자면 당시 정세는 21세기로 넘어가는 10여 년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미국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는 충격과 공포로 다가오는 어떤 것 안에 담겨 있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미국의 전쟁’ 대실패는 북대서양조약기구가 그루지아까지 거침없이 확장하는 걸 러시아가 막고 나섬으로써 더욱 악화됐다. 특히 맑스주의자들이 주기적으로 예상하던 동시다발적인 경제 위기가 신자유주의의 법과 워싱턴 컨센서스의 예언가들을 무색하게 만들며 때맞춰 터졌다. 아마 저 역사가는 중요한 포럼에서만, 비유를 섞어서 말하자면 트로츠키가 언젠가 자비를 모르는 역사의 실험장이라고 부른 곳에서만, 타당성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p.147

출판사 리뷰

“홉스봄, 20세기의 정치와 역사를 생각한다!”
아직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한 맑스주의 역사학자의 치열한 지적 연대기!


정치를 향한 열정.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 1917년에 태어나 2012년 현재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많은 동료 역사가들과 달리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나이 90이 넘어서도 인터뷰에, 기고문에, 책 출간 등으로 여전히 바쁜 이 백발의 공산주의자와 동시대인으로 살아가면서 그가 평생 동안 역사가로서 하고자 했던 실천적 삶의 실체를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스스로가 혁명과 전쟁을 직접 경험하며, 관찰자로서 참여자로서 역사가로서 20세기를 묘사해 온 에릭 홉스봄. 알튀세르:이론의 우회, 페리 앤더슨 등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영국의 학자 그레고리 엘리어트(Gregory Elliott)가 추적하고 있는 홉스봄의 모습은, 홉스봄이 겪은 “끔찍한 동시에 흥미로운 시절”만큼이나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든 것이지만 홉스봄이 맑스주의 역사학자가 되기까지의 그 형성기와,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들을 촘촘히 따라감으로써 이 책의 제목인 ‘홉스봄, 역사와 정치’에 충실한 리포트가 되어 준다.

다시 주목해야 할 역사가, 에릭 홉스봄― 20세기를 증거한다

많은 책을 썼다. 그들 중 상당수가 의미 있는 저작이다. 공적 지식인 자격으로 곳곳에 초대받아 당대의 쟁점에 대해 늘 발언을 했고, 그의 ‘짧은 20세기’에 대한 역사서 극단의 시대는 “교육받은 좌파라면 누구나 읽을 것이고 또 확실히 읽어야만 하는 책”으로 분류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에릭 홉스봄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썼던 글에 대한 개별 비평은 수없이 많지만 그를 전적으로 다룬 작품은 전무하다. 저자 그레고리 엘리어트의 지적처럼 “홉스봄의 정열적 저술 활동과 명성을 고려할 때, 그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글들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점은 눈길을 끈다”.(본문 6쪽)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의 제3권, 홉스봄, 역사와 정치는 본격적으로 홉스봄의 정치적/사상적 흐름을 좇는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90세가 넘도록 세상과 치열하게 대결하고,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분주했던 그가 보여 준 인류와 세계에 대한 주목과 관심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주목받지 못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그러나 진보에 대한 믿음,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격변의 20세기를 몸으로 견디며 맑스주의 역사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최후까지 대의에 충실했고 여러 면에서 아주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위대한 작가로 불리지는 않는 인물, 전투적이고 실천적인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가명으로 재즈 관련 책을 출간할 정도로 관심분야가 많았던 특이한 인물. “희귀한 것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도 흥미가 있다”는 홉스봄 자신의 말처럼 관심분야가 비(`)전형성을 띠었지만, 바로 그런 특이함 덕분에 그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 20세기를 일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기 쉽도록 많은 글과 자료를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혁명의 실패 이후에도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맑스주의 역사가의 관점을 놓지 않았던 것 역시 10대 시절 형성된 이래 변하지 않았던 그의 ‘맑스주의자’로서의 정체성 덕분이었다.

“에릭 존 어니스트 홉스봄, 키 크고 모난 데다 축 늘어지고 못난 금발의 열여덟 살 청년…… 혁명가가 되고 싶으나 아직까지 조직화에 재능을 보여 주지 못한다. 작가가 되고 싶으나 소재를 형상화할 열정과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산을 움직일 믿음은 없고 그저 희망만 품고 있다.”(본문 23쪽)

홉스봄 자신이 스스로를 묘사한 자화상에서 우리는 자책에 가까운 그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저자 그레고리 엘리어트의 지적처럼 “학생 홉스봄이 어른 홉스봄의 아버지”였다면, 우리는 이 글에서 유대인 소년의 자기비하만큼이나 행복에 대한 믿음과 혁명에의 희망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 홉스봄, 역사와 정치는 홉스봄의 유년시절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시절까지를 살피는 동시에 그가 남긴 여러 개인적인 글들과 편지글, 모임에서의 발언까지도 확인함으로써 그가 어떻게 맑스주의 역사가로 성장하게 되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때로는 웃음을 살 판단과 발언을 하고, 후회할 법한 정치적 결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공산주의의 탄생과 몰락을 자신의 온 생애를 거쳐 함께하고, 영국 정치현실은 물론 전세계 정치지형에 폭넓게 관심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해 온 20세기의 산증인으로서의 홉스봄의 면모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것은 더 이상은 늦춰지면 안 될 일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는 무엇을 하는가― 끝나지 않는 지적 투쟁

1880년대 이후 맑스주의에 귀의했던 상당수의 지식인은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과 더불어 세계 변혁을 꿈꿨다. 여기에 역사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집단의 대다수가 맑스주의의 영향하에서 대중적인 정치세력이 되어 갈 무렵 민중사, 노동사 등은 원래 맑스주의적 역사 해석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의 변혁을 바라는 역사가는 정치운동과 참여를 통해 ‘맑스주의적 역사학’적 관점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갔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을 기점으로 맑스주의와 관여된 지식인들이 다시금 등장하게 된 것은 홉스봄의 맑스주의 역사가로서의 성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고,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공산권에서 탄생한 (공식적) 맑스주의 역사관은 파시즘 시기에 때맞춰 반체제투쟁의 기본이 될 수 있었다. 로드니 힐튼, 크리스토퍼 힐, E.P.톰슨, 모리스 돕 등 유명한 맑스주의 역사가들과 함께 1946년에 시작한 ‘공산당 역사가 모임’(Historian’s Group of Communist Party)은 홉스봄의 문제의식인 정치 행동주의와 자신의 직업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이었고, 56년까지 이어진 이 모임의 조직적 유산은 스스로 “과학적 역사학술지”라 칭한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로 남았다.(본문 40쪽)

“현재 세대는 역사에 대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의 가능성 그 자체를 거부하는 19세기 초 낭만주의의 반합리주의 세계관에서 직·간접적으로 물려받은 특정 사상 조류가 다시 발호하는 걸 보고 있다.…… 우리는 이성과 과학의 방법이 적어도 지질학, 고생물학, 생태학 또는 기상학에서처럼 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과거와 현재 창간호 사설 중에서)

맑스주의 역사학의 출발점은 개별 ‘사실’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의식’에 있었고, 자신이 경험하게 된 전쟁이나 혁명 등의 낱낱의 사실들에 대해 발언할 때에도 홉스봄은 비난받을지언정 맑스주의자로서의 아이덴티티와 신조를 저버리지 않았다. 공산주의가 쇠락하고, 맑스주의와 반맑스주의가 번갈아 등장할 적에도 말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역사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면서 인간의 이해 능력을 벗어난 것은 물론 인간의 사회·정치 제도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도 확실히 넘어선 상황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아마 20세기 인간 집단의 기획이 가져온 예상 밖의 원치 않는 결과를 이해한 경험이 있는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적어도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본문 152쪽)이라는 그의 소박한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맑스주의에 몸 담았던 많은 지식인들과 역사가들이 몇 차례의 위기를 겪고 대를 지나면서 사회혁명가이길 그침과 동시에 맑스주의도 동시에 내다버릴 때 홉스봄은 그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공산당을 떠나지 않았고, 공산당을 떠나면 얻을 수 있었던 물질적 풍요와 보장된 성공을 거부함으로써 대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정절을 지켰다.

“물론 제가 받아들인 대의가 실패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공산주의를 선택하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이상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유일한 이상이 물질적 풍요를 통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인류는 언젠가 멸종하고 말 것입니다.”(홉스봄의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홉스봄은 “미래는 더욱 낫고, 더욱 정의로우며 더욱 활력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자. 구세기는 좋게 끝나지 않았다”(극단의 시대) 말하며 아직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 끔찍하고 별난 세기, 20세기를 통과한 그가 보여 주는 낙관이기에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는 그의 말을 무조건 믿고 그의 계속되는 지적 투쟁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우리 시대의 정치를 이야기하자

“9 ·11 은, 소련이 사라진 뒤 마침내 제 힘에 단기적 한계라고는 없으며, 명백한 우위의 과시를 빼면 그 힘의 사용 목적이 꽤 불분명함에도, 그 힘을 사용할 의지에 한계를 두지 않기로 작정한 전세계 유일 과대 권력과 우리가 같은 세상을 산다는 걸 증명했다. 20세기는 끝났다. 21세기는 어스름과 어둠 속에서 열리고 있다.”(본문 139쪽)

홉스봄이 미국을 “세계적 헤게모니를 주장할 위치에 있는 역사상 유일한 나라”라 지적하고,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실수”라고 꼬집어 말하고, 미국의 전세계적 제국 건설을 두고 뻔뻔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명확한 규범이나 공통의 가치가 상실된 세계로 내던져지는 이 신자유주의 현실 속에서, 홉스봄의 이야기에 새삼 귀를 기울이게 된다. 더욱이 지금 우리가 ‘정치’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고는 냉소이거나 우스뎰가 태반인 이때, 정치에 대한 열정과 희망으로 여전한 이 공산주의자를 보면 어째서 그는 냉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가 궁금해지게 된다. 온갖 별명과 수사로 포장되어 알맹이를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된 우리 시대의 정치. 우리는 ‘정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 진지하면서 독특한 역사가의 지적 투쟁, 곧 삶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홉스봄의 ‘시대 4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은 20세기 정치의 판도나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 교과서가 되었다. 또 그는 “활동하는 최고의 맑스주의 역사가”라 불린다. 그의 지적?정치적 활동과 지속적으로 보여 준 실천적 운동 덕분일지 모르겠다.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홉스봄 자신의 전기(국역본 미완의 시대)와 구분되게 그의 사상적 측면과 저작활동과의 연관관계를 내밀하게 살피는 이 작업을 통해서 정치적 역사가의 형성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지금 정치와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영국 노동운동과 정치현실의 투쟁에 있어 ‘과잉’은 있었을지언정 ‘일탈’은 없었던 에릭 홉스봄. 정치가 농담이 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진지하고 조금은 엉뚱한 역사가의 삶과 그의 투쟁기를 살펴보는 것은 충분히 유의미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