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여의도 지하벙커

동방박사님 2019. 9. 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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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실에서 발견된 소파

여의도 지하벙커를발견할 당시 이 공간에 있던 소파, 무릎까지 차오른 물에 공간전체가 잠겼던 탓에 소파의 천이 모두 삭혀서 복원 불가능하여 프레임만 유지하고 천은 세로 제작했다


발견에서 개관까지

여의도 지하벙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 2017년 SEMA벙커로 개관 하여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여의도 벙커는 2005년 5월,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 도중 발견됐다. 서울시는 발견 이듬해인 2006년 하반기에 이를 간이화장실, 매점 휴계실 등을 갖춘 시민 편의 시설로 바꿔 개방할 계획이었다. 동시에 인근에 들어설 서울국제금융센터와 벙커를 지하로 연결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그러나 벙커가 지하인데다 유동인구가 적어 사업성이 약하다는 평가가 내려지면서 페쇠조치됐도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2013년 여의도 벙커는 그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 받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이때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문화시설로릐 활용계획을 수립했다. 이루 2016년부터 설계 및 리모델링공사를 거쳐 2017년 10월19일,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년 SEMA벙커로 개관했다.


벙커의 역사

5.16광장에서 개최된 " 국군의 날" 행사 당시의 사열대와 벙커의 위치가 일치, 유사시 대통령 대피시설로 추정. 여의도 벙커는 2005년 5월, 서울시가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건립하기 위한 현지조사를 진행하던 중 발견됐다. 전체 공간은 소파와 화장실을 갖춘 VIP실 (20평)과 지휘대 및 기게실이 있는 수행원 대기실 (180평) 및 3개의 출구로 구성돼 있었다. 발견당시 벙커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내시경을 넣어 조사한 끝에 벙커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국토교통부 지하 시설물 도면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수도방위 사령부에도 해당기록이 없는 등 관련자료와 소관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5.16광장에서 국군의날 행사가 개최됐을 당시의 사열대와 벙커의 위치가 일치한다는 점, 관련된 자료가 전무하다는사실등을 고려할때,

여의도 벙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사시 요인대피 방공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당시의(2005년) 언론보도가 있었다. 또한 서울시가 보유하고 있는 항공사진 확인결과 벙커의 출입구가 1977년 이후 자료부터 표시된 것으로 미루어 볼때, 1976년 말에서 1977년 초에 벙커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설명 : 여의도 봉커눈 굿모닝신한증권 본점 앞에서 찿길 하나 건너 마주한 화단의 쇠철문 이래 잠들어 있었다. 5월인데도 벙커안은 초여름 날씨처럼 서늘했다.


여의도 벙커, 최근까지 관리됐다.

2005년 5월17일 제560호

1980년대 후반부터 쓴 건축자재발견....

창덕궁 지하에도 벙커를 만들었던 불행한 역사의 흉터들


"이게 뭘까?

4월중순, 서울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지으려던 서울시 건설안전본부 직원들은 00증권회사 본점에서 찻길

하나를 건너 마주한 화단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철제문을 찿아 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 왔기 때문에 이곳을 자주 오가던 시민들도 문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아 채지 못했다.


누군가 알면서도 침묵 지키는듯

철거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일꾼들은 궁리 끝에 철제문 안에 "내시경"을 넣어보기로 했다.  이풍근 현장감리 단장은 "화면을 보고) 너무놀라 까무러칠 뻔했다.'며 " 처음에는 소설책에서만 읽던 지하비밀기지를 찿아낸 줄로 오해했다"고 말했다. 지하에 있었던 것은  2개의 화장실, 대형재피실, 3개의 비상용 탈출구가 설치된 180평크기의 지하 벙커였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누가, 언제, 여기에, 왜 이런시설을 만들것일까?

지금까지 나온 한결같은 대답은 "모른다" 다 최진호 서울시 교통개선 추진단장은 " 관련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고, 국방부는 "존재 자체를 모른다. 군사 시설이 아니다'는 짤막한 논평을 냈다. 대통령 경호실이나 국가정보원 등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현재까지는 "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국군의 날 " 행사 때 대통령과 정부 주요 요인들이 대피하도록 만든 시설일 것' 이라는 서울시의 추정이 가장 그럴 듯한 대답이다. 그렇지만 5월10일 < 한겨례21> 취재팀의 답사 결과, 현장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한 건축 자재들이 발견돼 벙ㅋ커가 서울시의 추정보다 훨씬 최근에 만들어 졌거나 적어도 최근 까지 관리되온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상장기사 참조). 누군가는 벙커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벙커를 보자마자 자연스레 "박대통령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것은 박대통령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때는 그런 시절었다. 1960년 말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숨돌릴 틈 없이 급변했다. 1968년 1월21일 북한에서 특수 산악훈련을 받은 124군 특공대원31명이 청와대 앞산까지 침입한  이른바 "김신조사건" 이 터졌다. 그 이틀 뒤인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불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납치됐고, 같은해 11월2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 불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납치됐고, 같은 해 11월2일에는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00여명이 나타났다. 이에 맞서 박정권은 그해 2월6일 지금은 서울경찰으로 바뀐 서울시 경찰국에 전투경찰대를 만들었고, 4월1일에는 (38년째 대한민국 성인남자들을 웃고 울리는) "250만 향토 예비군"을 창설했다.


벙커의 추억, 그원조는 조선 총독부

박대통령은 그래도 불안 했는지 이듬해인1969년 "올해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만들자는 신년사를 냈다. 이로부터 " 엿새뒤 "원조불도저"  김헌옥 서울시장은 " 서울시 요새화게획" 이라는 걸 내 놓은다. 여기서 요새는 전쟁터의 요새가 요새가 아닌 말그대로 "요새'를 뜻한다.  이를 토대로 평소에는 교통수단으로 쓰고 전쟁이 펼쳐질 때는 2인이상을 수용하는 대피소로 활용되는 남산1.2호 터널과, 1970년 7월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2곳에 "군용비행장"을 만들었다. 


1971년 3월 미 7사단이 철수했고, 베트남을 거쳐 라오스.캄보디아 등으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다. 전쟁의 그림자가 일상에 드리워진 때였다. 여의도 광장은 그때 태어났다.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종목 서울 시립대학교 명예교수는 " 1970년 10월말" 여의도 대광장을 만들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며 '이는 전쟁이 일어 났을때 군사용 비행장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 했다. 1971년 2월20일에 시작해  공사비  7억6천만원, 연인원 6만 7,300명, 장비 1만 1천대를 들여 그해 9월29일에 공사를 끝냈다. 광장길이는 1,350m, 넓이는 12만평, 완공 이틀 뒤인 10월1일 전국의 학생과 군인 30만명을 모아 이곳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열었다. 여의도광장의 원래 이름은 " 5.16광장" 이었다.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 문화재 요새화"도 시작됐다. 같은 민족인 북한군이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향해 총과 대포를 쏘지 못할 것이라는 게산이 깔린 조처였다. 문화재 요새화의 흔적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2004년 문화광광위원회의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은 " 서울창덕궁 안의 방공진지 등 전국문화재 창덕궁, 조선성종과 정현왕후의 묘인 선릉, 숙종과 장희빈의 서오릉, 고종 계비엄씨의 묘인 영휘원 등에 50평 안팍의 방송용 벙커 4개를  만들기로 했다. (이들 벙커는 2003년께 모두 철거되었다)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던 시절, 여의도 벙커 하나 만드는 것들은 일도 아니던 시절 이었다.


그지하에 버스카드 충전한다 

주변 곳곳에 남아 있는 지하벙커들은 우리가 버려온 세월의  일체감을  증언하는 삶의 흉터다.흉터는 감추고 외면하기보다는 똑바로 응시할 때 치유할 수 있다. 1970년대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코크리트를 부어 벙커를 만들고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을가. 당시 사정을 귀로 전해 듣고, 눈으로 책을 읽어  알뿐인 후세사람들이 그렇게라도 해 불안감을 떨치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당혹 스러움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박대통령은 전쟁터가 아닌, 술자리 심복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 었다.

새로 발견된 여의도 벙커는 철저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개방해 화장실과 매점 등으로 활용할 것이라 한다. 6월 부터는 비상시에 대통령의 목숨을 구하여 만들었던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웃고, 차를 마시고, 버스카드를 충전할 수 있게된다. 역사는 느림듯 보이지만, 그렇게 끈질기게 조금씩 앞으로 진보해가는 것인가 보다.


1992년 9월30일에 마지막 점검?

서울시는 여의도 벙커가 1970년대 박정희 정권때 국군의날 행사에 대비해 만들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추정이지만 석연치 않는 구석도 있다. 일단, 당시 핵심 관게자가 부인한다.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록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 당시 여의도 광장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 했기 때문에 (그때 만들어 진 것이라면) 내가 모를리 없다" 며 "공군이 여의도를 사용하던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헣지만 벙커 출입구는 영등포에서 마포대교를 잇는 도로 한가운데에 설치된 화단에 있다. 벙커가 여의도

도시게획이 끝난 뒤에 만들어 졌다는 의미다. 손 교수가 모른다면 재직 시절 이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5월10일 <한겨례21>의 현장답사 결과 벙커는 적어도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 진 것이 확실해보였다. 현장에서 발견된 '아남" 상표의 형광등 스위치, 에비용 백열등< 화장실 변기 등은 1970년가 아닌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것들이다. 내부 전기 장치 안에서 발견된 사용 점검표의 점검 번호가 1989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89"로 시작 되는 점도 이런  추정에 설득력을 더한다.


다만, 화장실 변기에 붙어 있는 점검표에는 연도 없이 " 9월30일" 이라는 점검 낭짜가 적혀 있어, 10월 1일 " 국군의 날'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을 했을 것이라고 주측할 수 있다. 국군의 날 행사 잔소가 서울 여의도에서 육. 핵. 공 3군 본부가 있는 게룡대로  바뀐것은 1993년부터다. 1993년 이전이라면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이다.

이후 여의도 광장은 1998년 조순 서울시장 때 7만평의 공원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공사 관계자는 " 나중에 개조됐을 가능성도 있기때문에 벙커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며 적어도 최근 까지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한다.


여의도벙커는 차지철 작품

육영수 피격직후 건축- 청와대 경호실이 운용.관리

소충섭기자 2005.05.14 


여의도 벙커(위) 위치는 국군의날 사열식때 단상이 있었던 곳과 일치하며 위급시 단상이 지하로 가라앉도록 설계된 것으로 알려 졌다.

지난 4월 중순 서울여의도에서 발견된지하 벙커는 의문 투성이이다. 도심 한 복판에 1백 80평이나 되는 지하시설이 지금까지 비밀리에 존재해 왔다는 것 자체 부터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철문, 소파, 화장실, 전화 2백대를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단자함, 여기에 지휘대 시설까지, 온갖 영화적인 상상력 까지 자극한다. 버스환승센터 만들기 위해 공사하던 인부들이 우연히 발견한 이 시설을  서울시는 앞으로 시민 편의시설로 개방할 계획이다. 이벙커는 두가, 왜 어떤 목적으로 만든 것일까?


여의도 벙커가 발견된 직후 군 비밀 시설이 나니냐는 주측이 일자 윤광웅 국방부장관은 "군에서 아는 사람이 없다. 군이 관리하는 시설이 아니다" 라고 밝혔다.


신현돈 국방부 대변인도 " 수도방위 사령부에 문의한 결과 이와 관련한 어떤 기록고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라고 말했다. < 시사저널> 취재결과 이 벙커는 1970년대 " 청와대 경호실"이 운용했던 극비시설로 밝혀졌다.

여의도 광장 (처음에는 5.16광장)이 만들어진 것은 1972년이지만 당시에 벙커는 없었다. 1970년대에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여의도 벙커는 1975년 ~1976년 청와대 경호실이 주도해 만들엇다'라고 밝혔다. 

경호실이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의 전신) 공병대를 동원해 비밀리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극히 일부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공사를 한 병사들도 이 시설이 어떤 시설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벙커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 이후 보안사가 인수 

1973년 2월부터 1975년 6월까지 수경사 참모장을 지내고, 1979년 사령관을 지낸 장태환 전 재향군인회 회장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벙커 공사를 주도했을 것이다. 혹 누가 알면 폭약을 설치할 위험 등이 있어서 극비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장씨에 이어 수경사 참모장을 지낸 전주식씨도 "최근에야 벙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리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전 청와대 경호실관계자는 "1974년 발생한 육여수여사 피격사건이 벙커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보안사 경호과가 이 시설을 관리했다'라고 말했다.

육여사 피격 직후인 1974년 8월22일 대통렬 경호실장이 되면서 2인자로 떠오른 차지철은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라는 표어를 자기 방에 붙여놓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전을 국정의 최 우선 순위로 두었던 인물이다. 여의도 벙커위치는 국군의날 사열식 때 단상에 있었던 곳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 졌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단상이 그대로 지하로 가라앉도록 설계되어 있었다는 말을 벙커공사에 참여했던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전했다.  지하벙커에 전화시설을 설치해 놓은 이유는 위기상황에서도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대통령을 염두에 둔 시설이어서 소파등도 당시로서는 최고급품이었다고 한다."여의도 벙커" 가 언제부터 무용지물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단1980년대 중반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국군의 날리 사라진것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76년/1977년 여의도 벙커지역 공사흔적 비교 자료:국방부




1968년 국군의날 행사에 국방부 요구사항

국방부에서 국군의날 행사를 위해 서울시에 요청한 요구조건 문안으로, 매년 국군의날 행사를 여의도에서 실시하게 된 배경과 행사시 요구조건 및 행사규모의 내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1969년 국군의날 행사에 대한 국방부의 요구사항과 서울시의 답변서


1978년 국군의 날 행사 단상 하부에 위치한 지하벙커


열쇠보관함

발견 단시 나온 열쇠 보관함.

각 실별 열쇠를 보관한 상자로 출입구, 집수정 및 각종 맨홀등 벙커 곳곳에 진입할 수 있는 열쇠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복원했다.


코어 조각

벙커의 콘크리트 두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코어 조각.

지표면에서 2.2m 아래 위치한 벙커는 천장과 바닥, 벽 모드 50cm 두께의 콘크리트로 이뤄져 있다. 콘크리트 단면을 잘라보았을때 공극(孔隙)을  찿아 볼수 없어 매우 강도 높은 재료를 사용 했음을 알수 있다. 이로부터 이장소가 외부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설게 되었음을 추정할수 있다.



VIP실의 세면대와 좌변기

VIP실(現역사갤러리)로 추정되는 지금 이자리에 설치되어 있던 세면대와 좌변기. 발견 당시에는 칸막이 시설이 갖춰져 있었으나 노후되어 유리 전시벽으로 교체하였다



SeMA 역사 갤러리

SeMA 벙커는  서울시립박물관의 분관으로서 여의도에 특화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이 공간은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동안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가 2005년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을 위한 현지조사 도중 발견되었다. 발견당시 이곳은 무릎 높이까지 물이 차 있었고, 약 180평에 이르는 넓은 공간과 30여평 남짓한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울시는 2015년 벙커를 발견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일반에게 공개하는 시민체험 행사를 개최했는데, 이때 시민들의 의견을 수렵하여 문화시설로의활용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 부터 설계 및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사무실, 기게실 및 항온항습 시설등을 구비하며  SeMA 벙커는 현재 150여평의 전시장과 20여평의 역사갤러리로 탈바꿈했다. 동시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 및 관리를 맡아 2017년 10월 19일, SeMA 벙커라는 정식명칭으로 개관했다. 서울 시립미술관은  SeMA 벙커를 운영함에 있어 숨겨졌던 역사적 장소로서 공간이 지닌 원래의 맥락을 부분적으로 살리는 한편, 이를 지속적으로 상상과 생산의 공유공간으로 만들어 가고자한다. 역사갤러리는 이러한 서울 시립 미술관의 운영철학을 반영하며 SeMA 벙커의 정체성으 보존하고 구축하는 공산이다. 2015년 벙커를 일반에게 공개한 이후, 역사적 장소에 대한 원형보존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서울시의회의 의견을 수렴하여 역사갤러리는 리모델링 후에도 시민 체험 행가 당시 에 공개한 상태로 유지, 운영하기로 결정 되었다.

이에 서울 시립 미술관은 이 공간에 벙커의 역사를 떠올리거나 되짚어볼 수 있도록 관련자료들을 전시하는 한편, 새롭게 SeMA 벙커의 역사성과 미학적 특성을 반영하는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선보임으로 써 이곳을 단순한 기록보관소 의미가 아닌 미래를 향해 열리는 가능성들로 채워나갈 계획이다. 


이 계단은 SeMA벙커의 기존 출입구 중 하나로, 여의도 환승센터 2번버스 승강장 아래 위치해 있습니다.

현재 보행자 안전을 위해 페쇄 조치했습니다.


여의도의 역사

홍수때마다 잠기던 모래 벌판  대한민국정치. 금융중심지로 변모

여의도는 조선시대 잉화도 (仍火島) 라의주(羅義州)라 불리던 섬으로, 홍수에 잠길 때조차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던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사람들이 '나의 섬"" 너의 섬"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날 여의도 (汝矣島)로 되었다도 알려져 있다. 모래땅으로 이루어진 불모의 벌판 이었으나, 1916년 일제강점기에 간이비행장이 건설되면서 비행기지로서 여의도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2년 12월, 이곳을 토애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安昌男)의 모국방문 비행이 이루어 졌으며, 광복 직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곳으로 입국했다. 이후 여의도 비행장은 미군공군기지로 활용되자가 1955년우리 공군에 인수되어 1971년 성남시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공군본부로 사용됐다. 1968년 서울시는 여의도 개발을 위한 윤중제 (輪中堤)축조 등 도시게획사업에 착수했다. 윤중제는 착공 반년 만에 완공됐으며, 1970년 5월, 여의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6차선의 마포대교가 개통되면서 신시가지 발전이 가속화됐다. 1971년 9월29일, 여의도 한복판에 5.16광장 (現여의도공원)이 조성되어 국군의 날 행사를   비롯한 대규모 행사개최지로 활용했다. 1981년 10월, 4차선의 원효대교가 개통되면서 여의도와 용산구 원효로 4가를 연결 했으며, 현재는 국회의사당, 각종 언론사 및 금융관계사,서울국제금융센타 (SIFC), 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서며 정치. 금융의 메카로 자리메김했다.


조선시대 동국여도 - 도성도


우리나라 최초의비행장 - 여의도 비행장


1955년 여의도 비행장 모습


1968년 여의도 개발공사 기공식


1968년 개발 당시 여의도 전경


1958년 여의도 비행장 전경과 샛강

자료: 영등포구 포토소셜 역사관


1968년 여의도 제방공사


1968년 여의도 개발 당시 공사현장


1970년 5.16 광장 완공모습


1971년 5.16광장 조성공사 당시 여의도 모습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준공식


1972년 5.16일 광장 반공궐기대회


여의도 국회의사당 신축 전경


1975년 여의도 아파트 단지 전경


1984년 요한바오로2세 방한 자료 ; 한국정책방송원


1981년 여의도 국풍 81 자료 ; 한국정책방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