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2.개항기.구한말

제국의 후예들

동방박사님 2021. 11. 30. 07:05
728x90

책소개

이 책 《제국의 후예들》은 가파르게 굽이친 한반도 근현대 100년사의 발화점이자 심장부인 대한제국 황실의 이야기다. 무능했던 대한제국 황실에 망국의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했지만 사실 이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자리조차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이 땅 권력자들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거나 이용당하면서 누구보다 심한 부침을 겪었다. 《제국의 후예들》은 이들의 삶을 있었던 모습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한반도 근현대사의 빈 페이지를 채우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저자는 대한제국 후예들의 온전한 자리를 찾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뒤졌지만, 그 기록들의 옥석을 가려내는 일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1차적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이방자의 여러 자서전조차 대필자에 의해 내용이 첨삭되었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믿을 만한 기록과 사실을 발라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황실에 대해 서술한 대부분의 저서와 언론은 내용 확인이나 취재원에 대한 정확한 명시도 없이 떠도는 이야기를 그대로 싣기 일쑤였다. 역사를 기술하는 태도가 감정적이다 보니 황족들의 독립운동이라면 덮어놓고 사실을 부풀렸고 일제의 잔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대를 끊기 위해 일제가 석녀(石女)인 이방자를 영친왕과 맺어주었다거나 덕혜옹주가 일본인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얻어맞아 유산했다는 소문은 우리가 한 세기 동안 그 시대를 얼마나 감정적으로 인식해왔는지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책 《제국의 후예들》에서는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 의친왕 이강과 덕혜옹주, 영친왕의 아들 이구 등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가 소개된다. 거기에는 민갑완과 이구의 전 부인 줄리아 뮬록, 황적에 올랐던 이강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 그리고 황적에 오르지 못한 후예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제법 비중 있게 소개하는 민갑완은 어려서 이은의 간택단자를 받았다는 이유로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야 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조선 황족과 일본 황족의 정략결혼, 소위 일선융화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비록 황족은 아니지만 그녀가 감내한 세월 속에는 대한제국 황실 그 누구의 삶보다 장중하고 애절한 역사가 서려 있다.

황족들은 그들의 나약함이나 무능함과는 상관없이 몰락해가던 대한제국 민중들에게 희망의 불꽃이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들의 이야기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의친왕 이강은 무수한 풍문과 논란의 진원지였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주색으로 허송세월했다고 폄하했지만 진위여부가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민중들은 그의 빛나는 독립운동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해방 후, 황실의 재산을 악착같이 빼앗으려던 정부의 등쌀에 밀려 황실 후예들의 삶은 고단해졌으며, 언론과 대중들은 '거지가 된 왕자'와 같은 선정적인 이야기에만 흥미를 가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한제국 후예들과의 수차례에 걸친 만남과 전화통화를 통해 이들의 현재 삶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프리랜스 르포라이터로 활동해온 저자는 수백 권의 관련서와 당대 신문, 잡지를 샅샅이 살피고 관련 인물들을 만나 꼼꼼히 취재하면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복원해냈다. 원고지 200매 분량의 방대한 주석이 저자가 얼마나 성실하게 원전을 읽고 분석해왔는지 짐작케 한다.

저자가 우직하게 기록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간 우리가 스스로의 역사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어둠 속의 공간으로 인식돼왔던 '과거'의 이야기가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전하는 목소리는 무엇인지를 새롭고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저 : 정범준 (鄭範俊)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부산으로 이주했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다 졸업했다. 추첨으로 1986년 금성(錦城)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제일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됐다. 그곳에서 나는 평생의 지기(知己)를 만났다. 금성고 졸업(1989년)은 롯데 자이언츠 창단 어린이회원 활동(1982년)과 함께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경력이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1997년 8월)했고,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에서 잠시 공부했다(2000년 1학기). 2000년 5월 [넷벤처]라는 잡지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7개월 만에 잡지가 폐간되어 실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일자리를 구할 때마다 함께 일하게 된 동료와 상사들이 한결같이 좋았다.

지금까지 『제국의 후예들』, 『이야기 관훈클럽』, 『거인의 추억』, 『작가의 탄생』, 『마흔, 마운드에 서다』,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 『돌아오라 부산으로』, 일곱 권의 책을 냈다. 이 책은 정범준이란 필명을 건 여덟 번째 책이다. 이 필명에는 나를 포함한 네 사내의 인연과 우정이 깃들어 있다.
 

책 속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은 대한제국의 상징을 꺾어버리려는 세력과 그를 향한 민중들의 소리 없는 비원 사이에서 가시밭길 같은 삶을 살았다. 도망칠 수 없는 대한제국 황태자로서의 책무는 오랜 세월 그를 짓눌렀지만, 한편으론 긴 시간 동안 고난을 감내할 수 있던 힘이기도 했다.

해방 후에 그를 만난 한국인들은 50년 가까이 거의 일본에서만 생활했던 이은이 유창한 우리말을, 그것도 '우아한 궁중 용어'를 쓰는 데 경탄하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남몰래 우리말을 연습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모국어를 잊지 않고 그렇게 유창하게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93쪽
일본의 황족이었던 이방자의 본명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그녀는 일제의 전략에 의해 어려서 조선의 황태자 이은과 결혼해 평생을 이방자로 살았다. 파란 많은 시기에 타국의 황태자비로 가는 일은 그녀에게도 가혹한 일이었지만, 나라를 빼앗긴 설움으로 가득했던 조선인들에게 이방자는 망국의 상징일 뿐이었다. 민중들은 그녀를 대한제국의 대를 끊기 위해 일제가 보낸 석녀로 몰아갔다. 이방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조선 민중들의 불만과 일본 황족들의 미묘한 시선을 견디는 와중에 큰아들의 죽음과 두 차례의 유산을 겪었다. 끝없이 이어진 불행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침대를 떠날 수조차 없었던 남편과 환국한 뒤, 이방자는 홀로 복지사업에 힘을 쏟았다. 장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감내해야 했고, 그녀가 눈을 감는 날까지 이방자를 둘러싼 수선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방자는 자신과 이은의 일생이 이방자는 자신과 이은의 일생이 “한일문제를 배경으로 한 파란에 충만된 드라마”였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그리고 이은과 함께 처음 환국할 때 “아! 마침내 파란만장한 여로가 끝이 났구나!”라고 감회에 젖은 듯 쓰고 있다.
--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