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4.한일관계역사

소가씨 4대 : 고대 일본의 권력가문

동방박사님 2021. 12. 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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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미완의 왕조 소가씨 100년의 흥망
일본고대 최고·최대의 권력가 소가씨 집안을
천황, 외척, 도래인이라는 키워드로 파헤친다

고대일본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소가씨 가문
그 핏줄은 현재의 천황 집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소가씨 가문은 6~7세기 동안 4대에 걸쳐 번영하였다. 그런 일본고대의 권력가문이 한반도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계 씨족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현재 천황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 ‘소가씨의 핏줄’이 어떠한 흐름 속에 자리매김하였는지,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관계, 특히 백제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와의 관계를 시야에 두면서 살펴본다.

목차

머리말·100년 권력 소가씨 4대 이야기

제1장 이나메와 긴메이 천황

제2장 우마코와 스이코 천황, 쇼토쿠 태자

제3장 에미시·이루카와 조메이·고교쿠 천황

맺음말·현재 천황까지 이어지는 ‘소가씨의 핏줄’

저자 소개 ()

저 : 나행주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유학하여 일본고대사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고대사, 고대 한일관계사, 도래인 및 도래씨족, 동아시아 고대의 정치문화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대진대학교 일본학과 강의교수, 일본사학회 연구이사를 거쳐 현재 한일관계사학회 편집이사 및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건국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로 있다.

저서로 『왜 일본에 사무라이가 등장했을까』가 있으며, 공저한 책으로『일본고중세사』 『역주 일본서기 1·2·3』 『동아시아 속의 한일관계사』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현황과 과제』 『문답으로 풀어 본 왕인박사』 『한일관계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일본문화사전』 『임나문제와 한일관계』 등이 있다. 역서로는 『일본의 봉건제』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이 책이 검토 대상으로 삼은 역사의 주인공은 645년에 발생한 다이카개신(大化改新: 이른바 을사의 변)까지의 일본 고대사의 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소가씨 집안의 사람들이다. 특히 소가씨 본종가(본가)를 형성한 소가노 이나메(稻目)-우마코(馬子)-에미시(蝦夷)-이루카(入鹿)로 이어지는 소가씨 4대다. --- p.7

‘소가’라는 씨족명에 대해서는 거주지 주변에 서식하는 식물 ‘스가’(골풀)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좀 더 주목되는 점은 소가씨의 거주지인 소가 지역에 ‘구다라가와(百濟川)’, 즉 ‘백제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소가씨와 백제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한편 소가씨 가문의 계보 중 마지(滿智)·가라코(韓子)·고마(高麗) 등 한반도와 관련된 이름이 보이고 있다는 점, 소가씨가 그 아래에 아야(漢)씨·후네(船)씨 등과 같은 백제계 도래씨족을 다수 거느리고 있는 점, 소가씨 가문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대외정책에 있어서 친백제 정책을 견지하고 있는 점, 목만치와 마지가 동일인물로 추정되며 백제 목(木)씨의 후예로 볼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소가씨 집안을 한반도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계 씨족으로 보아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 p.29

오늘날에도 이 게이타이 천황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즉, 지금의 일본 천황은 계통적으로 따지고 올라가면 바로 이 게이타이 천황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6세기 초에 성립한 게이타이 천황의 왕조는 이후 무너지는 일 없이 일본열도 전체의 최고 지배자 가문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왕위계승분쟁도 있었고 분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대왕가의 왕통은 게이타이 천황의 등장 이후 안정적으로 확보되었으며, 다른 가문으로 대체되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메이지시대 이후의 근대에 들어 일본천황가의 만세일계를 표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50

이나메와 도래인(각종 박사·승·기능인 등)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반도 특히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온 도래인들은 전문 관료·테크노크라트 및 외교사절로서 활약하고 율령 및 각종 사서편찬에도 직접 관여한 사실들이 주목된다. --- p.60

이처럼 한반도에서 건너온 승려와 박사·학자·시학사(학사) 등은 기본적으로 왜 왕권 내의 차기 왕위계승 후보자를 포함한 유력 왕가나 유력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제왕학이나 유교·불교 등 학문이나 사상을 교수하였다. 나아가서는 왜국의 대외적 혹은 대내적인 정책입안이나 시행에도 일정한 관여나 지도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p.68

결국, 소가씨는 국가 재정을 담당하고 도왜인(도래인) 출신들을 활용·중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이를 배경으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신흥호족 중에서 가장 유력한 호족으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 pp.74~75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설사 형식상으로는 섭정 쇼토쿠 태자와 오오미(大臣) 소가노 우마코가 공치(共治)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권력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소가씨, 즉 우마코의 손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고 현실적인 이해일 것이다. --- p.80

따라서 그 결과로 소가씨의 피를 받은 왕족은 나라(奈良) 시대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소가씨의 피는 황실에 면면히 이어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가씨의 피가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와의 결합에 의해 그 정치적 후계자로 등장한 신흥 귀족 후지와라씨에게로 수혈되면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