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일본학 연구 (책소개)/3.일본근대사

일본근세의 서민지배와 검약정치

동방박사님 2021. 12. 9. 09:28
728x90

책소개

『일본근세의 서민지배와 검약의 정치』는 저자가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동안에 일본에서 발표한 2편의 논문과 한국에 돌아와 전문 학술지에 발표한 5편의 개별 논문을 토대로 저술한 책이다. 에도 막부 시대에 일본을 점령했던 상인 지배정책 가운데 검약령을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단순한 사치금지나 상품경제를 통제하려는 봉건적인 지배이념이 아닌 서민경제 내지 민중새활의 안정을 꾀한 막부의 지배정책으로 해석하면서 넓게는 근검절약이라는 허울 아래 정치적 지배를 꿈꾸는 세력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다.

인간 사회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보편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기 전까지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공유해 왔다. 생산물의 과도한 소비를 막고 한정된 재화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치와 허영은 죄악시 되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적인 농업경제를 이상으로 삼은 조선사회에서도 검약과 절제는 위정자가 지켜야 할 최고의 미덕이었다. 시정의 사치스런 풍속은 기성 질서를 무너뜨리는 중대한 도전행위로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사치는 법률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탕평책과 균역법을 실시했던 개혁군주 영조는 몸소 검약을 실천하며 재위중 수차례에 걸쳐 금주령과 사치금지법을 발령하였다.

이렇게 검약을 몸소 실천하며 온 국민에게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벌여 검약을 강제하고 절대권력을 실감케 했던 독재자의 존재는 일본의 에도시대에 등장했던 권력세력들과 닮아 있다. 개혁을 표방하며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검약’은 민중의 일상생활에 개입하고 통제하기 위한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 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몸에 밴 대통령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일 사상 최대의 이익을 실현하는 일부 대기업과는 대조적으로 ‘반서민적인’ 친서민정책 탓에 높은 물가고에 시달리며 원치 않는 검약과 절제를 강요당하는 오늘날, 검약의 정치는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옥죄고 있다. 이렇듯 일본의 에도시대에 군중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검약의 정치가 지금도 대중 모르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책은 말하고 있다.

목차

간행사
일러두기

제1장 서민 지배와 검약
제2장 17세기 막부 검약령의 전국적인 전개
제3장 18세기 막부 지배의 안정과 도시 지배정책의 전개
제4장 도시사회의 변화와 '조 운용경비 절감령'의 시행
제5장 농촌사회의 변화와 검약규약의 제정
제6장 19세기 막부 지배의 동요와 검약의 강화
제7장 근대국가의 수립과 ‘근검저축’의 장려
맺음말


저자 소개

저자 : 박진한
1971년 출생. 일본 근세사 전공. 연세대학교 사학과 및 동양사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2004년 일본 교토대학에서 「일본 근세 검약령의 연구-에도 막부 검약정책의 전개와 민중의 대응」이라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세중후기 상방지역의 검약촌정에 관한 연구」,「에도시대 촌락규약의 제정과 촌락운영-'기나이'지역을 중심으로-」,「무사도의 창안과 현대적 변용-근대 일본의 국민도덕 만들기-」,「에도시대 상층농민의 여가와 여행」등의 논문과 『기억의 전쟁-미화와 추모 사이에서』,『공간 속의 시간』의 저서가 있다. 현재 일본사회의 문화적 전통과 근대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에도 시대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수행중이며 인천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판사 리뷰
흔히들 일본을 연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 중의 하나가 바로 ‘검소함’이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국가의 거대한 경제력에 걸맞아 보이지 않는 (초라해 보일 정도의) 작은 주택이라든가 검소한 생활태도, 소형차는 패전 이후 일본이 단기간에 경제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던 비결로 간주되곤 한다. 비단 외부의 시선뿐만 아니라 검약과 절제는 일본사회를 타자와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이야기되어 왔다.

검약이 일본사회의 ‘미덕’ 혹은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일본사상사 연구자인 야스마루 요시오는 “근세 중기 이후 상품경제의 진전으로 농촌사회에서 계층분화가 심화되고 경제적인 곤궁이 심각해지자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서민에게 처세술을 강연하는 이들이 검약과 근면 등의 가치관을 소개, 장려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통속도덕이 일본사회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과연 이러한 설명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이번에 박진한 교수가 펴낸 일본 근세의 서민지배와 검약의 정치는 이러한 문제를 밀착해서 다룬 책으로 일본 근세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과거나 현재나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주제로서 관심이 크게 가는 주제다. 저자는 검약을 일종의 통속도덕이라고 보고 사상과 종교에 의한 내면적인 자기혁신의 결과로 보려는 야스마루와 같은 종래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검약 문제를 어디까지나 ‘사회적 제도화’의 결과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검약 같은 가치관이 일반 다수에까지 보편적인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단지 개인의 의식적인 ‘자기 형성 내지 자기 수련’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이나 공동체의 내규를 통해 강제되는 사회적 제도화가 더욱 중요한 기제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에도 시대에 농촌과 도시에 살던 주민들이 작성한 ‘규약집’을 소재로 삼아 막부의 검약령이 사회구성원에게 전파, 강제,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에도 막부는 1615년 도쿠가와 장군과 다이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무가제법도에서 “제국의 사무라이는 검약해야 한다”고 규정한 이래, 무사계층이 지켜야할 중요한 생활윤리로 검약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640년대 전국적으로 대기근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대책마련 차원에서 서민의 의식주에 대해 강제적인 절검을 지시하면서, 검약은 서민지배를 위한 구체적인 통치행위로 인식되었다. 이후 에도 막부는 사농공상의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사치품은 물론이고 일상용품에까지 제각기 신분에 걸맞은 소비한도를 세밀히 규정한 ‘검약령’을 제정하여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막부의 검약령을 토대로 하여 17세기 후반 이후, 가미카타(오늘날의 교토와 오사카 주변) 지역의 농촌에서는 촌민의 일상생활은 물론 축의행사와 오락 등에 관한 절검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검약규약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개인생활의 간섭과 통제를 수반하는 촌민들의 검약규약 제정을 단순히 막부로부터의 지시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들은 혼례나 장례 같은 행사를 간소화하여 얻은 이익을 마을공동경비로 사용하여 절검 효과를 촌락 전체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촌민들이 작성한 규약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실은 봉공인의 임금과 처우를 제한하고 촌락행정인의 의복을 예외로 인정하는 등, 상층농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조항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근세 중기 이후 봉공인이나 와카모노같은 촌락내 하층민의 발언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 가던 촌락행정인과 상층농민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검약규약을 주도적으로 제정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다시 말해 촌민들이 작성한 검약규약 안에는 마을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검약조항과 상층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봉공인일용의 임금조항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이 같은 검약규약의 이율배반성은 상품경제의 진전에 따른 촌락 내부의 갈등과 모순, 즉 하층농민과 상층농민 간의 대립관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도시 거주자인 조닌 스스로 검약에 관한 규약을 제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7세기 후반 이후 치안, 청소, 화재진압 등의 행정업무가 점점 늘어나면서 이를 책임져야 할 조닌의 경제적 부담은 계속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해 에도 막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조 운용경비 절감령’을 발령하였다. 조닌들은 막부 지시를 토대로 지역공동체이자 행정단위인 ‘조 운용경비를 절감하기위해 조 규약을 새로이 작성하거나 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규약에는 단지 조 운용경비의 절감에 관한 조항뿐만 아니라 역시 이들과 고용관계에 있던 점원이나 봉공인에게 검약을 강제하고, 이를 어긴 자에게는 교화권까지 행사하는 내용이 담겼다. 도시에 거주하며 영속적인 가업경영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 검약과 절제의 가치관을 중시했던 조닌들은 그들과 고용관계를 맺은 봉공인에게까지 이를 강요함으로써 검약을 빌미로 이들의 일상생활에까지 개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검약은 야스마루의 지적대로 영속적으로 가업을 유지하고자 했던 상층 조닌과 유력 농민의 입장에선 자발적인 ‘자기 형성 내지 자기 수련’을 통해 내면화해야 할 생활윤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특별한 재산이나 재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봉공인이나 하층민에게는 단지 그들의 임금과 처우를 제한하고 일상생활을 간섭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검약이 일부 자산계층을 넘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확대, 전파, 수용되었던 것은 사상이나 종교에 의한 의식적인 노력에 앞서 지배권력의 법령과 지연공동체의 규약 등을 통한 강제적인 사회적 제도화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메이지 신정부 하에서도 검약은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정치 혼란과 재정 부족으로 효과적인 기민대책을 실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상무성에서는 농촌의 황폐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885년 제급취의서를 제정하고, ‘농업생산력 강화’와 ‘저축 장려’를 주된 해법으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정부정책은 황폐화된 촌락 갱생과 지역 자치의 돌파구를 모색하던 호농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주도 하에 근검저축조합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저축장려운동은 “각자 저축에 열심히 노력해 구휼의 예비로 삼을 것”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 잉여의 축적보다는 구황 대비라는 측면이 더욱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정부의 저축장려 정책은 청일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1898년 6월 당시 대장성 장관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미숙한 은행 제도를 보완하고 금본위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치의 일소와 함께 우편저축제도 등을 통해 관민이 일체가 되어 소득증가분을 저축하도록 강제하였다. 결과적으로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지도 아래 ‘저축’은 이제 명실공히 ‘검약’을 대신해 국가의 자주독립과 촌락의 자력갱생을 가져오는 생활윤리이자 민중의 경제생활을 통제하는 유력한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역사와 일본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우리에게 생소한 일본 근세사회를 세밀히 다루면서도 우리에게도 익숙한 검약 문제를 다루고 있어 일반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고 시사하는 바도 많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