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문학의 이해 (책소개)/3.한국문학

풍금이 있던 자리 (신경숙)

동방박사님 2022. 2. 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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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실험적인 소설쓰기를 꾸준하게 실천하며, 한국 소설의 지평을 질적·양적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해온 작가 서정인의 독특한 장편소설. 소설사의 커다란 족적 『달궁』을 최측의농간에서 『달궁』 박달막 이야기로 새롭게 편집하여 개정 합본판으로 선보인다. 『달궁』은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저자 특유의 형식 파괴적 실험이 본격적/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출간 편의상 한 권씩 분리 되어 출간 되었던 세 권의 『달궁』(초판 『달궁』, 『달궁 둘』 『달궁 셋』)에 흩어져 있던 모든 소챕터들(각종 문예지를 통해 수년간 33편의 연작 중?단편 형식으로 발표된 바 있는)을 『달궁』 박달막 이야기라는 단일한 제목 아래 한 데 묶어 작고 가벼운 판형으로 새로이 단장하였다. 이번 개정 합본판 발간을 위해 저자는 직접 전체 원고를 면밀히 검토, ‘박달막 이야기’를 부제로 설정하였으며 초판에 있던 일부 오식을 바로 잡고 다수의 문장을 개작하여 작품 완성도에 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목차

『달궁』 박달막 이야기

차례

네거리 9 | 모래밭 11 | 등장가 14 | 만리포 16 | 다시 네거리 20 | 바다횟집 23 |이모네 집 고모네 집 26 | 매운탕 29 | 구토 32 | 조사 36 | 옛 이야기 39 | 소포 42 | 청산별곡 46 | 소포 속의 편지 49 | 추신53 | 오리 56 | 기도원 60 | 빼앗긴 것 62 | 탈출 65 | 군납 69 | 고향 73 | 여인숙 76 | 돌부처 80 | 스승 83 | 제자 86 | 탕자 90 | 우는 남자 93 | 어머니와 아들 96 | 행복 99 | 형사 102 | 항산 항심 106 | 광기 110 | 권사 114 | 현미 117 | 안정 121 | 욕심 125 | 기도 128 | 가시철사 131 | 주천 산장 135 | 언니 138 | 이사장 142 | 도구 145 | 완행 148 | 머리 152 | 낯선 사람들 156 | 아우님 160 | 형님 164 | 제수 168 | 조카 171 | 유괴 174 | 손가락 177 | 오누이 180 | 괴수 183 | 두목 187 | 법 190 | 주먹 193 | 물길 197 | 불길 200 | 차석 203 | 말석 206 | 치기 209 | 박기 213 | 정 216 | 피아노 219 | 혼자 소리 222 | 싸구려 인생 225 | 공갈 228 | 똥 멍청이 231 | 양광 235 | 수작 238 | 방법 240 | 이모 244 | 헌뫼와 고우내 246 | 노파 248 | 친구 251 | 앵보 254 | 변명 257 | 허방 260 | 비석 263 | 빈말 266 | 보호 270 | 대화 273 | 진단서 276 | 내간체 279 | 협박 282 | 화해 285 | 새벽 288 | 버리고 가기 291 | 쥐뿔 294 | 이우딧과 홀로벨넷 297 | 외경 301 | 밤차 304 | 길음동 307 | 잠수함 310 | 합작 313 | 하마 316 | 낮술 318 | 주근깨 321 | 도깨비 방망이 324 | 아버지의 집 327 | 야바위꾼 331 | 적과 친구 334 | 조장 337 | 뽄 딸지 마 340 | 염병 343 | 역전 346 | 윷 350 | 낙 353 | 악질 356 | 상습 359 | 고백들 362 | 사냥 365 | 매치 불치 368 | 춘치 371 | 기억 374 | 불가사리 377 | 단결 380 | 서문 383 | 부국강병 386 | 호가호위 389 | 이빨 392 | 손톱 394 | 주먹밥 397 | 니나노 400 | 당상관 403 | 광화문 407 | 동남아 411 | 문산리 414 | 영내 회관 417 | 김치 420 | 장례식 423 | 정표 426 | 옥말 429 | 목마 431 | 촌지 434 | 물리 438 | 도덕 441 | 생물 444 | 경제 447 | 종돈 450 | 구호 453 | 착각 456 | 백중 459 | 성터 462 | 고궁 466 | 불빛 470 | 희망 473 | 원동진여회 476 | 유유상종 479 | 식장 482 | 주례 485 | 하객 488 | 봉선화 491 | 구파발 494 | 대서문 497 | 외판원 500 | 우이동 503 | 파락호 506 | 발바닥 509 | 토끼 귀 512 | 대답해 515 | 스승들, 518 | 밖으로 520 | 안으로 523 | 기름밥 526 | 우등생 529 | 낭떠러지 532 | 앞잡이 536 | 수구초심 539 | 파포리 542 | 출상 545 | 매장 548 | 성토제 551 | 마적 554 | 사해동포 557 | 공룡 560 | 금반지 564 | 돌잔치 568 | 살의 571 | 해방 574 | 돈 세상 578 | 웃음 581 | 내 딸아 584 | 누나야, 강변 587 | 친구 따라 강남 590 | 연수회 593 | 저녁 597 | 아침 600 | 점심 603 | 탈 606 | 한밤의 음악편지 609 | 오팔 612 | 삼삼 615 | 발 없는 말 619 | 평생 622 | 갈피 625 | 무슨 호랑이? 628 | 몫 631 | 호상 634 | 영팔이와 장삼이 637 | 식읍 640 | 새댁 642 | 흰자질 645 | 위안 648 | 부창 651 | 부수 654 | 불평 660 | 치과 664 | 불만 668 | 출산 671 | 절도 674 | 공범 677 | 원죄 680 | 무능 683 | 업보 686 | 일락서산 689 | 을숙이 692 | 소 695 | 유령 698 | 망령 701 | 쉬슨 염통 704 | 새살 헌살 707 | 삼종 710 | 사무장 713 | 고아원 716 | 상품 719 | 다다익선 722 | 지피지기 725 | 지푸라기 728 | 떨이 팔이 731 | 딸의 편지 734 | 속 편지 737 | 왕 목사 740 | 인도 사람 743 | 용종 746 | 대장촬영 750 | 이반 일리치의 죽음 754 | 연천 영감 757 | 조직 검사 760 | 목포의 눈물 763 | 중농주의 766 | 중상주의 769 |
어부사 772 | 섬 선생 775 | 낙엽과 꽃 778 | 춘화 추실 781 | 따귀 784 | 억지 787 | 음모 790 | 복수 793 | 면회 796 | 달아나기 801 | 제 발로 804 | 화색 807 | 증인 810 | 의경 813 | 의부 816 | 시비 819 | 악취 822 | 소독 825 | 누이 828 | 동병상련 831 | 권토중래 834 | 가포의 연가 837 | 문학의 밤 840 | 연인 843 | 빨간 합승 846 | 심부름 849 | 일기장 852 | 조양문 855 |


부록

책머리에 861
저자 후기 863
달궁 연표 866
 
저자 소개
저 : 서정인 (Suh,jung-in)
 
1936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정인의 소설은 삶의 꼼꼼하고 섬세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작품 전체의 충전된 삶의 우울한 그림자가 있다. 충전의 전원은 우선은 그의 문체에 있다. 또한 그는 언어의 음감과 의미를 정교하게 균형 잡는 ‘스타일리스트’, 혹은 ‘말과 소리의 리얼리스트’로 평가받는다. 서정인의 「강」과 「나주댁」은 1960년대 소설이 획득한 뛰어난 서정성의 ...
출판사 리뷰
“네 눈의 불빛은 빛을 못 보아도 불빛이다.”

망각의 시간을 뚫고 귀환한 한국 소설의 기념비, 최측의농간이 출간하는 첫 소설, 서정인 장편소설 『달궁』 박달막 이야기 개정 합본판.


달궁이라는 이름의 세계

오래 견딘 것들의 힘은 은근하다.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힘의 밀도가 높다는 것을, 우리는 『달궁』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달궁』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만 못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오래 불안하였던 우리는 무엇보다도 독자들에게 『달궁』이라는 이 막막한 소설의 숲을 직접 거닐어보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달궁’은 뱀사골에서 지리산 속으로 5킬로미터 정도 더 들어간 산속 오지의 지명이다. 이 책 『달궁』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달궁’이라는 단어 자체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지리산이라니, 늘 대도시 근처에서 먼지의 황량한 흐름만을 바라보며 유년을 보냈던 우리에게 지리산은 차라리 ‘환상 속의 어떤 곳’과 다르지 않은 장소였다. “경치 좋고 평화로운 이 산골의 울림소리 좋은 이름 속에 저자는 혹시 그가 쓰고 싶어 하는 것의 상징적 함축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저자 서정인은 『달궁』(1987)의 초판 서문에서 자신을 삼인칭화하여 쓴 바 있다.

기존에 절판되어 있던 『달궁』을 완독해본 독자들은 간파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쓰고 싶어 하는 것의 상징적 함축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스스로조차 명확히 계산해놓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달궁』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 독자들에게 그가 언급했던 상징적 함축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애초 그는 흔히 일반적인 소설에서 기대할법한 명료하고 단순한 상징들을 배제해나가는 과정으로 개별 「달궁」 에피소드들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언급했던 상징적 함축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것은 소설의 부분 부분에서 나고 죽기를 반복하며 그 자체 새로운 상징적 함축의 가능성을 부단히 확장하고 있는 중이 아닌가 짐작해볼 뿐이다. 그렇다. 그것을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독자들에게 『달궁』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완결되지 않음으로서의 완결. 최측의농간은 소설 『달궁』 박달막 이야기의 운명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독창적인 형식실험의 구현. 80년대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한 지평을 열었다는 정도의 수사만으로 손쉽게 소개할 때, 『달궁』이라는 작품의 심원함은 소실되어버릴 수 있다.

진행형의 지옥도, 혹은 억압된 목소리들의 몽타주

수많은 줄거리가 비선형적으로 얽혀 있어 편히 읽어나가기가 힘들다는 것. 처음 『달궁』을 접한 독자들이 보일 수 있는 일반적인 토로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만난 『달궁』의 첫인상 또한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러므로 독서의 여정 내내, 읽고 넘어간 부분을 다시 들추거나 아직 읽지 않은 부분까지를 수시로 더듬거리며 『달궁』의 세계에 접속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그러나 모든 사건들의 뼈대가 되는 큰 이야기 줄기 하나를 『달궁』 속 곳곳에 튼튼히 심어 놓았다. ‘인실’이라는 여성의 기구한 삶이 바로 그것이다. 6?25 전쟁 통에 미아가 되어 여러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던 그녀는 소설 속에서 한국 현대사(특히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의 질곡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삼촌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강간을 ‘당하기도 한다’라고 쓰는 이유는 강간이라는 끔찍한 폭력의 불행이 사소하거나 특별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혹은 그와 다른 밀도와 종류의 끔찍하고 기구한 불행들이 그녀의 삶에 가득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인실’이라는 한 개인의 비극적 인생행로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온 국민이 국가성장담론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되었던 산업화 시대의 기구함과 포개지는데, 따라서 우리는 인실이라는 인물을 『달궁』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손쉽게 못 박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실의 삶에 관련된 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이 인실의 삶(주인공으로서의 삶, 혹은 시선)에 종속되거나 도구화/장식화 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풍성하게 『달궁』의 세계와 만날 수도 있다.

주의 깊은 독자들이라면 각계각층 다양한 군상으로서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 -그 인물들에는 화자와 작가 자신도 포함된다- 이 독립적인 시선이나 관점을 획득하기도 하며, 다른 맥락의 서사를 이끌기도 하면서 소설 속 큰 줄기의 사건 전개에 직간접적으로 상호 영향을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혹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과 사건들 또한 『달궁』의 중요한 부분이자 전체로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말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 되었던 역사의 현장에서 파편화 되어가는 주체들, 다양한 계층의 억눌린 목소리가 이 책의 구석구석에 다채로운 형태의 조각글로서 새겨져 있다. 그 목소리들은 산업화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모순의 상황을 견디며 스스로 모순 그 자체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계층 군상들의 초상과 다르지 않다. 활자의 형태로 형상화된 그 목소리들은 ‘인실’의 비극적 삶의 형상과 맞물려 낱낱의 조각글이라는 형태를 통해 당대라는 거대한 세계상을 그려내는 몽타주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몽타주는 ‘소외’를 강요당하는 주체들이 소외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에 따라 우리는 『달궁』이 전하는 진실 한 자락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입장들은, 억압이나 왜곡, 오해 없이 통합되거나 해소될 수 없다는 것. 그것들은 애초에 통합하거나 해소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간신히, 공존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작가 서정인은 그렇게 소설이라는 이름의 몽타주를 통해 현재진행형인 산업화시대의 지옥도를 생생히 재현해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비틀어진 세상을 비틀어 말하는 일

지금은 소설에서의 다양한 형식실험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달궁』의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1987년) 이 소설의 형식 실험적 면모는 단연 놀라운 예술적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소수의 시인들이나 소설가들만이 열어젖힌 어떤 지점을 작가 서정인은 『달궁』의 발표를 통해 이룩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빽빽한 목차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소제목을 가진 수많은 조각글들의 집합으로 『달궁』의 큰 구조는 험준한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각 조각글들은 200자 원고지로 10매에서 15매 정도이며 작가가 일반적인 단편소설 분량으로 몇 조각씩 묶어 문예지에 발표했던 것이다. 각 조각들은 대체로 하나의 사건이나 장면을 가지고 있지만 복수의 그것도 산재하며 그 자체 완결된 느낌을 주는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많은 개별 조각들이 인과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무질서하게 섞여 배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조각들은 모두 이야기의 어떤 한 부분만을 크로키하여 포착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조각에 따라서 시점과 화자 또한 무작위에 가까운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미로에 빠진 기분을 느끼기 십상일 수 있다. 이 미로는 그러나 탈출의 희망이 요원한 극악 난이도의 미로가 아니다. 주의를 기울이며 차분하게 몇 십 개의 조각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의 관계와 펼쳐지는 사건의 윤곽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려지기 시작하는 그림을 나침반 삼아 우리는, 평론가 이남호의 『달궁』 읽기의 한 인상적인 대목을 떠올려 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으리라. “달궁의 형식적 특수성은, 삶의 잠재적 가능성의 혼돈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우발적이고 미필적인 실현들을 보편적이고 완전하게 드러내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유기적인 듯 유기적이지 않아 보이는 조각글들의 구성을 요연하게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달궁』의 독특한 문장, 즉 이른바 ‘요설(妖說)체’로 일컬어지는 서정인 특유의 개성적인 문체와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작품 행로에 있어 중요한 한 분기를 마련한 작품 「철쭉제」를 통해서도 우리는 서정인 특유의 요설적 문체를 체험할 수 있었지만 『달궁』에 이르러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를 가미, 보다 본격적으로, 독특하며 완성도 높은 요설체의 경지를 보여준다.

『달궁』 이후의 작품들은 모두 이 작품에서 실현한 문체적 성과를 근간으로 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 특유의 요설체가 도달한 경지는 놀랍다. 종종 4?4조의 판소리 가락으로, 때로는 가사(歌辭)문학의 운율과 형식, 민중의 애환이 서린 각종 민요의 형태로 드러나는 남도의 한 서린 풍월과도 같은 이 ‘소리말’들은 이야기의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잦아지기를 반복한다. 논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인, 시골 노인들의 중얼거림과도 같은 서정인 요설체의 언어들은 저잣거리 특유의 거칠고 진솔한 목소리들, 지배계급의 끝없는 수탈 속에서도 다시 또 하루를 견뎌가야 했던 민중들의 넋두리, 오래 수행으로 생(生)의 비밀 혹은 진실 한 자락쯤 깊은 화두로 던져낼 수 있는 선승의 중얼거림과 닮아 있다. 작가로서의 서정인은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 자연스럽게 체득했거나 듣고 배워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삶에 관한 진실의 여러 자락들을 남도의 한 맺힌 정서가 스며있는 이 요설체를 통해 넋두리하듯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궁』에 등장하는 말의 맛, 맛이 살아 숨 쉬는 말들의 향연은 독자들로 하여금 모국어로만 쓰여질 수 있는 소설을 모국어로 읽는 일의 복(福)됨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박달막 이야기

이번 개정 합본판 『달궁』의 발간을 통해 저자는 ‘박달막 이야기’라는 부제를 첨언하였다. 최측의농간 또한, 새롭게 달리는 이 부제의 무게를 살피기 위해 몇 마디의 첨언을 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서, ‘인실’이라는 여성을 『달궁』의 중요한 인물로 볼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는데 예견됨과 동시에 증언 되고 있는 그녀의 삶, 혹은 아명(兒名)에 관한 한 대목을 살펴보자.

“고모 이름을 몰라? 막딸라 마리아는 뭐냐?”
“딸막이는 이모 아명일 거야. 엄마가 어른들끼리 이야기할 때 이모를 분명히 딸맥이라고 불렀어. 딸맥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엄마는 머리를 내젓고 무서운 얼굴을 해보여. 난 하나도 안 무서운 데도.”
“우리 집에서는 고모 얘기는 아예 금기야. 난 아빠가 고모 얘기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개정 합본판 『달궁』 박달막 이야기 _본문에서

‘달막’은 ‘딸막’이며 ‘딸맥이’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들이 귀한 집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바라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끝순이, 딸맥이, 말순이, 말숙이 등의 이름을 대강 짓는 행위가 흔했다. 남아선호는 가부장제 질서를 유지케 하는 중요한 풍조다. 여성에게 부여된 그 대강 지어진 ‘이름’들은 이미 하나의 낙인에 다름없으며 당사자들/여성들이 맞이하게 될 험난한 생(生)의 은유이자 예고이기도 하다. ‘박달막’이라는 이름 속에는 ‘막달(딸)라 마리아’와 ‘딸맥이’의 은유가 공존한다. 우리는 가부장제 질서의 기저이자 사회 기능으로서 여성이 ‘어머니/창녀(Mother/Whore)’의 짝 이미지로 범주화되고 유통된다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 짝 이미지의 범주화와 유통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인실의 삶은 처절하게 증거 한다.
저자는 이미 오래전에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구빈이라니, 이름이나 제대로 불러라. 백성에게는 이름이 없다. 있는 이름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다. 이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중략) 먼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라.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을 오염시키지 말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을 가진 그 사람인 채 사람으로 대접하라. 그 사람의 과거의 기억을 훼손하려 하지 마라. 그 사람의 과거를 없애면 그를 죽이는 거다. (중략) 인실이가 특히 정직하거나 외롭거나 결벽한 것은 아니다. 그 여자가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그 여자의 주위가 너무 더럽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자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오염이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자는 단순히 그 여자 자신에게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 여자는 그 여자가 그 여자라고 주장했을 뿐이었다.
개정 합본판 『달궁』 박달막 이야기 _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일’이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달막 이야기’라는 부제는 『달궁』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자 하는 저자의 한 의지가 아닐까. ‘인실’ 말고 ‘달막’(딸맥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일, 그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일, ‘여성’이라는 것이 저주가 되는 세계를 살다간 한 여성의 기억을 훼손하지 않는 일,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충실했을 뿐인 한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호명하려는 한 의지가 아닌가? 우리 최측의농간은 작가의 이 의지에 다음과 같은 우리의 작은 의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포갠다. 기억을 훼손하지 않고 - 죽이지 않고 - 살리는 일, 시장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소설 『달궁』을 살리는 일.

늘 곁에 지니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달궁』을 위하여

“네 눈의 불빛은 빛을 못 보아도 불빛이다. 흙에 묻혔다고 금강석이 보석이 아니냐? 내 딸아, 너는 진주다. 다만 사람들이 흙만 보고 그 밑을 못 볼 뿐이다.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 잘못이고,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보물을 흙 속에 던져 버린 세상 잘못이다.”
개정 합본판 『달궁』 박달막 이야기 _본문에서.

그렇다. 어떤 작품은 스스로의 운명을 예견하기도 한다.

최측의농간에게 『달궁』은 활자들의 미궁이었으며 오래 견딘 단단한 활자들의 질서가 불을 뿜어대는 화염의 덩굴이었다. 그러나 그 화염의 덩굴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가슴 안에 지울 수 없는 한 화인을 남겼다. 그 덩굴 속에는 읽기의 고통과 기쁨이 득실거렸는데 그로인해 우리는 독자들에게 최측의농간을 통해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개정 합본판 출간을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 작가 ‘서정인’은 예술가의 장인정신이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절판된 지 오래된 방대한 분량의 원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손수 교정 교열 작업에 치밀하고 열성적인 자세로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문장들을 세심하게 손질하거나 어루만져서 『달궁』의 소설적 완성도에 보다 만전을 기했다. 개정 합본판에 새로 달리는 부제 ‘박달막 이야기’는 그러한 작가의 열정과 의지를 통해 새롭게 선보이는 『달궁』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박달막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몇몇 독자들에게 그 부제는, 필요 이상의 부연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달궁』을 둘러싼 이런 저런 신화화와 난독 혹은 오독에 대한 일종의 작가적 응답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독자들은 ‘박달막 이야기’라는 부제를 일종의 이정표 삼아 ‘달궁’이라는 세계에 새롭게 다가가볼 수 있을 것이다.

『달궁』이라는 세계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 독자들에게, 최측의농간의 외침은 무의미할 수 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이제, 이 놀라운 소설 『달궁』 _박달막 이야기를 완독해보길 다시 한 번 힘주어 권하고자 한다. 200자 원고지로도 4000매에 가까운 방대한 원고를 작은 판형 안에 모두 집어넣은 것은, 젊은 출판사의 이해받지 못할 객기 같은 것이 아니다. 작고 가벼운 판형으로의 단장에는 『달궁』과 다시, 혹은 새롭게 만나게 될 독자들이 삶의 곳곳에서 텍스트 자체와 보다 치열하게 밀착하여 조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던 우리 최측의농간의 한 열망이 담겨 있다.

빽빽한 조판으로도 900쪽에 가까운 막대한 원고의 양과 교차적으로 얽혀 있는 비선형적인 이야기들, 앞서 언급했던 형식 실험적 특성들로 인해 좀처럼 읽기의 진도를 내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답답함과 막막함, 지난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달궁』은 소설 읽기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초판 출간 30년 전, 절판된 지도 20년 가까이 된다. 오래 살아남았던 『달궁』은 결국 시장에서 사망선고를 받았었다. 그 선고의 부당함을 알리는 일, 이제는 풍문으로만 남은 소설에게 그가 온당히 지녀 마땅한 숨결을 되찾아주는 일, 『달궁』의 개정 합본판을 준비하며 우리가 오래 생각했던 것은 그런 일들이었다.

최측의농간은 『달궁』에 관한 몇 마디의 인상적인 말을 기다리고 싶었다. 죽비와 같은 단말마의 독후감이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하기를, 새롭게 단장하여 나오는 『달궁』과 만나게 될 독자들이 오래 잠 못 이루기를, 기다려보는 일. 우리는 이제 그 기다리는 일을 시작하고자 한다.

『달궁』과 반갑게 재회할 노련한 독자들, 새로운 시대에 『달궁』과 처음 만나게 될 패기 넘치는 독자들이여, 그대들 모두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오래 괴로울 수 있기를. ‘달궁 읽기’라는 고통과 쾌감의 끝에서, 고통은 고통이 아니었음을, 쾌감 또한 쾌감이 아니었음을, 독자들은 스스로 납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