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사회학 연구 (책소개)/2.여성젠더

사료로 보는 중국여성사 100년

동방박사님 2022. 5. 13. 07:16
728x90

책소개

근현대 중국 여성의 삶을 사료로 보다

조선에서 대한제국 시기 그리고 일제의 강저기 우리 역사는 전환기였다. 이는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말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근대라는 시대로 이행하며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태평천국운동, 신해혁명, 1,2차 세계대전 등이 바로 그러한 사건들이다. 천안문 사태 등 현대에 이르러서도 굵직한 사건은 연달아 발생했다.

이 책은 이러한 전환기에서 중국 여성이 어떻게 삶을 꾸려나갔는지를 조명한 책이다. 책에 실린 사료에는 여성의 해방에 힘쓰고 몸소 실천했던 그녀/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가정과 학교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철폐되었는지 그리고 여성이 어떻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히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목차

서(序): 전근대 유학이념과 현실

제1장|근대 중국의 개막: 청(淸) 말
01 기독교와 여성 서양과의 만남
02 태평천국과 의화단
03 부전족운동 속박을 풀어놓다
04 여학·여자유학생 지식에 대한 소망
05 청 말의 여성해방사상 추근과 하진

제2장|공화국의 성립: 1910년대
01 신해혁명 국가를 짊어지려는 뜻
02 임시약법·포양조례 ‘2급국민’으로서
03 참정권운동 제1차 페미니즘에 호응하여
04 여자중학교의 설립 현모양처의 장려
05 유교도덕 비판 가정에서의 탈출
06 아동공육논쟁 가정의 공죄(功罪)를 둘러싸고

제3장|대혁명시대: 1920년대
01 5·4운동 반역하는 처녀들
02 여자고등교육 대학의 문을 열다
03 국공 양당의 정책 여성운동
04 참정권 운동의 새로운 전개 내셔널리즘과 젠더
05 문명결혼 신문고시와 웨딩드레스
06 신(新)성도덕 논쟁 일부일처인가, 성의 자유인가
07 ‘매춘’ 문제 폐절을 둘러싼 논의와 활동
08 북벌과 여성 병사 「종군일기」
09 YWCA와 사회활동 배외주의에 저항하여
10 농촌여성 ‘근대화’의 그늘에서
11 여공 프롤레타리아의 탄생
12 신여성과 직업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제4장|분열 속의 근대화: 1930년대
01 새로운 혼인가족법 국민정부와 소비에트정부
02 우생학·산아제한 민족의 강화와 모체
03 물질문명과 여성 모던걸의 등장
04 신생활운동과 「부녀공작대강」 국공 양당의 여성운동
05 ‘여성은 가정으로 돌아가라’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06 식자·사회교육 문자를 알면 세계를 안다
07 소비에트구의 여성 병사와 장정 무기를 손에
08 ‘만주’의 여성 식민지에서 살다
09 항일구국운동 민족과의 일체화
10 국제적 여성교류 아그네스 스메들리와 하세가와 데루코

제5장|항전과 전후재건: 1940년대
01 ‘위안부’ 일본군에 의한 성적 가해
02 민주선거·헌정운동 법치와 민주를 찾아서
03 1943년 결정·토지개혁 여성정책의 전환
04 고아·이산가족 끊어진 유대
05 국제민주여성연맹·미군폭행항의운동 전후 세계체제 속에서

제6장|인민공화국 시대: 20세기 후반
01 모택동 사상과 여성 ‘남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성도 할 수 있다
02 부녀연합체제 국가가 구성한 여성조직
03 혼인법·부녀권익법 남녀평등인가 여성보호인가
04 여성교육 손에 쥐어진 과실(果實)·남아 있는 난제
05 매매춘 사회주의에서 폐지, 시장경제에서 부활
06 한 자녀 정책 관리되는 생식
07 여성연구운동 ‘여자라는 것’의 재고
08 이중역할부담과 부녀회가론 ‘개혁개방’ 후의 여성노동
09 소수민족의 여성 주연(周緣)에서

제7장|대만: 100년의 흐름
01 총독부의 황민화정책 여자교육을 통해서
02 공창제도 일본이 들여온 폐창운동
03 여성조직의 탄생 항일과 여성해방
04 국민당의 여성정책 계엄령과 송미령의 지도
05 여수련의 신여성주의 대만의 페미니즘을 열다
 

저자 소개

저자 : 일본 중국여성사연구회
1972년 창설되었다. 중국의 여성에 관하여 이론적·실증적인 연구를 하고 나아가 전 지구적 규모의 여성사, 젠더상의 구축과 여성문제의 역사적 파악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회원은 100명을 넘었으며, 역사를 비롯하여 문학·사회학·국제관계 등 많은 분야의 연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2002년에 상해사범대학 여성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중국여성사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해외 연구자와 교류도 많이 하고 있다. 회지 ...
 
역자 : 이양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 사학과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자 : 김문희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

책 속으로

작자는 이 두 사람의 여성을 등장시키면서 가족제도하에서 겪는 여성의 고통을 표현하고 비판했다. 보옥은 “여자의 몸은 물로 만들어져 있고 남자는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등의 말로써 여성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홍루몽』은 남존여비사회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입장으로 여성의 세계를 묘사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불린다. --- p.42

전족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여성의 특이한 풍속이었다. 3~4세의 철없는 때부터 여자아이의 발을 심하게 조여 매어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발끝을 가늘게 조여 붙여서 소위 ‘삼촌금련(三寸金蓮: 약 10cm)’이라고 불리는 크기로 제한시켜 이것을 ‘미(美)’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고통 때문에 울부짖고 피륙(皮肉)이 썩어 문드러지며 선혈이 낭자했다. 밤에는 잠을 잘 수도 없고 음식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갖가지 질병이 이것 때문에 생겨났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성장해도 움직임이 느려져서 몸에 위험이 닥쳐도 달아날 수 없게 된다. (중략) 전족의 근절은 100년에 걸친 끈질기고도 강한 운동을 요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pp.45~48

혁명참가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회검(懷劍)을 손에 쥐고 남장을 했던 추근의 모습이 상징하듯이 신해혁명기 여성운동에서는 여성이 스스로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남성화를 지향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었다. 또한 여성을 혁명에 동원할 필요성이나 여성의 지위향상이 주장되었지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반청혁명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으며, 결코 순수하게 여성 자신의 해방이나 권리 획득이 목표가 되지는 않았다. --- p.70

5·4운동이 시작되자 우리들은 곧바로 호응하여 우리 학교는 그 지방 데모의 선두에 섰다. [중략] 다시 구국18인단을 조직하고 의식衣食을 절약하여 구국을 위해 기부했다. 또한 상인들에게 파업을 하도록 요구하고, 상점으로 가서 일본 제품의 유무를 조사하여 발견될 경우 군중 앞에서 불태워버렸으며, 일본 제품을 사지 않게끔 상인들에게 울면서 당부했다. 「호남 도원桃源여자제일사범학교의 5·4운동기 애국운동」왕일지, --- p.108

1926년 1월 16일에는 「여성운동 결의안」이 국민당 제2회 전국대표대회(二全大會)에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제1회 대회의 선언에서 보여준 남녀평등원칙을 구체화한 것으로서, 부녀부가 추진해온 여성운동의 방침―여성을 국민혁명에 참가시키고 더불어 여성 자신의 해방에도 힘을 기울인다― 이 명시되었다. 또한 이 ‘결의안’에는 남녀평등, 결혼의 자유, 남녀 동일 임금, 여성의 재산상속권을 정하는 법률 제정, 인신매매 금지, 여자교육의 향상 등 구체적인 항목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민족 전체의 해방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여성의 해방도 달성될 수 없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어서 국민혁명의 성공이 여성운동보다 우선시되었다. --- p.120

정치에서 ‘인민’의 의미에는 당연히 남녀 양성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남자에 한했던 민주정치는 결코 순수한 민주정치가 아니다. ‘인민’이란 명칭은 남자만의 호칭이 아니고 남녀를 포함한 인민 전체를 총칭하는 것이다. 인민 전체가 정치에 참여하는 권리를 가진 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이다. [중략] 「북경여권운동동맹회 선언」1922년 8월, --- p.

여성들은 재빨리 전선으로 향하여 북벌군의 격려활동이나 후방지원 활동에 참가했으며 그 모습은 당시 신문 등에 수없이 보도되었다. 더욱이 북벌의 진전과 함께 여자북벌구호선전대나 북벌공작단 등이 조직되어 구호, 선전, 위로활동을 했다. 또한 1926년 말에 국민정부가 광동에서 무한으로 천도하면서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武漢分校)가 개설되자 처음으로 여학생을 받아들여서 정규의 군사교육이 행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수험생이 모여들어 거의 200명의 여성이 합격했고, 훈련을 받은 후 전선에도 배속되었다. --- pp.148~149

최초로 여성이 중국 공장에 고용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20세기 초 강남의 면방직 공장에서 여성이 노동했던 사실은 확인된다. 천진이나 청도 등 중국 북부에 있는 방적공업 중심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남성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가 되자 드디어 남성노동자에서 여성노동자로 노동력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 p.165

1938년 상해 공동조계의 통계에서 중국인 여성의 직업별 인원수를 보면 ‘상업’에 4,150명, 은행·금융·보험업에 102명, 의사, 변호사, 신문기자, 회계사 등의 전문직에 1,467명, 정부 및 시정기관 직원이 81명, 서기, 속기사 등이 58명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 p.171

1930년대의 여성은 다양한 패션을 즐겼다. 스커트의 길이, 구두 굽의 높이, 액세서리, 두발 형태 등을 개인의 생냈 스타일에 맞게 선택하고 자유로이 변화시킬 수 있었다. 전족을 하지 않고 ‘치파오’를 입거나 짧은 웃옷에 바지를 맞추어서 경쾌한 복장을 갖추어 입고, 화장을 하고, 반지나 액세서리 외에 부채나 장갑 등에도 신경을 쓰는 여성들의 장식은 가정주부의 자태로서도, 직장여성의 모습으로서도 사람들의 선망이 되었다. --- p.193

1920년대 말이 되면 ‘독자적인 사회적 직책을 양성하고 그 특수한 필요성에 적응시킨다’는 목표로 중등여자교육이 단독으로 결정되었다. 1935년 국민당 제5기 전국대표자대회의 선언에는 ‘체력, 지식 양면이 건전한 모성을 육성하여 종족 쇠망의 위기를 구하고 국가나 사회의 견실한 기초를 만든다’는 내용이 넘쳐흘렀다. 보수진영은 세력을 얻고 여성해방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1935년 4월 북평 시장은 남녀공학 단속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공학 폐지를 실행했다. 교육계뿐 아니라 1933년 북평시정부는 경비 절감을 이유로 여자직원을 전원 해고했고, 광주의 이발사대회에서는 남성의 직장 확보를 위해 여성이발사를 배제했다. 강소성 송강에서는 30세 이하의 과부를 전절당(全節堂)에 모여 살게 하는 등 사회 풍조가 여성해방과는 반대로 나아갔다. --- p.206

‘43년 결정’은 일면으로 중국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가하여 경제적 자립을 얻도록 도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경제적 자립 측면에서만 여성해방이 달성되었을 뿐 다른 여성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면을 실종시켰고, 여성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목소리를 ‘원망’이라고 단죄하고 여성운동을 당에 복종함을 강제한다고 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이후에도 오랜 기간 문제가 되었다. --- p.256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었던 중국은 문화적 쇄국 상태에 있었으며 1949년 혁명에 의해 여성해방=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는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에 의념(疑念)을 품을 여지가 없었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80년대, 동시대의 세계 사상이 한꺼번에 유입되는 가운데 여성해방의 선진국이라 자부하던 중국여성들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문제를 재고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 pp.317~317
 

출판사 리뷰

태평천국운동·1,2차 세계대전·천안문 사태 등
격동의 100년간 중국 여성을 둘러싼 논쟁, 운동의 역사!
중국 여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서기까지!

이 책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중국 여성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근대 시기의 중국 여성이 어떻게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해왔는지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우리나라의 근대 여성들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