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서양사 이해 (책소개)/1.로마제국사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시오노 나나미)

동방박사님 2022. 10. 1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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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언젠가 반드시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책!
* 영웅을 필요로 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리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를 다룬 걸작 평전
* ‘황제의 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라 불리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이 시대 최고의 역사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들려주는 ‘중세의 진수’, 그 첫 번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그리고 교권과 왕권을 둘러싼 대결로 보는
시오노 나나미의 마지막 중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잡지에 첫 작품을 연재할 때부터 “언젠가 이 사람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룬 걸작 역사 평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가 한국 독자들을 찾아온다. 총 2권(상, 하)으로 구성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시오노 나나미가 쓰는 중세를 다룬 마지막 작품으로, 교권과 왕권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세계 내부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의 대결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중세를 다룬 작품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중세라는 시대를 살며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되찾았으며, 유럽 최초의 국립대학을 만들었던 ‘황제의 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 파란만장했던 ‘화려한 반역아’이자 ‘압도적 선구자’의 생애를 시오노 나나미의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의 이야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시칠리아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유소년 시절부터 시작한다. 법에 따른 질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시대인 중세에서 일찍이 부모를 잃은 소년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교황의 후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성인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와 교황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십자군 원정을 약속하지만, 검이 아니라 교섭의 길을 고른 데에서 반감을 사 결국 파문당하고 마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바라본, 영웅을 필요로 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 그 첫 번째 권이다.

 

목차

독자에게

1장 유소년 시대

천막 안에서 / 노르만 왕조 / 어머니 콘스탄체 / 늑대 무리 속의 한 마리 어린 양 / 독립 선언 / 라이벌 오토 / 베라르도와의 만남

2장 열일곱에 일어서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 독일로 / 풀리아의 소년 /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 마그나 카르타 / 교황과 황제 / 아헨의 서약 / 라테라노 공의회 / 헤르만과의 만남 / 교황 호노리우스 3세 / 영악한 스물다섯

3장 황제로서

로마에서의 대관식 / 법치국가로의 첫걸음 / 카푸아 헌장 /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 / 남쪽 나라 풀리아 / 사라센 문제 / 해군 부흥 / 포자 왕궁 / 유럽 최초의 국립대학

4장 무혈 십자군

이 시기의 국제 정치 / 출발까지 / 예루살렘의 왕 / 눈앞에 드러난 난제 / 아라비아 수학 / 술탄 알 카밀 /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 첫번째 파문 / 두 번째 파문 / 제6차 십자군 / 성지 입성 / 접촉 재개 / 체스판을 가운데 두고 / 강화 성립 / 반대의 대합창 / 예루살렘에서 / 그리스도의 적 / 귀환 / 애프터케어

5장 이제는 완전하게, 법치국가로

멜피 헌장 / 국가 체제 / 사법 / 경제 / 세제 / 견본시 / 통화의 확립 / 이단 재판소 / 초기 효과 / 아들 하인리히

6장 프리드리히에 의한 평화(Pax Fridericiana)

평정과 평화의 관계 / 롬바르디아 동맹 / 교황파(겔프)와 황제파(기벨린) / 베네치아공화국 / 코무네(자치도시)의 힘 /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 제1차 롬바르디아 전투 / 프리드리히식 정보 공개 / 제2차 롬바르디아 전투 / 대승

도판 출전 일람

 

저자 소개 

저 : 시오노 나나미 (Nanami Shiono,しおの ななみ,鹽野 七生)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63년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1968년까지 공식 교육기관에 적을 두지 않고 혼자서 르네상스와 로마 역사를 공부했다. 1968년에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잡지 《주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40여 년 동안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에 천착해왔으며, 기존의 관념...

역 : 민경욱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관련 회사에 근무하며 1999년부터 일본문화포털 ‘일본으로 가는 길’을 운영했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문번역가의 길을 걷고 있다. 또 일본 관련 블로그 ‘분카무라(www.tojapan.co.kr)’를 운영하며 일본문화 팬들과 교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요시다 슈이치의 『거짓말의 거짓말』, 『첫사랑 온천』,...

 

책 속으로

1968년이니까 45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입니다. 당시 잡지 〈주오코론(中央公論)〉에 데뷔작이었던 《르네상스의 여인들》의 연재를 끝낸 저는, 잡지 연재 중에 “재미있게 읽었다”라고 써주신 하야시 겐타로 선생님과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 선생님과 저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뭘 써줄 건가요?” “언젠가 프리드리히 2세를 쓸 생각입니다.” “오호! 왜?” “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냥 마음이 가는 남자라.” “칸토로비츠의 평전이 있는데요.” “그건 이미 샀습니다. 하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도쿄대학교 총장이 되실 때까지 독일 근현대사를 가르친 역사학자였습니다.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알아주셔서 기뻤습니다. (…)

그리고 이러한 중세 작품의 마지막이 이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입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교 세계 내부의 대립으로, 교권과 왕권을 둘러싼 대결이므로 중세를 다룬 작품의 ‘진수’라는 느낌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들 작품은 중세 천 년을 무대로 했다는 점은 같습니다. 같은 시대를 조명하면서 대상만 바꿔 썼다고 해야겠죠. 그러므로 읽어주시는 당신에게 제가 보증할 수 있는 딱 한 가지는, 중세를 다룬 저작 중에 ‘진수’라는 느낌이 있는 ‘프리드리히’를 읽으시면 중세가 어떤 시대였는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중세의 무엇이 고대와 다르고, 왜 중세 다음에 르네상스가 일어나는지도 알게 되겠죠.
---「독자에게」중에서

강화를 위한 교섭이 야파와 가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은 1228년 11월부터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229년 2월, 교섭이 드디어 타결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동안 줄곧 끈질기게 교섭해온 프리드리히에게 유리했다. 2월 18일 아침, 야파에서는 십자군 총사령관 자리에 오른 튜턴 기사단단장 헤르만이 동석한 가운데 동의가 이루어진 강화에 프리드리히가 먼저 서명?날인한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가자에서 알 카밀도 서명·날인을 끝낸다.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이 강화를 성립시킨 것이다. (…)

그런데 이 강화 내용이 알려지자마자 그리스도교 측에서도 이슬람 측에서도 소동이 벌어졌다. 이슬람 측은 우선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술탄 알 아쉬라프가 성도 예루살렘을 적에게 양보했다며 반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알 카밀의 위세가 너무 확고했으므로 그 목소리가 이슬람 전역으로 번지지는 못했다. 알 카밀이 이 동생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이슬람교도들의 십자군 관련 기록에서는 이 강화를 이슬람교도의 ‘치욕’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측에 일어난 무시무시한 반향은 이슬람 측의 반응을 훨씬 능가했다. (…)

총주교는 한술 더 떠서 교황에 급히 편지를 보냈는데 그 안에서 다음과 같이 프리드리히를 비난했다. “이 황제는 그리스도교도의 황제로서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무능하기만 한 남자로 사라센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밖에 모르며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말뿐입니다. 불신앙의 무리마저 그를 경멸하는 상황입니다.” 총주교 제라르도로서는, 강화에서 볼 수 있는 프리드리히의 이교도 존중과 그들과의 공생이라는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총주교의 편지를 받은 교황도 프리드리히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화시킨다. 이 교황이 파문을 풀 가능성은 더욱 멀어졌다. 성직자들에게는 이교도와 교섭했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교도로서 잘못된 행위가 된다. 성도 예루살렘의 ‘해방’은 이교도와의 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도의 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 성도의 일부를 ‘이슬람 지구’로 인정한 해방이라니, ‘해방’이라 부를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에게도 그들의 성역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교도 간의 공생은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 p.239~244

작가는 저작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프리드리히에게도 매사냥을 논한 책이 있다. 하지만 그는 저작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었다. 행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부류에 속하므로 그에게 행동은 그의 ‘작품(Opera)’이라 할 수 있다. 제6차 십자군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를 완성한 후에는 다른 ‘작품’에 착수한다. 그것은 십자군 원정이라는 가업에 대한 책임을 완수하고 또 파문이라는 성가신 문제로부터 풀려난 삼십 대 중반의 에너지를 모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법에 근거한 국가 형성’이었다. (…)

즉 ‘로마법대전’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법률을 배우는 데 가장 적합한 기초를 제공한다는 공적이 있으나 프리드리히에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그의 머리에는 봉건 사회를 중앙집권국가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교를 배제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법률에 기초하는 수밖에 없고 그에 사용될 법률이 있으면 좋겠다, 없다면 새로 만들자는 생각뿐이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흥미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생활에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이 차이는 사용한 단어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Codex’는 법률을 모았다는 의미만 지닌다. 한편 프리드리히의 ‘Constitutiones’는 현대적으로 바꾸면 ‘헌법’이다. 통치의 기본 방침과 그를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법령을 열거한 것이므로.
--- p.274~278

목차

7장 모든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서 시작되다

황제와 코무네 / 브레시아 공방 / 교향악 지휘관처럼 / 파문(세 번째) / 멜로리아 해전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 / 성 베드로의 자산 / 궁지로 몰아넣다

간주곡(intermezzo)

여자들 / 자녀들 / 협력자들 / 간부 후보생 / 친구들 / 멜피 헌장 / 카스텔 델 몬테 / 《매사냥의 서》 / 이탈리아어의 탄생 / 동시대 ‘미디어’의 평가

8장 격돌 재개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 / 도망친 교황 / 리옹 입성 / 이단 재판 / 리옹 공의회 / ‘리옹’ 이후 / 교황의 ‘긴 손길’ / 음모 / 포획물을 덮치는 매 / 재구축 / 빅토리아 소실(燒失) / 피에르 델라 비냐 / 엔초, 붙잡히다 / 마지막 일 년 / 마지막 매사냥 / 유언 / 죽음

9장 그 후

불안 / 교황들의 집념 / 콘라트의 죽음 /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 / 프랑스 왕의 변심 / 왕제 샤를 / 만프레디의 죽음 / 시칠리아의 만종 / 종언의 땅

연표
도판 출전 일람
참고문헌

 

 
 
 
책 속으로
‘무인’과 ‘정치가’의 차이는 뛰어난 무장과 뛰어난 통치자의 차이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예로 들면,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차이 아닐까.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생애를 통해 교향악 지휘자였다. 그의 행동을 좇고 있자면 참 잘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고 동시에 대처했구나 싶다. 연구자라면 그런 점들을 자세히 서술하는 게 의무일 테지만 그러면 역사 서술에 꼭 필요한 흐름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무성한 나뭇가지를 과감히 잘라내듯 생략하며 쓰고 있는데 같은 시대의 다른 황제와 왕들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스타일이었냐 하면 전혀 아니다. 평생 교향악 지휘자로 살았던 프리드리히가 중세 후기라는 시대에서는 특이한 존재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휘자 같은 프리드리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맛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라는 시대를 비추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레시아에서 철수한 다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어떻게 실행에 옮겼는지 열거해보겠다. (…)

생각해보면 중세 후기의 거인이자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성 프란체스코와 황제 프리드리히는 로마 교황이 생각하는 만큼 이질적인 존재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시종일관 주장한 것은 예수 시절의 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황제 프리드리히가 계속 주장한 것은 예수가 말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또 제5차 십자군에 동행한 프란체스코는 알 카밀에게 가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프리드리히도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오리엔트로 향하는데 역시 알 카밀과의 사이에서 강화, 즉 평화 수립에 성공한 것이다. 나이가 열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게다가 나란히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어디선가 만난 적은 없을까, 연구자들은 필사적으로 찾았으나 아직도 그것을 실증할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 만났더라면 수도사와 황제라는 위치를 넘어서 함께 공감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교황 그레고리우스보다도 더 서로 공감하지 않았을까.
--- p.41~48

15일이나 휴회한다고 하니 공의회 참석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리옹을 비우고 있었다. 영국 왕의 대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왕과 협의해야겠다며 본국으로 건너가 협의를 끝내긴 했으나 아직 도버 해협을 건너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타데오는 리옹에 머물면서 동료 피에르 델라 비냐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7월 17일에 갑자기 소집된 공의회의 참석자는 원래 모였던 150명에서 대거 줄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교황은 강행한다. 출석한 사람만 모인 자리에서 교황은 재판관의 판결을 읽어내려갔다. 공소권을 인정하지 않은 교회법에 근거하는 이상 그것이 최종 판결이 된다. 재판장이기도 한 인노켄티우스 4세는 검사 역을 맡은 세 명의 스페인인 주교가 주장한 황제의 죄상을 다 인정했다. 그에 대한 타데오의 반론은 모두 기각했다. 이날 교황의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그가 차지한 높은 지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그런 그가 한 모든 짓은 이단 행위이고 그 자신이 속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완전히 반하고 있다. 이제까지 그에게 내렸던 파문도 이 ‘교회의 적’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더욱더 엄격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교황은 계속했다. 나는 독일의 선제후들을 비롯한 제후 전원에게 진언한다. 프리드리히를 대신할 황제 선출을 서두르라고. 다만 시칠리아 왕국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은 이 왕령의 진정한 소유자인 로마 교황에 권리가 있는 이상 왕국의 왕이 될 자는 내가 생각하겠다. 이 판결을 들은 타데오 다 세사는 손도 안 들고 일어나 넓은 대성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디에스 이스타 디에스 이라에, 칼라미타티스 에 미제리아에(Dies ista dies irae, calamitatis et miseriae)!” “오늘 이 순간 신이 분노의 불길을 일으켜, 인간이 고통받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주군과 항상 같은 생각을 해온 타데오 다 세사였다. 그런 그가 내뱉은 라틴어의 의미를 생각하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라고 말한 예수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반하는 행동에 나선 교황 인노켄티우스에 신이 분노해, 이로 인해 결정적인 일이 된 황제와 교황의 항쟁으로 관련 없는 사람까지 고통을 받는 시대가 온다고. 초원에서 거대한 코끼리끼리 격돌할 때의 폐해는 중소 동물들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p.21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