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2.조선학문

눌암 기략 (2022) - 서학을 둘러싼 남인들의 전쟁기록

동방박사님 2022. 11. 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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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8세기 조선사 연구의 중요 자료 국내 첫 완역 출간!
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번역과 해설로 만나는 초기 교회사의 숨은 보석

초기 교회사의 생생하고도 입체적인 증언 기록 『눌암기략』 역주본을 정민 교수의 충실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로 읽는다. 그간 학계와 교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명료하게 밝히고, 불분명했던 수많은 인명의 인적 사항을 정리했으며, 교차 검증의 편의를 위해 원문 영인본을 수록했다. 무엇보다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내용들을 새롭게 발굴·소개했다.

서학을 중심으로 들여다본 18세기 조선의 정치 지형
척사의 기록에 담긴 초기 교회사 『눌암기략』

이 책은 채제공의 실각과 복권 과정에서 서학을 두고 벌어진 남인 내부의 정쟁과 대립을 양비론적 시각에서 치밀하게 고발한 기록이다. 서학 문제를 신앙과 신념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적 맥락에서 파악해, 서학에 대한 당대 인식을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목차

간행사
격려사
서문
눌암기략
해제 _서학을 둘러싼 남인들의 전쟁 기록
인명 찾아보기
영인 눌암기략

저자 소개 

저 : 이재기
 
본관은 전주, 자는 선시(善始), 호가 눌암(訥菴)이다. 부친은 한성우윤을 지낸 이명준(李命俊, 1721~1789)이다. 조선 천주교회의 중심이었던 황사영 가문과 사돈을 맺었고, 이승훈 가문과도 가까웠다. 벼슬길은 늦어 37세 때인 1795년에 진사로 식년시에 급제했고, 42세 나던 1800년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1800년 전적과 병조좌랑, 1801년 지평, 1803년 강원도사, 1805년 장령, ...
 
역 : 정민
 
한문학 문헌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온 우리 시대 대표 고전학자.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 지성사의 전방위 분야를 탐사하며 옛글 속에 담긴 깊은 사유와 성찰을 우리 사회에 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살핀 《비슷한 것은 가짜다》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다산 정약용을 다각도로 공부한 《다산과 강진 용혈》 《다산 증언첩》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책 속으로

이재기의 『눌암기략』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책이 아니다. 그간 원본이 공개되지 않아,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부 내용만 인용되어왔다. 초기 조선 천주교회사의 대단히 중요한 증언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 이 자료는, 신서파와 공서파로 갈려 싸우던 남인 내부의 정쟁을 양비론적(兩非論的) 시각에서 직접 견문한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중간자적 시선으로 당시의 서학 문제를 바라본 저작은 흔치 않다. 더구나 그것이 특별히 남인의 시선을 통해 본 내부 고발이라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서학은 신앙 차원을 넘어, 정조 초년 정국의 격랑 속에서 채제공을 정점에 둔 남인들의 정쟁과 맞물려 복합적으로 발생한 문제였다.
--- p.9

우리가 100년간 죄를 지어 폐출되었으니 실로 다툴 만한 형세나 이익이 없이, 사람마다 인정이 마치 골육간과 같아 서로 마주하면 간담이라도 내줄 것 같았다. 비록 수백 리 밖에 살아도 말과 기운이 서로 통하여, 그 풍속이 아름답다 할 만하였는데, 하루아침에 한집안 사람끼리 싸우는 변고가 있었으니, 아! 또한 매우 불행하다 하겠다.

어떤 이는 말한다.
“지금 서인도 두 개의 당여(黨與)로 나뉘어졌으니, 이것은 시대의 풍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가 않네. 서인이 죽자고 싸우는 것은 그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이해가 생기기 때문이지. 우리의 경우는 두 과부가 서로 싸우는 격이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 p.24

홍인호는 재예가 민첩하여 임금께서 특별히 이를 아껴 언제나 아주 가까운 곳에 두었다. 하루는 임금께서 채제공에게 유시하셨다.
“경은 어찌하여 홍인호와 유감을 풀지 않는 게요?”

이에 홍인호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죄하라고 명하셨다. 홍인호가 미동으로 찾아가니, 손님과 주인 사이에 날씨 이야기만 나누고는 파했다고 했다. 자익 이겸환이 일찍이 두 누이의 남편을 위해 채제공에게 잘 지내라고 여러 번 청하였지만, 채제공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 p.52

“간밤에 미용(美庸. 정약용의 자)이 와서 이야기하더군요. ‘대감께서 우리 세 사람을 죽이려 하시는데, 세 사람이 죽으면 자네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사람을 물에 빠뜨릴 때 빠지는 사람이 반드시 손으로 끌어당겨 함께 들어간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던가?’ 미용의 이 말이 몹시 두려우니, 만약 차자를 올리시면 화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채제공이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는데, 수저를 쓸 때가 되자 거꾸로 세워 밥상머리를 탕탕 소리가 나도록 두들겼고, 이어서 온종일 화난 것마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등촉이 오자 이에 차자의 초고를 꺼내서 태워버렸다.
--- p.119

책의 중심은 서학보다 채제공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당시는 8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노론 집권 세력의 전제에서, 채제공이라는 불세출의 정객이 남인 세력을 키워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임금 정조를 보필해서 신도시 화성을 세우며, 새로운 국가의 비전 수립을 위해 매진하던 시기였다.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은 이 상황에서 마치 돌발변수처럼 새로운 정국 구상 속에 끼어들었다. (…) 정조나 채제공은 이들의 문제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반대 진영의 논리도 알았지만, 개혁의 큰 틀을 허물지 않은 상태로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해 이들을 안고 갔다. 이는 결국 남인 내부의 심각한 균열을 불러왔고, 정조와 채제공의 개혁 구상에 걸림돌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확실히 『눌암기략』의 이 같은 구성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를 관통하는 서학 코드를 채제공이라는 인물을 정점에 놓고 힘겨루기의 과정으로 살펴본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보다 입체적으로 그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서학을 단순히 신앙과 신념의 문제로 다루지 않은 점이 새롭다.
--- p.276
 

출판사 리뷰

초기 교회사의 생생하고도 입체적인 증언 기록
정민 교수의 충실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로 만난다


서학 도입기 조선 사회의 다각적 복원에 필요한 중요 사료가 마침내 공개된다. 18세기 조선 지성사를 깊이 탐구해온 고전학자 정민 교수가 번역하고 해제를 붙인 이재기(李在璣, 1759~1818)의 『눌암기략(訥菴記略)』이 완역 출간되었다. 그간 학계와 교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명료하게 밝히고, 수백 개의 주석을 통해 불분명했던 수많은 인명의 인적 사항을 정리했으며, 교차 검증의 편의를 위해 원문 영인본을 수록했다. 무엇보다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내용들을 새롭게 발굴·소개했다.

이 책은 채제공의 실각과 복권 과정에서 서학을 두고 벌어진 남인 내부의 정쟁과 대립을 양비론적 시각에서 치밀하게 고발한 기록이다. 서학 문제를 신앙과 신념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적 맥락에서 살핀 점이 의미가 깊다. 남인의 분화와 갈등 원인, 신서파와 공서파의 세부 동선 및 정파의 길항 관계까지 서학에 대한 당대 인식을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송담유록』 『눌암기략』은 그간 학계에서 제대로 된 주목을 받은 적이 없다. 교회사뿐 아니라 당대 정치사의 흐름 이해와 남인의 위상 파악을 위해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귀한 자료다. 초기 교회사의 누락된 부분이 반서학의 입장을 지녔던 이들의 기록에 힘입어 충실하게 채워지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_정민

서학을 중심으로 들여다본 18세기 조선의 정치 지형
척사의 기록에 담긴 초기 교회사
『눌암기략』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다산 정약용을 오랜 시간 공부해온 정민 교수는 다산의 청년기와 천주교 신앙 문제를 다룬 『파란』을 집필하며 조선 사회에 서학이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에 서학 열풍을 일으킨 천주교 수양서 『칠극』을 번역했고, 이어서 초기 교회사 연구서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집필했다. 그는 이러한 연구 여정 중에 『눌암기략』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 이재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사실이 없었고, 간략한 소개 외에는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적도 없었다. 책의 소재 또한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다 무주의 다산영성연구소에서 예기치 못하게 『눌암기략』 원본과 마주했다.

“처음엔 다른 글에 인용된 내용을 보고서 이 책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원본의 소재를 알 수 없었다. (…) 당초 나는 좀 더 나은 상태의 복사본을 구해볼 수 있으려나 하는 바람으로 내려간 터여서, 그곳에서 자료의 원본과 맞대면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깜짝 놀라서 전율이 일었다. 이 자료와의 만남이 더욱 운명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_서문에서

정민 교수는 『눌암기략』 외에도 천주교 관련 주요 문헌의 번역과 주석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는 이와 같은 자료를 반드시 정리하고 교차 검토해야만 한국 초기 교회사의 실상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땅은 기억을 지우고, 시간은 기록을 묻는다. 순교의 영성을 복원하거나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기억과 기록의 재생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유불리를 떠나 금쪽같은 단편의 기록 속에서 기억의 편린을 붙들어 그 시절과 내밀하게 접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_해제에서

『눌암기략』의 자료 가치

『눌암기략』은 채제공을 중심축에 두고 서학의 추이를 살핀 책이다. 대채와 소채가 분파된 미천서원 파동부터 1814년 채제공 사후 벌어진 관작추탈 상소와 관련한 논의까지, 저자 이재기는 혈족, 인척, 학맥, 정파 등으로 얽히고설킨 인맥을 통해 직접 견문한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이 책은 서학, 즉 천주교라는 외래 종교를 전면으로 다루는 대신, 서학을 믿은 신서파와 반대한 공서파의 일전을 조망해, 초기 교회사를 정치사적 맥락에서 파악했다. 채제공의 권력에 기대 입지를 넓혀간 신서파의 동선을 구체적인 팩트로 제시함으로써, 당시 서학 문제가 남인 내부의 정치적 득실과 맞물려 증폭된 사건임을 보여주었다.

또 신서파 그룹의 포교와 대응 전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점에서 가치가 높다. 이른바 공서파의 화심(禍心)을 구실로 한 신서파의 권모술수와 반격 과정이 드러나, 당시의 정황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돕는다. 특별히 유배 이전, 채당의 핵심 참모로서 반채 전선에 맞서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던 젊은 시절 정약용의 기질과 행동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롭다. 당대 사료 중에 서학 문제의 이면을 이렇게 생생하게 파헤친 저작은 보기 드물다. 신서파와 공서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양비론적 시각에 의한 기술이어서 사료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준다.

이재기는 누구인가? 『눌암기략』의 집필 동기

저자 이재기는 서학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이승훈·이치훈·정약용 등 신서파 중심인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결과 신서파가 공적(公敵)으로 선언한 사흉팔적(四凶八賊)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기까지 했다. 한편 홍낙안·이기경·강준흠 등 공서파에 대해서도 서학을 배척한 방법과 과정, 그 후의 잘못된 행태로 남인의 적전 분열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채제공과의 관계도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았다. 이재기는 『눌암기략』에서 채제공의 편협한 처신과 좁은 성정을 지적하며 남인의 갈등상황이 악화된 데 채제공의 책임이 적지 않음을 피력했다. 이재기는 채제공과 서학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한창일 때는 논쟁에 끼지 못했으나, 문과 장원급제 후 양 진영에서 자신을 회유하고 음해하자 평소의 양비론적 입장을 『눌암기략』을 통해 선명하게 밝히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