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2.조선학문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동방박사님 2022. 11. 2. 06:36
728x90

책소개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혀
17세기 조선 유학사를 새로 쓰다
조선 유학사에 대한 통설에 질문을 던지다


저자 강지은(국립대만대학 국가발전대학원 부교수)은 고려대학교에서 한문학을 전공하면서 조선시대 지식인의 저작을 두루 읽었다. 특히 17세기 저작들과 그에 관한 연구서들을 폭넓게 접하면서 17세기 지식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거기에서 탄생한 그들의 사상에 대해 새롭게 분석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일본 도쿄대학에서 공부한 후 타이완으로 건너가 타이완대학에서 연구를 거듭하면서 조선시대 지식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놓고 있다.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朝鮮儒儒學史の再定位―十七世紀東アジアから考える』는 그러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20세기 초반 두드러졌던 17세기 조선 유학사에 대한 통설을 재검토하여 ‘조선 유학사란 어떤 것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통설에 의하면, 17세기 조선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연이은 침입으로 인한,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사상사적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식으로써 새로운 경서 해석을 집필하여, 엄격한 사상 통제의 억압 속에서 주자학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7세기 조선 유학사를 ‘주자학에 대한 정밀한 연구 및 이에 동반하는 주자학 교조화’와 ‘주자학에 대한 회의 및 비판의식의 시작’이라는 두 개의 대립적인 축으로 바라본 이 같은 관점은 식민지 시대 이래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점차 강화된다. 조선왕조의 체제교학體制敎學(국가의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유학자가 망국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간주되었고, 주자학의 경서 해석에 부분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던 17세기 몇몇 유학자의 견해는 ‘조선 후기 실학파’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근대의식의 맹아’라는 위상을 부여받는다.

 

목차

서론

1. 20세기 초반 ‘동아시아’의 탄생
1절 유학사에 대한 관심
2절 17세기에 주목하다

2. 17세기 유학자 세계의 양상
1절 조선의 사대부士大夫 사회
2절 공명共鳴할 수 없는 한국과 일본의 유학자

3. 유학자들의 신념
1절 조선 유가 사회儒家社會의 사상적 기초
2절 새로운 경서주석의 등장에 즈음하여

4. 조선 유학사 전개의 요체
1절 주자학 연찬硏鑽
2절 조선 유학의 창견創見 제시 패턴
3절 새로운 해석-그 의미부여

5. 동아시아 속에서의 조선 유학사
1절 관점의 전환
2절 동아시아에서 바라보다

결론
한국어판 후기
주석
 

저자 소개

저 : 강지은
 
고려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일본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에서 아시아문화연구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문철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립대만대학교 국가발전대학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 유학사는 형성 과정에서도, 근대적 학문으로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면서도 국경을 초월해 있었다. 이 때문에 20세기 전후 동아시아 지식인이 유...

역 : 이혜인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으로 역사문헌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조선의 양명학》(공역)이 있다.
 
책 속으로
20세기 초반 식민지화되고 있던 한국에서는 자국의 유학사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행해져, 조선왕조의 체제교학體制敎學(국가의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유학자가 망국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간주되었다.
--- p.19

조선 유학사의 주자학 편향성이 비판받는 한편, 주자학에 대항하거나 이로부터 벗어나려 한 인물이나 학파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것이 식민지시대 한국 학계의 동향이었다.
--- p.24

17세기는 조선 유학사에서 사상사적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일컬어지는 시대이다. 반복되는 외세의 침입에 허덕였던 이 고난의 시대에, 경서 해석에서 주자학적 해석과 다른 학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 학계에서는 이 고난의 시대와 새로운 경서 해석의 출현이 인과관계에 놓여 있다고 …… 서술하였다.
--- p.28~29

식민사관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주자학에 도전한 인물이나 저작이 과도하게 주목받은 반면, 조선에서 가장 융성했던 주자학 방면에 대한 고찰이나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자학 측과 반주자학 측의 대립 도식에 갇혀, 평생 주자학을 연구했던 조선 유학자의 본질을 구명하는 데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 p.39

대부분의 사대부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걸고 올바른 도를 실현하려 하였다. 올바른 도의 실현을 자신의 의무로 인식하고 행동하였던 유학자들이 형성한 조선 유학사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형성된 유학사와는 다를 것이다. 유학사 연구에서도 이러한 유학자들의 존재 양상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p.62

조선과 도쿠가와 일본에서 유학이 전개된 배경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전혀 다른 이 두 종류의 ‘주자학 연구’와 ‘주자학 비판’은 식민과 반식민항쟁의 권력구조에 의해 무리하게 연계되어 단순한 비교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타당치 못한 문화 비교가 조선 유학사 연구에 타당한 관점이 마련되기 어려운 환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 p.92

식민지시대에 본격화된 만큼 조선 유학사 연구는 망국을 초래한 원인을 구명하려는 깊은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실용을 경시하는 유가儒家 사회의 경향이 비판받는 동시에, 17세기에 실용과 실천을 중시한 인물이 발굴되어 칭송받아 왔다.
--- p.97

주희 주석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여 물의를 빚은 끝에 처벌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윤휴와 박세당을 들 수 있다. …… 1. 그들은 주자학에 이견을 제창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문난적’이라고 공격당한 끝에 처벌되었다. 2. 그들은 주자학을 비판할 의도로 새로운 경서 해석을 저술하였다. 3. 그들의 해석은 대다수 주자학자의 그것과는 대조적이며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로부터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식으로써 새로운 경서 해석을 집필하여, 엄격한 사상 통제의 억압 속에서 주자학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적 의식의 맹아가 발견된다’라는 사상사적 전환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p.127~128

17세기 조선 유학계에서 어떤 이는 주희의 발언을 실마리로 삼아 연역하고 어떤 이는 주희의 문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자기 생각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주희가 읽은 서적들을 구해서 공부하고 주희의 저작을 분석·정리하면서 주희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과제를 설정·수행하였다. 주희의 견해에 동의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희와 다른 견해를 갖는 이라 할지라도, 주희의 학설에 의거하고 주희의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설을 전개하였다. 이처럼17세기 조선 유학사는 ‘주자학에 대한 정밀한 연구와 이에 동반하는 주자학 교조화’와 ‘주자학에 대한 회의 및 비판의식의 시작’이라는 두 개의 대립적인 축을 넘어선 지평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 p.179

조선조 경서 해석의 의의는, 그 표현에 지나치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주희 주석이라는 출발점에서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포함하여 그 내용을 상세히 분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 p.194

17세기 경학에서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빈번하게 나타나 이 경향이 조선 후기에 유행할 정도로 선명해진 ‘사실’을 확인한다. 이러한 사상사에서의 ‘사실’에 ‘선’을 그으면 “17세기 이후의 실천 중시 경향이 실학사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라는 사상사상思想史像을 그려 낼 수 있을 것이다. …… 조선 실학 연구의 지향점은 조선 유학사에서 정주학과 구별되는 ‘실심實心’에 따랐던 사상적 전통을 발굴한다는 작업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실학의 기반이 된 사상이 정주학 이외에 존재한다”라는 전제가 미리 상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17세기박세당의 ‘실천적 경서 해석’이 조선조에서 ‘사상적 진보’를 나타내는 가치 있는 ‘점’으로 평가받아, 18·19세기의 ‘실학’으로 그 ‘선’이 이어진 것이다.
--- p.258

식민지시대가 되자 앞에서 서술했듯이 일본 학계에서 이토 진사이·오규 소라이가 ‘경전과 주자학의 권위에 과감히 도전하였다’고 높은 평가를 받은 한편, 조선조 유학자들은 도쿠가와 일본의 유학자들의 이러한 혁신 성과에 대비되어 ‘주자학의 추종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 그리고 머지않아 조선조 17세기의 일부 유학자가 주자학의 경서 해석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에 주목하여, ‘근대의식의 맹아’라는 위상을 부여하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 이러한 연구를 전형으로 삼아 17세기 조선의 경학사는 ‘주자학 그 자체의 내재적 전개’로서가 아닌,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식의 형성’이라는 도쿠가와 유학 연구에서 유래된 관점으로 다시 읽히게 되었다.
--- p.281~282

이 책은 17세기 조선 유학사에 대한 통설을 재검토하여 이 문제에 답하고자 하였다. 통설에 의하면, 17세기 조선은 네 차례에 달하는 일본과 중국의 침입을 받고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사상사적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통설에서는 주자학적 해석과 다른 새로운 경서 해석의 등장에 대해, 기존 주자학 사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튼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해석의 저자들이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상황이 기록된 사료에 대해서는 주자학파와 반주자학파의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의미 부여에 대해 ……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 p.307

식민지 한국에서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편향이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조선 유학사 최대의 특징 자체가 비판받은 것이다. 조선 유학사에 대한 이 같은 전면적인 부정 속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한 주자학적 사상과 대립하면서 반주자학적 사상이 등장했다는 도식이 세워졌다. 17세기 반주자학적 경향의 등장은 이른바 ‘조선 후기의 실학파’ 탄생의 맹아로 주목받게 되었다.
--- p.308

조선 유학사는 올바른 도의 실현을 자신의 책무로 여기고 언제든 이를 위해 행동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만주족인 청을 대신하여 중화 도통의 계승을 자임하였고, 계승해야 할 도의 중심으로 생각하였던 것은 다름 아닌 주자학이었다. 경서와 세상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주자학을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이로부터 새로운 견해도 생겨났다. 그러므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저자들이 주자학에 대한 회의나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는 당연히 발견되지 않는다.
--- p.308~309

발전 배경이 전혀 다른 조선 유학과 도쿠가와 일본 유학의 ‘주자학 연구’와 ‘주자학 비판’은, 20세기 초반 식민과 반식민 항쟁이라는 권력구조에 의해 무리하게 연결되어 단순한 비교 대상이 되었다. 적절하지 못한 문화 비교는 조선 유학사 연구에서 타당한 관점이 마련되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p.309

17세기 당시, 주희의 학설과 다른 견해는 정치적 대립자에 의해 ‘주자와 다름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공격받았다. 권위 있는 주자학에 대해 이처럼 ‘다름’을 추구한 저작은 20세기 초반 이래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기존 권위에 도전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근대적 의식’이 여기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사료들을 상세히 읽어 보면, 주자학 연구가 매우 정밀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주희의 저작 속의 변화나 모순을 발견해 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17세기 조선 유학사의 양상이다.
--- p.310
 

출판사 리뷰

17세기 조선 유학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 같은 통설에 대해 저자는 17세기 유학자들의 저작과 20세기 초 한·중·일 3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저서를 토대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첫째,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17세기 유학자들이 주자학에 대한 회의나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 발전 배경이 전혀 다른 조선 유학과 도쿠가와 일본 유학의 ‘주자학 연구’와 ‘주자학 비판’은, 20세기 초반 식민과 반식민 항쟁이라는 권력구조에 무리하게 연결되어 단순한 비교 대상이 되었다. 셋째, 17세기 사료들을 상세히 읽어 보면, 주자학 연구가 매우 정밀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주희의 저작 속의 변화나 모순을 발견해 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확인한 17세기 조선 유학사의 양상이다.

동아시아적 시야에서 조선 지식인의 생각을 새롭게 쓰다

저자는 조선 유학사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만이 아닌 한·중·일 3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조(1392~1910) 중기에 해당하는 17세기 유학자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대응이 어떠했는지 밝히려는 작업을 17세기가 아닌 20세기 진입 전후에 대한 서술로, 조선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짊어지고 있던 시대적 사명에 대한 서술로 시작한 건 그래서다.
왜 동아시아적 시야가 필요한가. 저자에 의하면 ‘동아시아’는 한·중·일이 자타의 역사를 확실히 인식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공간이며, 특히 조선 유학사는 형성 과정에서도 그리고 근대적 학문의 연구 대상이 되기 시작하던 때에도, 국경을 초월하여 존재했다고 한다. 즉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에 기초하여 그 ‘천하’ 속에서 자신들의 바람직한 존재 방식을 사색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천하’의 시야에서 그들의 저작을 관찰해야만 17세기 조선의 사상사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또한 19세기 말엽부터 식민지 시대를 거치는 시기는 동아시아 각국이 자타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때다. 조선 유학사의 의의를 찾아내는 작업은 연구자뿐만 아니라 애국운동가,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시대적 사명감을 짊어지고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며, 식민 종주국 일본의 학설에 대해 학습과 반론을 계속했다.

주자학 일색인 조선민족은 열등한가

저자는 20세기 진입 전후의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조선시대 지식인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 ‘오해’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 유학사는 ‘주자학 일색’이며 ‘비독창적’이라는 말로 ‘멸시’를 받았다. 이에 대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자학 일색이 아니며, 독창적’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러한 방식의 대응은 어쩌면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대응을 멈춰야 할 때가 왔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우선, 주자학 일색이라서 독창성이 없고 그래서 조선 민족이 열등하다는 논리는 식민지 시대 일본인 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인 학자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제국주의 정부에 부화뇌동했을 뿐인가? 이 책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혹시 일본 사회의 역사적 배경에 의한 것이 아닐까? 우리 학계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이러한 주장을 일소하기 위해 조선 시대는 주자학 일색이 아니라 여러 사상이 다양하게 공존했으며 독창성이 풍부하고 따라서 조선 민족은 열등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쳐야 하는가?

일본을 알자

저자는 우선, 20세기 초 식민 종주국 일본의 학술에 주목한다. 그들의 학술 사상이 태어난 역사적 배경인 근세 일본 사회를 설명한다. 도쿠가와 일본, 즉 에도시대 일본 유학의 발전상은 중국이나 조선과 완전히 달랐다. 무사계급이 통치하는 사회에서 유학이라는 학문의 권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독창’적 경서 해석이 빈번하고 ‘독창’이 평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유학 경서에 대한 해석에서 해석자의 독창성에 어디까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해석학의 근본적 가치가 과연 독창에 있는 것일까? 경서 해석학에서 누군가의 새로운 해석이 기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독창성을 지닌다고 해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은, 20세기 진입 전후에 들어온 서양적 학술 관점을 과도하게 적용한 것이거나, 조선시대 유학사를 주자학 맹종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유학사를 부정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는 서로 다른 사상사

식민지 시대에 한국 역사가 일본 식민 당국에 의해 폄훼되는 상황은 기본적으로 일본적 배경을 가진 유학사 서술의 맥락이 조선 유학사 비판에 사용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자학 추종 일색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서 조선시대의 양명학파를 발굴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뒤로도 반주자학자나 주자학 비판자를 발굴하는 연구가 알게 모르게 이러한 논리를 반박하는 취지로 진행되었다. 저자는 지금 이 시대에 서서, 조선 유학은 주자학 일색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보다 주자학이 비독창성이나 열등함을 나타낸다는 관점 자체의 문제, 경서 해석에서 독창성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관점에 내재된 문제를 제기한다.

오해에서 이해로

저자는 20세기 진입 전후 지식인들이 국가·민족의 위기에 직면하여 조선 유학사에서 ‘근대적’ 사상의 맹아를 찾아내려 한 상황을 고찰한다. 그들은 17세기 문헌에서 기존 사상, 즉 주자학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견해를 ‘발굴’해냈다. 20세기 지식인에게는 분명 이러한 문제의식이 존재했다. 하지만 17세기 유학자들도 역시 그러했는가?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하나하나 확인해간다.
17세기 조선의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그들이 기존의 권위 있는 경서 해석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운 학설은 어떤 과정에서 출현한 것인가? 그리고 당시 사회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것은 권위를 지닌 기존 사상체계에 대한 도전이었을까?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사람은 자신을 주자학 비판자로서 인식하고 있었을까? 조선 유학사에서 이 새로운 해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조선 유학자들이 살았던 세계는 20세기 진입 전후의 지식인들이 직면한 동아시아 정세와 크게 달랐다. 그러므로 서양식 식민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할 방법을 모색한 근대의 지식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 의식을 지닌 조선의 유학자가 ‘나라’를 위해 혹은 ‘천하’를 위해 세운 뜻이 같을 수는 없다. 우리는 조선조 유학자들이 처한 현실 사회와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한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은 근대적 민족국가로서의 한국의 주권을 되찾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한 지식인들에게는 과거 조선 유학자들의 시점에 서서 그들이 일생을 걸고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 조선 유학사란 대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 책은 조선 유학사에 관한 그 시대 이래의 자리매김을 바꿔보려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식인들의 뜻을 본받아 21세기 학술계에 주어진 사명의 일부를 충실하게 완수하고자 한다.

새로운 역사적 단계로 진입하다

요컨대 저자는 지난 사상사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주자학 위주의 사회 일각에서 반주자학이라는 동향이 근대의 맹아로서 등장했다는 가설을 부정하고 ‘주자학과 다른 학설은 반주자학을 목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의 틀’이 없었다고 선언하거나 반주자학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의 서술 목적은 ‘맞다’, ‘틀리다’라는 선언에 있지 않다고 한다. 선학들의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의 일환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대 이래 축적된 조선 유학사에 대한 ‘오해’는 시대의 산물이다. 결코 ‘잘못’으로 치부하고 망각해버릴 대상이 아니라 연구하여 연원을 밝혀야 하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해’를 빚어낸 시대적 필연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한 시대 조류의 역사적 단계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식민사관’에 저항하며 분투했던 한 시대를 이제는 역사 속에서 편히 쉬게 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