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2.조선학문

송담유록 (2022) -초기교회사 자료의 숨은 보석

동방박사님 2022. 11. 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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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8세기 조선사 연구의 중요 자료 국내 첫 완역 출간!
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번역과 해설로 만나는 초기 교회사의 숨은 보석

초기 교회사의 생생하고도 입체적인 증언 기록 『송담유록』 역주본을 정민 교수의 충실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로 읽는다. 그간 학계와 교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명료하게 밝히고, 불분명했던 수많은 인명의 인적 사항을 정리했으며, 교차 검증의 편의를 위해 원문 영인본을 수록했다. 무엇보다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내용들을 새롭게 발굴·소개했다.

서학의 태동기부터 신유박해 이후까지
척사의 기록에 담긴 초기 교회사 『송담유록』

이 책은 성호 이익의 서학에 대한 논의부터 서학의 발생 및 성장 배경, 공서파와 신서파의 갈등과 행태까지 초기 교회사의 큰 흐름에 대한 풍부하고도 통시적인 전망을 제공한다. 다양한 주변 자료를 편집·정리해 서학 도입기 조선 사회의 면면을 생동감 있게 담아낸 기록이다.

 

목차

간행사
격려사
서문
송담유록
황사영백서
돈와기문편
안정복 서간
부록_ 아들 강준흠을 향한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 글
부록_ 홍문관교리 이공 묘지명
해제_ 초기 교회사 자료의 숨은 보석
인명 찾아보기
영인 송담유록

저자 소개

저 : 강세정 (姜世靖)
 
본관은 진주, 자는 명초(明初), 호가 송담(松潭)이다. 아들은 홍낙안·이기경과 함께 공서파 3인방의 한 사람이었던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이다. 서학을 믿은 이가환·황사영 집안과 혼맥이 있었다. 41세 때인 1783년 늦깎이로 증광시에 응시해 진사 2등 6위로 급제했다. 이후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57세 되던 1799년에야 회덕현감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추향(秋享) 제례 때 축문에 명나라 연호를 쓰지...
 
역 : 정민
 
한문학 문헌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온 우리 시대 대표 고전학자.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 지성사의 전방위 분야를 탐사하며 옛글 속에 담긴 깊은 사유와 성찰을 우리 사회에 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살핀 《비슷한 것은 가짜다》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다산 정약용을 다각도로 공부한 《다산과 강진 용혈》 《다산 증언첩》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책 속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께서 일찍이 서양의 학문에 대해 논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는 신성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서양학이 치성하게 된 뒤에 사람들이 간혹 이것을 가지고 그가 서학을 깊이 믿었다고 의심하여, 함부로 비방하는 논의를 더하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학은 불교의 나머지 유파로 아교와 칠이 엉긴 단지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니, 애석하다.”

이 같은 두 마디의 말에서 그가 엄하게 서학을 배척한 것을 판단할 수가 있다. 그가 신성하다고 여겨 취했던 것은 다만 천문과 역법의 기교 같은 몇 가지였을 뿐이다. 뒷사람들이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 p.17~18

이승훈과 정약용의 무리가 감제(柑製)에 들어갔는데, 성상께서 내리신 제목에 제사에 대한 주장이 있자 둘 다 백지를 내고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 또한 제사는 마귀가 먹는다는 이유로 제사가 무익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강이원이 전해준 이야기다.
--- p.48

이에 앞서 권철신이 그 부친의 장례를 치를 때 아녀자들이 모두 성장(盛粧)하고 화려한 복장을 입은 채로 면화솜으로 망자의 코를 막을 때 영결하였다. 손님들이 가서 조문하자, 맏아들만 홀로 조문을 받고 그 나머지 형제는 조문을 받지 않았다. 손님을 접대하며 권철신이 말했다. “우리 집안의 상례(喪禮)가 어떠하오?”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 p.49

『송담유록』은 아버지 강세정이 가문의 희망이었던 아들 강준흠의 정치적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쓴 책이다. 그는 곳곳에서 아들이 국가의 정론인 반서학을 외쳤을 뿐 채제공을 반대한 것은 아니란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또 아들 강준흠이 공서파를 대표하는 3인방으로 홍낙안, 이기경과 한목에 엮이는 것에 대해서도 불편함을 드러냈다. 신유박해 이후 모질고 각박한 행동으로 외면당한 홍낙안, 이기경과 거리를 두고, 당시 복권 분위기에 있던 채제공 노선에 접근함으로써, 아들 강준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주고 가문을 지키려는 부정(父情)이 강하게 깔려 있다.
--- p.394

성호 이익의 서학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 1801년 신유박해까지, 서학 내부에서 일어난 여러 일과, 신서파와 공서파의 공방을 다뤄서, 초기 서학의 성격 이해에 도움을 준다. (…) 이어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들었을 초기 서학 관련 자료인 「황사영백서」와 「돈와기문편」을 수록해, 책에 자료집의 성격을 부여했다. 「황사영백서」가 신유박해 당시의 심층을 보여준다면, 「돈와기문편」은 그보다 70여 년 전 이익과 신후담의 토론 기록을 남김으로써 조선에서 서학 논의의 출발 지점이 언제였고, 당시의 쟁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끝부분에 수록된 안정복의 여러 서간과 한시 및 일기는 1785년 서학이 처음 태동하던 시기 신서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권철신·이기양 등과의 사이에 오간 격렬한 공방과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처음 서학이 태동하던 시기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따라서 이 한 권의 책으로 『벽위편』 못지않게 서학 도입기 조선에서 벌어진 다양한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 p.418
 

출판사 리뷰

초기 교회사의 생생하고도 입체적인 증언 기록
정민 교수의 충실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로 만난다


서학 도입기 조선 사회의 다각적 복원에 필요한 중요 사료가 마침내 공개된다. 18세기 조선 지성사를 깊이 탐구해온 고전학자 정민 교수가 번역하고 해제를 붙인 강세정(姜世靖, 1743~1818)의 『송담유록(松潭遺錄)』이 완역 출간되었다. 그간 학계와 교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명료하게 밝히고, 수백 개의 주석을 통해 불분명했던 수많은 인명의 인적 사항을 정리했으며, 교차 검증의 편의를 위해 원문 영인본을 수록했다. 무엇보다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내용들을 새롭게 발굴·소개했다.

이 책은 서학 태동기부터 신유박해 이후까지 조선 사회를 뒤흔든 충격과 그 흐름에 대한 풍부하고 통시적인 전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성호 이익의 서학에 대한 논의부터 서학의 발생 및 성장 배경, 공서파와 신서파의 갈등과 행태 등 서학이 태동하던 시기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또한 각종 상소문과 황사영의 「황사영백서」, 신후담의 「돈와기문편」, 서학을 배척한 안정복의 편지까지 주변 자료를 다수 수록했다.

“『송담유록』 『눌암기략』은 그간 학계에서 제대로 된 주목을 받은 적이 없다. 교회사뿐 아니라 당대 정치사의 흐름 이해와 남인의 위상 파악을 위해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귀한 자료다. 초기 교회사의 누락된 부분이 반서학의 입장을 지녔던 이들의 기록에 힘입어 충실하게 채워지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_해제에서

서학의 태동기부터 신유박해 이후까지
척사의 기록에 담긴 초기 교회사
『송담유록』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다산 정약용을 오랜 시간 공부해온 정민 교수는 다산의 청년기와 천주교 신앙 문제를 다룬 『파란』을 집필하며 조선 사회에 서학이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에 서학 열풍을 일으킨 천주교 수양서 『칠극』을 번역했고, 이어서 초기 교회사 연구서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집필했다. 그는 이러한 연구 여정 중에 『송담유록』을 처음 접했다. 그러나 『송담유록』은 홍이섭 교수의 최초 소개 이후 단 한 차례도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고, 책의 소재 또한 찾을 길이 막막했다.

“문득 강세정의 아들 강준흠의 문집이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홍이섭문고에 소장되어 있으므로, 혹 『송담유록』도 같은 문고 안에 들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보니, 일반 고서 목록에는 빠진 채 홍이섭문고 목록 속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 어떻게 이렇듯 귀한 자료가 첫 소개 이후 이제껏 그대로 묻혀 있었을까? 뜻밖의 행운에 놀라운 한편으로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나는 즉각 이 자료의 번역 작업에 돌입했다.” _해제에서

정민 교수는 『송담유록』 외에도 천주교 관련 주요 문헌의 번역과 주석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는 이와 같은 자료를 반드시 정리하고 교차 검토해야만 한국 초기 교회사의 실상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땅은 기억을 지우고, 시간은 기록을 묻는다. 순교의 영성을 복원하거나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기억과 기록의 재생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유불리를 떠나 금쪽같은 단편의 기록 속에서 기억의 편린을 붙들어 그 시절과 내밀하게 접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_정민

『송담유록』의 자료 가치

『송담유록』은 서학 도입기 조선 사회의 면면을 생생하게 담아낸 책이다. 성호 이익의 서학에 대한 인식부터 신유박해 이후 서학에 반대한 공서파의 득세와 몰락까지, 다양한 주변 자료를 편집·정리하여 객관적 정보 위주로 기술한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저자 강세정이 혈족, 인척, 학맥, 정파 등으로 얽히고설킨 인맥을 통해 직접 견문한 사실뿐만 아니라, 의금부가 제출한 사학(邪學) 죄인의 공초 기록, 공서파의 각종 통문 및 상소문, 황사영의 「황사영백서」, 신후담과 성호 이익 등이 서학에 관해 토론한 문답인 「돈와기문편」, 서학이 번지는 상황을 우려한 안정복의 편지 등을 한자리에 모아 수록했다. 한편, 역자 정민 교수는 부록으로 강세정이 지은 「아들 강준흠을 향한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 글」과, 강준흠이 공서파 이기경을 위해 쓴 「홍문관교리 이공 묘지명」을 함께 번역해 실었다. 『송담유록』의 내용과 맞물려 있고, 초기 교회사의 배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초기 교회사 연구에 간과치 못할 소중한 증언집이다. 천주교 집회 광경, 교인들의 소지품, 교회 지도자들에 관한 새로운 사실 등 그간 불분명했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 초기 교회사 연구를 한층 풍부하게 해준다. 정약용과 이승훈이 제사와 관련된 문제라 하여 과거시험 답안을 백지로 제출한 일화는 『송담유록』에만 실려 있다.

강세정은 누구인가? 『송담유록』의 집필 동기

저자 강세정은 홍낙안·이기경과 함께 공서파 3인방의 한 사람인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부친으로, 그는 철저한 공서(攻西)의 입장에서 서학 집단의 신앙 활동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다만 신서파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던 채제공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가문의 희망이었던 아들 강준흠의 공서가 홍낙안·이기경 등 반(反)채제공 노선과는 달랐음을 해명하는 데 애를 썼다. 이는 1805년 정순왕후가 세상을 뜬 뒤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시파의 김조순 등이 집권하게 된 정국과 관련이 있다. 이때 채제공 계열의 남인이 복권하면서 아들 강준흠이 반채제공의 오명을 쓰고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자, 강세정은 『송담유록』을 통해 채제공과 서학을 분리해서 보아야 함을 강조하며 아들의 정치적 입장을 변호하고 가문을 보전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