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5.대한민국대통령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 (2011) - 노태우 경제의 재조명

동방박사님 2023. 6. 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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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주화시대를 맞이한 우리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기업권력과 정치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한 편의 경제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와 국회의원, 경제인 등 당시의 경제를 이끌었던 주역들의 생각과 논의구조의 변천 과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목차

추천사 _ 현장감 넘치는 경제드라마
서문 _ 물대통령이 주도한 경제민주화
6공 경제정책 인맥도

제1장 ‘민주화’라는 쓰나미

기자도 참석시킨 경제차관회의
경제민주화의 시동
전두환정권이 넘겨준 짐
친구끼리 주고받은 대통령 권좌
그 밥에 그 나물
올림픽 성공과 그 이후
노 대통령의 경제관
대통령의 가정교사

제2장 여소야대(與小野大)시대

국회, 권력의 중심에 서다
야당이 주도한 경제 입법
포퓰리즘의 향연
쌀값도 국회가 정한다
농협회장도 직선제로 뽑아라

제3장 소모품 장관들

27번의 개각
키친 캐비닛
124명의 장관들
누가 경제사령탑인가
경제수석들 고전

제4장 용두사미 개혁정책

회장 전두환, 사장 노태우
‘작은 정부’ 한다더니…
‘경제 CIA’ 국세청
선거공약 달성률 98%
안 되면 언론 탓

제5장 노동자시대

달라지는 노동정책
공권력 발동 시비
무노동무임금의 진통
연봉제의 탄생
불발탄으로 끝난 노동관계법 개정

제6장 금융실명제 두 번 죽다

부활한 금융실명제
금융실명단의 발족
실명제의 표류
대통령의 우유부단

제7장 신도시 건설

정부가 불지른 부동산투기
분당은 문희갑, 일산은 박승
200만 가구를 짓다
바닷모래와 중국산 시멘트
졸속과 신속의 차이

제8장 토지공개념의 탄생

개혁을 놓치면 혁명이 온다
토초세가 몰고 온 부작용들

제9장 정부와 재계의 전쟁

기업권력과 정치권력
“대통령을 뭘로 보나”
재계의 항복, 그리고 반격
자진매각에서 강제매각으로
정주영의 도전
현대를 죽여라
노 대통령의 재벌관
달라진 정치자금 풍속도

제10장 산업정책의 진화

민주화 바람 속의 부실기업 정리
한국중공업 민영화의 엎치락뒤치락
제2이동통신의 특혜 시비
대통령의 망신

제11장 한국은행의 독립운동

때를 만난 한국은행
시녀와 식객 사이에서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이전투구
싸움은 무승부로 끝나고

제12장 금리자유화의 긴 여정

사공일 구상
장관 바뀌면서 다시 원점으로
대통령 사돈의 원격조정
돌아앉은 재무부와 한국은행

제13장 속 썩인 주식시장

발권력까지 동원된 12·12조치
대책 없는 증시대책

제14장 다시 적자시대로

국제수지, 다시 적자로
미국의 환율절상 압력
쉬쉬했던 우루과이라운드
보험시장 개방의 우여곡절
대통령이 악화시킨 대일관계

제15장 노태우의 대표작, 북방정책과 SOC투자

소련과의 역사적 수교
영종도신공항과 경부고속철

후기(초판) _ 노태우시대의 경제를 정리하면서
부록 _ 6공 경제일지
_ 찾아보기(인명 한자표기 포함)
 

저자 소개저 : 이장규

 
글쓴이 이장규는 언론, 기업, 대학 등을 전전하며 여러 직업을 살아왔다. 경제기자 오래 한 것을 밑천 삼아 술 회사의 CEO도 지냈고, 신재생에너지 회사와 항공사의 경영을 맡기도 했다. 은행과 재벌회사 사외이사를 맡았었고, 회계법인에서도 훈수를 뒀다.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껴서 한동안 빠졌었고, 대학 경영을 맡아서는 호된 고생과 좌절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를 지배하는 DNA는 여전히 기자다. 31년간 중...

책 속으로

경제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성장률은 연거푸 12%를 기록했고, 넘쳐나는 국제수지 흑자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것을 줄이느냐가 고민거리였다. 한국경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바보였다. ---p.27

경제비서관을 지낸 한 측근의 평가는 훨씬 인색했다.
“애당초 노태우 대통령은 경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36.6%짜리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부담감이 항상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고, 더구나 총선 결과가 여소야대로 나타남에 따라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으니까요. 노사분규를 수습하는 태도를 봐도 그랬습니다. 노사분규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언론과 정치권이 시비를 걸 만한 대책은 피했습니다. 겪을 건 겪어야 한다는 정면돌파보다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가는 정책은 가급적 안 쓰겠다는 쪽이었지요.” ---p.63

드디어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평민·민주·공화 야 3당은 국회가 개원되자마자 당장 16개의 상임위원장 중에서 9개를 차지하는가 하면, 국정감사 부활과 5공특위 구성 등을 관철시키며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7월 2일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은 국회의 힘, 더 구체적으로는 ‘야대(野大)’의 위세가 어떤지를 여실히 보여준 첫 번째 사례였다. ---p.79~80

잘 모르거나 확신이 안 서면 여론의 향배에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다. 언론이 한번 개각의 필요성을 제기하면 십중팔구 그렇게 되었다. 실제 통계가 그 실상을 뒷받침해 준다. 노태우정권 5년 동안 크고 작은 개각을 무려 27번이나 했고 그 과정에서 장관을 통틀어 124명이나 양산했다. 평균 재임기간은 13개월 정도, 전두환시대의 평균 재임기간은 17.5개월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장관들에게 책임을 물어 사람을 교체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문책인사를 통해 여론의 공격을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 ---p.109~110

키친 캐비닛의 고정 멤버는 두 사돈과, 동서인 금진호 씨, 그리고 친인척은 아니지만 이원조 씨가 단골로 끼었다.
이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과천의 경제관료들은 여느 장관회의가 열릴 때보다 이들의 회동내용을 더 궁금해했던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p.120

6공에 들어와서도 국세청장의 대통령 독대 관례는 종전과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김종인 경제수석도 국세청과 대통령 사이의 특수관계에 관한 한 모르는 일이 많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6공 들어 국세청장의 활동범위는 과거에 비해 훨씬 공개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투기단속이나 재벌문제 등을 다루는 공식 회의석상에도 자주 출석해야 했고, 서로 격의 없는 토론도 함께 나눴으니까요. 그러나 국세청장이라는 자리의 성격상 대통령과의 독대는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건 어떤 수석비서관도 개입할 수 없는 경우이겠지요. 물론 나도 모르게 국세청장이 대통령과 독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p.160

당시 노동문제를 담당했던 한 실무 관계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공권력을 발동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대통령이 대충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지금 공권력을 쓰면 일시적으로는 진정시킬 수 있지만 불씨를 완전히 끄지는 못한다. 여론도 등을 돌린다. 불순세력을 저항 없이 뿌리 뽑자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정부가 내버려두면 저희들끼리 강온파로 갈려 싸울 것이다. 강성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면 그때 공권력을 써서 추려내면 된다. 명분도 서고 실익도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상황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더군요. 강온파끼리의 대립도 크지 않았고 핵심 멤버들도 꼬리를 잡히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업들의 불만이 거세지고 경제도 흔들릴 조짐을 보이니까 비로소 서둘러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지요. ---p.184~185

돌이켜 보면 1980년대 중반에 찾아온 이른바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 끝에 불어닥친 집값폭등 현상은 정말 끔찍했다. 돈은 흘러넘치는데 집은 모자라고, 민주화 열기 속에 각종 규제는 맥을 못 쓰고…. 자고 나면 다락같이 오르는 집값에 속수무책이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급격한 소득증대로 대형 주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판에 수년 동안 공급을 꽁꽁 묶어 놓는 정책을 써 왔으니 대형 아파트값이 집중적으로 폭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수습한 것이 분당과 일산 신도시 건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문희갑과 박승이 주도한 신도시 건설은 주택정책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p.258

나중에 대통령선거에 나서게 된 정주영은 심지어 어느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김종인이 때문에 내가 정치할 것을 결심했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해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대통령은 괜찮았는데, 경제참모가 문제였다”는 말도 수시로 하고 다녔다. 정주영 회장이 직접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 원을 갖다 주었다는 문제의 폭탄선언 내용도 따지고 보면 세무조사를 무마시켜 달라고 대통령에게 돈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p.309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요. 그러면 내가 독재자란 말이오.”
아니나 다를까, 노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술자리가 끝나고 김종인 경제수석은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도대체 어찌 된 거요. 재벌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죄송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힘을 정부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제대로 정리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벌이 대통령을 우습게 보았기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진 만큼, 이참에 재벌들의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점을 김종인이 에둘러 이야기한 것이다. ---p.322

6공 들어서는 도무지 헷갈려서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기업들의 고충이었다. 기업들로서는 돈을 잘 먹고 잘 봐주는 사람이 제일 좋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돈을 안 받거나, 받더라도 그 과정이 복잡한 상대는 싫어한다. 전 대통령이 전자에 속한다면 상대적으로 노 대통령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집권 후반에 가서는 노대통령도 잘 받는 쪽으로 돌아섰다).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뜻에서 노 대통령에게 ‘물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배경에는 아마도 이 같은 기업들의 불만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p.330

브레이크는 엉뚱한 곳에서 걸렸다. 수차에 걸친 당정회의에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후보가 제동을 걸었다. 여당의 차기 대통령후보가 현직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이동통신사업은 본격적인 정치문제로 비화하게 된다. ---p.353~354

사공일은 자신이 곧 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금리자유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나름대로 ‘국제화’라는 전체 구도 속에서 금리자유화계획을 설정해 놓고 재무부를 떠나기 전에 오히려 서둘러 밀어붙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퇴임 직전에 실행에 옮긴 금리자유화에 대해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시작이 반’인데 자신이 그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후임 장관, 그것도 대학 동기동창에 의해 원점으로 되돌려질 줄은 전혀 몰랐다. ---p.406~407

막상 경제가 다시 어려워지고 국제수지 적자가 통계로 드러나자 정부도 학자들도 뒤늦게 후회와 반성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86~88년의 3저 호황 때 흑자관리를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걸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경제규모나 관리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무턱대고 흑자 내는 데만 매달린 나머지 결과적으로 국내적으로는 물가상승을, 대외적으로는 통상압력을 불러왔습니다.”
양수길 당시 KDI 연구위원의 이 같은 지적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p.439~440

국내 언론들이 “정부는 UR 대책을 미리미리 세우지 않고 왜 지금 와서 허둥대고 있느냐”며 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고 나서자 서울에 주재하던 한 일본 특파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언론들은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 언론은 왜 그토록 잠잠했습니까. 언론 자신부터 UR에 무관심한 채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모두들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만 하고 있는데, 정말 우루과이라운드가 성사되지 않는 것이 한국경제에 이롭다고 생각해서입니까.” ---p.452~453

양국의 정상회담으로 수교는 기정사실로 여겨졌으나 정작 도장을 찍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남아 있었다. 첫째로는 소련은 경제협력, 다시 말해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우선적으로 요구했던 반면 한국정부는 수교부터 먼저 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돈을 빌려주는데 그 규모를 얼마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p.487

실무주역이었던 김영주의 말을 더 들어보자.
“김종인 경제수석과 이석채 기획단장의 콤비플레이가 오늘의 사회간접투자 확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수석이 정치적으로 울타리를 쳐주고, 기획단장이 실무적으로 능란하게 끌어 나갔기 때문에 실무자들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할 수 있었습니다. SOC투자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인데, 만약 그때 밀어붙이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의 영종도공항이나 경부고속철이 존재했을까 의문입니다. 논란 속에 시간을 질질 끌었더라면 땅값 상승으로 토지수용 부담은 훨씬 더 커졌을 테고, 민주화 열풍 속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작업은 갈수록 힘들었을 테니까요.”
---p.499~500
 

출판사 리뷰

전두환은 살리고, 노태우는 죽였다?

노태우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다. 같은 군인 출신이요 친구인 전두환 대통령과 비교해도 차이가 크다. 전두환 팬클럽은 있어도 노태우 팬클럽이 결성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측근들의 결속력도 훨씬 떨어진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전두환이 기껏 살려놓은 경제를 적자의 늪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만년에는 비자금사건으로 더욱 만신창이가 되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노태우시대를 살았던 세대조차 그가 어떤 지도자였고 무슨 일을 했는지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물태우’, ‘물대통령’이라는 희화적 별명으로나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나 이런 잣대만으로 노태우와 6공화국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그는 정말로 경제를 망쳐 놓는 무능한 대통령이었을까? 그의 시대는 단지 ‘잃어버린 5년’에 불과했던 것일까?

청와대는 나서지 마시오

이승만은 건국, 박정희는 산업화, 전두환은 물가안정이었다면 노태우의 키워드는 단연 민주화다. 그만큼 노태우시대는 격변의 시기이기도 했다. 6·29선언을 기점으로 군사독재가 끝나고 뜨거운 민주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치면서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민주화라는 단어가 붙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각계각층의 요구가 넘쳐났고, 대통령은 코미디 프로그램과 신문 만평의 단골 소재로 등장했으며, 경제차관회의에는 기자들의 참석이 허용되었다.
노태우는 취임 후 첫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청와대 비서실은 행정부의 일에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경제는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관료들이 알아서 원만하게 해결해나가도록 했다. 모든 것을 시장과 현장에 위임하다시피 했다. 첨예한 노사분규의 현장에도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았으며, 부실기업 정리와 금리자유화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정치도 경제도 민주화가 ‘대세’였다.
하지만 경제는 그가 기대한 대로 ‘알아서’ 저절로 굴러가지 않았다. 88올림픽의 흥분이 가시는 것과 함께 경제는 비실비실 활기를 잃어갔고, 흑자를 구가하던 국제수지도 적자로 돌아섰다. 수출경쟁력은 떨어지고 물가와 부동산가격은 치솟았다. 정책 선택의 미숙과 실기(失期)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노태우경제는 오직 실패뿐이었을까.

물대통령의 재발견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는 1995년에 나온 《실록 6공경제》를 다시 고쳐 쓴 것이다. 《실록 6공경제》를 쓸 당시, 노 대통령은 한국경제를 어렵게 만든 지도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6공경제의 실정을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전가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의 하나가 노 대통령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것이 매우 불만스러워서였다. 그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 이상의 비난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저자의 시각은 이번 책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판적이었던 시각을 바꾸어 더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쪽으로 재평가한 측면이 있다. 노태우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인 북방정책에 대해 16년 전의 초판에서는 다소 비판적이었으나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는 ‘잘한 정책’으로 재조명한 것이 그렇다. 소련과의 30억 달러 경협에 대한 평가도 당시의 관점과 지금의 관점이 같을 수 없었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철도, 영종도신공항,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하기로 한 결단 역시 예전의 평가가 너무 인색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또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어쩌면 노태우 같은 인물이 민주화 과정에서 적절했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누가 봐도 노태우는 우유부단형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총명한 지도자도,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도자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런 타입이 민주화시대에 알맞은 최고통치자의 덕목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이 밖에도 이 책은 틀린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미흡했던 해석과 평가를 보완하여 한층 재미있고, 깊이 있고, 정확한 새 책으로 거듭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는 민주화시대를 맞이한 우리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기업권력과 정치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한 편의 경제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와 국회의원, 경제인 등 당시의 경제를 이끌었던 주역들의 생각과 논의구조의 변천 과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재임기간 중 전두환의 경제정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한다. 이왕에 전직 대통령한테서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면, 전두환보다는 노태우의 경제정책을 참고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독재시대에 폈던 정책들이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태우에 대해 연구했다면 복지정책이든 분배정책이든 노무현은 훨씬 더 세련되고 업그레이드된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분명하다. 개발독재하의 관성이 무너지고 갑자기 찾아온 민주화 세상에서 빚어졌던 갖가지 시행착오와 내부갈등, 실패사례들이야말로 두고두고 귀중한 교훈이 될 것이다. 이 땅의 현직 대통령과 미래의 대통령은 물론 한국경제를 연구하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학생, 교사, 연구자, 공무원이 필독해야 할 책이다. 현실 경제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