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동양철학의 이해 (책소개)/2.한국철학사상

무위당 장일순 : 생명사상의 큰스승

동방박사님 2021. 12. 24. 07:34
728x90

책소개

늘 낮은 곳에서 함께 한 지도자,
대한민국 생명운동의 대부, 무위당 장일순


장일순. 그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무위당의 일대기가 책으로 편찬 된 것엔 큰 의미가 있다. 무위당은 1953년 원주 대성학원 설립 후 평생을 교육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며 보냈다. 정치활동의 전면에는 결코 나서는 법이 없었지만 늘 반독재 투쟁운동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역할을 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과 무위당의 일생은 그 궤를 같이 한다. 무위당 한 사람의 일대기 만으로도 우리는 근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모두 살펴 볼 수 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은 난관에 봉착하면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해, 생명을 아끼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무위당의 선구자적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목차

1.교육 운동
선생님 가신다
하늘과 사람을 대하여 부끄럼이 없어야
사람이 곧 한울이라
줄탁동시

2.민주화 운동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밑으로 기어라!
함께 잘 사는 길
모든 길은 원주로 통한다

3.생명운동
나는 미처 몰랐네,그대가 나였음을
돌은 말이 없지만 나의 스승
모기가 불쌍해 등을 켜지 않노라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어

장일순 선생의 생애
 

저자 소개

저자 : 이용포
196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한양 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8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성자 가로등]이 당선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청소년 소설 《느티는 아프다》, 《뚜깐뎐》과 인물 이야기 《이휘소》, 《유일한》 등을 출간했다.
 

 

출판사 리뷰

무위당 장일순, 대한민국이 기꺼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고결한 사람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스승으로 삼은 사람. 고 리영희 교수가 “우리 사회에 이런 분 또 없을 것”이라 잘라 말한 사람. 이현주 목사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분”이라 한 사람. 유홍준 교수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고 한 사람. 모두 무위당 장일순을 두고 한 말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을 지키며 힘없는 이들의 벗으로 남았고, 민주화 투쟁과 생명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긴 무위당. 올해 5월 22일로 무위당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되었다.

1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현실은 어떤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우리는 행복한가? 구제역으로 몰살당한 가축 300만 마리는 행복했을까? 이명박 정부가 파헤치는 4대강은? 순식간에 무너진 핵발전소 덕분에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마음놓고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무위당이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뭐라고 했을까? 원주를 생명운동의 구심점으로 만든 무위당에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름다운 지구인의 자취를 발굴해 널리 알려 온 지은이 이용포는 무위당 장일순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줄탁동시

무위당은 스물여섯 나이에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원주에서 교육 운동을 시작한다. 교육이 죽으면 미래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1953년 무위당은 성육 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교육 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 의식의 상호작용이야말로 교육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에 반대했다.

교육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잘난 몇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 똑똑한 영재를 하나 키우겠다고 나머지 둔재를 버리는 것은 교육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무위당이 매를 든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학생을 때리려 든 매가 아니었다.

오늘은 너희가 나를 때려야겠다. 너희들이 이토록 공부에 열의가 없으니 이게 다 선생인 내 죄가 아니겠느냐. 1번부터 나와서 날 때리거라.

그날 무위당의 종아리엔 피가 맺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은 무위당에 감화되기 시작한다. 훗날 무위당은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는 조급한 마음에 ‘날 닮아라, 날 닮아라’ 했지. 허나 이젠 그때 일이 후회스럽구먼.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잖은가. 무어냐 하면,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껍질을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새끼가 알에서 나오는 걸 돕기 위해 바깥에서 쪼는 것을 ‘탁’이라 하거든. 그 둘이 맞아야 된다, 이 말이야. 어린 아이가 신이 나서 하게 해야지, 부모가 억지로 당긴다고 되나? 안 되지!

모든 길은 원주로 통한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틀 뒤에 무위당이 체포되었다.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었다. 무위당은 8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한다. 출소 뒤 대성학원 이사장으로서 교육 운동에만 전념할 생각이었지만, 역사는 무위당을 비껴가지 않았다. 1965년 대성 고등학교 학생들이 고등학생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한일회담 반대 집회를 연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원주 시청까지 행진했다. 군사정부는 이 일을 이유로 무위당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만든다.

이즈음 무위당은 평생 뜻을 함께한 지학순 주교를 운명처럼 만난다. 1965년 원주 교구 설립과 함께 지학순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후 무위당과 지학순 주교는 재해대책사업위원회, 가톨릭 농민회 운동, 신용협동조합 설립 등에 힘을 모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원주캠프’가 싹트게 된다. ‘5?16 장학회 부정부패 사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거치면서 원주는 ‘70년대 원주, 80년대 광주’라고 할 정도로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원지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이 있었다.

모기가 불쌍해 등을 켜지 않는다

1980년대 민주화 세력이 정치 투쟁에 몰두해 있을 때 무위당은 자신의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 끝에 생명운동으로 한 단계 도약한다. 그는 기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한다.

땅이 죽으면, 인간도 죽어. 생명을 기르는 땅이 죽는데, 인간인들 별 수 있겠어?
1983년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이 출범한다. 무위당과 원주캠프의 생명운동이 구체화된 것이다. 조합원 36명이 낸 출자금 36만 원으로 시작한 한살림은 20여 년 만에 회원 15만 세대를 확보했다. 이제 한살림 운동은 시민?사회운동으로 발전해, 모든 사람이 함께 이루어 가는 공존공영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무위당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해월 최시형이다. 무위당은 억압받던 이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해월만큼 거룩한 모범을 보여 준 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해월신사법설》 중에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해월의 가르침은 무위당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다. 무위당이 평생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소중하고 평등하게 대한 것은 해월의 가르침이 준 깨달음 때문이었다. 무위당은 평생 삶을 통해 ‘모심과 섬김’을 실천한 사람이다. 돈을 모시지 말고 생명을 모시고, 쇠물레(기계)를 섬기지 말고 흙을 섬기며, 눈에 보이는 겉껍데기를 모시지 말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알짜로 값진 것을 모시고 섬길 때만이, 마침내 새로운 누리가 열릴 수 있어요.

무위당은 말년에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생명인 자연을 훼손하지 말고 귀하고 고맙게 여겨야,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만 잘살겠다고 발버둥 치면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경고였다.

그런데 현대 문명이 최고의 가치로 설정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든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최대로 이용해서 각자의 이득을 챙기고 사욕을 채우는 그것이란 말일세. 서로가 서로를 이용 상대로만 보고 그래서 결국 미쳐 돌아가는 거라. 여기서 오늘의 심각한 공해 문제라든가 생태계 파괴가 발생하는 건데, 사람들이 서둘러 도와 덕으로 삶의 축을 세우고 자연의 도리에 따라서 살아갈 때 비로소 그런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지.

선생님 가신다, 선생님 이제 다시 오신다
1993년 3월 12일 평생 동지인 지학순 주교가 세상을 떠난다. 무위당도 그해 9월 병세가 나빠져 입원한다. 1994년 5월 22일, 무위당은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7년이 지났다. 그 긴 세월에도 무위당을 아는 사람들은 그이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더욱 판을 칠수록, 사람들이 타자화될수록, 자연이 더 악랄하게 착취당할수록 그이가 더 보고 싶어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무위당은 비틀거리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모색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고, 의심하는 자에게 신념을 주고, 방황하는 자에게 철뉙할수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무위당에게 배워야 한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망가지는 생명 앞에서 무위당에게 물어야 한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람이 곧 한울이니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말고, / 상하게 하지 말고, / 어지럽게 하지 말고, / 일찍 죽게 하지 말고, / 더럽히지 말고, / 굶주리게 하지 말고, / 허물어지게 하지 말고, / 싫어하고 불안하게 하지 말고, 춥고 굶주리게 하지 말라.[십무천], 해월 최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