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 190

다카시마 & 미쯔비시

타카시마 탄광의시작 [일본측설명] 개국이 시작된이후, 외국증기선의 연료로 사용되며 석탄의 수요가 높아지자 사가번의 스코틀랜드 출신 상인 글로버와 함께 1868년 사가번 (담당 :마쓰바야시겐조)과 글로버는 타카시마 탄광의 공동경영 계약을 맺고 합병회사를 설립하여 탄광개발을 시작 하였습니다. 영국인 기술자 모리스를 초빙하여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차에 의한 수직갱도인 타카시마 탄갱 (홋케이정갱)을 만들엇습니다. 타카시마 탄갱은 1881년부터 미쓰비시가 소유하게 되었고, 타카시마 탄갱의 석탄기술은 일본 근대탄광산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시마 (군함도) 모형

하시마 (군함도) 모형 하시마에서는 이미 19세기 초에 사가번에 소규모의 채탄을 하고 있었으며, 1890년에 미쓰비시 합자 회사가 경영하게되면서 본격적으로 해저탄광으로서 조업이 시작되엇습니다. 석탄의 생산량이 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1916년에 좁은 섬에서 많은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골조의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고 ,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층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좁은 섬에 빾빽이 서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어 그 특징적인 섬의 모습이 군함을 닮았다하여 "군함도"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이름도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전성기에는 약 5,300명이 살앗으며, 인구밀도가 당시 도쿄도의 약9배로 세게에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 수요..

다카시마 석탄자료관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항구에서 18.5km떨어진 이 섬은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던 곳이다. 나가사키에는 육지나 섬 지하로 굴을 파 들어가 바다밑 수백미터 아래까지 채굴하는 해저탄광이 여럿 발달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카시마는 증기기관을 갗춘 일본 최초의 근대적탄광이자 해저탄광으로 널리 알려졌다.본래 감옥노동, 즉 발목 쇠사슬을 찬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개발돼 사측의 노무관리가 가혹하기로 도 유명했다. 1881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한 이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첬던 이곳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끌려와 막장에서 신음했다.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및 그 가족의 숫자는 3,500명이나 됐다.

나가사키 미쯔비시조선소

미쓰비시는 어떤기업인가? 1부 에도 막부 시절인 1835년 도사번 (지금의 시코쿠지방 고치현)에서 출생한 하급무사 출신 이와사키 야타로가 1870년 배 세척을 가지고 해상무역에 손을 대면서 기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73년 회사명을 "미쓰비시상회로 내 걸면서 미쓰비시라는 상호가 처음 등장하게 된다. 미쓰비시는 이와사키가의 문장이었던 3개의 마름 (*바늘꽃과의1년생) 에서 따온 것이다. 야타로는 이른바 "사가의 난"이 발생 했을때 정부를 도와 반란군을 진압하는등 메이지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인사들과 긴밀히 접촉하여 기업을 성장 시켰다. 그는 막부정권을 무너 뜨리고 (대정봉환 :大政奉還 - 1867년 에도막부가 천황에게 국가통치권을 넘겨준사건)을 성사시킨 일본의 국민적 영웅 사카모토료마의 사업을 승계한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