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 607

서울시장의 공관

서울시장의 공관 혜화동 옛 시장공관은 다양한 서울시의 정책이 논의되는 일터이자, 서울시장이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집이었다. 공관은 국내외의 손님이 초대되는 행사장이었고, 동네의 일원으로서 반상회를 개최하거나 새해에 떡국을 나누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텃밭을 가꾸고 평상에 한숨을 돌리는 일상의 공간이었다. 1981년부터 2013년까지 13명의 역대 서울시장이 거주하였으며 이곳에서 논의된 다양한 정책들은 서울시의 역사이자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되었다. 혜화동 엣시장공관

한양도성 (낙산~혜화)

서울 한양도성 지정번호 : 사적 제10호 (서울한양도성) 시대 : 1396년 (태조9)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 (태조5년)에 백악 (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세계의 도성중 가장 오래도록 (1396~1910, 514년)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 (..

한양도성 박물관

한눈에 보는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새 도읍지를 정한 1394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간 지속적으로 보수 관리되어 온 성이다. 전체 길이는 18,627km, 성벽높이는 5~8m이다. 성벽은 백악,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 네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여 자연의 형상과 일체화하였으며, 각각 독특한 건축미를 지닌 8개의 성문과 2개의 수문水門을 내었다. 성벽의 일부 구간에는 치성雉城을 쌓았고, 곳곳에 군사용 성랑城廊을 지었다. 19세기 말부터 전타, 자동차 등 근대적 교통수단이 도입되고 도시의 영역이 성벽 바깥으로 확장됨에 따라 평지 구간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 되었지만, 산지의 성벽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현재 13,370km의 성벽이 남아있는데, 현존하는 세..

한양도성의 각자상석(동대문)

한양도성의 각자 상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숙종 32년 (1706년) 4월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 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 구산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쌓았다는 기록이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은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극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 (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 (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것 (18C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의 유형의 각자 상석이 280개 이상 전해..

태화관 중앙발딩 승동교회 YMCA

이 집터는 본래 중종 때 순화 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 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청하고 일제히 사로 잡혔다. 그 뒤 남 감리교회는 이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 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었으나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계획에 건물이 헐리게~

공평도시유적 전시관

공평 도시유적전시관 보존의 상생 - 공평동 일대는 1978년 "공평구역 도심 재개발지구"로 총 19개 지구가 지정되었고, 2010년까지 6개 지구의 재개발사업이 완료되었다. 2014~15년 재개발 사업 시행에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가 제1.2.4 지구에서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개의 시대별 문화층에서 건물지와 도로 등 유구와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중 유구의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는 iv문화층 (16~17세기)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공평동 도시 유적관은 도심정비 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 원위치 전면 보존" 한다는 원칙을 적용한 첫 사례이다. 능성 구 씨 가옥의 변천 능성구씨 가옥은 구수영의 증손인 구사안이 동생 구사맹에게 대지의 서..

종각 피맛골 역사투어

국가에서 점포를 건설하여 상인들에게 임대하고 세금을 받는 관설 시장을 시전(市廛) 이라한다. 조선 태종 [태종 재위 1400~1418] 종로에 양쪽 건물이 길게 늘어선 행랑을 조성하여 이곳에서 장사를 하게 하였다 의금부 터 (義禁府 跡) 의금부는 조선시대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 금오, 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 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앗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승훈 베드로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아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식민지 역사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 기억을 둘러싼 투쟁 친일인명사전, 그 후 10년 2019.1118.(금) ~2020.3.8 (일) 식민지 역사박물관 돌모루 홀 전시회를 열며 2009년 11월 8일 온갖 난관을 뚥고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청산의 기치를 높이 든 지 18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출범한 지 8년 만에, 4,389명에 이르는 친일 인물들의 행적과 경력을 집대성한 역사정의 실현의 이정표가 세워진 것입니다.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오랜 기간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친일파들의 죄적이 백일하에 드러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시민의 힘만으로 '오욕의 역사'를 정리해 낸 세계사에 유례없는 역사운동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정직한 역사에 대한 시민들의..

식민지 역사박물관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50년 되는 해인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의 좌절이라는 민족사의 교훈을 이지 않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표석을 설치했다. 본래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4 당시 국민은행 본점 자리인 옛 반민특위 터에 세워졌으나, 건물 신축 공사로 인해 2018년 10월 이곳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새문안 동네의 변화 해방 이후 새문안 동네는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부터 주택가에는 주변에 위치한 명문 중고등학교를 가기 위한 과외방이 하나, 둘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곳 과외방은 1980년 과외 급지 법 시행과 강남지역으로의 명문고등학교 이전 등 정부 정책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지만, 한동안 도심 속 주거지로서 큰 변화는 없었다. 과외방을 대여해주었던 곳은 원래부터 살림집이었기 때문에 과외교사들이 떠나고 난 뒤에도 새로운 주민들이 들어와 거주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주변에 큰 회사와 관공서가 들어서면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식당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교육청 길을 따라 형성되었던 식당가는 점차 마을 골목 안쪽까지 진출하여 2000년 경에는 마을의 대부분이 식당가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