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계여행 (1987~2023) <여행지>/9.남미 6개국 (2018년) 50

8-1 칠례산티아고 -> 발파이소가는길

칠례 국가안내1.수도-산티아고, 2.인구- 1820만명 (통계청 2016년기준) 3.면적 -한반도 면적 3.4배. 4.언어-스폐인어5.대통령 중심제 (임기4년, 연임불가, 중임 가능)6.민족 - 백인 (58%) 매스티소 (29.9%) 원주민(3.1%) 물라토 (0.9%)7. 종교 - 카톨릭 (55%) 개신교 (13%) 무교(25%) 기타 (7%) 남북 길이가 4,329인데 동서의 폭은 180km 밖에 되지 않는 뱀장어가 잠자는 모습처럼 가늘고 긴 나라이다.6세기 가지 폐루 잉카제국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1540년 스폐인에 의해 점령을 당하엿고, 그 후 3세기동안 칠례는 식민지 시대를 겪었다. 1818년 2월에 칠례는 독립을 선언 하엿고 1879년~83년 태평양 전쟁에서 폐루, 볼리비아와 전쟁을 하여 영토..

8-2 칠례 발파이소 광장 야시장

칠례의 역사110,000여년 전, 토착 아메리카인 이주자들이 오늘날 칠례의 해안지역과 비옥한 계곡에  정착했다.이곳에 초기인간이 살았던 흔적은 쿠에바 델 밀로돈과 발리 아이케 분화구의 용암굴에서 찿아볼 수 있다. 한때 잉카인들은 현재 칠례 북부까지 진출한바 있으나, 그곳의 마푸체인들은 국가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잉카제국의 침략을 수차례 잘 막아냈다. 마푸체인들과 사파 잉카투팍 유판키와 그의 군대와 싸웠다. 3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이 전투를 마울레 전투라고 하는데, 이 전투의 결과로 잉카의 칠례정복은 마울레 강에서 끝났다.1520년,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그의 이름을 딴 마젤란해협을 발견했다. 다음으로 칠레에 도착한 유럽인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그의 스폐인 정복자..

8-4 전망대에서본 칠례 발파아소

칠례역사2 (독립)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 국왕을 몰아내고 자신의 동생 조제프를 옹립하면서, 스폐인에서 독립하려는 시동 불이 붙었다. 1810년 9월18일 쫓겨난 왕의 후계자인 페르디난동의 이름을 딴 첫 의회가 열렸다. 이 의회는 칠례를 스폐인 왕국 내 자치 공화국으로 선언했다. 곧 완전 독립운동이 폭 넓은 지지를 얻게된다. 스폐이는 이 땅을 다시 찿고자 시도해, 지리한 투쟁이 이어졌다.간헐적인 전쟁이 계속되다가, 1817년 칠례의 액애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 아르헨티나 독립전쟁의 영웅 호세데산 마르틴이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례를 해방 시켯다. 1818년 2월12일 칠례는 오이긴스의 지도 아래 독립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사회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으며, 19세게 칠레사회는 여전히 식민지 ..

8-5 칠례 발파아소 -> 산티아고 가는길

칠례의 역사 3 (정치.사회동향)칠례의 역사는 1987년에 1973년 군사정권에 의해 금지되었다. 가종 파티가 있었다. 전반에 걸쳐, 정당은 현재의 시스템을 설정 1988년 국민 투표에 참여하도록 개편했다.  이 시스템은 큰 정치 연합의 형성에 부분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징후 점에서) 의원과 대통령의 지방선거를 포함하여 1989년~2010년 칠례 선거결과 이후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지만 얼라이언스는 주로 국가 혁신년과 1988년의 국민투표에서 옵션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독립민주연합 (EU)에 의해 형선된 중심의 연합이다. 이십년의 야당 정치 세력후, 자신의 후보 세바스티안 피녜라 2010년 대통령 결선에서 투표의 56.61%를 얻었다. 그는 2014년 야당으로 돌아 왔다. 새로눈 대부분은 ~~ (중략)

8-7 칠례 발파아소 언덕. 산티아고시 전망

산 크리스토발 언덕 - 칠레 산티아고 북붕 있는 언덕아르미스 광장에서 북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높이 약324m에  이르는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산이다. 언덕을 오르는 등반 코스와 산책로가 만들어 있지만 케이블카로 정상에 쉽게 오를수 있다. 정상부 전망대에 오르면 웅장한 고봉들이 둘러싸고 있는 산티아고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볼수가 있다.언덕 정상에는 흰색으로 조각된 14m높이의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산티아고 도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항상 많은 관광객 들이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