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례의 역사1
10,000여년 전, 토착 아메리카인 이주자들이 오늘날 칠례의 해안지역과 비옥한 계곡에 정착했다.
이곳에 초기인간이 살았던 흔적은 쿠에바 델 밀로돈과 발리 아이케 분화구의 용암굴에서 찿아볼 수 있다. 한때 잉카인들은 현재 칠례 북부까지 진출한바 있으나, 그곳의 마푸체인들은 국가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잉카제국의 침략을 수차례 잘 막아냈다. 마푸체인들과 사파 잉카투팍 유판키와 그의 군대와 싸웠다. 3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이 전투를 마울레 전투라고 하는데, 이 전투의 결과로 잉카의 칠례정복은 마울레 강에서 끝났다.
1520년,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그의 이름을 딴 마젤란해협을 발견했다. 다음으로 칠레에 도착한 유럽인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그의 스폐인 정복자 무리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영토분쟁을 일으 킨뒤 그는 1535년 금을 찿기 위해 폐루에서 왔다. 그는 '칠레의 발견자"로 여겨지나 이 땅은 마푸체 원주민의 땅 이었다. 스폐인들은 칠례 땅에서 다양한 문화를 가진 마푸체인 수 십만명과 만나게 된다. 본격적인 칠례정복은 1540년에 시작돼,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 페드로 데 발다이아가 이끌었다. 그는 산타루시아 기슭에 산티아고 데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를 건설했다. 비록 스폐인인들은 그들의 찿던 많은 금과 은을 찿진 못했으나 칠례 중부 계곡이 농사짓기 좋은 곳임을 알게 되었으며 페루 부왕령의 일부가 됐다.
페드로 데 발다비아, 이 땅의 정복은 천천히 이루어졌다. 유럽인들은 번번이 토착민의 반란에 시달렸다. 1553년 대규모 마푸체인 반란으로 진압하던 중 발다비아가 죽었으며, 식민지의 주요 정착지가 많이 파괴 되었다.
이후 큰 반란이 1598년과 1655년에도 일어났다. 마푸체와 다른 토착집단이 봉기 할 때마다 식민지의 남부 국경은 북쪽으로 밀렸다. 1683년 노예제가 페지돼 식미지와 마푸체와 남쪽 땅 사이 국경에서 긴장이 완화됐으며, 둘 사이의 교역이 늘게 됐다.
북쪽은 사막으로, 남쪽은 마푸체인 (아라우코)으로, 동쪽은 안데스 산맥으로, 서쪽은 태평양으로 가로막힌 지형 때문에 칠례는 매우 중앙 집중화된 지역으로, 스폐인의 아메리카 영토에서도 매우 동질적인 식민지 였다. 국경 수비의 기능을 하던 이 식민지는 스스로 마푸체 그리고 영국, 네덜란드 같은 스페인의 유럽 적국과 싸웠다. 마푸체뿐 아니라 해적과 영국의 모험가들도 식민지를 위협했다. 그 중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은 1578년 칠례의 주요항구 발파라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칠례는 페루와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중에서도 매우 많은 상비군이 주둔해 스폐인의 재산을 지키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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