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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금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
[대한민국史] 한홍구가 전하는 유신체제의 탄생과 몰락 이야기
한국 현대사의 필독서 [대한민국史]의 저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유신시대를 일괄하는 신간을 내놓았다. 딸 박 대통령의 시대가 다시 아버지 박 대통령의 유신시대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부쩍 늘고 있는 요즘, 유신은 꼭 한번 되짚어봐야 할 역사이다.
[대한민국史] 한홍구가 전하는 유신체제의 탄생과 몰락 이야기
한국 현대사의 필독서 [대한민국史]의 저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유신시대를 일괄하는 신간을 내놓았다. 딸 박 대통령의 시대가 다시 아버지 박 대통령의 유신시대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부쩍 늘고 있는 요즘, 유신은 꼭 한번 되짚어봐야 할 역사이다.
목차
추천사 고은(시인)
여는 글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저자 서문
프롤로그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제1부 헌정의 파괴
1 유신 전야, 1971년의 대한민국
2 친위 쿠데타의 준비, 풍년사업
3 박정희와 일본 - 유신의 정신적 뿌리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
1 국회 안의 꼭두각시, 유정회
2 윤필용 사건
3 김대중 납치 사건
4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5 인혁당 재건위 사건
6 대통령 저격 미수와 육영수 여사의 죽음
7 장준하 의문사
제3부 금기, 저항, 상처
1 금기의 시대와 청년문화
2 여공애사
3 동일방직 노동조합 인분 사건
4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중앙정보부
5 도시산업선교회 마녀사냥
6 기자들의 각성, 자유언론실천선언
7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8 ‘무등산 타잔’의 비극
제4부 유신의 사회사
1 조국 ‘군대화’의 그늘
2 베트남 파병이 남긴 것
3 기지촌 정화운동
4 유신의 다른 이름, 새마을운동
5 통일벼와 식량증산정책
6 원자력발전과 핵무기 개발 사이
7 강남공화국의 탄생
8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 평준화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
1 10?26의 서곡, YH 사건
2 남민전 사건
3 김형욱의 실종과 죽음
4 부마항쟁, 불길이 치솟다
5 1979.10.26. 운명의 날
에필로그 -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광주, 그 장엄한 패배
부록1 - 박근혜 후보에게 드리는 공개장
부록2 - 신유신의 밤
여는 글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저자 서문
프롤로그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제1부 헌정의 파괴
1 유신 전야, 1971년의 대한민국
2 친위 쿠데타의 준비, 풍년사업
3 박정희와 일본 - 유신의 정신적 뿌리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
1 국회 안의 꼭두각시, 유정회
2 윤필용 사건
3 김대중 납치 사건
4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5 인혁당 재건위 사건
6 대통령 저격 미수와 육영수 여사의 죽음
7 장준하 의문사
제3부 금기, 저항, 상처
1 금기의 시대와 청년문화
2 여공애사
3 동일방직 노동조합 인분 사건
4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중앙정보부
5 도시산업선교회 마녀사냥
6 기자들의 각성, 자유언론실천선언
7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8 ‘무등산 타잔’의 비극
제4부 유신의 사회사
1 조국 ‘군대화’의 그늘
2 베트남 파병이 남긴 것
3 기지촌 정화운동
4 유신의 다른 이름, 새마을운동
5 통일벼와 식량증산정책
6 원자력발전과 핵무기 개발 사이
7 강남공화국의 탄생
8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 평준화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
1 10?26의 서곡, YH 사건
2 남민전 사건
3 김형욱의 실종과 죽음
4 부마항쟁, 불길이 치솟다
5 1979.10.26. 운명의 날
에필로그 -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광주, 그 장엄한 패배
부록1 - 박근혜 후보에게 드리는 공개장
부록2 - 신유신의 밤
책 속으로
유신시대는 일제가 키워낸 식민지 청년들이 장년이 되어 사회를 운영해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친일잔재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 친일잔재를 청산하려던 세력이 거꾸로 친일파에게 역청산당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박정희를 사령관으로 하는 병영국가는 그가 청년기를 보낸 시절 만주국의 국방 체제나 일본의 총동원 체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황국신민으로 자라난 ‘친일파’ 박정희의 진면목은 청년장교 시절보다도 만주국이나 쇼와유신의 실패한 모델을 다시 살려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신체제의 폭압성은 박정희의 지도력 부족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된다. 박정희는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따라 복잡해진 사회구성을 더 이상 최소한의 형식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는 이끌어나갈 수 없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의 ‘퇴행’은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들고나온 것을 의미했다.
--- p.23
유신의 원인을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는 ‘논쟁’이라 부를 것도 없이 싱겁게 결론이 내려졌다. 절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박정희가 내세운 위기란 과장된 것이고, 실제 위기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헌정 중단과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데 거의 이견이 없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13권짜리 전기를 쓴 수구논객 조갑제조차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특별선언문 어디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고 인정했다. 유신체제 출현의 근본 원인이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박정희에게 종신집권의 야욕이 없었다면 유신과 같은 독재 체제가 튀어나와야 할 역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p.30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크게 약진한 것은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에게 강력하고 도전적인 야당이 포진한 국회란 당파 싸움과 국론 분열만 일삼는 비능률적인 공간이었다. 박정희는 몰래 유신을 준비하면서 국회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박정희가 고심했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회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의 참패, 즉 여촌야도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도록 해버렸다. 그리고 소선거구제 대신 중선거구제를 도입하여 도시에서도 여당 후보가 야당과 동반 당선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여권이 언제나 3분의 2에 가까운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 p.59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 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 p.77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절반 이상인 120개월가량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또는 긴급조치였다. 유신시대는 1973년에 몇 달과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이듬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의 몇 달 만을 제하곤 쭉 긴급조치의 억압과 공포가 지속된 시기였다.
--- p.97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p.116
20세기 후반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수구진영 일각에서는 ‘산업화 세력’이란 말로 자신들을 포장하면서 민주화도 산업화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산업화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떠받들기도 한다. 과연 이 땅의 민주화와 산업화는 누가 이룬 것일까. 민주화와 산업화 두 과제에서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서도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은 노동자, 특히 ‘공순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며, 그 강고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선봉들이다.
--- p.165
사람들 사이에〈동아일보〉보는 맛으로 산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1974년 12월 16일부터 몇몇 회사가〈동아일보〉로부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가기 시작했다. 당시〈동아일보〉의 광고 효과는 매우 컸기 때문에 광고를 한번 실으려면 현금을 주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동아일보〉에서 광고주들이 사정은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를 취소하고 동판을 회수해간 것이다.〈동아일보〉는 처음에는 예약된 광고를 앞당겨 싣거나〈신동아〉,〈여성동아〉같은 자매지의 책 광고를 실으며 버텼지만, 광고의 98퍼센트가 해약되자 12월 26일 광고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영향력과 발행 부수에서 단연 1위를 자랑하던 신문에서 광고가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광고탄압으로 자유언론의 목을 죄려 했지만, 정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로 언론인 홍종인이 12월 28일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실은 것을 시작으로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중앙정보부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고,〈동아일보〉구성원들로서는 “차마 받기에 가슴 아픈, 정말 가슴 아픈 성금과 격려광고”에 목이 메었다.
--- p.226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 p.272
1979년 10월 18일 아침, 조간신문을 집어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부산에 18일 자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하도 ‘비상사태다’, ‘긴급조치다’, ‘위수령이다’ 등 특별조치를 남발했지만, ‘비상계엄’이란 말에는 각별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지난여름 YH 사건이 터진 뒤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떨어지고, 2주일 전인 10월 4일에는 급기야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는 소동까지 일어나는 등 정국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지만, 비상계엄은 참으로 느닷없었다. 7년 전 10월 17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꼭 7년 후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종막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틀 전인 10월 16일 부산대학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가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또한 비상계엄을 불러온 이 시위가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태풍을 불러올 나비의 날갯짓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 바로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이었다.
--- p.383~384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김재규를 죽인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의 항쟁마저 짓밟고 생명이 다한 것 같았던 유신체제를 간판만 바꿔 달아 신장개업했다. 전두환의 내란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보지 못했다.
--- p.412
유신시대는 죽음의 시대였다. 최종길, 장준하와 인혁당 관련자들만 희생된 게 아니었다. 유신시대는 군대에서 1년에 근 1,500명이 죽던 시대였다. (…) 유신 전체로 치면 1개 사단이 전쟁도 치르지 않았는데 전멸한 것이다. 아니, 전쟁 없이 죽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상대로 치른 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 둘째, 유신시대는 박정희 한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 만인의 자유가 희생된 시대였다. (…) 박정희는 유세 다니고 토론하는 것 하기 싫어서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버렸다. 그 시절 박정희는 천황과도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꿈꿨다. 셋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가 끔찍하게 유린당한 시대였다. ‘유신독재 타도하자’나 ‘유신헌법 철폐하라’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쳐주세요’ 하고 부탁(청원)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때려버리는 것이 유신체제였다. (…) 넷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를 넘어 인간 내면의 양심의 자유까지 침해된 시대였다. 친일파에서 광복군으로, 광복군에서 좌익이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 프락치로, 좌익 프락치에서 다시 우익으로 숨 가쁘게 변신한 박정희는 전향하지 않는 좌익수들의 꼴을 봐주지 못했다.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형기를 다 살았어도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계속 옥살이를 시켰다. 형기를 마치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다시 잡아들여 보호감호란 이름으로 기약없는 옥살이를 시켰다.
--- p.23
유신의 원인을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는 ‘논쟁’이라 부를 것도 없이 싱겁게 결론이 내려졌다. 절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박정희가 내세운 위기란 과장된 것이고, 실제 위기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헌정 중단과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데 거의 이견이 없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13권짜리 전기를 쓴 수구논객 조갑제조차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특별선언문 어디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고 인정했다. 유신체제 출현의 근본 원인이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박정희에게 종신집권의 야욕이 없었다면 유신과 같은 독재 체제가 튀어나와야 할 역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p.30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크게 약진한 것은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에게 강력하고 도전적인 야당이 포진한 국회란 당파 싸움과 국론 분열만 일삼는 비능률적인 공간이었다. 박정희는 몰래 유신을 준비하면서 국회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박정희가 고심했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회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의 참패, 즉 여촌야도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도록 해버렸다. 그리고 소선거구제 대신 중선거구제를 도입하여 도시에서도 여당 후보가 야당과 동반 당선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여권이 언제나 3분의 2에 가까운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 p.59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 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 p.77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절반 이상인 120개월가량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또는 긴급조치였다. 유신시대는 1973년에 몇 달과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이듬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의 몇 달 만을 제하곤 쭉 긴급조치의 억압과 공포가 지속된 시기였다.
--- p.97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p.116
20세기 후반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수구진영 일각에서는 ‘산업화 세력’이란 말로 자신들을 포장하면서 민주화도 산업화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산업화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떠받들기도 한다. 과연 이 땅의 민주화와 산업화는 누가 이룬 것일까. 민주화와 산업화 두 과제에서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서도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은 노동자, 특히 ‘공순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며, 그 강고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선봉들이다.
--- p.165
사람들 사이에〈동아일보〉보는 맛으로 산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1974년 12월 16일부터 몇몇 회사가〈동아일보〉로부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가기 시작했다. 당시〈동아일보〉의 광고 효과는 매우 컸기 때문에 광고를 한번 실으려면 현금을 주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동아일보〉에서 광고주들이 사정은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를 취소하고 동판을 회수해간 것이다.〈동아일보〉는 처음에는 예약된 광고를 앞당겨 싣거나〈신동아〉,〈여성동아〉같은 자매지의 책 광고를 실으며 버텼지만, 광고의 98퍼센트가 해약되자 12월 26일 광고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영향력과 발행 부수에서 단연 1위를 자랑하던 신문에서 광고가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광고탄압으로 자유언론의 목을 죄려 했지만, 정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로 언론인 홍종인이 12월 28일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실은 것을 시작으로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중앙정보부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고,〈동아일보〉구성원들로서는 “차마 받기에 가슴 아픈, 정말 가슴 아픈 성금과 격려광고”에 목이 메었다.
--- p.226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 p.272
1979년 10월 18일 아침, 조간신문을 집어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부산에 18일 자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하도 ‘비상사태다’, ‘긴급조치다’, ‘위수령이다’ 등 특별조치를 남발했지만, ‘비상계엄’이란 말에는 각별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지난여름 YH 사건이 터진 뒤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떨어지고, 2주일 전인 10월 4일에는 급기야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는 소동까지 일어나는 등 정국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지만, 비상계엄은 참으로 느닷없었다. 7년 전 10월 17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꼭 7년 후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종막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틀 전인 10월 16일 부산대학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가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또한 비상계엄을 불러온 이 시위가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태풍을 불러올 나비의 날갯짓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 바로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이었다.
--- p.383~384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김재규를 죽인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의 항쟁마저 짓밟고 생명이 다한 것 같았던 유신체제를 간판만 바꿔 달아 신장개업했다. 전두환의 내란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보지 못했다.
--- p.412
유신시대는 죽음의 시대였다. 최종길, 장준하와 인혁당 관련자들만 희생된 게 아니었다. 유신시대는 군대에서 1년에 근 1,500명이 죽던 시대였다. (…) 유신 전체로 치면 1개 사단이 전쟁도 치르지 않았는데 전멸한 것이다. 아니, 전쟁 없이 죽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상대로 치른 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 둘째, 유신시대는 박정희 한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 만인의 자유가 희생된 시대였다. (…) 박정희는 유세 다니고 토론하는 것 하기 싫어서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버렸다. 그 시절 박정희는 천황과도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꿈꿨다. 셋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가 끔찍하게 유린당한 시대였다. ‘유신독재 타도하자’나 ‘유신헌법 철폐하라’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쳐주세요’ 하고 부탁(청원)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때려버리는 것이 유신체제였다. (…) 넷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를 넘어 인간 내면의 양심의 자유까지 침해된 시대였다. 친일파에서 광복군으로, 광복군에서 좌익이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 프락치로, 좌익 프락치에서 다시 우익으로 숨 가쁘게 변신한 박정희는 전향하지 않는 좌익수들의 꼴을 봐주지 못했다.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형기를 다 살았어도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계속 옥살이를 시켰다. 형기를 마치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다시 잡아들여 보호감호란 이름으로 기약없는 옥살이를 시켰다.
--- p.439~440
출판사 리뷰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만인의 자유가 희생된 시대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국민의 반은 산업화를 이끈 영웅으로, 국민의 반은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로 그를 기억한다. 그의 딸이 후보로 나온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팽팽했던 결과는 그러한 국민들의 마음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다. 1963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는 1967년 재선에 성공한 후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1971년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얻고, 1971년 가까스로 3선에 성공한다. 다시는 국민들에게 표를 부탁하지 않겠다던 그는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유신헌법을 만들어 국민들로부터 투표권을 빼앗은 뒤 영구집권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결국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이 책은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후반 9년을 통해 벌어진 일들을 살펴본다. 유신시대가 탄생한 배경에서 붕괴해가는 모습까지, 그가 어떻게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였는지, 유신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해갔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던 시대
‘제1부 헌정의 파괴’에서는 우선 1970년대 초반의 풍경을 통해 1972년 비상계엄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수구논객 조갑제마저도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는다며 시인한,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유신의 원인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에서는 법과 인권,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을 소개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게 했던 유정회와 같은 제도에서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장준하 의문사 사건, 민청학련 사건과 초유의 사법살인을 자행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오직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무리수가 자행되었으며, 이러한 사건들이 결국은 어떻게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살펴본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진정한 영웅, 공순이
‘제3부 금기, 저항, 상처’에서는 그 시대 민초들의 삶을 조명한다. 특히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 세칭 ‘공순이’들의 눈물겨운 삶과 투쟁의 역사를 복원한다. 그들은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이다. 오빠나 남동생을 공부시키고자 꽃다운 나이에 도시로 나와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게 그들이다. 또한 그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다.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연 것도 그들이다. 3부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동일방직 노조, 반도상사 노조의 상황 등을 통해 당시 노동운동의 모습을 전한다. 더불어 언론운동의 흐름도 살펴본다. 농성 중인 대학가에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을 정도로 신뢰를 잃은 언론인들도 부끄러움을 종식하기 위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다. 유신체제의 탄생 이후 숨죽였던 저항의 불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제4부 유신의 사회사’는 1970년대의 사회상을 전한다. 조국‘군대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 사회가 병영화되는 가운데 벌어진 베트남 파병, 새마을운동, 기지촌 정화운동, 강남 개발 등의 모습을 통해 미시적 영역에까지 드리운 독재의 그늘을 확인한다.
급격히 붕괴된 유신체제, 갑자기 찾아온 봄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는 YH 사건에서부터 10.26까지를 다룬다. 가발 수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YH무역의 폐업에, 이를 막아달라며 YH 노동자들이 당시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신민당사에 들어간 일이 유신정권의 몰락을 향한 신호탄이 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979년 8월 9일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9월 8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판결, 10월 4일 김영삼 의원 국회에서 제명, 10월 16일 부산대 유신반대 시위 시작,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그간 곪아온 유신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봄은 오래 가지 않았다. 10.26 이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이어가고자 했던 전두환의 야욕에 김재규는 ‘국부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으며, 죄 없는 광주시민들은 ‘폭도’가 되었다. 여전히 유신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역사를 잊었을 때, 그 역사는 반복된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는 여는 말을 통해 “우리의 누림이 무임승차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 책을 통해 유신의 야만을 제대로 깨닫고 민주주의를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저자 역시 ‘유신의 부활’을 막고자 집필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유신의 폐해와 그 실체를 목도하고 분노하게도 되지만 한편으로 지금의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세력을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세대라고 일컫는 저자는 정작 그들이 민주주의가 몸에 밸 기회를 갖지 못한 불행한 세대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그 세대에 속하는 역사학도로서 유신시대를 제대로 장송하지 못하고, 보다 나은 세대를 누려야 할 젊은 세대에게 안녕하지 못한 시대를 물려주게 되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역사를 잊었을 때, 그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비극이 두 번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국민의 반은 산업화를 이끈 영웅으로, 국민의 반은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로 그를 기억한다. 그의 딸이 후보로 나온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팽팽했던 결과는 그러한 국민들의 마음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다. 1963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는 1967년 재선에 성공한 후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1971년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얻고, 1971년 가까스로 3선에 성공한다. 다시는 국민들에게 표를 부탁하지 않겠다던 그는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유신헌법을 만들어 국민들로부터 투표권을 빼앗은 뒤 영구집권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결국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이 책은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후반 9년을 통해 벌어진 일들을 살펴본다. 유신시대가 탄생한 배경에서 붕괴해가는 모습까지, 그가 어떻게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였는지, 유신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해갔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던 시대
‘제1부 헌정의 파괴’에서는 우선 1970년대 초반의 풍경을 통해 1972년 비상계엄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수구논객 조갑제마저도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는다며 시인한,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유신의 원인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에서는 법과 인권,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을 소개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게 했던 유정회와 같은 제도에서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장준하 의문사 사건, 민청학련 사건과 초유의 사법살인을 자행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오직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무리수가 자행되었으며, 이러한 사건들이 결국은 어떻게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살펴본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진정한 영웅, 공순이
‘제3부 금기, 저항, 상처’에서는 그 시대 민초들의 삶을 조명한다. 특히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 세칭 ‘공순이’들의 눈물겨운 삶과 투쟁의 역사를 복원한다. 그들은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이다. 오빠나 남동생을 공부시키고자 꽃다운 나이에 도시로 나와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게 그들이다. 또한 그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다.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연 것도 그들이다. 3부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동일방직 노조, 반도상사 노조의 상황 등을 통해 당시 노동운동의 모습을 전한다. 더불어 언론운동의 흐름도 살펴본다. 농성 중인 대학가에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을 정도로 신뢰를 잃은 언론인들도 부끄러움을 종식하기 위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다. 유신체제의 탄생 이후 숨죽였던 저항의 불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제4부 유신의 사회사’는 1970년대의 사회상을 전한다. 조국‘군대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 사회가 병영화되는 가운데 벌어진 베트남 파병, 새마을운동, 기지촌 정화운동, 강남 개발 등의 모습을 통해 미시적 영역에까지 드리운 독재의 그늘을 확인한다.
급격히 붕괴된 유신체제, 갑자기 찾아온 봄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는 YH 사건에서부터 10.26까지를 다룬다. 가발 수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YH무역의 폐업에, 이를 막아달라며 YH 노동자들이 당시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신민당사에 들어간 일이 유신정권의 몰락을 향한 신호탄이 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979년 8월 9일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9월 8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판결, 10월 4일 김영삼 의원 국회에서 제명, 10월 16일 부산대 유신반대 시위 시작,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그간 곪아온 유신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봄은 오래 가지 않았다. 10.26 이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이어가고자 했던 전두환의 야욕에 김재규는 ‘국부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으며, 죄 없는 광주시민들은 ‘폭도’가 되었다. 여전히 유신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역사를 잊었을 때, 그 역사는 반복된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는 여는 말을 통해 “우리의 누림이 무임승차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 책을 통해 유신의 야만을 제대로 깨닫고 민주주의를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저자 역시 ‘유신의 부활’을 막고자 집필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유신의 폐해와 그 실체를 목도하고 분노하게도 되지만 한편으로 지금의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세력을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세대라고 일컫는 저자는 정작 그들이 민주주의가 몸에 밸 기회를 갖지 못한 불행한 세대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그 세대에 속하는 역사학도로서 유신시대를 제대로 장송하지 못하고, 보다 나은 세대를 누려야 할 젊은 세대에게 안녕하지 못한 시대를 물려주게 되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역사를 잊었을 때, 그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비극이 두 번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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