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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산자가 된 심정으로 나라 안 곳곳을 발로 밟으며
지도 속 몇십만 분의 일 축척 속에 담긴 역사를,
그 실낱같은 길을
현실감 있게 숨소리까지 되살려냈다
거대함 속에 상세함과 정밀함을 갖춘 대동여지도처럼
이 책은 한반도의 문화유산을 다루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갖고 출발했지만
지나간 역사가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부수고
그 정적인 유물과 장소들로부터 저마다 생생하고 세밀한 목소리들을 복원해냈다
이로써 왜 문화유산이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을 결정짓는가가 드러난다
일번지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문화유산 답사
‘천년의 고도古都’라는 수식어처럼 우리는 흔히 문화유산이라 하면 오랜 과거의 것이며, 박물관에 가서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박물관 수장고와 유물정리실에서 일하며 전시를 기획하는 학예연구사 유승훈은 이 책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는다. “문화유산은 수장고에만 있지 않고 전 국토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지금 문화유산의 숲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중에서 조선시대부 수백 년간 수도로 기능했던 서울에는 가장 많은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있다. ‘빌딩숲’ ‘콘크리트 도시’에 감춰진 면모다.
도시인들은 문화유산의 존재를 모르기도 할뿐더러 안다고 해도 무심히 곁을 지나치곤 한다. 저자는 바로 이 점을 가장 안타깝게 여긴다.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조감하듯 거리를 두고 살펴본다면, 역사가 ‘말하는’ 공간이 바로 곁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이나 고고학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점에서 문화유산을 읽어내 좀더 널리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다.
이 책에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기존 인식을 바꾸기 위한 작지만 큰 노력을 기울인다. 일반적인 문화유산 답사는 주로 오래된 도시를 목적지로 삼거나 먼 과거의 문화유산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문화유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간적·시간적으로 훨씬 더 가까이에 있다. 저자는 바로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도심에 있는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했고, 지역성이 뚜렷한 문화유산을 둘러보려 노력했으며, 자주 이야기되던 고대·중세의 유적보다는 대구나 군산 등 근대 문화유산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특히 이 책에서 누구보다 염두에 둔 독자는 ‘청춘들’이다. 저자는 자신이 20대 후반에 흔들릴 때마다 길을 찾아줬던 건 문화유산이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인생 ‘일번지’를 이제부터 찾아가야 하는 청춘들에게 있어 문화유산은 누군가가 이미 갔던 길이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자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다. 그리하여 저자는 문화유산은 낡고 고루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문화유산뿐 아니라 주변의 사물들도 새로운 인식으로 돌아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지도 속 몇십만 분의 일 축척 속에 담긴 역사를,
그 실낱같은 길을
현실감 있게 숨소리까지 되살려냈다
거대함 속에 상세함과 정밀함을 갖춘 대동여지도처럼
이 책은 한반도의 문화유산을 다루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갖고 출발했지만
지나간 역사가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부수고
그 정적인 유물과 장소들로부터 저마다 생생하고 세밀한 목소리들을 복원해냈다
이로써 왜 문화유산이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을 결정짓는가가 드러난다
일번지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문화유산 답사
‘천년의 고도古都’라는 수식어처럼 우리는 흔히 문화유산이라 하면 오랜 과거의 것이며, 박물관에 가서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박물관 수장고와 유물정리실에서 일하며 전시를 기획하는 학예연구사 유승훈은 이 책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는다. “문화유산은 수장고에만 있지 않고 전 국토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지금 문화유산의 숲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중에서 조선시대부 수백 년간 수도로 기능했던 서울에는 가장 많은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있다. ‘빌딩숲’ ‘콘크리트 도시’에 감춰진 면모다.
도시인들은 문화유산의 존재를 모르기도 할뿐더러 안다고 해도 무심히 곁을 지나치곤 한다. 저자는 바로 이 점을 가장 안타깝게 여긴다.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조감하듯 거리를 두고 살펴본다면, 역사가 ‘말하는’ 공간이 바로 곁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이나 고고학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점에서 문화유산을 읽어내 좀더 널리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다.
이 책에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기존 인식을 바꾸기 위한 작지만 큰 노력을 기울인다. 일반적인 문화유산 답사는 주로 오래된 도시를 목적지로 삼거나 먼 과거의 문화유산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문화유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간적·시간적으로 훨씬 더 가까이에 있다. 저자는 바로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도심에 있는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했고, 지역성이 뚜렷한 문화유산을 둘러보려 노력했으며, 자주 이야기되던 고대·중세의 유적보다는 대구나 군산 등 근대 문화유산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특히 이 책에서 누구보다 염두에 둔 독자는 ‘청춘들’이다. 저자는 자신이 20대 후반에 흔들릴 때마다 길을 찾아줬던 건 문화유산이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인생 ‘일번지’를 이제부터 찾아가야 하는 청춘들에게 있어 문화유산은 누군가가 이미 갔던 길이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자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다. 그리하여 저자는 문화유산은 낡고 고루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문화유산뿐 아니라 주변의 사물들도 새로운 인식으로 돌아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목차
1부 제 빛깔이 아름다운 보배
01 제 빛깔이 있는 바다: 통영 세병관과 그 후예들
그리운 혓바닥의 추억|수향정이 품은 한려수도|바다에는 경계가 없다|돌아와요 세병관에|‘무의 터전’에서 ‘예향 1번지’로|통영의 빛깔 있는 후예들
02 내 안의 보배, 이 뭐꼬: 순천 송광사
보배를 만나러 가는 길|보배를 물로 씻어내다|조계산의 보배 탄생기|송광사의 명물 세 가지|나를 비우면 보배
03 나를 버리는 걸쭉한 사랑: 남원 광한루와 춘향전
추어탕식 걸쭉한 사랑|이몽룡이 광한루에 오른 이유|푸짐한 이야기 공작소, 광한루원|걸쭉한 사랑과 걸걸한 동편제|품이 넓은 지리산식 사랑
04 시작과 끝을 보다: 서울 종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조선의 출발, 종묘의 시작|잇고 또 잇고, 종묘 정전|잘돼도 못 돼도 조상 덕|영녕전과 공민왕 사당
05 쉼과 여유가 그립다: 밀양 영남루
천년의 쉼터, 영남루|산천은 예와 같으나 누각은 새로워라|밀양 12경도에 숨은 뜻|시원한 바람이 부는 영남루|아랑사의 스산함
2부 내 인생의 길라잡이
06 내 삶의 길라잡이: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우리 땅을 사랑한 옛 지도|박물관에서 만난 「동국여지도」|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는 김정호|청구도, 근대로 가는 길라잡이|목판본 「대동여지도」의 숨결|내 삶의 위대한 길라잡이
07 시험과 고갯길: 문경새재와 토끼비리
시험은 고개인가|말도 벌벌 떠는 토끼비리|한 맺힌 돌고개 성황당|새들도 넘기 힘든 고개|새재 주막에서 승천한 다섯 용|멈추고 돌아보는 문경새재
08 땅과 사람의 상생相生: 부안의 높이 솟은 돌기둥
땅은 살아 있는 생명체|행주형 부안, 당간과 돛대|매창과 허균|돌짐대와 오리의 수수께끼|땅의 근본을 파고든 유형원
09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숭례문과 흥인지문 그리고 한양도성
우리나라의 상징 대문|한양도성의 성문을 열다|나의 숭례문, 우리의 숭례문|정동에서 남산공원까지, 성곽을 따라|옹성이 있는 흥인지문|낙산으로 가는 성곽 길에서
10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
임진왜란을 말하는 기록화|위태로운 조선, 「부산진순절도」|「동래부순절도」가 말하는 것들|할 말 많은 조선의 백성|언젠가는 말하는 유물
3부 청춘을 위한 문화유산
11 흘러간 탁류는 부끄럽지 않다: 군산의 근대 건축물
탁류는 군산 사람의 인생|‘갈대의 도시’에서 ‘쌀의 도시’로|군산세관과 조선은행 군산지점|침탈과 참회의 공존, 동국사|삶을 누리는 근대 건축물
12 높고 푸른 이상을 꿈꾸는 곳: 수원 화성
이상도시의 숨결, 수원 화성|이상의 실현은 함께하는 것|이로움을 말미암고 형세를 이용하라|이루지 못한 꿈도 아름답다
13 녹두장군의 타는 눈빛: 정읍의 동학농민혁명유적
치열한 삶을 살았는가|정읍, 후천개벽을 믿는 땅|녹두장군 집에서 만난 녹두꽃|만석보를 허물어라|황토현에 난리가 났네|누군가가 찍은 사진 한 장
14 가까운 곳에서 길을 찾다: 대구 골목의 근대 문화유산
가까운 골목에서 찾은 길|경상도의 중심지, 대구|조선의 대구를 해체한 근대|식민지 거리와 대구근대역사관|골목의 종교 유산, 제일교회와 계산성당|청라언덕 길과 선교사 주택|사보담의 피아노와 존슨의 사과나무
15 염원을 새겨 오래도록 남기고 싶을 때: 울산의 바위그림
염원을 오래 남기는 방법|바위그림으로 가는 벼루길|대곡천에 잠긴 반구대 암각화|최초의 고래잡이 그림|천전리 각석에 새긴 비밀은?|염원을 향한 디자인
01 제 빛깔이 있는 바다: 통영 세병관과 그 후예들
그리운 혓바닥의 추억|수향정이 품은 한려수도|바다에는 경계가 없다|돌아와요 세병관에|‘무의 터전’에서 ‘예향 1번지’로|통영의 빛깔 있는 후예들
02 내 안의 보배, 이 뭐꼬: 순천 송광사
보배를 만나러 가는 길|보배를 물로 씻어내다|조계산의 보배 탄생기|송광사의 명물 세 가지|나를 비우면 보배
03 나를 버리는 걸쭉한 사랑: 남원 광한루와 춘향전
추어탕식 걸쭉한 사랑|이몽룡이 광한루에 오른 이유|푸짐한 이야기 공작소, 광한루원|걸쭉한 사랑과 걸걸한 동편제|품이 넓은 지리산식 사랑
04 시작과 끝을 보다: 서울 종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조선의 출발, 종묘의 시작|잇고 또 잇고, 종묘 정전|잘돼도 못 돼도 조상 덕|영녕전과 공민왕 사당
05 쉼과 여유가 그립다: 밀양 영남루
천년의 쉼터, 영남루|산천은 예와 같으나 누각은 새로워라|밀양 12경도에 숨은 뜻|시원한 바람이 부는 영남루|아랑사의 스산함
2부 내 인생의 길라잡이
06 내 삶의 길라잡이: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우리 땅을 사랑한 옛 지도|박물관에서 만난 「동국여지도」|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는 김정호|청구도, 근대로 가는 길라잡이|목판본 「대동여지도」의 숨결|내 삶의 위대한 길라잡이
07 시험과 고갯길: 문경새재와 토끼비리
시험은 고개인가|말도 벌벌 떠는 토끼비리|한 맺힌 돌고개 성황당|새들도 넘기 힘든 고개|새재 주막에서 승천한 다섯 용|멈추고 돌아보는 문경새재
08 땅과 사람의 상생相生: 부안의 높이 솟은 돌기둥
땅은 살아 있는 생명체|행주형 부안, 당간과 돛대|매창과 허균|돌짐대와 오리의 수수께끼|땅의 근본을 파고든 유형원
09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숭례문과 흥인지문 그리고 한양도성
우리나라의 상징 대문|한양도성의 성문을 열다|나의 숭례문, 우리의 숭례문|정동에서 남산공원까지, 성곽을 따라|옹성이 있는 흥인지문|낙산으로 가는 성곽 길에서
10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
임진왜란을 말하는 기록화|위태로운 조선, 「부산진순절도」|「동래부순절도」가 말하는 것들|할 말 많은 조선의 백성|언젠가는 말하는 유물
3부 청춘을 위한 문화유산
11 흘러간 탁류는 부끄럽지 않다: 군산의 근대 건축물
탁류는 군산 사람의 인생|‘갈대의 도시’에서 ‘쌀의 도시’로|군산세관과 조선은행 군산지점|침탈과 참회의 공존, 동국사|삶을 누리는 근대 건축물
12 높고 푸른 이상을 꿈꾸는 곳: 수원 화성
이상도시의 숨결, 수원 화성|이상의 실현은 함께하는 것|이로움을 말미암고 형세를 이용하라|이루지 못한 꿈도 아름답다
13 녹두장군의 타는 눈빛: 정읍의 동학농민혁명유적
치열한 삶을 살았는가|정읍, 후천개벽을 믿는 땅|녹두장군 집에서 만난 녹두꽃|만석보를 허물어라|황토현에 난리가 났네|누군가가 찍은 사진 한 장
14 가까운 곳에서 길을 찾다: 대구 골목의 근대 문화유산
가까운 골목에서 찾은 길|경상도의 중심지, 대구|조선의 대구를 해체한 근대|식민지 거리와 대구근대역사관|골목의 종교 유산, 제일교회와 계산성당|청라언덕 길과 선교사 주택|사보담의 피아노와 존슨의 사과나무
15 염원을 새겨 오래도록 남기고 싶을 때: 울산의 바위그림
염원을 오래 남기는 방법|바위그림으로 가는 벼루길|대곡천에 잠긴 반구대 암각화|최초의 고래잡이 그림|천전리 각석에 새긴 비밀은?|염원을 향한 디자인
출판사 리뷰
감각으로 기억하는 바다, 통영
통영은 감각으로 다가오는 도시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바다를 보고 가장 먼저 감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 하지만 눈가를 간질이는 것은 바다뿐이 아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을 거쳐 통영시립박물관에 이르면 다양한 나전칠기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빛을 뿜어내는 자개의 색과 그 뒤를 은은히 받쳐주는 칠기의 검은색은 통영의 빛깔이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다. 바다 빛을 실컷 감상할 수 있는 충무교를 건너 전혁림 미술관에 다다르면 제일 먼저 오방색이 눈에 띤다. 오방색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색은 역시 파랑이다. 프랑스 미로 미술관에서 개최한 ‘한국 빛깔의 신비전’에 초대받았을 정도로 모두의 시각을 자극하는 파랑색. 이 색은 전혁림이 평생 보고 그린 통영의 바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아흔 살이 넘을 때까지 고집스럽게 통영 바다만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한편 통영은 청각을 깨어나게 하는 곳이다. 통영성의 북쪽 여황산 기슭에 위치한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다. 단일형 객사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건물이며, 군사 열병 및 훈련은 물론 영호남의 장수들이 모여 제를 올리는 의전 행사 공간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세병관은 오랜 세월 통영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왔다. 가수 김성술이 1970년에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에 등장하는 “세병관 둥근 기둥 기대어 서서 목메어 불러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라는 구절에서 이러한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세병관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오랫동안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는데, 통영의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이 바로 이곳에서 배움을 수학했다. 전혁림과 달리 윤이상은 죽는 날까지 통영 땅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그는 그 그리움을 침실에 걸린 통영의 파노라마 사진과 창작열로 달랬다. 윤이상은 통영을 바탕으로 「류퉁의 꿈」 「심청」 등 150여 개의 곡을 작곡했다.
마지막으로 통영은 미각의 장소다. 풍부한 해산물이 혓바닥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물론이며, 지역특산물인 충무김밥과 통영꿀빵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두 음식의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유별나다. 본디 통영군에 속했던 충무가 1955년에 충무시로 승격되었다가,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다시 합쳐지면서 현재의 통영시가 된 것이다. 그 흔적이 밥과 빵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음식에 담겨 있는 셈이다.
국가의 문을 열고 닫는다는 것-한양도성의 숭례문과 홍인지문
우리나라에는 유독 문과 관련된 속담이나 표현이 많다. 이는 구역과 경계에 대한 구분이 확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장소 구분이 뚜렷해야 하니 구역을 나누는 경계와 이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통로인 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문을 여닫는 일 역시 허투루 지나갈 수 없었다.
밤 10시경에 모든 문을 닫고 새벽 4시쯤 다시 문을 열었던 조선시대의 통행금지 제도는 음양오행설과 관련이 있다. 음기와 양기가 들어오고 빠지는 시간대에 맞춰 통금 시간을 정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뭄이나 폭우 등 자연재해에 대처할 때에도 음양에 따라 대문을 열고 닫았다. 나라 전체의 운용과 문을 여닫는 일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이런 까닭에 한양도성을 축성할 당시 성문 건설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숭례문이 국보 제1호에, 홍인지문이 보물 제1호로 등록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조상들의 사고방식을 존중하는 데에서 나온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문을 여닫는 행위는 물질적인 면 외에 정신적인 면과도 연관이 있다. 일례로 개항기에 문을 열 때를 잘못 맞췄던 탓에 한양도성이 크게 멸실된 것을 들 수 있다. 본래 한양도성은 숭례문에서 서북쪽으로 뻗어서 정동을 거쳐 새문안길 위의 돈의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항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크게 훼손되었다. 특히 외국인들의 거주 공간으로 변모한 정동은 멸실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었던 곳이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억지로 열린 문은 결국 식민지라는 나락과 잇닿았다. 한양도성의 상태가 이를 대신 입증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된 뒤 숭례문을 포함한 한양도성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후 복원된 한양도성은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고, 현재는 백악산까지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어 한양도성을 둘러볼 수 있다. 서울의 역사를 담은 문화유산이 시민과 함께 살아가게 된 것이다.
소리 없는 비명이 가득한 그림-「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
의사소통의 기본 규칙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잘 구분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런 규칙이 문화유산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문화유산을 대할 때는 그것이 드러내는 부분뿐 아니라 감춰져 있는 속내와 이야기를 파악하여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임진왜란을 그린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바로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작품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전쟁으로, 그중에서도 부산과 경남 일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 왜군이 부산을 입구 삼아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때 부산성과 동래성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그린 것이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다. 순절도殉節圖란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 바쳐 싸우다 죽은 인물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부산 첨사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의 장렬한 전투와 죽음이 이 두 그림에 다 담겨 있다. 즉 순절도는 말하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억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간 민중의 목소리다.
부산진성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그린 「부산진순절도」를 보자. 정발 장군의 지휘 아래 소수의 조선군은 왜적에게 맹렬히 맞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졌다. 결국 정발이 전사하면서 왜적에게 성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패배한 조선인들을 기다리던 것은 무자비한 살육이었다. 한편 「동래부순절도」가 보여주는 것은 조금 다르다. 순절도는 말하려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사건의 시차를 무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래부순절도」는 용기와 비겁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 중앙에 그려진 송상현 부사는 조복을 입은 채 곧게 앉아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좌측에는 경상 좌병사 이각이 몇몇 부하와 함께 성문을 열고 달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런 위정자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포로가 송환된 뒤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4월 14일,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부지에서 동래부 전투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중에는 동래부 전투 때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80여 구의 유골도 있었다. 수안역 건설부지는 동래읍성의 해자垓字였고,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은 이 해자에 시체와 무기들을 버렸던 것이다. 유골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근접전에서 공격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말을 남길 기회도 없이 죽어갔지만, 유골로 남아 자신들을 보는 이들에게 참혹하고 무의미한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군산, 탁류와 함께 근대가 흘러갔던 곳
군산을 배경으로 삼은 유명한 문학 작품이 있다. 바로 소설가 채만식의 『탁류』다. 군산은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조성한 도시였다. 그런 탓에 곳곳에서 드라마가 넘쳐났고, 탁류처럼 아름답진 않았지만 추하지도 않은 삶을 살았던 이들의 고향이다. 한편 군산은 근대의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일제의 잔재’라 일컫는 목소리와 ‘근대 문화유산’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군산은 에코 뮤지엄(한 지역 전체를 야외전시관 형태로 꾸민 박물관)의 가능성을 충분히 담고 있는 도시다. 모형만이 들어차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오른편엔 실제 근대 건축물인 ‘구舊 군산세관’이 숨 쉬고 있다. 그 왼쪽에는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과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우뚝 서 있다. 현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군산근대미술관과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유명 건축물만 일본식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군산의 월명동과 신홍동 일대에는 일본식 가옥들이 여기저기 들어차 있다. 이 가옥들은 민족의 수치로 치부됐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역사를 되돌아볼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일본식 가옥에서 제일 흥미로운 지점은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며 필요에 따라 개조한 흔적들이다. 가옥들이 문화유산과 관광 상품으로 인정받으면서 일본식으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금강이 서해와 섞이면서 생겨나는 탁류처럼, 군산의 매력은 과거와 현재·일본식과 한국식이 혼재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군산에 남은 근대 문화유산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숨기고 없애야 할 정도로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현재 시점에서도 일본은 과거에 대해 여전히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침탈과 파괴의 증거물인 근대 문화유산을 더더욱 보호하고 보존해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통영은 감각으로 다가오는 도시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바다를 보고 가장 먼저 감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 하지만 눈가를 간질이는 것은 바다뿐이 아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을 거쳐 통영시립박물관에 이르면 다양한 나전칠기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빛을 뿜어내는 자개의 색과 그 뒤를 은은히 받쳐주는 칠기의 검은색은 통영의 빛깔이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다. 바다 빛을 실컷 감상할 수 있는 충무교를 건너 전혁림 미술관에 다다르면 제일 먼저 오방색이 눈에 띤다. 오방색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색은 역시 파랑이다. 프랑스 미로 미술관에서 개최한 ‘한국 빛깔의 신비전’에 초대받았을 정도로 모두의 시각을 자극하는 파랑색. 이 색은 전혁림이 평생 보고 그린 통영의 바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아흔 살이 넘을 때까지 고집스럽게 통영 바다만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한편 통영은 청각을 깨어나게 하는 곳이다. 통영성의 북쪽 여황산 기슭에 위치한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다. 단일형 객사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건물이며, 군사 열병 및 훈련은 물론 영호남의 장수들이 모여 제를 올리는 의전 행사 공간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세병관은 오랜 세월 통영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왔다. 가수 김성술이 1970년에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에 등장하는 “세병관 둥근 기둥 기대어 서서 목메어 불러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라는 구절에서 이러한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세병관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오랫동안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는데, 통영의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이 바로 이곳에서 배움을 수학했다. 전혁림과 달리 윤이상은 죽는 날까지 통영 땅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그는 그 그리움을 침실에 걸린 통영의 파노라마 사진과 창작열로 달랬다. 윤이상은 통영을 바탕으로 「류퉁의 꿈」 「심청」 등 150여 개의 곡을 작곡했다.
마지막으로 통영은 미각의 장소다. 풍부한 해산물이 혓바닥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물론이며, 지역특산물인 충무김밥과 통영꿀빵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두 음식의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유별나다. 본디 통영군에 속했던 충무가 1955년에 충무시로 승격되었다가,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다시 합쳐지면서 현재의 통영시가 된 것이다. 그 흔적이 밥과 빵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음식에 담겨 있는 셈이다.
국가의 문을 열고 닫는다는 것-한양도성의 숭례문과 홍인지문
우리나라에는 유독 문과 관련된 속담이나 표현이 많다. 이는 구역과 경계에 대한 구분이 확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장소 구분이 뚜렷해야 하니 구역을 나누는 경계와 이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통로인 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문을 여닫는 일 역시 허투루 지나갈 수 없었다.
밤 10시경에 모든 문을 닫고 새벽 4시쯤 다시 문을 열었던 조선시대의 통행금지 제도는 음양오행설과 관련이 있다. 음기와 양기가 들어오고 빠지는 시간대에 맞춰 통금 시간을 정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뭄이나 폭우 등 자연재해에 대처할 때에도 음양에 따라 대문을 열고 닫았다. 나라 전체의 운용과 문을 여닫는 일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이런 까닭에 한양도성을 축성할 당시 성문 건설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숭례문이 국보 제1호에, 홍인지문이 보물 제1호로 등록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조상들의 사고방식을 존중하는 데에서 나온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문을 여닫는 행위는 물질적인 면 외에 정신적인 면과도 연관이 있다. 일례로 개항기에 문을 열 때를 잘못 맞췄던 탓에 한양도성이 크게 멸실된 것을 들 수 있다. 본래 한양도성은 숭례문에서 서북쪽으로 뻗어서 정동을 거쳐 새문안길 위의 돈의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항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크게 훼손되었다. 특히 외국인들의 거주 공간으로 변모한 정동은 멸실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었던 곳이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억지로 열린 문은 결국 식민지라는 나락과 잇닿았다. 한양도성의 상태가 이를 대신 입증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된 뒤 숭례문을 포함한 한양도성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후 복원된 한양도성은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고, 현재는 백악산까지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어 한양도성을 둘러볼 수 있다. 서울의 역사를 담은 문화유산이 시민과 함께 살아가게 된 것이다.
소리 없는 비명이 가득한 그림-「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
의사소통의 기본 규칙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잘 구분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런 규칙이 문화유산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문화유산을 대할 때는 그것이 드러내는 부분뿐 아니라 감춰져 있는 속내와 이야기를 파악하여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임진왜란을 그린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바로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작품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전쟁으로, 그중에서도 부산과 경남 일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 왜군이 부산을 입구 삼아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때 부산성과 동래성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그린 것이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다. 순절도殉節圖란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 바쳐 싸우다 죽은 인물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부산 첨사 정발과 동래 부사 송상현의 장렬한 전투와 죽음이 이 두 그림에 다 담겨 있다. 즉 순절도는 말하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억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간 민중의 목소리다.
부산진성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그린 「부산진순절도」를 보자. 정발 장군의 지휘 아래 소수의 조선군은 왜적에게 맹렬히 맞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졌다. 결국 정발이 전사하면서 왜적에게 성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패배한 조선인들을 기다리던 것은 무자비한 살육이었다. 한편 「동래부순절도」가 보여주는 것은 조금 다르다. 순절도는 말하려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사건의 시차를 무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래부순절도」는 용기와 비겁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 중앙에 그려진 송상현 부사는 조복을 입은 채 곧게 앉아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좌측에는 경상 좌병사 이각이 몇몇 부하와 함께 성문을 열고 달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런 위정자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포로가 송환된 뒤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4월 14일,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부지에서 동래부 전투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중에는 동래부 전투 때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80여 구의 유골도 있었다. 수안역 건설부지는 동래읍성의 해자垓字였고,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은 이 해자에 시체와 무기들을 버렸던 것이다. 유골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근접전에서 공격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말을 남길 기회도 없이 죽어갔지만, 유골로 남아 자신들을 보는 이들에게 참혹하고 무의미한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군산, 탁류와 함께 근대가 흘러갔던 곳
군산을 배경으로 삼은 유명한 문학 작품이 있다. 바로 소설가 채만식의 『탁류』다. 군산은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조성한 도시였다. 그런 탓에 곳곳에서 드라마가 넘쳐났고, 탁류처럼 아름답진 않았지만 추하지도 않은 삶을 살았던 이들의 고향이다. 한편 군산은 근대의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일제의 잔재’라 일컫는 목소리와 ‘근대 문화유산’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군산은 에코 뮤지엄(한 지역 전체를 야외전시관 형태로 꾸민 박물관)의 가능성을 충분히 담고 있는 도시다. 모형만이 들어차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오른편엔 실제 근대 건축물인 ‘구舊 군산세관’이 숨 쉬고 있다. 그 왼쪽에는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과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우뚝 서 있다. 현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군산근대미술관과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유명 건축물만 일본식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군산의 월명동과 신홍동 일대에는 일본식 가옥들이 여기저기 들어차 있다. 이 가옥들은 민족의 수치로 치부됐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역사를 되돌아볼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일본식 가옥에서 제일 흥미로운 지점은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며 필요에 따라 개조한 흔적들이다. 가옥들이 문화유산과 관광 상품으로 인정받으면서 일본식으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금강이 서해와 섞이면서 생겨나는 탁류처럼, 군산의 매력은 과거와 현재·일본식과 한국식이 혼재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군산에 남은 근대 문화유산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숨기고 없애야 할 정도로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현재 시점에서도 일본은 과거에 대해 여전히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침탈과 파괴의 증거물인 근대 문화유산을 더더욱 보호하고 보존해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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