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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경제적 결과 (2016)

동방박사님 2024. 4. 1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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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약속을 존중하고 정의를 충족시키는 것이 파리평화회의의 임무였다. 그러나 삶을 재구축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 임무는 승자의 아량이라는 원칙에 따라서도 필요했지만 유럽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다.”

“프랑스가 현재의 투쟁에서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이번에는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 유럽의 내전은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행사 같은 것이라거나 아니면 적어도 미래에 다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보거나, 과거 100년 동안 이어져온 강대국 간의 갈등은 당연히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장래 프랑스의 위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미래관에 따르면, 유럽 역사는 영원히 프로 권투 시합 같은 것이 될 것이며, 이번 라운드에는 프랑스가 이겼지만 이번 라운드가 마지막 라운드가 아닐 게 틀림없다. 프랑스와 클레망소의 정책은 인간의 본성이 언제나 똑같다는 점을 보려하면 구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또 국제연맹이 대표하는 모든 원칙에 대한 회의(懷疑)에서 나온 것이었다.”

“워싱턴을 떠날 때, 윌슨 대통령은 전 세계적으로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또 신망도 얻고 있었다. 대담하고 신중한 그의 발언은 유럽 주민들에게 유럽 정치인들의 목소리보다도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적국의 국민들도 윌슨 대통령이 자신들에게 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으며, 연합국의 국민들도 그를 승리가자 아니라 거의 예언자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였다.”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불행하게도 정치적 고려가 경제적 고려를 방해하고 있다. 무역과 경제적 교류가 자유로이 이뤄지는 체계에서는 철이 정치적 국경의 이쪽에 있고 노동과 석탄, 용광로가 다른 쪽에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를 빈곤하게 만들고 서로를 빈곤하게 만들 방법을 고안해내고 개인적 행복보다 집단적 증오를 더 선호한다.”

“로이드 조지 총리나 윌슨 대통령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관심을 요구하고 있던 문제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이거나 영토적인 것이 아니라 재정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또 미래의 위험은 국경이나 주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석탄, 운송에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유럽은 아마 아주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이드 조지도, 윌슨도 파리평화회의의 어느 단계에서도 이런 문제들에 적절한 관심을 쏟지 않았다.”

“유럽이 난국에서 빠져나오려면, 미국이 아주 큰 아량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은 스스로 먼저 아량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독일만 아니라 서로를 벗기는 일에도 몰두하고 있는 연합국이 독일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미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만약에 1918년 12월의 영국 총선이 탐욕이 아닌 관용의 정신에서 치러졌더라면, 유럽의 재정적 전망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져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기 전이나 평화회의 초반에 영국 대표들이 미국 대표들과 경제적 및 재정적 상황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깊이 해야 했다고 믿고 있다. 또 영국 대표단에게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할 권한이 주어져야 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인 제안에 이런 내용이 포함될 수 있었을 것이다. (1)연합국 상호간의 부채는 즉시 탕감한다. (2)독일이 연합국 측에 지급할 액수를 100억 달러로 정한다. (3)영국은 이 액수에 대한 청구를 포기하고, 영국이 받을 몫은 파리평화회의가 새로 창설할 국가들의 재정을 돕는 목적에 쓰도록 넘긴다. (4)즉시적으로 사용할 신용의 바탕을 조성하기 위해,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총액 중 일정 부분에 대해 조약의 모든 당사국들이 보증한다. (5)옛 적국들도 자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 그와 비슷한 보증이 따르는 채권을 발행할 권한을 갖는다.
이 같은 제안은 미국의 관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불가피했으며, 미국의 재정적 희생을 줄인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미국에도 꽤 호소력을 지니는 조치였다. 그런 제안들은 실현 가능했을 것이다. 거기엔 공상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요소가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 또 그 제안들은 유럽에 재정적 안정과 부흥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케인스를 세계에 널리 알린 그의 첫 베스트셀러!
독일 경제를 완전히 파괴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춘 파리평화회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관용에 바탕을 둔 평화가 필요한 이유를 조목조목 밝힌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대표작은 1936년에 발표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이지만 케인스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책은 1919년 11월에 발표한 『평화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다.

이 책은 출간 6개월 만에 12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어 10만 권이나 팔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널리 읽혔다.

상업적 성공만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마 당시에 연합국의 적국이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1919년 영국 대표단으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케인스가 독일 경제 조직을 완전히 초토화하는 내용을 담은 평화조약(베르사유조약) 초안을 수정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되던 5월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뒤 2개월에 걸쳐 완성한 것이 이 책이다. 당시 케인스가 구상했던 평화조약의 기본 정신은 관용이었다. 독일에 대한 배상금 요구는 100억 달러를 넘지 말아야 하고, 연합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에 서로 지게 된 부채는 탕감하고, 미국이 유럽 부흥을 도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케인스의 생각은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하나의 체계로 움직이던 유럽에서 독일이 평화조약의 결과로 경제를 복구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유럽 국가들의 고난도 볼 보듯 하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경제적 접근이 무엇보다 필요했는데도 평화회의를 주도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정치적으로만 접근했다는 것이 케인스의 판단이었다.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영국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무엇인가를 바랐고,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경쟁국인 독일의 팔다리를 잘라놓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현실 감각이 부족한 데다 그걸 다른 방향으로 보완하려는 의지마저 보이지 않고 자신의 도덕 감각만 내세우는 무능한 모습을 시종일관 보였다는 것이 케인스가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들에 대한 평가이다.

이런 인물평까지 담은 이 책은 케인스의 바람대로 주요 국가의 여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도 베르사유조약의 불공정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미국이 최종적으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게 된 것도 물론 일차적으로는 국제연맹을 주창한 우드로 윌슨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그랬겠지만 케인스의 영향도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이 독일 안에서 나치당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배경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책이 나온 시점은 바로 오스트리아 태생인 아돌프 히틀러가 1913년에 독일로 이주해 세계대전에 참전한 다음에 나치당에 입당하던 시점(1919년)과 맞아 떨어진다. 히틀러는 1923년에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해 투옥된 후 거기서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했으며, 1924년 출옥한 뒤에는 베르사유조약을 공격함으로써 큰 인기를 얻었다. 이때 지식인 엘리트들이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 영향을 받은 탓에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는 데 대해 강하게 저항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런 한편으론 파리평화회의에 케인스의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더라면 유럽 역사가 완전히 달라졌을 수 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한 차례 더 세계대전을 치른 뒤부터 지금까지 유럽이 걷고 있는 길을 보면 후자의 분석이 더 그럴 듯하게 다가온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온 ‘마셜 플랜’은 케인스가 파리평화회의에서 제안한 내용과 아주 비슷하다. 마셜 플랜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경제 수치로만 본다면 첫 번째 세계대전 이후의 ‘카르타고 식 평화’보다는 케인스의 관용을 바탕으로 한 평화가 세계 경제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세계 무역이 1948년부터 1971년 사이에 매년 평균 7.27%의 성장을 기록했으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는 1930년대처럼 오히려 떨어지기도 했으니 하는 말이다.

케인스가 파리평화회의에서 활동하며 세계를 주무르던 주요 인물들에게 실망하고 있던 그 즈음, 한국에서도 우드로 윌슨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사실과 지금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