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李仲燮)
신상정보
출생 1916년 9월 16일 /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 / 사망 1956년 9월 6일(39세) / 서대문적십자병원 / 직업 화가 / 학력 도쿄 문화학원 / 분야 미술 / 부모 이희주(1886년~1920년,부),안악 이씨(?~1950년,모) / 배우자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 자녀 장남(요절),이태현,이태성 / 형제 2남 1녀 중 막내 / 친척 증조부 이동규(1826년~1898년) / 조부 이창희(1856년~1898년)
묘소 망우역사문화공원
부부 (1953년 , 현대미술관 소장품) 두 마리의 새가 서로를 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파랑색과 빨간색이 대조를 보여준다.
이중섭(李仲燮, 1916년 9월 16일~1956년 9월 6일)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서양화가로 호는 대향(大鄕), 본관은 장수이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겼다는 것이 소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 등은 향토성이 진하게 밴 대표적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과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들은 동화적이고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166-10번지에 이중섭 가옥이 있다
생애
생애 초기
1916년 9월 16일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셔서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했다고 한다. 사업 종류가 제 시대에 거리낄 일이 없는 종류라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했다.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인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된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일본인들이 일부러 소에 관련된 표현 자체를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작품을 그려낸다.
첫 작품이라 전시 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 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는 말이 이어진다.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승려)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같은 중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하여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서 써낸 일화가 있다.
일본 유학
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인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했고, 1943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
귀국
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군에 돌아왔다. 1945년 5월에는 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토 이남덕(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山本方子, 1921 ~ 2022.08.13)과 결혼했다. 이남덕은 이중섭을 분카 학원 유학 시절에 만났다.
1946년에는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했지만 1주일 만에 사직했다. 같은 해에는 그의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인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이후
1950년 한국 전쟁 때 월남해서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았다.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하고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지내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들의 만남은 1953년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주일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전시회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백화점에서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마흔가지도 넘게 전시를 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차일피일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되는 수고비 정도였다고 한다.
이중섭은 자신의 전시회를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로 인해 중섭은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된다. 1956년 간염으로 인해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이중섭을 찾았는데 이미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기념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다.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를 개최한다.
2016년 9월 1일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
서훈
1978년 은관문화훈장(2등급, 추서)
위작 논란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에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에 가짜로 밝혀져서 대한민국의 미술 시장이 냉각되기도 했다.
가족 관계
배우자: 야마모토 마사코 (한국명: 이남덕, 1921년~2022년 8월 13일)
장남: 이태현 (1947년~2016년)
차남: 야마모토 야스나리 (한국명: 이태성, 1950년~ ) 출처 위키백과
화가 이중섭 (1916~1956)
호는 대향, 평안남도 평원출신, 평안남도 평원출신,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임용련의 지도를 받았으며, 1937년 일본 도코 분카학원에 들어가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등과 교유하면서 일본의 전위적인 미술단체인 자유미술협회전과 모던니즘 미술단체인 자유미술협회전과 모던니즘단체인 미술창작가협회전 등에 참여하여 야수파 (20세기초 프랑스에서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는 표현성이 강한 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미술운동)를 바탕으로 개성적이고 표현적인 화풍을 확립하였으며 , 조선신 미술가 협회를 결성하여 몇차례작품발표를 하였다. 1945년 귀국하여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토와 결혼한후 원산 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하하여 신사 실파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손응성, 한묵, 박고석, 등과 함께 지조전 (1952)를 개최하였다. 자신의 내면세계를표현하고자 했던 그는 생활고로 인해 일본인 처가에 맡겨 놓았던 가족의 모습과 소.비둘기. 닭 등의 토속적이고 자족적이며 한국적인 대상들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색감과 생략적이고 힘찬 선묘를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인 화풍을 이룩하여,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 받고 있다. 대표작으로서는 <황소> (1953, 삼성미술관 리움소장)<흰소. (1953~1954홍익대학교 박물관소장)<집떠나느 가족> (개인소장) <투계>(국립현대박물관소장) 등이 있다.6.25전쟁중 잠시 머물렀던 제주도 시 서귀포시 정방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중섭거리. 이중섭거주지. 이중섭미술관이 조성되어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3390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부산 이중섭의 길
1937년일본으로 건너가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獨立展)과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太陽賞)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원산에서 결혼하여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 일시 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6·25 사변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붕섭은 홀로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밀항하여 가족들을 만났으나 굴욕적인 처가 신세가 싫어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그의 나이 40세에 적십자에서 죽었다.
화단 활동은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朴古石)·한묵(韓默)이봉산상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서울·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을 위시하여,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90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한국의 서양화가.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시대의 아픔과 굴곡 많은 생애의 울분을 ‘소’라는 모티프를 통해 분출해냈다. 대담하고 거친 선묘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해학과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이 작품 속에 녹아 있으며, 경쾌하고 유연한 필선의 은지화는 그 고유성을 인정받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90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끊어진 다리를 이어, 그 생애의 실체와 마주하다
이중섭에 관한 이야기들이 범람한다. 그와 그의 그림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화가, 미술작품을 꼽을 때마다 예외 없이 앞 순위를 차지한다. 그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신화가 되었고, 그는 천재화가로, 불행한 생을 살다 간 고독한 예술가로, 때로 애절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고정된 이미지의 틀 안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호출된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끊어진 다리의 연속이다. 그에 관한 온갖 기록과 기억은 난무하되 이 시기와 저 시기가 맞지 않고,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투성이다. 거기에 추측과 과장이 보태져 그의 생애는 미묘하게 어긋난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그 때문에 더욱 더 그의 삶은 미궁 속을 헤맨다.
지금까지 회자되어오는, 이중섭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그의 실체에 가 닿아 있을까.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중섭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미술사학자 최열이 쓴 『이중섭 평전』은 바로 그런 물음표에서 출발했다. 우리 미술사에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된 화가 이중섭을 이대로 허상 속에 머물게만 할 수 없다는 저자의 의지는 한 인간에 대한 밝혀진 모든 기록을 들추게 했고, 그것은 원고지 약 4천 매 분량으로 거듭났다. 이로써 우리는 이중섭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족적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삶의 고비에 마주할 때마다 겪었을 이중섭의 고뇌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숱하게 흩어진 수많은 기록과 기록 속에서 발견한, 이중섭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그가 왜 신화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가를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이제 이중섭을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펼쳐야 한다. 그 속에 지금껏 감춰진 이중섭 생애의 실체와 그의 예술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목차
* 마지막날
01 평원평양정주 1916-1935
포근한 나날들 탄생의 날|소년, 티 없이 자라다|평양에서 화가로서의 싹을 틔우다|고분벽화, 이중섭 예술의 첫 번째 운명 *그의 생일은 언제인가
빛나는 학창 시절 낙방, 그리고 오산과의 만남| 타잔 같은 남학생, 미성을 지닌 사람|오산고보 미술부|미술교사 임용련, 백남순|생애 최초, 공모전에 입선하다 *평양의 미술계
휴학과 복학, 그림에 빠져 살다 휴학, 가족이 있는 원산으로|휴학 중 공모전 입선|“소에 미치다”|복학, 공모전 입선|졸업, 대한해협을 건너 도쿄로 *오산고보 방화사건의 진실은
02 도쿄원산도쿄 1936-1943
도쿄에서의 첫 해 낯선 땅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선택한 까닭은|제국미술학교에서 보낸 일 년|원산으로 귀향, 프랑스냐 일본이냐
다시, 도쿄로 두 번째 거처, 분쿄구|문화학원으로 옮긴 까닭|문화학원 신입생, 아고리 이중섭|루오와 피카소, 서구 근대문학에 심취하다|자유미술가협회전 응모의 시작|그녀, 야마모토 마사코 *화가, 츠다 세이슈
졸업, 귀국 대신 진학 문화학원 연구과에 들어가다|“우리 화단의 일등 빛나는 존재”|이중섭은 루오, 구상은 예수|대향, 20대 이중섭의 유쾌한 결단|화가 이중섭의 화창한 봄날 *‘중섭’을 ‘둥섭’으로 쓰는 까닭
소 도판으로만 남은 소, 소 그림의 원형|소묘로 그린 또다른 원형|서 있는 소, 아름다운 애린|초현실의 신화를 담은 망월 1|사랑의 유혹을 그린 두 작품|정령 연작, 범신론의 세계관을 드러내다|다가설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절망
치닫는 사랑, 불안한 도쿄 글 없는 그림 편지|그림에 담긴 그녀|불안으로 뒤덮인 도쿄|사랑하는 여인을 뒤로 하고, 귀국 *미술사의 축복, 이중섭의 엽서화
03 원산서울원산 1943-1950
이별해후결혼 1943년 8월의 이별, 도쿄에서 경성 그리고 원산으로|어둡고 무거운 나날|벗들과의 조우|조선에 온 직녀|5월의 신부, 야마모토 마사코가 이남덕으로
해방을 맞이하다 해방 직후의 원산 미술계|11월에는 경성, 12월에는 평양|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다|집 안팎의 사정들 |원산미술동맹 결성과 이중섭의 작품 활동|이중섭의 그림을 평한 소련인 비평가|첫아이의 죽음, 둘째아들의 탄생|원산미술소를 열다|제자 김영환, 그가 남긴 이중섭 어록 *강원도의 박수근과 한묵
‘인민의 적’ 시집『응향』사건, 문학과 정치의 충돌|『응향』의 표지화, 억압 받은 ‘표현의 자유’|『나 사는 곳』의 속표지화를 그리다|“이중섭의 작품은 인민의 적”|1947년 8월 서울과 평양, 이중섭은 어디에|해방공간에서 창작에 몰두하다|월북한 오장환과의 해후|셋째아들의 탄생|박수근과의 만남 *벌거벗은 가족
남쪽으로 전쟁, 전시체제에서의 이중섭|원산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다|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린 월남
04 부산서귀포부산 1951-1953 상
월남, 그후 배를 타고 부산으로|부산에서 한 달여, 다시 따뜻한 제주도로
서귀포 시절 서귀포 서귀동 512-1번지|전쟁과 제주도|제주와 부산을 오가다|오페라 「콩지팟지」의 무대장치와 소품 제작|제주, 고통과 환상의 땅 *서귀포행, 1월인가 4월인가 *피난지 제주도 화가들
제주에서 그린 그림 서귀포의 화공이 되어 그린 제주 풍경|그림에 담은 아이들과 바닷게|최초의 은지화, 그리고 그가 그린 제주 사람들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잣집|전쟁을 전후한 부산과 부산 미술계|김환기와의 해후, 다른 화가들과의 인연의 시작|분주한 나날들, 종군화가단 가입과 전람회와 작품전 출품|삽화를 그리다|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두 아들 *범천동의 낭인설 *신화의 기원
홀로 부산 혼자 남은 나날들|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의 시작|야마모토 마사코, 서적 무역 사업의 실패|표지화를 그리다|부산 월남미술인작품전 출품|이 시절 이중섭을 만나고, 함께 했던 사람들 *구상의 『민주고발』*대구 월남화가 작품전과 부산 월남미술인 작품전 개최를 둘러싼 논란
전설이 된 은지화 은지화의 기원|아이들부터 현실 세계까지 아우른 은지화 속 세상|이 시절 그린 다른 그림들
1953년 봄날 새해, 새봄, 진해와 통영으로 떠난 여행|여행을 마치고 다시 부산|활력소가 된 제3회 신사실파전
도쿄로 보낸 편지 “나는 약간 신경질이 되어 있소”|“새로운 회화예술을 창작하고 완성해가겠소”|“대향은 반드시 남덕을 행복하게 해 보이겠소”|“마씨의 건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요”
05 도쿄통영마산진주 1953 하-1954 상
일본행 일주일을 위한 준비|일본에서의 일주일|돌아온 뒤, 여전한 괴로움|부산을 떠나 통영으로
통영, 행복한 시절 자신만의 양식을 완성하다|통영에서 보낸 6개월, 눈부신 나날들|잘못 만들어진 이중섭의 모습 *통영의 문화예술계
대향양식의 성취 꿈결 같은 통영을 그리다|구성계열과 표현계열, 이중섭만의 세계 완성|곧 이중섭 자신이었던 들소|두 점의 양면화|가족, 새와 꽃, 끈과 아이……|소묘 그리고 유사도상|삽화 양식의 정립
남도와의 이별 마산 출입|박생광과의 해후, 진주에서의 개인전|진주의 진주, 진주 붉은 소|허종배, 이중섭을 찍다, 걸작을 남기다|“일본에 가는 것을 찬성해주시오”|남도와의 이별
06 서울대구 1954 하-1955 상
남도에서 서울로 제6회 대한미술협회 전람회 참가, 외국 진출의 희망|그림만을 그리는 나날|『저격능선』의 표지화, 『한국일보』의 삽화 *전후 서울 풍경 *정치열 형에게
최후의 절정 서울 시절의 교유 관계|지친 나날들|“당신 곁에서 1년 만이라도 머물 수 있다면”|누상동을 떠나 신수동으로|사진, 새로운 소통의 수단
개인전 준비 “지금부터는 목숨을 거는 겁니다”|전시장은 미도파화랑으로|“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작품”|자화상, 탐닉하는 스스로를 그리다|그림에 담은 그리운 가족들|닭을 그린 까닭|절정의 걸작, 흰 소 1의 탄생|풍경과 추억을 소재로 삼다 *개인전을 둘러싼 여러 설 *작품 닭의 제목과 제작 연대 변천사
드디어, 개인전 새해, 새 희망|1955년 1월 18일 이중섭 작품전 개막|작품전의 작품들|평판과 판매에 깊은 관심을 갖다|작품의 철거, 수금의 실패|작품 판매를 위한 대구에서의 개인전 *통영 들소 2와 흰 소 1은 어떻게 판매되었는가
개인전을 둘러싼 비평 이활의 비평, 언론계의 첫 공식 반응|정규와 이경성, 상반된 시선으로 작품을 평하다|이중섭의 값진 면모를 발견한 맥타가트
07 대구칠곡왜관 1955 상
마지막 희망 대구에서 다시 개인전을 준비하다|개인전을 위해 태어난 눈부신 걸작|1955년 4월 11일 이중섭 작품전 개막|실패, 자학의 시작 *1950년대 대구 풍경
절망의 노래 대구와 칠곡, 왜관을 오가다|왜관에서 그린 그림|그림을 불태우다|절망의 노래, 구원의 갈망
발병, 그에 관한 기록 구상의 기록|조정자의 기록|고은의 기록|대구에서의 마지막 아침
08 서울 1955 하~1956
투병 병원 생활의 시작|병원에서 그린 그림|그에 관한 이대원과 한묵의 기록|“동경에 가는 것은 병 때문에 어려워졌소”
퇴원 그후 눈 덮인 정릉으로|삽화에 몰두하다|정릉에서 남긴 작품
최후 치료 방식에 관한 오류|다시 입원|병원을 옮기다|퇴원, 다시 입원
*다시, 마지막날
외전 |그 떠난 후 사인|요절 천재가 되다|떠난 뒤 9월|떠난 뒤 10월|떠난 뒤 11월|떠난 뒤 12월|유작|신화의 탄생|찬사와 비판|이중섭미술관|끝나지 않은 전설 *MoMA에 소장된 은지화
부록 주|이중섭 주요 연보 1916-1956|이중섭의 주요 작품|이중섭에 관한 주요 문헌|
이중섭과 관련한 주요 인물|찾아보기
감사의 말
저자 소개
끊어진 다리를 이어, 그 생애의 실체와 마주하다
이중섭에 관한 이야기들이 범람한다. 그와 그의 그림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화가, 미술작품을 꼽을 때마다 예외 없이 앞 순위를 차지한다. 그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신화가 되었고, 그는 천재화가로, 불행한 생을 살다 간 고독한 예술가로, 때로 애절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고정된 이미지의 틀 안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호출된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끊어진 다리의 연속이다. 그에 관한 온갖 기록과 기억은 난무하되 이 시기와 저 시기가 맞지 않고,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투성이다. 거기에 추측과 과장이 보태져 그의 생애는 미묘하게 어긋난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그 때문에 더욱 더 그의 삶은 미궁 속을 헤맨다.
지금까지 회자되어오는, 이중섭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그의 실체에 가 닿아 있을까.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중섭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미술사학자 최열이 쓴 『이중섭 평전』은 바로 그런 물음표에서 출발했다. 우리 미술사에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된 화가 이중섭을 이대로 허상 속에 머물게만 할 수 없다는 저자의 의지는 한 인간에 대한 밝혀진 모든 기록을 들추게 했고, 그것은 원고지 약 4천 매 분량으로 거듭났다. 이로써 우리는 이중섭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족적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삶의 고비에 마주할 때마다 겪었을 이중섭의 고뇌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숱하게 흩어진 수많은 기록과 기록 속에서 발견한, 이중섭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그가 왜 신화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가를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이제 이중섭을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펼쳐야 한다. 그 속에 지금껏 감춰진 이중섭 생애의 실체와 그의 예술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중섭에 관한 명실상부한 정전의 탄생,
우리 미술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가 등장하다
약 40여 년 전 열일곱 나이에 이중섭 작품과 우연히 만난 저자 최열은 세월이 흘러 우리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인으로 살면서 이중섭을 늘 마음 한켠에 두고 살았다. 불분명한 것들 투성이인 우리 미술사 연구의 한복판에서 다른 무엇이 아닌 문헌과 기록 그리고 남아 있는 작품만을 바탕으로 그 실체를 밝히는 데 주력하는 대표적인 연구자인 그는 언젠가 이중섭에 관한 기록을 완성하겠노라는 마음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섭렵했고, 흩어진 퍼즐을 짜맞췄다. 그렇게 만난 이중섭에 관한 주요 문헌은 약 500여 종에 이르고, 그는 그 모든 기록을 총망라하여 앞뒤의 모순과 맥락의 불일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정확한 기록을 선별하되 그것에 대한 감상적인 추측과 불확실한 과장은 극도로 경계했다. 이러한 그의 치밀한 노력은 이중섭 생애 전반을 복원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동안 이중섭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숱한 에피소드의 진실이 무엇인지까지를 밝혀내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참고문헌의 리스트로만 수록하는 대신 해당 문헌과 기록의 구체적인 출처 정보를 약 70여 페이지의 빼곡한 주( y)로 밝혔다. 또한 약 500여 종의 문헌 가운데 시와 소설, 희곡 작품이나 아동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제외한 약 150여 종을 따로 선별하여 그것의 목록을 책 뒤에 모아놓음으로써 이중섭 아카이브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게 하였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완전하다. 때문에 저자 최열은 이중섭이 어릴 때 자라고, 유랑하듯 지냈던 도시의 당시 문화계 지형을 살피는 것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세심하게 살핀, 이중섭의 족적과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이중섭이 머물렀던 도시들의 문화계 풍경은 한 사람의 예술가의 생애만이 아니라 식민지 치하, 전쟁의 와중에 우리 문화계가 어떠한 지형을 구축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보고서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이중섭이라는 사람의 생애를 좀더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한 연구자의 집요하고 치열한 노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이 책은 그러므로 이후 이중섭 연구의 새로운 기준점이 되는 것은 물론, 이중섭에 관한 명실상부한 정전이자, 나아가 우리 미술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추측과 사실, 상상과 진실이 교차된
이중섭 생애의 정확하고 거의 완전한 복원
191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마흔의 생애를 살았던 이중섭은 동시대를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한동안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그 기억들은 수많은 기록으로 남아 그의 생을 증거하는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었고 그 기록들은 새로운 기록 탄생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기억이란 때로 왜곡되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하는 법. 기록과 기록은 어긋나 있었고, 막연한 추측과 환상이 사실로 둔갑하여 그의 생을 대표하는 중요한 장면으로 남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동안 이중섭이 오산고보에 진학한 것은 민족정신을 추구하는 오산고보의 이념과 맞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에 두 차례 연이어 낙방하고 난 뒤 외할아버지 이진태와 오산고보 설립자인 이승훈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오산고보에 진학한 것으로 볼 수 있다.(본문 39쪽) 또한 도쿄 유학 시절 도쿄미술학교가 아닌 제국미술학교로, 뒤이어 문화학원으로 옮긴 까닭은 그가 민족정신이 투철하거나 또는 관학파를 싫어하고 재야파를 선호하는 자유로운 기질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유학을 갈 시기 도쿄미술대학의 입학 규정이 까다로워져 상대적으로 입학이 쉬운 제국미술학교로 간 것이고, 부진한 성적으로 정학 처분을 받아 문화학원으로 옮긴 것이다.(본문 82쪽, 본문 95쪽)
서귀포에서 지낸 기간 역시 그동안 6개월부터 1년까지 의견이 분분했으며(본문 262쪽) 통영에서의 체류 기간 역시 불분명하던 것을 기록을 통해 바로 잡았고,(본문 424쪽) 그가 정신병력을 보인 것은 가문의 내력이라는 설부터 서울 개인전 당시부터라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1955년 7월 이후라는 것 역시 밝혔다.(본문 624쪽) 자신의 작품이 MoMA에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수롭지 않은 척 반응했다는 것은 사실 무근이며 그는 살아 생전 자신의 작품이 MoMA에 소장된 사실조차 모르고 세상을 떠난 것(본문 705쪽) 역시 드러났다.
이외에도 그의 불불명했던 생일부터 몇 차례 열었던 개인전의 경위, 사망의 시점, 기존 저술들의 불확실성 등을 숱하게 바로 잡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동안 미묘하게 어긋나 있던 무수한 사실들의 재발견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1916년 9월 16일에서 1956년 9월 6일까지 살았던 그는 물론이요
사후부터 지금까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식을 되돌아보다
1956년 9월 6일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 311호실에서 이중섭은 외롭게 홀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간장염으로 사망한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영안실에 이틀 동안 홀로 있어야 했다. 사흘째가 되어서야 그의 사망 사실을 알게 된 지인들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하는 기사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최열의 『이중섭 평전』은 생전의 이중섭의 생애를 추적하는 것은 물론 사후 쏟아지듯 뜨거워진 그에 대한 관심의 현상 역시 고스란히 담았다. 후일담에 그치지 않고 ‘외전-그 떠난 후’라는 별도의 장을 할애해서 그의 불명확한 사인을 밝히고, 그를 추모하거나 회고하는 모든 기록을 살폈으며 이후 1957년부터 2005년까지 대규모로 열린 그의 작품전의 풍경을 통해 그에 관한 우리 사회의 열기를 들여다본다. 또한 서귀포시에 세워진 이중섭미술관 개관 당시 진품이 거의 소장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의 유작에 관한 논란 등을 아우르며 이중섭을 우리가 어떻게 소비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9월은 실로 이중섭의 달이다. 그는 1916년 9월 16일에 태어나 1956년 9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벌써 세상을 떠난 지 58년. 이제 그를 그저 소비하기만 하는 우리의 방식을 바로잡을 때도 되었다고 저자는 말없이 말을 건넨다.
화가 이중섭을 살피는 첫걸음,
그의 생애와 그가 이룩한 예술 세계의 밀접성에 주목하다
이중섭은 길지 않은 생애를 이 땅에 살면서 식민지 백성으로, 피난민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멀리 떠나 보낸 외로운 사람으로 살았다. 그는 평남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과 정주, 원산 등을 거쳐 도쿄와 서울, 부산과 서귀포, 통영과 진주 등을 떠돌며 유랑민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열여덟 살 때 이미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고, 일본 유학 시절에도 늘 촉망 받는 예술가였다. 그는 유학 시절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며, 해방 전후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전쟁 후 고향에 가족을 두고 왔으며, 일본으로 아내와 아이들까지 떠나보낸 탓에 남은 생애 내내 고독과 외로움을 껴안고 살아야 했다. 가족과의 해후를 간절히 바라던 그는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쓸쓸하게 최후를 맞았다. 이런 삶의 고비마다 그는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때문에 그의 생은 그 시기 그가 그린 그림과 분리될 수 없다. 저자 최열은 생애를 통틀어 다른 것에 곁눈질하지 않고 온전히 그림 하나만 붙들고 살았던 이중섭의 인생을 복원하면서 그의 작품과 생애의 밀접성에 주목하였고,
그동안 파편적으로 감상되어온 그의 그림들은 그러나 시기적으로 분절되어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남긴 작품들이 생애 전체를 통해 형성하고 있는 뚜렷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시간과 삶의 순간에 따라 어떻게 변주, 변화되어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 번 취한 그림의 소재를 삶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작품 속에 등장시켰고, 그때마다 새로운 예술 세계를 구축해냈다. 저자 최열은 바로 이러한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의 특징을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개별적인 작품의 특징을 강조하는 대신 그의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각 시기의 작품 특징에 매몰되지 않고 이중섭 생애 전반을 높고 멀리 조망하면서 바라볼 때에야 가능하다. 이중섭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몇 가지 작품의 개별적인 이미지의 설명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 이중섭이 어떤 예술 세계를 지향하고 그것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는가를 살피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 소비되는 이중섭의 드라마틱한 인생사에서 벗어나 화가로서의 그의 생애를 제대로 살피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고, 그 첫걸음을 위해 저자의 이런 시도는 매우 유의미하다 할 수 있다.
다양한 시각자료의 배치, 새롭게 등장한 자료의 수록,
풍부하고 꼼꼼한 주석, 한눈에 감상하는 이중섭의 작품 세계,
이중섭과 관련된 인물들의 총망라
본문에는 두 종류의 이미지가 배치되어 있다. 하나는 살아 생전의 이중섭의 모습, 그 생애의 장면을 가늠할 수 있는 관련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저자가 꼽는 이중섭의 대표작이다. 저자는 이중섭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망라한 덕분에 확보할 수 있었던 다양한 이미지를 본문에 풍부하게 싣는 대신에 본문에 언급한 작품의 이미지의 배치는 최소화했다. 다만 이중섭의 생애 전반을 통틀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몇 작품을 선정하여 그것에 관한 별도의 자세한 설명을 붙여두었다. 여기에서 저자가 꼽은 작품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대표작과는 별개로 오랫동안 이중섭을 연구해온 저자의 판단으로 꼽은 작품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독자는 이렇게 저자가 뽑은 작품들을 일별함으로써 새로운 시선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집필하며 저자 최열은 놀라운 경험을 몇 차례 해야만 했다.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채 두문불출 원고를 완성하고, 출판사에 원고를 모두 넘겨 편집이 한창이던 때 어떻게 알았는지 이중섭에 관한 새로운 자료와 기록들이 전해져 왔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밝힌 논문이 우연히 발견된 사례는 많으니 제외하더라도, 1953년 7월 부산에 머물 때 가까이 지낸 화가 문우식의 딸인 문소연은 이중섭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저자에게 알려 왔고,(본문 383쪽, 493쪽, 551쪽, 567쪽, 683쪽 등) 1953년 통영으로 이중섭을 초청한 공예가 유강렬의 유족들은 이중섭이 유강렬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하여 이중섭과 관련한 귀중한 사진 자료의 존재를 알려 왔다.(본문 383쪽, 398쪽, 410쪽, 418쪽, 432쪽, 556쪽, 562쪽 등) 또한 기록에만 있을 뿐 실체는 발견되지 않았던, 이중섭의 그림으로 표지화를 삼은 구상의 책은 인쇄 직전 저자의 눈에 띄어 부랴부랴 편집을 손보기도 했다.(339쪽 『말씀의 실상』표지) 이러한 새로운 자료의 등장으로 이중섭 생애의 불분명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었고, 좀더 풍성한 당시의 자료를 책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각주와 미주는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본문의 출처에 해당하는 내용은 책 뒤에 미주로 배치하되, 본문의 이해를 돕는 주석은 본문의 하단에 배치함으로써 주석의 효율성을 고려했다. 또한 이 책은 통상 예술가의 생애를 다룬 책에서 본문에 언급한 관련 작품의 이미지를 배치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이중섭이 남긴 작품 중 확보할 수 있는 작품을 별도의 장에 함께 모아 배치하였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 파편적으로 개별 작품을 보기보다 생애별 작품을 한눈에 보게 함으로써 이중섭의 시기별 예술 세계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에 약 350점의 이중섭 작품을 독자들은 원색의 이미지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중섭과 관계된 인물들을 찾아보기의 항목으로만 머물지 않고 개별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별도로 정리함으로써 이중섭과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이들의 관계 지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541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화와 대표작품 90편
이중섭이 직접 쓰고 그린 것을 시인 박재삼이 번역하다.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의 개정판이다. 책에는 유화, 수채화, 스케치, 구아슈화, 은종이 그림 등 이중섭의 대표작품 90여 점과 더불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중섭이 일본에 있던 아내 이남덕(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이 결혼 전 마사코에게 띄운 그림엽서 등이 담겨 있다. 제삼자가 아닌 화가 이중섭이 직접 기술한 것을 고(故) 박재삼 시인이 아름다운 우리말로 다시 노래한 이 서간집에는 당시 이중섭의 궁핍했던 생활상과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 예술에 대한 광적인 집착 등이 애처롭게 표현되어 있다.
고(故) 김춘수 시인의 이중섭 연작시 중 두 편을 담다.
무의미 시론으로 유명한 고(故) 김춘수 시인의 이중섭 연작시 중 두 편, 고(故) 이경성 미술평론가의 ‘이중섭 예술론’, 고(故) 구상 시인이 전하는 이중섭의 삶과 예술에 대한 글을 추가했다. 삶과 사랑, 예술을 위해 치열하게 사투를 벌인 이중섭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친구들의 이러한 생생한 증언과 평가야말로 진정한 이중섭을 만나볼 수 있다.
목차
연인 - 사랑의 그림엽서들
2. 나의 사랑하는 소중한 아고리
3. 나의 영리하고 착한 아들 태현, 태성
이중섭의 삶과 사랑 그리고 예술
책 속으로
金春洙
光復洞에서 만난 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세계 속에 올바르게,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으로 자처하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 … 더욱이 조국의 여러분이 즐기고 기뻐해줄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여 다른 나라의 어떠한 화공에게도 뒤지지 않는 올바르고 아름다운,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기 위하여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소.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하에서 생활해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 p.99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아내를, 진심으로 모든 걸 바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소. 독신으로 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고리는 그런 타입의 화공은 아니오. 자신을 올바르게 보고 있소.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다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도 상관이 없소. 힘껏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하면 되오. 나는 한없이 사랑해야 할, 현재 무한히 사랑하는 남덕의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하늘이 점지해주셨소. 다만,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 p.128
당신의 힘찬 애정을 전신에 느껴, 남덕은 마냥 기뻐서 가슴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 나는 온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합니다. (…) 어리석은 남덕은 지금 이렇게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저 자신이 얼마나 당신을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깊이깊이 몸과 마음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절실히 깨달았답니다. 하지만 늦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길고 희망에 가득 찬 장래가 우리 앞에 있지 않나요? 굳게굳게 맺어져서 어떠한 장애에도 굽히지 말고,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길을 오롯이 나아갑시다.
그리운 사진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몇 달 만에 뵙는 사랑하는 아고리의 얼굴, 기뻐서 정신없이 입 맞추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멋있는 입술, 그러나 눈에 힘이 없어 보이고 두 뺨도 여위어 보이네요. 요즘의 식사 상태는 어떤지요. 역시 하루에 한 번 아니면 겨우 두 번 잡숫는 게 아닌가요?
출판사 리뷰
온갖 화려한 수식어가 앞에 놓이는 행복한 화가.
지독한 가난,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쓸쓸한 죽음.
온갖 고통 속에서 예술혼을 불사른 불행한 화가.
유화, 수채화, 스케치, 구아슈화, 은종이 그림 등 이중섭의 대표작품 90여 점과 더불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중섭이 일본에 있던 아내 이남덕(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이 결혼 전 마사코에게 띄운 그림엽서 등을 담은 책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제삼자가 아닌 화가 이중섭이 직접 기술한 것을 고(故) 박재삼 시인이 아름다운 우리말로 다시 노래한 이 서간집에는 당시 이중섭의 궁핍했던 생활상과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 예술에 대한 광적인 집착 등이 애처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만난 일본 여성과 결혼을 하고, 한국 전쟁 기간에 부산, 제주도를 오가며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가난한 생활을 하다 결국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지내야 했던 이중섭 가족의 드라마틱한 삶과 사랑의 절절함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보아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그 와중에 혼신의 힘을 쏟아 한 점 한 점 완성한 그림들의 붓 터치와 색감 하나하나는 예술에 있어 ‘정직한 화공’이기를 자처한 이중섭의 노력과 고민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의 분신들입니다. 그의 삶과 예술을 느끼고 이해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소중하고 진실된 자료는 없을 것입니다.
덧붙여 고(故) 김춘수 시인의 이중섭 연작시 중 두 편, 고(故) 이경성 미술평론가의 ‘이중섭 예술론’, 고(故) 구상 시인이 전하는 이중섭의 삶과 예술에 대한 글을 담았습니다. 삶과 사랑, 예술을 위해 치열하게 사투를 벌인 이중섭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친구들의 이러한 생생한 증언과 평가야말로 진정한 이중섭을 만나게 해줍니다. 수년 전, 위작 시비를 겪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도 편치 못한 상황에 놓였던 이중섭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책으로 달래며, 예술에 대한 고뇌, 탐구,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녹아 있는 이중섭의 작품들과 더불어 가족을 향한 그의 사랑과 절절한 그리움을 독자님들께 오롯이 전하고자 합니다.
“중섭 형의 그림을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 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중섭 형은 참 용한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러한 것을 생각해내고 또 그렇게 용한 표현을 하는지 그런 것이 정말 개성이요 민족 예술인 것 같다. 중섭 형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우리 화단에 일등으로 빛나는 존재이다.” - 화가 김환기
“이중섭은 누구에게나 애착을 주는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 있어서 가장 먼저 후진성을 탈피한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비록 서구적인 자료로 그림을 그렸을망정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한 개성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였다. … 짙은 토착색… 동양화가 갖고 있는 형식적이고 꿈에 잠긴 듯한 특질을 거의 완전무결하게 곁들이고 있다. … 그는 일본에 머물러 수업하면서도 일본의 그것을 하나도 묘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뚜렷한 자아가 있었다. 일단 붓을 들면 그의 피에 섞여 흐르는 것, 즉 그를 키워준 향토의 숨소리와 꿈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이 근대 한국의 어느 작가보다도 한국적이고 또 전통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재래의 산수화가 빠져 있는 취약성을 탈피하여 훨씬 웅장하고 무한한 세계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숨소리와 꿈이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 화가 김병기
“이중섭은 억압에서 자유를 거쳐 전쟁으로 이어진 끊임없는 격동의 시대, 혼돈의 사회를 살다 간 화가이며, 이런 격동과 혼돈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 화가이다. 적어도 이중섭은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현실을 실감하면서 살았고, 자신의 체험과 상황을 여실히 표현하고 그릴 줄 알았다. 그 혼돈의 시대를 이중섭만큼 보람차게 산 예술가가 달리 없다고 해도 될 만큼 그는 치열하게 살았다.” - 평론가 최석태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0472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2001년에 발간된 아이세움판의 전면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나온 이 책은 이중섭 그림 100여 점과 참고 도판 60여 점이 수록되는 등 글과 그림을 더 풍성하게 개정했으며, 유화, 엽서 그림, 편지, 은지화 등 이중섭 그림의 정수를 짚고 조명하는 구성을 더하였습니다. 이중섭의 생애와 그림의 탄생 과정을 살피면서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의 역사적 환경에 대한 이해도 한층 높였습니다. 초등학교 권장도서와 중학교 필독도서로 어린이와 청소년,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 책은 역사와 인물, 미술과 예술혼이라는 다양한 감상이 가능하기에 독서감상문을 쓰기에도 적절한 책입니다.
목차
1장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
2장 큰 성공과 남다른 사랑
3장 떠도는 삶 속에서 피운 꽃
4장 쏟아진 걸작들
5장 돌아오지 않는 강
이중섭 연보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중섭은 벌써 이 무렵부터 소를 즐겨 그렸습니다. 친구들이 “이중섭이는 소하고 같이 산다”거나 “이중섭이가 소하고 뽀뽀하는 것을 봤다”고 농담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때부터 즐겨 그린 소 그림은 그가 죽을 때까지 내내 되풀이되면서 점점 더 높은 기량과 다른 특징을 나타냅니다. 이 무렵에 이중섭이 몰두한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칠한 뒤 철필로 긁어 바탕을 드러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스승의 가르침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임용련 선생님은 앞으로 새 세상을 열어갈 청년들에게 과거의 교육에 집착하기보다는 변해가는 미래 세계에 대비하고 개성과 실험 정신이 강조된 산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몸소 실천에 옮겨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 p.27
일본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진 이중섭은 관제엽서에 그림을 그려 마사코에게 보내며 사랑을 전했습니다. 보내는 이의 주소도 적지 않은 이 그림엽서들은 1940년 12월 25일에 시작되어 1941년에는 80점 안팎, 1942년에는 10여 점, 1943년에는 2점이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이 엽서에는 글은 단 한 줄도 없고 오직 그림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소재는 다양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여자, 동물에 둘러싸인 여자, 과일을 따거나 사다리를 오르는 남자, 사랑이 넘치는 남과 여, 들짐승이나 날짐승과 함께 등장하는 가족, 사슴이나 학, 오리 등의 짐승, 연꽃과 과일나무 등이 담겼습니다. 이 온갖 그림들은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상징과 기호로 가득 찬 비밀 연서였습니다.
출판사 리뷰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우리 예술가의 생애와 업적을
이야기와 그림으로 만나는 미술책입니다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미술관에 자주 찾아가 그림 감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혹은 그림을 보면서도 스스로 감상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알려 준 감상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미술 환경이 녹녹치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 시리즈는 세계에 이름을 떨친 우리 예술가의 생애와 업적을 이야기와 그림으로 만나는 미술책입니다. 세계적인 우리 예술가들은 어떤 환경에서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지, 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며, 작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스스로 묻고 생각하도록 꾸몄습니다. 책상 위에서 미술관을 산책하듯 책을 통해 예술적 소양을 쌓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예술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중등 국어교과서, 초중등 미술교과서에 등장한
천재화가 이중섭 필독도서, 무엇이 새로워졌나요?
천재 화가, 국민 화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은 초등학교 교과서뿐 아니라 중등과 고등 미술교과서에서도 흔히 만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강점과 한국전쟁을 겪고, 안타깝게 가족과 헤어지고, 이윽고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이중섭의 이야기는 그의 그림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렇듯 이중섭이 우리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화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을 열면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의 그림이 보입니다. 소가 노을을 배경으로 입을 약간 벌려 울부짖고 있는 이 그림은 화가 이중섭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이중섭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질문이 뒤따르게 되지요. 이 책은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그림을 비롯해 많은 걸작을 남긴 이중섭의 일생 이야기와 그림들을 돌아봅니다. 이중섭 이야기는 중학교 국어교과서(7차교육과정 중등 1-2)에 실렸을 만큼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풍부하며, 이중섭 그림들은 우리를 예술 세계로 인도해주는 정직한 창문입니다.
2001년에 발간된 아이세움판의 전면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나온 이 책은 이중섭 그림 100여 점과 참고 도판 60여 점이 수록되는 등 글과 그림을 더 풍성하게 개정했으며, 유화, 엽서 그림, 편지, 은지화 등 이중섭 그림의 정수를 짚고 조명하는 구성을 더하였습니다. 이중섭의 생애와 그림의 탄생 과정을 살피면서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의 역사적 환경에 대한 이해도 한층 높였습니다. 초등학교 권장도서와 중학교 필독도서로 어린이와 청소년,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 책은 역사와 인물, 미술과 예술혼이라는 다양한 감상이 가능하기에 독서감상문을 쓰기에도 적절한 책입니다.
예술과 인문이 어우러진 종합 청소년 교양서이자
제주도 미술·역사기행에 반드시 필요한 책입니다
2016년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이자 이중섭 타계 6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전국에서 이중섭의 생애와 그림을 되돌아보는 전시와 행사가 기획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중섭이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서 살았던 이중섭의 서귀포 거주지와 이중섭미술관은 제주도 미술·역사 기행의 필수코스이고 한 해에도 수만 명의 관람자가 다녀가고 있습니다.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은 이런 기행의 한 자락을 풍성하게 채워줄 그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더 알아보기]를 꾸며 고려청자, 상감기법, 고구려 무덤벽화, 글씨 예술 등 전통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유화, 엽서 그림, 편지, 은지화 등 이중섭 그림의 특징들을 설명하며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단순한 그림책이 아니라 미술과 역사, 예술과 인문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 청소년 교양서입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003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백년의 신화 - 이중섭》은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근대인이자 민족의 화가이며 정직한 화공이었던 이중섭을 재조명하는 기회다. 국립현대미술관, 조선일보사.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이중섭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동안 불과 5년 안팎의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작품이 이만큼 남아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전시는 이중섭의 삶의 궤적에 따라 전개된다. 일본 유학 시기 미술창작가협회에 출품한 소묘부터 해방공간 원산 시절의 연필화들이 몇 안 되는 초기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제주도와 부산 피란 시절의 작품, 그리고 통영, 서울, 대구, 다시 서울 정릉 시기의 작품들이 순차적으로 전시장에 걸렸다. 일본 체류기에 연인에게 보낸 엽서화, 생애 내내 꾸준하게 제작한 은지화, 그리고 1953-55년 사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화들이 시공간 사이에 끼어들 듯이 전시된다.
출판사 리뷰
《백년의 신화 - 이중섭》은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근대인이자 민족의 화가이며 정직한 화공이었던 이중섭을 재조명하는 기회다. 국립현대미술관, 조선일보사.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이중섭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동안 불과 5년 안팎의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작품이 이만큼 남아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전시는 이중섭의 삶의 궤적에 따라 전개된다. 일본 유학 시기 미술창작가협회에 출품한 소묘부터 해방공간 원산 시절의 연필화들이 몇 안 되는 초기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제주도와 부산 피란 시절의 작품, 그리고 통영, 서울, 대구, 다시 서울 정릉 시기의 작품들이 순차적으로 전시장에 걸렸다. 일본 체류기에 연인에게 보낸 엽서화, 생애 내내 꾸준하게 제작한 은지화, 그리고 1953-55년 사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화들이 시공간 사이에 끼어들 듯이 전시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중섭뿐만 아니라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치면 묵묵히 예술가로 평생을 살아온 수많은 무명 예술가들에게 우리 사회가 더욱 더 관심과 애정, 연구와 지원을 쏟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한국의 보석 같은 근대 화가들에 비하면 이중섭은 진정 ‘행운아’인 것이다.
-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003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090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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