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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본서의 저자 프란시스 왓슨은 영국의 신약신학자로서 예리한 관찰과 명쾌한 논리를 전개하는 이로 유명하다. 그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되는 것은 본서가 처음이다. 그는 두툼한 학설서인 전작 『복음서 저작』에서 기존의 복음서 연구의 한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네 개의 복음서뿐 아니라 정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배제된 다양한 텍스트 모두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펼친 바가 있으며, 이 책은 그의 기존 주장을 전제한 가운데 보다 대중적인 필치로 쓴 책이다.
목차
서문
약어표
서론: 사중 복음서의 형성
1부 다양한 관점
1. 첫 번째 복음서: 유대인 예수
2. 두 번째 복음서: 길을 예비하다
3. 세 번째 복음서: 마리아 찬가
4. 네 번째 복음서: 하나님을 보다
2부 합치점
5. 네 권의 복음서, 한 권의 책
6. 도시와 정원
7. 승리자 그리스도
8. 복음서의 진리
참고문헌
약어표
서론: 사중 복음서의 형성
1부 다양한 관점
1. 첫 번째 복음서: 유대인 예수
2. 두 번째 복음서: 길을 예비하다
3. 세 번째 복음서: 마리아 찬가
4. 네 번째 복음서: 하나님을 보다
2부 합치점
5. 네 권의 복음서, 한 권의 책
6. 도시와 정원
7. 승리자 그리스도
8. 복음서의 진리
참고문헌
책 속으로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이 복음서가 독자들에게 유대 배경에서 자라고 사역한 유대인 예수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갑자기 불현듯 튀어나온 인물이 아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는 메시아로서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 곧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성경 전체 이야기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 유대인이다. 마태복음은 이방인 독자와 유대인 독자를 모두 염두에 둔다. 이 복음서는 유대 계보로 시작하여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는 명령으로 끝맺는다. 그럼에도 이방인 독자는 유대인 예수, 곧 유대 성경에 담긴 보화─율법과 예언서─를 온 세계에드러내 보이는 예수의 세계로 안내를 받는다.
--- 「1장 첫 번째 복음서: 유대인 예수」 중에서
이 본문 가운데 첫 번째 본문(출애굽기)은 세례자 요한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천사의 인도와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여기서 “사자”는 그저 어떤 천사다. 두 번째 본문(말라기)은 더 직접 연관이 있다. 이 짧은 예언서 끝부분에서 이 약속된 사자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지만, 머지않아 곧 돌아올 엘리야와 동일시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한을 따르는 자들은 그를 다시 돌아올 이 엘리야와 동일시한 것으로 보이며,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이 견해를 이어받았다. “허리의 가죽 띠” 역시 엘리야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로서는 말라기서의 사자에 관한 본문이 “엘리야”와 하나님 자신의 출현 사이에 예수를 위한 공간 창조를 위해 수정될 필요가 있었는데, 출애굽기는 이에 필요한 어법을 제공해준다. 이로써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가 이제는 “보라! 내가 내 사자를네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로 바뀐다. 말라기서 본문은 이제 출애굽기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직접 예수에게 말씀하신다.
--- 「2장 두 번째 복음서: 길을 예비하다」 중에서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다. 요셉은 베들레헴을 방문하고 예수가 탄생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남자에게 맡겨진 역할은 이제 또 다른 수태 고지의 대상자인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로 넘어간다. 마리아는 여기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확인하고 이를 과감하게 받아들인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그 누구도 불륜에 대한 암시를 주지 않는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난다.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엘리사벳의 아기까지도 복중에서 뛰놀며 그녀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인정하고, 엘리사벳도 황홀경 속에서 예언자적 발언을 통해 그녀를 칭송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구주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어떤 두려움이나 수치심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편 엘리사벳은 요한이란 이름의 아기를 낳고, 다시 한번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다. 그녀의 이웃과 친족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그녀와] 함께 즐거워[한다].” 2장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가랴가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 「3장 세 번째 복음서: 마리아 찬가」 중에서
마태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자기 복음서를 창세기에서 빌려온 두 단어 어구로 시작한다. 마태가 사용한 어구는 원 문맥에서 인류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하는 반면, 요한이 사용한 어구는 만물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49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어구가 창조 사건을 가리키기보다는 그 원시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 이미 “있었던”(was) 사건을 가리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있었다”(was)라는 이 동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첫 문장에서 두 번 더 반복된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50 그다음 구절에서는 이 첫 문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이 훨씬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태초에 계신 이 말씀은 영원하다. 이 말씀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 말씀은 영원하므로 또한 신적인 존재다. 영원성은 신성의 배타적인 속성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신 존재 역시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네 번째 복음서 저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서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사도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두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은 영원한 말씀으로 시작하고, 마태복음은 유대인 예수로 시작한다. 이 영원한 말씀은 곧 예수다.
--- 「4장 네 번째 복음서: 하나님을 보다」 중에서
네 정경 복음서는 한결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부활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일반적으로 복음서 이야기의 목적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어디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복음서 저자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차이점은 이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마태는 마가복음을 보완하고자 했다기보다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이 그가 세례를 받은 후 성령이 임한 사건보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마가의 견해를 교정하고자 했을 것이다. 오직 이 사중 복음서 안에서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상호 보완적일 수 있고, 또 상호 보완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호간의 차이점은 이 메시지의 진리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더욱더 풍요롭게 한다. 사중 복음서는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 「5장 네 권의 복음서, 한 권의 책」 중에서
바로 여기서 그 당시에 그 사건을 인식한 내용과 그 동일한 사건을 회상하면서 깨달은 내용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다. 그 당시 제자들은 그 사건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사건에 침몰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장면이 전개되는 동안 당연히 호산나의 외침에 참여했고 무리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내레이터에 의하면 그들은 그 사건의 참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진정 잘못되었거나, 잘못 인식되었거나, 또는 무의미했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핵심 성경 텍스트(슥 9:9)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순수하게 성경 자료만을 토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이보다 더거대한 사건, 즉 예수의 영화─그의 부활과 승천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성취된 그의 하늘의 영광으로의 승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또한 예수를 향한 무리의 환호는 예언서 본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하나의 표지 또는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진정한 즉위를 미리 앞당겨 예기한다.
--- 「6장 도시와 정원」 중에서
예수가 죽은 후에 그를 찌른 창은 그의 심장으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한다. 여기서 이 말씀의 배경은 이제 변화무쌍한 성경의 이미지가 회복된 성전에 대한 에스겔서의 환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는 성전의 입구에서 생명을 주는 물이 흘러나온다. 예수가 만나와 유월절 어린양과 동일시된 것처럼 여기서는 그가 성전과 동일시된다. 그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해올 때 목이 말랐지만, 그의 옆구리에서는 생명을 주는 강물이 흘러나왔고, 이로 인해 이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목마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 「7장 승리자 그리스도」 중에서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세운 공동체가 받아들인 그 나사렛 예수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비록 이 역사적 인물과 그를 수용한 그의 초기 모습을 서로 구분하는 것이 때로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그리스도”와 대비될 수 있는 “역사의 예수”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신학적·역사적인 이유에서 문제점이 있다. 역사적 예수의 재구성은 현대의 의제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지극히 높은 평가를 받은 1930년대의 한 저서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이스라엘과 유대”의 문화적 유산보다는 자신의 문화적 유산에 나타나 있는 “아리아 어족”의 성향을 반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중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다. 복음서는 비(非)유대인 예수를 배제한다. 복음서는 교회, 성경, 또는 교리가 없는 영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요구를 수용한 예수를 보여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출전(source)이 아니다. 그러한 인물은 복음서가 말하는 그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 「1장 첫 번째 복음서: 유대인 예수」 중에서
이 본문 가운데 첫 번째 본문(출애굽기)은 세례자 요한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천사의 인도와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여기서 “사자”는 그저 어떤 천사다. 두 번째 본문(말라기)은 더 직접 연관이 있다. 이 짧은 예언서 끝부분에서 이 약속된 사자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지만, 머지않아 곧 돌아올 엘리야와 동일시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한을 따르는 자들은 그를 다시 돌아올 이 엘리야와 동일시한 것으로 보이며,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이 견해를 이어받았다. “허리의 가죽 띠” 역시 엘리야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로서는 말라기서의 사자에 관한 본문이 “엘리야”와 하나님 자신의 출현 사이에 예수를 위한 공간 창조를 위해 수정될 필요가 있었는데, 출애굽기는 이에 필요한 어법을 제공해준다. 이로써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가 이제는 “보라! 내가 내 사자를네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로 바뀐다. 말라기서 본문은 이제 출애굽기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직접 예수에게 말씀하신다.
--- 「2장 두 번째 복음서: 길을 예비하다」 중에서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다. 요셉은 베들레헴을 방문하고 예수가 탄생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남자에게 맡겨진 역할은 이제 또 다른 수태 고지의 대상자인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로 넘어간다. 마리아는 여기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확인하고 이를 과감하게 받아들인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그 누구도 불륜에 대한 암시를 주지 않는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난다.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엘리사벳의 아기까지도 복중에서 뛰놀며 그녀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인정하고, 엘리사벳도 황홀경 속에서 예언자적 발언을 통해 그녀를 칭송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구주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어떤 두려움이나 수치심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편 엘리사벳은 요한이란 이름의 아기를 낳고, 다시 한번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다. 그녀의 이웃과 친족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그녀와] 함께 즐거워[한다].” 2장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가랴가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 「3장 세 번째 복음서: 마리아 찬가」 중에서
마태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자기 복음서를 창세기에서 빌려온 두 단어 어구로 시작한다. 마태가 사용한 어구는 원 문맥에서 인류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하는 반면, 요한이 사용한 어구는 만물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49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어구가 창조 사건을 가리키기보다는 그 원시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 이미 “있었던”(was) 사건을 가리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있었다”(was)라는 이 동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첫 문장에서 두 번 더 반복된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50 그다음 구절에서는 이 첫 문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이 훨씬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태초에 계신 이 말씀은 영원하다. 이 말씀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 말씀은 영원하므로 또한 신적인 존재다. 영원성은 신성의 배타적인 속성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신 존재 역시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네 번째 복음서 저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서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사도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두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은 영원한 말씀으로 시작하고, 마태복음은 유대인 예수로 시작한다. 이 영원한 말씀은 곧 예수다.
--- 「4장 네 번째 복음서: 하나님을 보다」 중에서
네 정경 복음서는 한결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부활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일반적으로 복음서 이야기의 목적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어디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복음서 저자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차이점은 이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마태는 마가복음을 보완하고자 했다기보다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이 그가 세례를 받은 후 성령이 임한 사건보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마가의 견해를 교정하고자 했을 것이다. 오직 이 사중 복음서 안에서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상호 보완적일 수 있고, 또 상호 보완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호간의 차이점은 이 메시지의 진리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더욱더 풍요롭게 한다. 사중 복음서는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 「5장 네 권의 복음서, 한 권의 책」 중에서
바로 여기서 그 당시에 그 사건을 인식한 내용과 그 동일한 사건을 회상하면서 깨달은 내용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다. 그 당시 제자들은 그 사건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사건에 침몰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장면이 전개되는 동안 당연히 호산나의 외침에 참여했고 무리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내레이터에 의하면 그들은 그 사건의 참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진정 잘못되었거나, 잘못 인식되었거나, 또는 무의미했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핵심 성경 텍스트(슥 9:9)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순수하게 성경 자료만을 토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이보다 더거대한 사건, 즉 예수의 영화─그의 부활과 승천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성취된 그의 하늘의 영광으로의 승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또한 예수를 향한 무리의 환호는 예언서 본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하나의 표지 또는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진정한 즉위를 미리 앞당겨 예기한다.
--- 「6장 도시와 정원」 중에서
예수가 죽은 후에 그를 찌른 창은 그의 심장으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한다. 여기서 이 말씀의 배경은 이제 변화무쌍한 성경의 이미지가 회복된 성전에 대한 에스겔서의 환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는 성전의 입구에서 생명을 주는 물이 흘러나온다. 예수가 만나와 유월절 어린양과 동일시된 것처럼 여기서는 그가 성전과 동일시된다. 그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해올 때 목이 말랐지만, 그의 옆구리에서는 생명을 주는 강물이 흘러나왔고, 이로 인해 이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목마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 「7장 승리자 그리스도」 중에서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세운 공동체가 받아들인 그 나사렛 예수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비록 이 역사적 인물과 그를 수용한 그의 초기 모습을 서로 구분하는 것이 때로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그리스도”와 대비될 수 있는 “역사의 예수”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신학적·역사적인 이유에서 문제점이 있다. 역사적 예수의 재구성은 현대의 의제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지극히 높은 평가를 받은 1930년대의 한 저서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이스라엘과 유대”의 문화적 유산보다는 자신의 문화적 유산에 나타나 있는 “아리아 어족”의 성향을 반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중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다. 복음서는 비(非)유대인 예수를 배제한다. 복음서는 교회, 성경, 또는 교리가 없는 영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요구를 수용한 예수를 보여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출전(source)이 아니다. 그러한 인물은 복음서가 말하는 그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 「8장 복음의 진리」 중에서
출판사 리뷰
주지하듯이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왜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인가? 그리고 왜 네 개의 복음서는 각각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혹시 네 개의 복음서에 서로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은 복음서(나아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은 지난 200년 동안 수많은 신약학자들의 관심과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비평 방법들이 강구되었으며, 그 결과 일일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연구서들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복음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존의 많은 저작들이 주로 복음서의 기원과 순서에 초점을 맞췄다면, 프란시스 왓슨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복음서의 형태와 구조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네 개의 복음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복음이 “~에 의한 복음”의 모습을 통해 네 개의 형태로 존재하는, 즉 사중복음서 이론을 제안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시작한다. 저자가 보기에 네 개의 복음서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추론을 따르면) 각 복음서 초두에 중심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즉 신약의 복음서들은 구약성경 에스겔서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유명한 ‘하나님 어좌 환상’에 나오는 네 생물의 모습처럼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태복음 1장은 ’족보‘를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마가복음 1장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있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사자의 얼굴을, 누가복음은 처음과 끝에서 성전의 제사 제물로 바쳐지는 소의 얼굴을 한 예수를, 요한복음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통찰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약성경 복음서는 하나의 복음을 다양한 모습을 띤 네 개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사중 복음 양식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모습을 풍성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한 분 예수에 대한 복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풀어내는 네 개의 복음서 이야기들은, 네 개의 복음서가 각기 다른 삶의 정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적-신학적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복음서 이야기들은 순전히 역사적인 시각뿐 아니라 신학적-문학적 관심사를 갖고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네 개의 서로 다른 강조점을 통해 하나의 복음을 증언하는 복음서의 기능은 복음서의 서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결미 부분에 서술된 ‘수난 기사’(예수의 체포, 재판, 고문, 처형 이야기)를 통해 더욱 강력하게 메아리친다. 각각의 복음서는 서술 과정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극복하고 결말 부분에 이르게 되면 놀라울 정도의 일치점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외면적 혼동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 있어 놀라울 정도의 질서와 조화를 잘 보여준다. 프란시스 왓슨은 이 점을 더욱 실감나게 서술할 목적으로, 초기 교회의 위대한 저술가인 에우세비오스가 개발한 복음서의 상호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복음서가 얼마나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끝으로 저자는 단순히 학문적 관심사에 국한하여 복음서의 신학적 통일성을 주창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역사적 예수의 초상에 대한 신약의 증언들, 특히 복음서의 증언들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충성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신학적 지식을 제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직접 인격적 관계를 맺고 새로운 생명을 수여하실 뿐 아니라 그 결과로써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이야기는 우리의 삶의 총체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본서는 신약 복음서 연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가까이 두고서 여러 번 음미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네 개의 복음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복음이 “~에 의한 복음”의 모습을 통해 네 개의 형태로 존재하는, 즉 사중복음서 이론을 제안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시작한다. 저자가 보기에 네 개의 복음서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추론을 따르면) 각 복음서 초두에 중심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즉 신약의 복음서들은 구약성경 에스겔서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유명한 ‘하나님 어좌 환상’에 나오는 네 생물의 모습처럼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태복음 1장은 ’족보‘를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마가복음 1장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있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사자의 얼굴을, 누가복음은 처음과 끝에서 성전의 제사 제물로 바쳐지는 소의 얼굴을 한 예수를, 요한복음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통찰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약성경 복음서는 하나의 복음을 다양한 모습을 띤 네 개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사중 복음 양식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모습을 풍성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한 분 예수에 대한 복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풀어내는 네 개의 복음서 이야기들은, 네 개의 복음서가 각기 다른 삶의 정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적-신학적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복음서 이야기들은 순전히 역사적인 시각뿐 아니라 신학적-문학적 관심사를 갖고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네 개의 서로 다른 강조점을 통해 하나의 복음을 증언하는 복음서의 기능은 복음서의 서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결미 부분에 서술된 ‘수난 기사’(예수의 체포, 재판, 고문, 처형 이야기)를 통해 더욱 강력하게 메아리친다. 각각의 복음서는 서술 과정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극복하고 결말 부분에 이르게 되면 놀라울 정도의 일치점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외면적 혼동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 있어 놀라울 정도의 질서와 조화를 잘 보여준다. 프란시스 왓슨은 이 점을 더욱 실감나게 서술할 목적으로, 초기 교회의 위대한 저술가인 에우세비오스가 개발한 복음서의 상호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복음서가 얼마나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끝으로 저자는 단순히 학문적 관심사에 국한하여 복음서의 신학적 통일성을 주창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역사적 예수의 초상에 대한 신약의 증언들, 특히 복음서의 증언들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충성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신학적 지식을 제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직접 인격적 관계를 맺고 새로운 생명을 수여하실 뿐 아니라 그 결과로써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이야기는 우리의 삶의 총체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본서는 신약 복음서 연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가까이 두고서 여러 번 음미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추천평
신약성경에 복음서는 왜 네 권인가? 사복음서를 네 권의 독립된 책으로,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사중 복음서로 읽고자 하는 독자에게 본서는 그것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해줄 것이다.
- 김동수 (평택대학교 신학과 교수, 한국신약학회 직전 회장)
본서는 ‘따로 그리고 같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독자들이 네 권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초상을 서로 충돌하여 이해하지 않으면서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사중 복음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본서는 목회자와 신학에 입문한 신학생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관심이 있는 평신도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귀한 책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김세현 (시드니신학대학교 한국신학부 신약학 교수)
저자는 사복음서가 초기 기독교회 역사 안에서 어떻게 평가 보전되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역사적·주석적·신학적 렌즈를 사용하여 상세히 살펴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복음서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에 정점을 찍으면서 한 분 예수에 대한 네 가지 초상화를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복음서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복음서 전문 연구서다. 왓슨은 복음서 연구에 새로운 길을 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본서는 ‘한 분의 예수’가 ‘네 편의 복음서’로 확정된 이유와 그 과정을 추적하여 다양한 관점을 지닌 ‘네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단 한 명의 예수’에 관한 하나의 초상화라고 확언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네 복음서’에 내장된 보다 더 충만한 의미(sensus plenior)와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네 복음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단 하나의 방식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겸손한 독서임이 틀림없다.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왓슨은 관찰력과 통찰이 매우 탁월한 성서학자다. 그는 예수의 초상에 관한 다른 네 증언의 개별적 특성을 찾아내어 고유한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를 조화롭게 함께 읽을 때 각 복음서의 유익의 합보다 더 큰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민규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목소리를 따로 들으면서 동시에 그들이 만드는 화음을 듣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숲보다 나무를 보는 것에 익숙한 한국교회의 성서 읽기가 이 책을 통해 균형을 찾게 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왓슨의 목소리를 유창한 한국어로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역자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정용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교목)
현대판 사사기 시대를 맞은 신약학계의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 해석학적 수류탄을 지속적으로 투척하고 있는 ‘용감한 올드 보이’(a brave old boy) 프란시스 왓슨. 국내 독자들(성도, 신학생, 목회자, 학자)도 왓슨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왔다. 성서를 읽는 동기와 목적을 고민하기 원하는 ‘용감한 영 보이’(a brave young boy)가 우리들의 교회/신학교 해석 공동체 안에 하나둘 일어나길 기대한다. 손에 잡은 왓슨의 책이 그런 축복으로 다가가기를!
-허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는 오늘날 독자들이 가장 섬세한 성경 해석자 가운데 한 명에게 기대하는 모든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책 안에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 뛰어난 주해 능력, 명쾌한 논증, 확실한 신학적 판단 등 복음의 진리를 위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존 웹스터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신학 교수)
과연 신학적으로 우리가 네 권의 정경 복음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는 전문가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며, 이 책은 풍부한 내용과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베벌리 로버츠 가벤타 (베일러 대학교 신약학 교수)
프란시스 왓슨의 공헌은 언제나 예리하고 혁신적인데,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할 이 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데일 C. 앨리슨 Jr.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이 책은 학생을 위한 탁월한 입문서가 될 뿐 아니라 예리한 역사적 탐정 수사와 사려 깊은(그리고 때로는 감동적인) 주해가 차고 넘쳐 전문가들에게도 명쾌한 통찰을 안겨주는 책이다.
-사이먼 개더콜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약학 교수)
- 김동수 (평택대학교 신학과 교수, 한국신약학회 직전 회장)
본서는 ‘따로 그리고 같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독자들이 네 권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초상을 서로 충돌하여 이해하지 않으면서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사중 복음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본서는 목회자와 신학에 입문한 신학생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관심이 있는 평신도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귀한 책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김세현 (시드니신학대학교 한국신학부 신약학 교수)
저자는 사복음서가 초기 기독교회 역사 안에서 어떻게 평가 보전되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역사적·주석적·신학적 렌즈를 사용하여 상세히 살펴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복음서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에 정점을 찍으면서 한 분 예수에 대한 네 가지 초상화를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복음서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복음서 전문 연구서다. 왓슨은 복음서 연구에 새로운 길을 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본서는 ‘한 분의 예수’가 ‘네 편의 복음서’로 확정된 이유와 그 과정을 추적하여 다양한 관점을 지닌 ‘네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단 한 명의 예수’에 관한 하나의 초상화라고 확언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네 복음서’에 내장된 보다 더 충만한 의미(sensus plenior)와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네 복음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단 하나의 방식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겸손한 독서임이 틀림없다.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왓슨은 관찰력과 통찰이 매우 탁월한 성서학자다. 그는 예수의 초상에 관한 다른 네 증언의 개별적 특성을 찾아내어 고유한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를 조화롭게 함께 읽을 때 각 복음서의 유익의 합보다 더 큰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민규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목소리를 따로 들으면서 동시에 그들이 만드는 화음을 듣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숲보다 나무를 보는 것에 익숙한 한국교회의 성서 읽기가 이 책을 통해 균형을 찾게 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왓슨의 목소리를 유창한 한국어로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역자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정용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교목)
현대판 사사기 시대를 맞은 신약학계의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 해석학적 수류탄을 지속적으로 투척하고 있는 ‘용감한 올드 보이’(a brave old boy) 프란시스 왓슨. 국내 독자들(성도, 신학생, 목회자, 학자)도 왓슨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왔다. 성서를 읽는 동기와 목적을 고민하기 원하는 ‘용감한 영 보이’(a brave young boy)가 우리들의 교회/신학교 해석 공동체 안에 하나둘 일어나길 기대한다. 손에 잡은 왓슨의 책이 그런 축복으로 다가가기를!
-허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는 오늘날 독자들이 가장 섬세한 성경 해석자 가운데 한 명에게 기대하는 모든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책 안에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 뛰어난 주해 능력, 명쾌한 논증, 확실한 신학적 판단 등 복음의 진리를 위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존 웹스터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신학 교수)
과연 신학적으로 우리가 네 권의 정경 복음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는 전문가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며, 이 책은 풍부한 내용과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베벌리 로버츠 가벤타 (베일러 대학교 신약학 교수)
프란시스 왓슨의 공헌은 언제나 예리하고 혁신적인데,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할 이 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데일 C. 앨리슨 Jr.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이 책은 학생을 위한 탁월한 입문서가 될 뿐 아니라 예리한 역사적 탐정 수사와 사려 깊은(그리고 때로는 감동적인) 주해가 차고 넘쳐 전문가들에게도 명쾌한 통찰을 안겨주는 책이다.
-사이먼 개더콜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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