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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천주교 선교사들이 기록한
조선인의 신앙과 생활
그들이 본 우리(Korean Heritage Books) 총서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신선한 나라 조선”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국제 가톨릭 선교단체인 성골롬반외방선교회 기관지『극동(極東, The Far East)』에 기고한 글들을 엮었다. 1933년 11월부터 1953년 12월까지 기고된 글들은 총 86편으로, 선교사들의 눈에 미친 근대 조선의 모습, 조선에 천주교 신앙이 정착되는 과정, 조선의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천주교 박해사건, 조선인의 국민성과 생활양식, 조선 생활에 대한 체험담을 담고 있다. 특히 한 명의 필자가 아닌 여러 명의 선교사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서울과 목포, 춘천 등지에서 묘사한 조선에서의 삶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을 더욱 풍부하게 드러낸다.
조선 천주교 신자와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서양 선교사가 겪은 조선인은 학구열과 유머가 넘치고 화려한 의전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으며, 한편으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심을 가진 용감한 자들이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거대한 역사 속 조선인의 일상을 선교사의 일기와 보고서, 회상록 형식으로 기록한다. 무엇보다 기존 역사서에서 쉽게 다뤄지지 않는 조선 나환자의 생활, 도벽증에 걸린 조선인, 여성 신자들의 활동, 피난민 생활에 관한 사제들의 고백은 그 어느 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조선 근현대사의 진귀한 사료가 될 것이다.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ㆍ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다. 발간ㆍ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ㆍ사회ㆍ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인의 신앙과 생활
그들이 본 우리(Korean Heritage Books) 총서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신선한 나라 조선”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국제 가톨릭 선교단체인 성골롬반외방선교회 기관지『극동(極東, The Far East)』에 기고한 글들을 엮었다. 1933년 11월부터 1953년 12월까지 기고된 글들은 총 86편으로, 선교사들의 눈에 미친 근대 조선의 모습, 조선에 천주교 신앙이 정착되는 과정, 조선의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천주교 박해사건, 조선인의 국민성과 생활양식, 조선 생활에 대한 체험담을 담고 있다. 특히 한 명의 필자가 아닌 여러 명의 선교사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서울과 목포, 춘천 등지에서 묘사한 조선에서의 삶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을 더욱 풍부하게 드러낸다.
조선 천주교 신자와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서양 선교사가 겪은 조선인은 학구열과 유머가 넘치고 화려한 의전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으며, 한편으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심을 가진 용감한 자들이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거대한 역사 속 조선인의 일상을 선교사의 일기와 보고서, 회상록 형식으로 기록한다. 무엇보다 기존 역사서에서 쉽게 다뤄지지 않는 조선 나환자의 생활, 도벽증에 걸린 조선인, 여성 신자들의 활동, 피난민 생활에 관한 사제들의 고백은 그 어느 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조선 근현대사의 진귀한 사료가 될 것이다.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ㆍ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다. 발간ㆍ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ㆍ사회ㆍ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발간사
편역자 해제
제1장 1930년대에 실린 기사
1933년 11월호 사설
1933년 11월호 동방 은자의 왕국
1934년 7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1회)
1934년 8월호 조선에서의 첫 생활 이모저모
1934년 9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2회)
1934년 10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3회)
1934년 12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4회)
1934년 12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5회)
1935년 1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6회)
1935년 2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7회)
1935년 2월호 왕자비(王子妃) 장씨(氏)가 보낸 성탄 편지
1935년 3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8회)
1935년 7월호 ‘둥글게 둥글게’
1935년 10월호 요한이 지은 집
1936년 2월호 영혼의 우리란 무엇인가?
1936년 3월호 메이누스선교회의 큰 영광
발행일 미상 조선에서 보낸 편지
1937년 11월호 갖가지 모자의 나라, 조선 !
1938년 1월호 우리의 문둥이 친구들
1938년 3월호 다니엘 맥메나민 신부님
1938년 6월호 조선의 소묘(素描)
1938년 9월호 조선에서의 어느 이른 아침
1939년 3월호 강원도 산간의 선교
1939년 3월호 다른 종(鐘)
1939년 5월호 목포의 자랑
1939년 6월호 환갑(還甲)
1939년 9월호 대구의 새 대교구장
1939년 10월호 순천의 우리 학교
1939년 12월호 아침의 고요 속에서
제2장 1940년대에 실린 기사
1940년 2월호 도사울의 경삿날
발행일 미상 조선에서 교회 세우기
1940년 8월호 송 바오로의 행복
1940년 9월호 미국에서 일본으로
1940년 10월호 선택받은 조선인들
1941년 1월호 조선의 산지(山地)에서
1941년 2월호 교황청, 퀸란 신부를 교구장에 임명
1941년 2월호 조선 천주교 박해 사건들의 회고
1941년 4월호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하게 하라
1941년 6월호 말괄량이 ‘왈바리’
1942년 2월호 조선의 생활양식
1942년 9월-10월 합본 조선의 공소
1943년 4월호 조선의 추억
1943년 4월호 조선의 학교생활
1945년 11월호 조선의 식복사(食服事)
발행일 미상 퀸란 몬시뇰로부터 온 편지
1946년 5월호 조선의 감옥에서 지낸 3년
1946년 8월호 조선에서의 감금
발행일 미상 세 사람의 조선인
1946년 12월호 퀸란 몬시뇰이 보낸 보고서
발행일 미상 조선의 일본인
1947년 8월호 조선 천주교의 재건
1947년 8월호 한국의 오두막
1948년 3월호 조선 에피소드
발행일 미상 조선의 교회
발행일 미상 최 안드레아
1948년 8월호 한국의 나병환자들
1948년 9월호 조씨와 마리아 의사 선생님
1949년 2월호 두 분의 선교회 지도자
제3장 1950년대에 실린 기사
1950년 1월호 한국의 성탄 전야
1950년 5월호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발행일 미상 어느 부랑자의 임종
1950년 9월호 한국에 온 신참자
1950년 11월호 한국의 추억들
1951년 1월호 한국에서 죽음을 당하시다
1951년 1월호 한국에서의 실종
1951년 2월호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한국의 선교원들
1951년 2월호 그분들은 한국에서 희생되셨습니다
1951년 2월호 북한에서 보내는 보고
1951년 2월호 목포로 귀환
1951년 3월호 강릉으로 귀환
1951년 4월호 춘천으로부터 후퇴
발행일 미상 전쟁의 상흔을 입은 춘천
1951년 9월호 라일리 신부님의 최후
1952년 3월호 한국에서의 장례미사
1952년 4월호 목포의 새 본당 신부
1952년 5월호 한국에서 보내는 소식
1952년 8월호 흑산도에서
1952년 10월호 미자와 마리아
발행일 미상 300명의 신부님들
1953년 6월호 한국
1953년 7월호 한국에서의 체포
1953년 8월호 장기간의 억류
1953년 8월호 신앙의 승리
1953년 9월호 한국 남서부에서 보내는 소식
1953년 10월호 춘천의 기적
1953년 12월호 평화의 서곡
편역자 후기
덧붙이는 글
편역자 주
편역자 해제
제1장 1930년대에 실린 기사
1933년 11월호 사설
1933년 11월호 동방 은자의 왕국
1934년 7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1회)
1934년 8월호 조선에서의 첫 생활 이모저모
1934년 9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2회)
1934년 10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3회)
1934년 12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4회)
1934년 12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5회)
1935년 1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6회)
1935년 2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7회)
1935년 2월호 왕자비(王子妃) 장씨(氏)가 보낸 성탄 편지
1935년 3월호 천주교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8회)
1935년 7월호 ‘둥글게 둥글게’
1935년 10월호 요한이 지은 집
1936년 2월호 영혼의 우리란 무엇인가?
1936년 3월호 메이누스선교회의 큰 영광
발행일 미상 조선에서 보낸 편지
1937년 11월호 갖가지 모자의 나라, 조선 !
1938년 1월호 우리의 문둥이 친구들
1938년 3월호 다니엘 맥메나민 신부님
1938년 6월호 조선의 소묘(素描)
1938년 9월호 조선에서의 어느 이른 아침
1939년 3월호 강원도 산간의 선교
1939년 3월호 다른 종(鐘)
1939년 5월호 목포의 자랑
1939년 6월호 환갑(還甲)
1939년 9월호 대구의 새 대교구장
1939년 10월호 순천의 우리 학교
1939년 12월호 아침의 고요 속에서
제2장 1940년대에 실린 기사
1940년 2월호 도사울의 경삿날
발행일 미상 조선에서 교회 세우기
1940년 8월호 송 바오로의 행복
1940년 9월호 미국에서 일본으로
1940년 10월호 선택받은 조선인들
1941년 1월호 조선의 산지(山地)에서
1941년 2월호 교황청, 퀸란 신부를 교구장에 임명
1941년 2월호 조선 천주교 박해 사건들의 회고
1941년 4월호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하게 하라
1941년 6월호 말괄량이 ‘왈바리’
1942년 2월호 조선의 생활양식
1942년 9월-10월 합본 조선의 공소
1943년 4월호 조선의 추억
1943년 4월호 조선의 학교생활
1945년 11월호 조선의 식복사(食服事)
발행일 미상 퀸란 몬시뇰로부터 온 편지
1946년 5월호 조선의 감옥에서 지낸 3년
1946년 8월호 조선에서의 감금
발행일 미상 세 사람의 조선인
1946년 12월호 퀸란 몬시뇰이 보낸 보고서
발행일 미상 조선의 일본인
1947년 8월호 조선 천주교의 재건
1947년 8월호 한국의 오두막
1948년 3월호 조선 에피소드
발행일 미상 조선의 교회
발행일 미상 최 안드레아
1948년 8월호 한국의 나병환자들
1948년 9월호 조씨와 마리아 의사 선생님
1949년 2월호 두 분의 선교회 지도자
제3장 1950년대에 실린 기사
1950년 1월호 한국의 성탄 전야
1950년 5월호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발행일 미상 어느 부랑자의 임종
1950년 9월호 한국에 온 신참자
1950년 11월호 한국의 추억들
1951년 1월호 한국에서 죽음을 당하시다
1951년 1월호 한국에서의 실종
1951년 2월호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한국의 선교원들
1951년 2월호 그분들은 한국에서 희생되셨습니다
1951년 2월호 북한에서 보내는 보고
1951년 2월호 목포로 귀환
1951년 3월호 강릉으로 귀환
1951년 4월호 춘천으로부터 후퇴
발행일 미상 전쟁의 상흔을 입은 춘천
1951년 9월호 라일리 신부님의 최후
1952년 3월호 한국에서의 장례미사
1952년 4월호 목포의 새 본당 신부
1952년 5월호 한국에서 보내는 소식
1952년 8월호 흑산도에서
1952년 10월호 미자와 마리아
발행일 미상 300명의 신부님들
1953년 6월호 한국
1953년 7월호 한국에서의 체포
1953년 8월호 장기간의 억류
1953년 8월호 신앙의 승리
1953년 9월호 한국 남서부에서 보내는 소식
1953년 10월호 춘천의 기적
1953년 12월호 평화의 서곡
편역자 후기
덧붙이는 글
편역자 주
몇 년간을 조선에서 지내보니, 동양의 나라들에서는 군중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군중들이 어떠한 정치 집회에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순식간에 모여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남자들은 손에 연장들을 들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안고, 하던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모두 내팽개쳐둔 채 모여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뭘 하려고? 아마도 어떤 이가 개를 조련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이거나, 길거리를 걷고 있는 한 외국인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조선의 군중들에게 구경거리가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단지 길 가던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에서 뭔가 희한한 것을 구경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군중들은 어떤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이고, 일단 모여들면 끝까지 머무른다. 한 시간 혹은 두세 시간을 머물러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 될 게 무엇인가? 시간은 조선인들에게는 가장 값싼 일용품이어서 그들은 얼마든지 시간을 탕진할 수 있다. 시간 낭비에 대해 조급해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서서 구경하는 것에 만족해한다. 사정에 따라서는 설령 볼 수 없는 경우에도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한다. ---- p.11~12
밤 동안에 폭우가 내렸는데 아침이 다가와도 계속해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진창이 된 황량한 벌판들은 비참하고 버려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이은 흙집들은, 마치 서로 의지하기라도 하려는 듯, 언덕배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물이 가득 찬 논들 근처에 위험스럽게 걸쳐 있었다. 비참한 골목길들이 구불구불 이 마을들로 이어지고 있었고, 길에는 조선인들이 오고 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흰옷은 이 점점 더 들이붓듯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 단정한 차림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 p.62~63
조선의 주식(主食)은 다른 극동(極東) 지역과 마찬가지로 쌀인데, 여기에 약간의 생선을 곁들여 먹는다. 조선인들은 다양한 야채를 좋아하는데, 어떤 것들은 날로 먹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데쳐서 먹기도 한다. 조선인들이 가장 흔하게 먹는 것은 단연 김치인데 이것은 조선 고유의 채소 절임으로, 그 시큼하고 지독한 냄새는 조선 곳곳에 배여 있다. 모든 조선의 주택에는 김치 항아리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데 그중 큰 것은 10~12갤런 정도의 용량이며 여러 달을 먹을 수 있는 양의 김치가 발효되고 있다. 조선의 가정주부는 김치 항아리를 여러 개 갖고 있을수록 특별한 자부심을 느낀다.
밤 동안에 폭우가 내렸는데 아침이 다가와도 계속해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진창이 된 황량한 벌판들은 비참하고 버려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이은 흙집들은, 마치 서로 의지하기라도 하려는 듯, 언덕배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물이 가득 찬 논들 근처에 위험스럽게 걸쳐 있었다. 비참한 골목길들이 구불구불 이 마을들로 이어지고 있었고, 길에는 조선인들이 오고 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흰옷은 이 점점 더 들이붓듯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 단정한 차림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 p.62~63
조선의 주식(主食)은 다른 극동(極東) 지역과 마찬가지로 쌀인데, 여기에 약간의 생선을 곁들여 먹는다. 조선인들은 다양한 야채를 좋아하는데, 어떤 것들은 날로 먹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데쳐서 먹기도 한다. 조선인들이 가장 흔하게 먹는 것은 단연 김치인데 이것은 조선 고유의 채소 절임으로, 그 시큼하고 지독한 냄새는 조선 곳곳에 배여 있다. 모든 조선의 주택에는 김치 항아리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데 그중 큰 것은 10~12갤런 정도의 용량이며 여러 달을 먹을 수 있는 양의 김치가 발효되고 있다. 조선의 가정주부는 김치 항아리를 여러 개 갖고 있을수록 특별한 자부심을 느낀다.
---- p.330
출판사 리뷰
그들이 본 우리(Korean Heritage Books) 총서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신선한 나라 조선”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게 하고, 현재 우리의 위상을 점검하게 하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의 전근대 및 근대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를 비춰주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 역할도 해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지대-LG연암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와 문서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이 엄선해 출간해온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발간사」 중에서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ㆍ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다. 발간ㆍ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ㆍ사회ㆍ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서양 천주교 선교사들이 생생하게 기록한
조선인의 생활, 조선인의 신앙
전 세계에서 교회 없이 상당수의 사람이 천주교 신앙을 스스로 받아들인 곳은 바로 조선이다. 1777년 권철신과 정약전, 이승훈을 포함한 유명한 학자들은 외딴 절에서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다. 이후 이승훈은 1784년 조선 최초의 영세자가 되어 몇몇 지인에게 복음을 전해 영세를 주고, 1794년에는 조선의 최초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발을 딛게 된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천주교 신자의 고난이 지속되자 이들의 신앙을 돕기 위해 각국의 선교회는 사제들을 조선에 파견한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1918년에 창설한 천주교 선교단체로, 1933년 교황청으로부터 한국 진출을 허락받아 맥폴린 신부 등 10명의 사제가 입국해 전라남도와 제주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 책은 조선에 파견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이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선교회의 월간 기관지인 『극동(極東, The Far East)』에 기고한 글들을 묶었다. 일부 글은 필자가 없고, 한두 편의 글은 한국인 신자의 글이다. 시대순으로 제1부는 1930년대에 실린 기사로 천주교 신앙이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서양 선교사들이 맞닥뜨린 조선에서의 첫 생활과 그 소감은 어떠했는지를 여러 필자의 언어로 기록한다. 제2부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험난한 국제 정세 속에서 선교사와 조선인이 어떻게 일상과 신앙을 영위해나갔는지 다양한 비화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제3부는 1950년대 실린 기사로 한국전쟁 당시 박해와 죽임을 당한 선교사들의 고난이 담겨 있다.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재탄생한 조선의 이모저모
동방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조선은 오랜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여하한 나라와도 절대 교류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타국으로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어떤 외국인도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이 허물어지면서 외래 문물과 외국인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간 비밀 경로와 잠입을 통해 조선인 신자들과 교류해왔던 서양 선교사들은 일말의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서 이방인이었다.
『극동』에 실린 기사는 조선 곳곳에서 제2의 삶을 개척한 서양 선교사들의 일화를 풀어낸다. 한국인이라면 익숙할 옛 모습은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새롭게 묘사된다. 조선 전통의 생활양식과 풍경, 조선의 문물과 산업, 조선의 국민성과 특이한 신자들에 대한 회고, 한국전쟁의 참상과 전후 복구 과정에 대한 선교사들의 기록은 놓치기 쉬운 조선의 이면을 포착한다.
“현대의 조선인들은 모이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살던 옛날 유대의 사람들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조선인은 항상 유대인들의 특징인 장사꾼 기질도 없었고, 그들을 그토록 비열하게 만들었던 교활함도 없었고, 그들을 그렇게 멸시받게 만든 위선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요컨대 조선인은 소박한 심성에 선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고, 그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조선인은 또한 극도로 붙임성이 있다. 아마도 이 점이 조선인들이 항상 마을에서 사는 이유일 것이다. 외딴집이란 것은 이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천주교사 속
숨은 주역들을 비추다
현재 한국의 천주교 신자 수는 약 570만 명으로, 총인구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1794년 조선 최초의 신부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을 당시 천주교 신자가 4,000여 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교하면 짧은 시간에 놀랄 만한 종교적 성장을 이룩했다. 이 책은 천주교가 조선에 뿌리내리고 꽃 피우기까지 박해에 굴하지 않고 천주교 전파에 힘쓴 조선인 신자들의 활약을 그린다. 무엇보다 메타적인 역사서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소수자 신자들의 신앙과 활약을 기록하고 있다.
험난한 박해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를 측근에서 도우며 신자들을 가르치고 이끌었던 강완숙,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신부의 자선을 거절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던 걸인 조씨, 사제관에서 사제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줬던 식복사, 사회와 고립된 곳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나병 환자들, 성당 재건을 위해 거리낌 없이 노동력을 제공하고 재산을 기부했던 지역 평신도들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천주교 신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신선한 나라 조선”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게 하고, 현재 우리의 위상을 점검하게 하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의 전근대 및 근대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를 비춰주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 역할도 해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지대-LG연암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와 문서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이 엄선해 출간해온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발간사」 중에서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ㆍ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다. 발간ㆍ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ㆍ사회ㆍ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서양 천주교 선교사들이 생생하게 기록한
조선인의 생활, 조선인의 신앙
전 세계에서 교회 없이 상당수의 사람이 천주교 신앙을 스스로 받아들인 곳은 바로 조선이다. 1777년 권철신과 정약전, 이승훈을 포함한 유명한 학자들은 외딴 절에서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다. 이후 이승훈은 1784년 조선 최초의 영세자가 되어 몇몇 지인에게 복음을 전해 영세를 주고, 1794년에는 조선의 최초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발을 딛게 된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천주교 신자의 고난이 지속되자 이들의 신앙을 돕기 위해 각국의 선교회는 사제들을 조선에 파견한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1918년에 창설한 천주교 선교단체로, 1933년 교황청으로부터 한국 진출을 허락받아 맥폴린 신부 등 10명의 사제가 입국해 전라남도와 제주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 책은 조선에 파견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이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선교회의 월간 기관지인 『극동(極東, The Far East)』에 기고한 글들을 묶었다. 일부 글은 필자가 없고, 한두 편의 글은 한국인 신자의 글이다. 시대순으로 제1부는 1930년대에 실린 기사로 천주교 신앙이 어떻게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서양 선교사들이 맞닥뜨린 조선에서의 첫 생활과 그 소감은 어떠했는지를 여러 필자의 언어로 기록한다. 제2부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험난한 국제 정세 속에서 선교사와 조선인이 어떻게 일상과 신앙을 영위해나갔는지 다양한 비화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제3부는 1950년대 실린 기사로 한국전쟁 당시 박해와 죽임을 당한 선교사들의 고난이 담겨 있다.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재탄생한 조선의 이모저모
동방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조선은 오랜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여하한 나라와도 절대 교류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타국으로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어떤 외국인도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이 허물어지면서 외래 문물과 외국인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간 비밀 경로와 잠입을 통해 조선인 신자들과 교류해왔던 서양 선교사들은 일말의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서 이방인이었다.
『극동』에 실린 기사는 조선 곳곳에서 제2의 삶을 개척한 서양 선교사들의 일화를 풀어낸다. 한국인이라면 익숙할 옛 모습은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새롭게 묘사된다. 조선 전통의 생활양식과 풍경, 조선의 문물과 산업, 조선의 국민성과 특이한 신자들에 대한 회고, 한국전쟁의 참상과 전후 복구 과정에 대한 선교사들의 기록은 놓치기 쉬운 조선의 이면을 포착한다.
“현대의 조선인들은 모이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살던 옛날 유대의 사람들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조선인은 항상 유대인들의 특징인 장사꾼 기질도 없었고, 그들을 그토록 비열하게 만들었던 교활함도 없었고, 그들을 그렇게 멸시받게 만든 위선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요컨대 조선인은 소박한 심성에 선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고, 그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조선인은 또한 극도로 붙임성이 있다. 아마도 이 점이 조선인들이 항상 마을에서 사는 이유일 것이다. 외딴집이란 것은 이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천주교사 속
숨은 주역들을 비추다
현재 한국의 천주교 신자 수는 약 570만 명으로, 총인구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1794년 조선 최초의 신부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을 당시 천주교 신자가 4,000여 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교하면 짧은 시간에 놀랄 만한 종교적 성장을 이룩했다. 이 책은 천주교가 조선에 뿌리내리고 꽃 피우기까지 박해에 굴하지 않고 천주교 전파에 힘쓴 조선인 신자들의 활약을 그린다. 무엇보다 메타적인 역사서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소수자 신자들의 신앙과 활약을 기록하고 있다.
험난한 박해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를 측근에서 도우며 신자들을 가르치고 이끌었던 강완숙,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신부의 자선을 거절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던 걸인 조씨, 사제관에서 사제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줬던 식복사, 사회와 고립된 곳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나병 환자들, 성당 재건을 위해 거리낌 없이 노동력을 제공하고 재산을 기부했던 지역 평신도들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천주교 신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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