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가톨릭-천주교 (독서)/4.한국천주교회사

조선 천주교 그 기원과 발전 (2015)

동방박사님 2023. 8. 30. 21:05
728x90

책소개

조선 천주교의 시작과 끝을 바라본
최초의 통사,
90년 만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다!


『조선천주교-그 기원과 발전』은 조선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천주교회사의 시작과 흐름을 종합적으로 바라본 책이자 최초의 조선 천주교 통사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653년 아시아 지역에서의 포교를 위해 프랑스에 설립된 해외 전도단체로 1831년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의 초대 대목으로 임명되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책은 1874년에 출간된 달레(Dallet) 신부의 『한국천주교사』보다는 뒤늦은 1924년에 출간되었지만, 달레가 천주교회사를 19세기 중반까지만 다룬 반면 이 책은 1924년까지의 조선 천주교회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최초의 조선 천주교 통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1784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조선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을 박해를 받은 당사자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의 눈에 비친 조선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병인양요와 같은 천주교의 박해를 조선인의 눈이 아닌 박해 당사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목차

발간사 ‘그들이 본 우리’?상호 교류와 소통을 위한 실측 작업
서문?나라와 백성
땅과 산물 | 환경 | 백성 | 언어 | 사회 계급 | 가족 | 국왕과 정부 | 종교 | 조선 민족의 기원

제1부: 그리스도교의 조선 유입과 최초의 박해들(1784~1831)
16세기 일본의 침입 | 조선 최초의 천주교 입교자들(18세기) | 가성직제도의 수립 |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의 입국과 순교 | 수많은 그리스도교인의 순교 | 척사윤음(1802년 1월 25일) | 30년간 선교사가 없었던 조선 교회

제2부: 가혹한 박해와 수많은 순교자
제1장: 조선 대목구의 설정(1831), 1839년과 1846년의 박해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몬시뇰 | 모방 신부의 조선 입국 | 샤스탕 신부의 조선 입국 |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몬시뇰 | 1839년의 박해 | 앵베르 주교의 체포 |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체포 | 세 선교사의 순교 | 척사윤음(1839년 11월 24일) |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몬시뇰 | 최초의 조선인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 김대건 신부의 순교
제2장: 선교사들의 활동(1847~1866)
페레올 주교의 죽음(1853) |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몬시뇰(1855) | 보좌주교로 성성된 다블뤼 몬시뇰(1856) | 보람과 시련의 시기(1857~1863) | 조선 국왕의 죽음과 궁정 혁명 | 신임 선교사 4인의 도착 | 러시아와 조선 | 박해가 일어나다 | 베르뇌 주교의 체포 |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와 승지 남종삼의 체포 | 추국청을 열고 국문을 행하다 | 베르뇌 주교와 그 동료들의 순교 |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의 체포와 순교 | 다블뤼 주교 및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의 체포 | 다블뤼 주교와 그 동료들의 순교 | 1866년의 무수한 순교자들 | 세 명의 선교사가 피신하는 데 성공하다 |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 수년간 박해가 지속되다

제3부: 카타콤바 밖으로 나온 조선 교회, 수확을 시작하다(1867~1911)
제1장: 조선 재입국을 위한 선교사들의 시도(1867~1870)
박해와 신교의 자유 | 이교국의 종교 자유를 위해 외세가 개입하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 조선 재입국을 위한 선교사들의 시도와 좌절, 그들의 중국 잔류
제2장: 리델 몬시뇰과 블랑 몬시뇰의 대목구장 재임 시기 그리고 조선과 외국 열강들 간의 조약(1870~1890)
제6대 조선 대목구장 리델 몬시뇰 | 1871년 미국의 조선 원정과 조선 입국을 위한 선교사들의 새로운 시도 | 리델 주교의 조선 입국, 그의 체포와 방면 | 조선어 문전과 사전 | 두 명의 선교사 체포당하다 | 마지막 척사윤음(1881년 6월 12일) | 조선과 외국 열강들 간의 조약 |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 몬시뇰
제3장: 조선 대목구장 뮈텔 몬시뇰, 수확
1890년 조선 교회의 현황 |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 몬시뇰 | 1891년의 민란과 1894년의 청일전쟁 | 선교사들의 활동과 복음화의 진척 | 러일전쟁과 일본 보호령이 된 조선 | 서울 베네딕토회 수도원 설립(1909)

제4부: 조선 교회의 조직화와 교구 분할
제1장: 서울 대목구(파리 외방전교회)
뮈텔 몬시뇰의 초대 서울 대목구장 취임과 드망즈 몬시뇰의 성성 | 서울 교구의 신학교 확장 | 천주교인의 이주 | 보통학교 | 더욱 충실한 신앙 생활 | 조선의 일본인 교우들 | 방인 사제들을 위한 라틴어 잡지 | 1914~1918년 전쟁, 개신교의 성장 | 병합 이후의 조선 천주교회와 일본 | 간도에서의 약탈과 소요, 최문식 베드로 신부의 피랍 | 뮈텔 몬시뇰의 주교 성성 30주년(1920) | 원산 대목구의 신설(1920), 서울에서 두 명의 주교가 성성되다(1921) | 1922년 서울 교구 시노드와 성직자들을 위한 새로운 지도서 공포 | 가톨릭 청년회 | 학생 기숙사와 상업학교 건립 노력 | 회장들을 위한 지도서 | 서울 교구 인쇄소 |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 소송 | 서울 대목구의 북서 지역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다 | 1924년 초 서울 대목구의 인원
제2장: 대구 대목구(파리 외방전교회)
조직 활동 | 복음전파 활동 | 1924년 초 대구 대목구의 인원
제3장: 원산 대목구(바바리아?성 오틸리엔 베네딕토회)
성 오틸리엔 베네딕토회의 조선 진출(1909년 2월) | 원산 대목구의 설립 | 조직 및 사업 | 원산 대목구의 인원(1924)
제4장: 평안도 지역(메리놀 외방전교회)
서울 대목구의 북서 지역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다 | 미국 가톨릭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결론
현재 조선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 | 조선에서 개신교의 위협 | 덧붙이는 말 | 조선 천주교 현황(1923)

옮긴이 글 | 옮긴이 주
 

저자 소개

저자 : 파리 외방전교회
이 책은 1924년 홍콩에 소재한 파리 외방전교회 인쇄소 발간으로 되어 있을 뿐, 그 저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658년 아시아 지역에서의 포교를 위해 프랑스에 설립된 해외 전도단체로 1831년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대목구에 파견하면서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전교회 소속으로 서울 대목구 보좌주교였던 드브레 신부가 이 책의 저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역자 : 김승욱
홍익대학교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는 남도 끝자락에 터를 잡고 번역을 일삼아 지내는 중이다.

책 속으로

조선어는 중국어와 상당히 다르다. 중국어는 단음절어인데 조선어는 다음절어로서 교착어의 한 갈래에 속한다. 조선어는 한편으로 일본어와 이웃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랄 알타이어족-몽골어·퉁구스어·터키어·사모예드어 등-과 가까우며, 또한 인도의 드라비다어족-타밀어·말라바르어 등-과도 유사한 점이 많아 보인다. 조선어는 1443년 이후로 한글 자모를 사용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티베트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 하며 모음 11개와 자음 14개의 25개 낱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전에 조선에선 중국 문자만을 알았으므로 음성 언어는 글로 적을 수 없었으며, 모든 것이 한자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어가 그 어휘에 있어 한자어를 많이 차용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자어는 라틴어나 희랍어가 현대 서구 언어들의 학술 용어 형성에서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조선에서 하고 있다. --- p.14

그는 베이징에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성직자를 만났고, 미사성제(聖祭)에 참석했으며, 또한 성사(聖事)들이 어떻게 집행되는지도 봤다. 게다가 그는 전례(典禮)의 조직을 다룬 서적도 갖고 있었다. 더 무엇이 부족한가? 저 조선인 신문교우들 가운데 사제가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교우들이 모여 수차례 회의를 거친 후에 권일신이 주교로 선출되고 이승훈과 다른 몇 명은 신부가 되었다. 모든 이가 절대적 선의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주고, 고해를 듣고, 견진(堅振)을 베풀고,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했고 신도들은 크게 열광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다양한 성무 활동에 전념한 지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1789년), 교리 서적 중 어떤 것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던 중 그들은 스스로 사제로 선출된 것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불안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 즉시 모든 성무를
중단하고 베이징 주교에게 서신으로 문의하였다. --- p.42

9월 18일 로즈 제독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즈푸를 출발하였다. 선상에는 통역으로 따라온 리델 신부가 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제독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그 어떤 지시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그가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겠으나, 속단하지는 말자. 함대는 곧 조선 해역에 도달하였다. 20일 그들은 한강 하구를 정찰했고, 25일 두 척의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 가까이에까지 접근하였다. 30일 그들은 뒤에 남겨두었던 ‘프리모게’호와 다시 합류하여 10월 3일 즈푸로 되돌아왔다. 이제는 실전에 나설 차례였다. 10월 11일 제독은 이번엔 일곱 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즈푸를 출발, 13일 강화도 앞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별다른 저항 없이 섬을 점령하였다. 그곳에서 제독은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들에게 극형을 내린 관원 세 명을 그에게 넘겨줄 것과 전권을 지닌 고관을 파견하여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그 서한에 회답하지 않았다. 한편 제독은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강화읍과 그곳에 있던 궁전[장녕전(長寧殿)]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프랑스인들이 겁을 먹고 도망쳤고 그리스도교인이 이러한 침략과 그로부터 입은 피해를 책임져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는 외교인들의 분노와 보복에 저 불쌍한 교우들을 무방비로 내버려 둔 채, 즈푸로 떠나고 말았다. --- p.111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개신교는 어떻게 저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예전에 그러하였듯이 개신교가 포교지에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그들의 성공은 과장된 것이며 결국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전혀 없다고 믿거나 말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별없는 행위요, 현실 직시를 거부하는 것이리라. 성공은 존재한다. 아니, 그 성공은 엄청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천주교의 전파에 있어 진정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 성공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개신교 목사들은 가톨릭 선교사들과 비교할 때 커다란 이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무제한이라 할 만한 재원을 갖추고 있다. 조선에서의 그들의 현재 예산을 보자. 최소 200만 엔이다. 그것을 조선 세 개 대목구의 선교사들이 신앙홍포회로부터 받는 보잘것없는 지원금과 비교해보자. 그 지원금은 현재 20만 프랑, 즉 불과 3만 엔 혹은 1만 5,000달러에 미치지 못한다. 개신교 목사는 훨씬 그 수가 많다. 가톨릭 선교사가 60명인 데 비하여 그들은 542명이다. 다른 한편, 그들의 재원 덕분에 후한 보수를 지급할 수 있기에 개신교는 많은 방인 목사(611명)와 전도사(1,449명)를 거느릴 수 있다. 그에 비해 조선 가톨릭교회는 기껏 42명의 방인 사제와 30여 명의 유급 회장을 두고 있을 뿐이다. 비교를 계속할 필요조차 없다.
--- p.210
 

출판사 리뷰

박해 당사자의 눈으로 본
조선 천주교인의 가혹한 역사


1777년, 외딴 절간에 몇몇의 학자가 모여 누가 들을 새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 낯익은 이름들이 있었으니 정약용·정약전 형제도 있었거니와 이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덕조, 그리고 권철신·권일신 형제도 있었다. 그들은 절간에 앉아 인성과 천(天), 세상에 관한 여러 문제를 고찰한 이후에 중국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함께 훑어보기에 이르렀다. 신의 섭리, 영혼, 미덕과 악덕에 관해 그 책이 말하는 가르침이 너무 좋아 보였기에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품행을 신의 계명에 일치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조선에서 천주교라는 종교의 씨앗이 싹튼 순간이었다.

조선의 천주교는 타국에 그것이 들어온 과정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 위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로써 그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라 조선인 스스로 학문을 탐구하고, 그럼으로써 천주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요, 국사 시간에 귀만 조금 기울였어도 알 만큼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연도와 박해받은 이의 숫자, 그리고 박해를 한 당사국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을 뿐, 박해받은 이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야기는 일반인으로선 쉽게 접할 수 없다. 현재 천주교를 믿거나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같은 사료를 읽은 사람만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은 1784년부터 1924년까지를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조선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다. 특별한 것은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인 당사자가 그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쓴 책이라는 점이다. 시대순으로 제1부는 1784년부터 1831년까지의 시기로 조선에 천주교가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그 경위와 경로를, 제2부는 1831년부터 1866년까지 이른바 ‘피로 물든’ 시기로 당시 벌어진 박해와 수많은 순교자에 대해 상세히 밝힌다. 이 부분에 병인양요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그 과정과 결과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제3부에서는 천주교회가 박해라는 ‘어둠의 시기’를 지나 합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의 역사를 다룬다. 마지막 제4부에서는 1911년 이후 조선 천주교회가 확장, 분할되는 과정과 메리놀 외방전교회와 같은 새로운 선교회들이 조선에 진출하여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를 담고 있다.

고난 속에서도
치우치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의 모습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한국학 개론서로써 아직 한국에 관한 정보가 빈약하였던 19세기 후반 서구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처럼 이 책 또한 서문과 본문 곳곳에 조선 사회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들어 있어 20세기 초반 한국에 진출하려는 서구 사회에 다양한 정보를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서문에서 환경, 백성, 언어, 사회 계급, 가족 등 9개 항목으로 나누어 조선 사회와 민족, 문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종적 특징, 특산물부터 말과 글을 다르게 쓰는 이유와 단군신화까지 그 묘사에 대해서는 우월감이나 열등에 대한 조롱 따위 없이 최대한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설명한 것이 단연 눈에 띈다.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조선에 대한 애정을 갖고 최대한 객관적인 눈으로 그 시대의 모습을 묘사하려 애썼다는 점이 놀랍다.

“오랫동안 중국에 예속되었던 조선은 항상 숭문(崇文)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학식 배양은 언제나 중국 방식을 모방했을 뿐, 국가적 특징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였다. 게다가 한글 자모의 창제 이후에도 교본이나 공문서는 계속해서 한글이 아닌 한자로 작성되었다. 언문책은 여자들이나 혹은 한자를 모르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예전에 조선의 선비는 한글을 모른다 하는 것이 오히려 자랑이었다. 어렵기 그지없는 한자를 안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힌 선비로서는 음소 문자이면서 또한 그 조합이 너무 간단한 한글이 별로 탐탁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도 주목할 만하다. 훌륭한 문자 한글을 가졌음에도 조선의 선비들이 그것을 쓰지 않으려 하는 이유, 조선 양반의 폐해와 조선 가족 구성원 내에서 여성의 지위까지 조선 사회를 면밀하게 또 오랜 기간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애정 어린 묘사는 딱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독립운동의 편에 선 개신교와는 달리 총독부에 협력했던 조선의 천주교는 당시의 상황을 매우 일제에 유리하게 서술하고 있다. 씁쓸한 역사의 단면이다.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 시대 각종 종교의 청사진


당시 조선의 사회상이나 생활상, 박해 당사자가 바라본 박해의 시기 또한 중요한 정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또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책의 독보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달레 신부가 기록하지 않았던 1874년 이후 조선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 시대 각종 종교의 현황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므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책의 결론이다. 이곳에서 조선 천주교에 위협이 되는 장애 요인에 대한 설명으로 당시 조선에 어떤 종교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지 그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는 불교와 신도(神道), 그리고 유교, 천도교, 시천교, 단군교 등을 언급함으로써 조선 후기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에 민초들이 어떤 종교에 의지했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백성이 가진 종교적 특질에 대한 설명도 있다. 특히나 개신교의 교세는 감리교·장로교·회중교회주의·재림교·안식교·구세군·성공회 등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종파를 언급하고 1921년과 1923년의 신자 숫자를 도표로 만들어 한 자릿수까지 정확히 명시되어 있으므로 천주교를 제외한 종교사로서도 가치가 있음이 틀림없다.

끝으로 본문에 담긴 사진 34점에는 성당이 없던 시절 공소의 모습과 명동대성당, 용산 신학교와 같은 종교 시설의 초기 모습도 담겨 있어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들이 본 우리(Korean Heritage Books) 총서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신선한 나라 조선”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게 하고, 현재 우리의 위상을 점검하게 하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의 전근대 및 근대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를 비춰주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 역할도 해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지대-LG연암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와 문서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이 엄선해 출간해온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발간사」 중에서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다. 발간·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사회·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