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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 시스템과 전문가들에 대한 신랄한 반론이며, 인간이 지닌 자발적 행동 능력에 대한 강력한 변론이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로서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현대의 상식과 진보에 근원적 도전을 던진 이반 일리치. 이 짧고 강력한 에세이는 그의 저서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현실 사회와 우리 삶을 바꾸기 위한 구체적 방향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일리치는 이 책에서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 이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수행하는 숨은 역할이 무엇인지 밝혀내면서 지금껏 누구도 제기하지 못한 시장 의존사회의 근본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무력감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쓸모 있는 실업’이라는 새로운 저항의 길을 제시하며 개인의 자율과 창조가 꽃피우는 현대 자급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준다.
목차
서문
들어가며
1 위기인가 선택인가
2 전문가의 제국
3 산업사회의 환상
4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5 적들의 반격
6 현대의 자급
들어가며
1 위기인가 선택인가
2 전문가의 제국
3 산업사회의 환상
4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5 적들의 반격
6 현대의 자급
저자 소개
저 : 이반 일리치 (Ivan Illich)
책 속으로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6p)
현대의 새로운 가난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상품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죄악이거나, 또는 두 가지 다일 수 있다. 소비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8p)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 (9p)
나는 현대성에 들어 있는 부정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시간을 잡아먹는 초고속 교통, 병을 만드는 의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이 그것이다. 허울뿐인 혜택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부정적 외부효과가 불평등하게 부과되는 것은 이 부정적 속성에 뒤따르는 결과이다. 나의 관심사는 현대화된 가난이 인간에게 끼치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결과이며,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이며, 이 새로운 비참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 (13p)
변하지 않는 나의 목표는 인간을 오로지 좌절시키기 때문에 항상 부당한 이 시대의 거짓 풍요를 발견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14p)
비트 bit와 와트 watt(각각 정보와 에너지 단위를 나타낸다)가 어느 한계를 넘어 대량 생산 상품에 과도하게 투입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impoverishing wealth’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 가난한 부는 함께 나눌 수 없을 만큼 희소한 부이거나, 한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 파괴적인 부이다. (15p)
상품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 (33p)
나는 이 20세기 중반을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46p)
미래의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학파와 사회주의 학파가 서로 반대되는 학파이고, 병원과 감옥, 운송체계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면 혼란에 빠질 것이다. (56p)
인간에게 공용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전문적인 서비스가 주입되는 탯줄이 달린 낯선 태반이 들어섰다. 인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집중치료를 받는다. 삶은 마비되었다. (77p)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85p)
근원적 독점이란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린 것이다. (88p)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수십 배가 증가했지만, 도구를 다루며 얻는 만족감은 드물다. 인간은 자신이 몸을 갖고 태어난 이유인 삶을 살기를 멈추었다. 그 어느 때보다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둘러싸였지만 기껏해야 간신히 생존했을 뿐이다. 인간의 일생은 남몰래 만족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필요의 사슬로 이어지게 되었다. 수동적 소비자가 된 이 인간은 급기야 삶과 생존을 분간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렸다.
(90p)
직장 밖에서 일하거나 전문가의 지시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지칭할 이름은 아직 생기지 않았지만, 이 역시 가난의 현대화로 겪게 되는 가장 분노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이런 자유는 대다수 보통 사람에겐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100p)
급여를 주는 직장에서 벗어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인간의 자율적 행위는 고용수준을 위협하고, 사회적 일탈을 일으키며, 국민총생산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부적절하게 불리는 ‘노동’일 뿐이다.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적 투자와 어울리지 않게 결합된 기괴한 요소를 의미한다.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
현대의 새로운 가난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상품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죄악이거나, 또는 두 가지 다일 수 있다. 소비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8p)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 (9p)
나는 현대성에 들어 있는 부정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시간을 잡아먹는 초고속 교통, 병을 만드는 의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이 그것이다. 허울뿐인 혜택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부정적 외부효과가 불평등하게 부과되는 것은 이 부정적 속성에 뒤따르는 결과이다. 나의 관심사는 현대화된 가난이 인간에게 끼치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결과이며,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이며, 이 새로운 비참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 (13p)
변하지 않는 나의 목표는 인간을 오로지 좌절시키기 때문에 항상 부당한 이 시대의 거짓 풍요를 발견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14p)
비트 bit와 와트 watt(각각 정보와 에너지 단위를 나타낸다)가 어느 한계를 넘어 대량 생산 상품에 과도하게 투입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impoverishing wealth’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 가난한 부는 함께 나눌 수 없을 만큼 희소한 부이거나, 한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 파괴적인 부이다. (15p)
상품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 (33p)
나는 이 20세기 중반을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46p)
미래의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학파와 사회주의 학파가 서로 반대되는 학파이고, 병원과 감옥, 운송체계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면 혼란에 빠질 것이다. (56p)
인간에게 공용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전문적인 서비스가 주입되는 탯줄이 달린 낯선 태반이 들어섰다. 인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집중치료를 받는다. 삶은 마비되었다. (77p)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85p)
근원적 독점이란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린 것이다. (88p)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수십 배가 증가했지만, 도구를 다루며 얻는 만족감은 드물다. 인간은 자신이 몸을 갖고 태어난 이유인 삶을 살기를 멈추었다. 그 어느 때보다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둘러싸였지만 기껏해야 간신히 생존했을 뿐이다. 인간의 일생은 남몰래 만족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필요의 사슬로 이어지게 되었다. 수동적 소비자가 된 이 인간은 급기야 삶과 생존을 분간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렸다.
(90p)
직장 밖에서 일하거나 전문가의 지시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지칭할 이름은 아직 생기지 않았지만, 이 역시 가난의 현대화로 겪게 되는 가장 분노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이런 자유는 대다수 보통 사람에겐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100p)
급여를 주는 직장에서 벗어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인간의 자율적 행위는 고용수준을 위협하고, 사회적 일탈을 일으키며, 국민총생산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부적절하게 불리는 ‘노동’일 뿐이다.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적 투자와 어울리지 않게 결합된 기괴한 요소를 의미한다.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1. 이 시대에 던지는 우리의 근본 물음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소비를 하지 않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인가”
“직장에 고용되지 않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인가”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와 이론으로 현실을 분석하는 두꺼운 사회이론서들이
이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지 선명히 보여주는 듯 하지만,
그럴수록 정작 내게 절실한 삶의 좌표는 실종된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의 삶과 이 시대의 근본 문제로 곧바로 들어간다.
‘누가’ ‘어떻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지 명쾌하게 밝혀내며,
빼앗기고 잃어버린 인간 능력과 창조적 삶을 회복하기 위한 길을 제시한다.
2.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현대의 금기어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경제 불황, 사상 초유의 취업난, 대량 실업, 비정규직 문제.
이런 키워드로 점철되는 시대에 일리치가 제안하는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는 위험하면서도 이상적으로 들린다.
지금 우리에게는 모두가 알지만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말이 있다.
취업은 점점 불가능해질 것이며
설사 취업이 된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편에서는 모두가 직장을 구하는 게 꿈이지만,
한편에서는 모두가 직장을 그만두는 게 꿈이다.
“지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이다.
이런 자유는 보통 사람에겐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이 사회는 ‘언제든 내 일을 할 수 있는 극소수’와
‘어디서도 내 일을 할 수 없는 대다수’로 양극화되었다.
3. 풍요 속의 가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내게 용기가 없어서도, 여유가 없어서도 아니다.
“생산에 필요한 도구가 직장에서만 얻도록
사회의 기반시설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 되었다.
꼬박꼬박 끼니를 갖다 주는 안락한 감옥인 직장 문을 나가는 순간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져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살아야 한다.
지금은 삶 자체가 상품 소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되었고,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일리치가 말하는 ‘가난의 현대화’는 경제 성장으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는 무력감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가 겪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제 나는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다.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겨 가난한 것이다.
“이제 내가 가난한 이유는 35층 고층 빌딩에서 일하느라
내 두 발의 사용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4. 140쪽에 응축된 일리치의 방대한 사상과 새로운 사회를 위한 구상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타임스)이자 ‘사상의 저격수’(뉴욕타임스)로서
이반 일리치는 사회, 경제, 역사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인간 위에 제도가 군림하는 현대 사회를 전방위에서 공략하며 그 근본전제를 허물었다.
70년대 『학교 없는 사회』와 『병원이 병을 만든다』의 세계적 사상가로
전 세계를 돌며 토론의 의제를 이끌던 그는 돌연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다.
시스템이 인간을 필요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현대’라는 세기를 목격하면서 절망에 빠진 나머지 현대 관념의 기원이 되는 12세기 중세 사상을 연구하는데 남은 삶을 바쳤다.
일리치가 현실 변화의 가능성을 열정적으로 모색하던 격변의 사상 전환기에 쓴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그의 저서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새로운 사회를 위한 구체적 전략을 분명히 제시하는 저서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세기의 사상가가 암울한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희망이 어둠 속에 별처럼 빛난다.
5. 일리치를 읽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할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입을 모아 위기의 시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리치에게 위기는 전혀 다른 의미다. 그는 원래 그리스어로 전환점을 의미했던 위기crisis는 우리에게 선택의 순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위기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스스로 만든 새장에 갇혀 살았다는 걸 깨닫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적의 순간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이 거대한 새장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삶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점점 더 의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군중 속에 익명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 두려움의 끝에 매달린 한 줌의 용기를 찾아 나설 것인가?
상품에 더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덜 의존할 것인가?”
이 두 갈래의 길에서 선택은 자유다.
하지만 이 세계의 어떤 사람도 이 선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리치가 던지는 이 극단의 질문은 분명 우리가 갈 길을 비춰줄 것이다.
마치 사상의 예언가처럼 일리치가 그리는 현실의 모습은 지금의 현실보다 더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가혹해질 것이다. 인간이 더 무력해질 때 일리치를 읽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소비를 하지 않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인가”
“직장에 고용되지 않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인가”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와 이론으로 현실을 분석하는 두꺼운 사회이론서들이
이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지 선명히 보여주는 듯 하지만,
그럴수록 정작 내게 절실한 삶의 좌표는 실종된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의 삶과 이 시대의 근본 문제로 곧바로 들어간다.
‘누가’ ‘어떻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지 명쾌하게 밝혀내며,
빼앗기고 잃어버린 인간 능력과 창조적 삶을 회복하기 위한 길을 제시한다.
2.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현대의 금기어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경제 불황, 사상 초유의 취업난, 대량 실업, 비정규직 문제.
이런 키워드로 점철되는 시대에 일리치가 제안하는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는 위험하면서도 이상적으로 들린다.
지금 우리에게는 모두가 알지만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말이 있다.
취업은 점점 불가능해질 것이며
설사 취업이 된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편에서는 모두가 직장을 구하는 게 꿈이지만,
한편에서는 모두가 직장을 그만두는 게 꿈이다.
“지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이다.
이런 자유는 보통 사람에겐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이 사회는 ‘언제든 내 일을 할 수 있는 극소수’와
‘어디서도 내 일을 할 수 없는 대다수’로 양극화되었다.
3. 풍요 속의 가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내게 용기가 없어서도, 여유가 없어서도 아니다.
“생산에 필요한 도구가 직장에서만 얻도록
사회의 기반시설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 되었다.
꼬박꼬박 끼니를 갖다 주는 안락한 감옥인 직장 문을 나가는 순간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져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살아야 한다.
지금은 삶 자체가 상품 소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되었고,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일리치가 말하는 ‘가난의 현대화’는 경제 성장으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는 무력감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가 겪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제 나는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다.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겨 가난한 것이다.
“이제 내가 가난한 이유는 35층 고층 빌딩에서 일하느라
내 두 발의 사용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4. 140쪽에 응축된 일리치의 방대한 사상과 새로운 사회를 위한 구상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타임스)이자 ‘사상의 저격수’(뉴욕타임스)로서
이반 일리치는 사회, 경제, 역사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인간 위에 제도가 군림하는 현대 사회를 전방위에서 공략하며 그 근본전제를 허물었다.
70년대 『학교 없는 사회』와 『병원이 병을 만든다』의 세계적 사상가로
전 세계를 돌며 토론의 의제를 이끌던 그는 돌연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다.
시스템이 인간을 필요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현대’라는 세기를 목격하면서 절망에 빠진 나머지 현대 관념의 기원이 되는 12세기 중세 사상을 연구하는데 남은 삶을 바쳤다.
일리치가 현실 변화의 가능성을 열정적으로 모색하던 격변의 사상 전환기에 쓴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그의 저서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새로운 사회를 위한 구체적 전략을 분명히 제시하는 저서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세기의 사상가가 암울한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희망이 어둠 속에 별처럼 빛난다.
5. 일리치를 읽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할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입을 모아 위기의 시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리치에게 위기는 전혀 다른 의미다. 그는 원래 그리스어로 전환점을 의미했던 위기crisis는 우리에게 선택의 순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위기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스스로 만든 새장에 갇혀 살았다는 걸 깨닫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적의 순간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이 거대한 새장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삶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점점 더 의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군중 속에 익명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 두려움의 끝에 매달린 한 줌의 용기를 찾아 나설 것인가?
상품에 더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덜 의존할 것인가?”
이 두 갈래의 길에서 선택은 자유다.
하지만 이 세계의 어떤 사람도 이 선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리치가 던지는 이 극단의 질문은 분명 우리가 갈 길을 비춰줄 것이다.
마치 사상의 예언가처럼 일리치가 그리는 현실의 모습은 지금의 현실보다 더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가혹해질 것이다. 인간이 더 무력해질 때 일리치를 읽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31.사회학 연구 (독서>책소개) > 5.노동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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