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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50년간의 스테디셀러이자 동학혁명 연구자들의 필독서
한국인이라면 ‘전봉준’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거기에 이 『전봉준 평전』을 읽으면 더욱 처연한 심정이 든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2년에 처음 출간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 4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찍이 동학 연구를 시작해, 이 책에는 다른 전봉준 연구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가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이 “시대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었거나 전봉준을 만났던 인물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라며, 1961년부터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호남과 충남지역에는 동학군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80대의 노인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 덕택에 다른 연구서와는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외손녀, 전봉준의 동지인 나사일의 손자로서 전봉준을 곁에서 본 나홍균, 김덕명의 손자, 김개남의 손자, 손화중의 손자, 옹택규의 손자, 청류암의 신도 등이 그들이다. 20년간 자료와 관련 인물을 찾아 5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전봉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다 거쳐간 “모든 곳과 모든 길”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봉준을 쓸 때 나를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보다 더 세밀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국인이라면 ‘전봉준’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거기에 이 『전봉준 평전』을 읽으면 더욱 처연한 심정이 든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2년에 처음 출간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 4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찍이 동학 연구를 시작해, 이 책에는 다른 전봉준 연구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가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이 “시대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었거나 전봉준을 만났던 인물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라며, 1961년부터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호남과 충남지역에는 동학군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80대의 노인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 덕택에 다른 연구서와는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외손녀, 전봉준의 동지인 나사일의 손자로서 전봉준을 곁에서 본 나홍균, 김덕명의 손자, 김개남의 손자, 손화중의 손자, 옹택규의 손자, 청류암의 신도 등이 그들이다. 20년간 자료와 관련 인물을 찾아 5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전봉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다 거쳐간 “모든 곳과 모든 길”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봉준을 쓸 때 나를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보다 더 세밀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목차
서장(緖章)에 대신하여
다시 쓰는 3판 서문
글머리에
I. 난세(亂世)
1. 삶의 어려움
2. 사상의 피폐
3. 당시의 국제 정세
4. 호남의 한(恨)
5.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Ⅱ. 태어남
1. 출생지
2. 가계(家系)와 가문(家門)
3. 수학 시절
4. 유랑의 세월
Ⅲ. 만남
1. 아버지와 아내
2. 동지들
3. 조병갑
Ⅳ. 횃불
1. 항변
2. 고부민란 : 1차 기포(起包)
3. 귀소(歸巢)
Ⅴ. 2차 기포(起包)
1. 박해
2. 무장(茂長)에서 황룡촌(黃龍村)까지
3. 전주성
4. 집강소
Ⅵ. 음모
1. 일본 천우협(天佑俠)과의 관계
2. 대원군(大院君)과의 관계
3. 북접(北接)과의 갈등
Ⅶ.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
1. 왜 이 문제가 거론되어야 하는가?
2. 종래의 주장과 논쟁의 시말
3. 교도에 관한 논쟁
4. 접주(接主)에 관한 논쟁
5. 맺는 말
Ⅷ. 조선의 십자군 : 3차 기포(起包)
1. 청일전쟁과 일본의 대응
2. 번민
3. 북진
4. 우금고개에서
5. 혁명인가, 전쟁인가?
Ⅸ. 떨어지는 별
1. 패주의 길
2. 황금에 눈이 먼 사람들
3. 공판과 처형
4. 유족(遺族)
부록
전봉준 공초(供草)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
다시 쓰는 3판 서문
글머리에
I. 난세(亂世)
1. 삶의 어려움
2. 사상의 피폐
3. 당시의 국제 정세
4. 호남의 한(恨)
5.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Ⅱ. 태어남
1. 출생지
2. 가계(家系)와 가문(家門)
3. 수학 시절
4. 유랑의 세월
Ⅲ. 만남
1. 아버지와 아내
2. 동지들
3. 조병갑
Ⅳ. 횃불
1. 항변
2. 고부민란 : 1차 기포(起包)
3. 귀소(歸巢)
Ⅴ. 2차 기포(起包)
1. 박해
2. 무장(茂長)에서 황룡촌(黃龍村)까지
3. 전주성
4. 집강소
Ⅵ. 음모
1. 일본 천우협(天佑俠)과의 관계
2. 대원군(大院君)과의 관계
3. 북접(北接)과의 갈등
Ⅶ.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
1. 왜 이 문제가 거론되어야 하는가?
2. 종래의 주장과 논쟁의 시말
3. 교도에 관한 논쟁
4. 접주(接主)에 관한 논쟁
5. 맺는 말
Ⅷ. 조선의 십자군 : 3차 기포(起包)
1. 청일전쟁과 일본의 대응
2. 번민
3. 북진
4. 우금고개에서
5. 혁명인가, 전쟁인가?
Ⅸ. 떨어지는 별
1. 패주의 길
2. 황금에 눈이 먼 사람들
3. 공판과 처형
4. 유족(遺族)
부록
전봉준 공초(供草)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
저자 소개
저 : 신복룡 (申福龍)정치학자이자 인물 연구가.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同) 대학원을 수료하고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중앙도서관장, 대학원장, 석좌교수(1979~2012)를 지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1999~2001),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의 객원 교수(1985~1986)를 지내고, 독립유공자서훈심사위원(장)(1999~2023)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 : 1943-1...
책 속으로
-호남이 원통함[寃]을 품게 된 세 번째 원인은 이곳이 곡창지대라는 역설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풍성하다는 것은 수탈의 깊이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지역의 토지는 비옥했다. 민란의 주역인 농민들은 ‘애당초부터’ 굶주렸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풍요를 맛본 적이 있었으나 어떤 기회에 가치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전봉준은 몸이 작지만 얼굴이 희고 눈빛은 형형하여 사람을 쏘는 듯하다. 평소 집에 머물 때는 동네의 소년들을 모아 『동몽선습』을 읽어주거나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동네의 어른들이 찾아오면 고현(古賢)의 사적(史蹟)을 들어 얘기할 뿐 세간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 때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았다 드러누웠다 하였으며, 부모를 봉양함에 그 효성이 지극했다.”
-“발통문은 두 개의 봉투 가운데 한 봉투에 동학 대접주 임명장과 같이 들어있었다. 나는 국한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살고있는 이 집터와 집은 고부면 신중리 대뫼 562번지로 갑오농민혁명 전 (부친이)이곳에 살다가 혁명 뒤 모의자로 지목되어 피신하였기 때문에 집은 관군에 의해 소각당했다. 이 집은 돌아와 다시 지은 것으로 부친이 이곳에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 뒤 계속해서 나는 여기에 살고 있다.”
-“갑오년, 내 나이 16세가 되던 해의 정월 초팔일은 말목 장날이었다. 석양에 동네 사람들이 쑤군쑤군하더니 조금 있다가 통문이 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여러 동네에서 징소리며, 나팔소리, 고함소리로 천지가 뒤끓더니 몇천 명의 군중이 내 동네 앞길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조병갑이를 죽인다고 민요(民擾)가 났다. 수만 군중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몰려갈 제 군수 조병갑은 정읍으로 망명 도주하여 서울로 도망하였다.”
-“군중들이 해산하고 10일도 못 되어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00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이닥쳐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에게 민란의 주모자들을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역졸을 고부 군내에 풀어 마을을 뒤지고 다니며 부녀자들을 강음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백성들을 마구 구타하고 굴비 꿰듯 사람을 엮어갔다.”
-고부민란이 혁명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노라면 우리는 역사가 반드시 거창한 법칙에 따라 예정되고 조화되어 흘러가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 그렇게 된 데에는 지극히 미소한 인자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용태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전봉준은 접주이기는커녕 동학교도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로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전봉준이 동학도였다거나 아니면 그가 고부의 접주였다는 주장은 그가 동학을 주요한 변수로 하여 전개되었던 혁명을 주도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선입견에서 온 성급한 단정이거나, 아니면 영웅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위광효과를 얻으려는 동학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농민군의 주력부대인 김개남 부대와 손화중 부대가 북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일본군이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있어 광주(光州)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김개남은 청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이 빠진 전봉준 부대는 농민군 가운데서도 가장 취약했으며, 전투 의지의 면에서도 다소는 낭만적이었다.
-“전봉준은 몸이 작지만 얼굴이 희고 눈빛은 형형하여 사람을 쏘는 듯하다. 평소 집에 머물 때는 동네의 소년들을 모아 『동몽선습』을 읽어주거나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동네의 어른들이 찾아오면 고현(古賢)의 사적(史蹟)을 들어 얘기할 뿐 세간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 때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았다 드러누웠다 하였으며, 부모를 봉양함에 그 효성이 지극했다.”
-“발통문은 두 개의 봉투 가운데 한 봉투에 동학 대접주 임명장과 같이 들어있었다. 나는 국한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살고있는 이 집터와 집은 고부면 신중리 대뫼 562번지로 갑오농민혁명 전 (부친이)이곳에 살다가 혁명 뒤 모의자로 지목되어 피신하였기 때문에 집은 관군에 의해 소각당했다. 이 집은 돌아와 다시 지은 것으로 부친이 이곳에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 뒤 계속해서 나는 여기에 살고 있다.”
-“갑오년, 내 나이 16세가 되던 해의 정월 초팔일은 말목 장날이었다. 석양에 동네 사람들이 쑤군쑤군하더니 조금 있다가 통문이 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여러 동네에서 징소리며, 나팔소리, 고함소리로 천지가 뒤끓더니 몇천 명의 군중이 내 동네 앞길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조병갑이를 죽인다고 민요(民擾)가 났다. 수만 군중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몰려갈 제 군수 조병갑은 정읍으로 망명 도주하여 서울로 도망하였다.”
-“군중들이 해산하고 10일도 못 되어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00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이닥쳐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에게 민란의 주모자들을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역졸을 고부 군내에 풀어 마을을 뒤지고 다니며 부녀자들을 강음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백성들을 마구 구타하고 굴비 꿰듯 사람을 엮어갔다.”
-고부민란이 혁명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노라면 우리는 역사가 반드시 거창한 법칙에 따라 예정되고 조화되어 흘러가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 그렇게 된 데에는 지극히 미소한 인자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용태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전봉준은 접주이기는커녕 동학교도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로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전봉준이 동학도였다거나 아니면 그가 고부의 접주였다는 주장은 그가 동학을 주요한 변수로 하여 전개되었던 혁명을 주도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선입견에서 온 성급한 단정이거나, 아니면 영웅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위광효과를 얻으려는 동학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농민군의 주력부대인 김개남 부대와 손화중 부대가 북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일본군이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있어 광주(光州)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김개남은 청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이 빠진 전봉준 부대는 농민군 가운데서도 가장 취약했으며, 전투 의지의 면에서도 다소는 낭만적이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50년간의 스테디셀러이자 동학혁명 연구자들의 필독서
한국인이라면 ‘전봉준’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거기에 이 『전봉준 평전』을 읽으면 더욱 처연한 심정이 든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2년에 처음 출간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 4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찍이 동학 연구를 시작해, 이 책에는 다른 전봉준 연구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가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이 “시대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었거나 전봉준을 만났던 인물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라며, 1961년부터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호남과 충남지역에는 동학군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80대의 노인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 덕택에 다른 연구서와는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외손녀, 전봉준의 동지인 나사일의 손자로서 전봉준을 곁에서 본 나홍균, 김덕명의 손자, 김개남의 손자, 손화중의 손자, 옹택규의 손자, 청류암의 신도 등이 그들이다. 20년간 자료와 관련 인물을 찾아 5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전봉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다 거쳐간 “모든 곳과 모든 길”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봉준을 쓸 때 나를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보다 더 세밀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봉준을 ‘영웅’이라는 측면에서보다 ‘사람 냄새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다. “전봉준은 조국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지배층도 아닌 한낱 시골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춘추대의를 위해 죽었다. 나는 그의 삶을 증언하고 그 이야기를 후대에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인문학적 요소와 저널리스트적인 현장감이 들어있어 읽기 시작하면 바로 빠져드는 흡입력이 있다.
이 책에는 초판 서문을 비롯해, 3판, 4판의 서문이 나란히 들어있어 책의 역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은 난세, 태어남, 만남, 횃불, 2차 기포(起包), 음모,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 조선의 십자군 : 3차 기포, 떨어지는 별 등 모두 9장으로 구성돼 있고 부록으로는 전봉준이 취조를 받았던 공초(供草)의 원문과 번역, 그리고 저자의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가 수록돼 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몇 가지만 짚어보면, 그 하나는 호남 차별의 역사성을 짚어내고 있는 지점이다. 곡창지대가 수탈의 장소가 되었고 또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호남 차별이 시작되어 미륵신앙을 통해 원통함을 풀고 있던 민중들에게 전봉준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봉준이 ‘동학교도’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시하여 천도교와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저자는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했음을 보여 주는 어떠한 사료도 없으며, 그가 접주였다는 주장은 최시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기정사실화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전봉준은 접주이기는커녕 동학교도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로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봉준의 출생지가 정읍이 아닌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마을이라는 것. 저자는 이기화 고창문화원장이 오랜 추적 끝에 이러한 사실을 밝혀냈다며 당촌 일대의 구전, 전봉준의 족보, 그리고 선대와 형제의 묘소를 추적하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한편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에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전봉준이 머물렀던 백양사 청류암에서 전봉준이 남긴 글씨를 찾아 책에 수록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전봉준이 처음 고부민란을 일으킨 1894년 1월이 동학혁명기념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2차 기포가 있었던 1894년 5월에 맞춰 기려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5공 시절 성역화 사업을 한다며 막대한 보조금을 내려보내는 과정에서 고창과 정읍 사이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져 이런 역사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이라도 여기에 동원된 학자와 정치인들이 정도(正道)로 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곡진하게 말했다.
한국인이라면 ‘전봉준’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거기에 이 『전봉준 평전』을 읽으면 더욱 처연한 심정이 든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2년에 처음 출간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 4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찍이 동학 연구를 시작해, 이 책에는 다른 전봉준 연구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가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이 “시대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었거나 전봉준을 만났던 인물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라며, 1961년부터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호남과 충남지역에는 동학군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80대의 노인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 덕택에 다른 연구서와는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외손녀, 전봉준의 동지인 나사일의 손자로서 전봉준을 곁에서 본 나홍균, 김덕명의 손자, 김개남의 손자, 손화중의 손자, 옹택규의 손자, 청류암의 신도 등이 그들이다. 20년간 자료와 관련 인물을 찾아 5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전봉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다 거쳐간 “모든 곳과 모든 길”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봉준을 쓸 때 나를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보다 더 세밀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봉준을 ‘영웅’이라는 측면에서보다 ‘사람 냄새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다. “전봉준은 조국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지배층도 아닌 한낱 시골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춘추대의를 위해 죽었다. 나는 그의 삶을 증언하고 그 이야기를 후대에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인문학적 요소와 저널리스트적인 현장감이 들어있어 읽기 시작하면 바로 빠져드는 흡입력이 있다.
이 책에는 초판 서문을 비롯해, 3판, 4판의 서문이 나란히 들어있어 책의 역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은 난세, 태어남, 만남, 횃불, 2차 기포(起包), 음모,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 조선의 십자군 : 3차 기포, 떨어지는 별 등 모두 9장으로 구성돼 있고 부록으로는 전봉준이 취조를 받았던 공초(供草)의 원문과 번역, 그리고 저자의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가 수록돼 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몇 가지만 짚어보면, 그 하나는 호남 차별의 역사성을 짚어내고 있는 지점이다. 곡창지대가 수탈의 장소가 되었고 또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호남 차별이 시작되어 미륵신앙을 통해 원통함을 풀고 있던 민중들에게 전봉준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봉준이 ‘동학교도’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시하여 천도교와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저자는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했음을 보여 주는 어떠한 사료도 없으며, 그가 접주였다는 주장은 최시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기정사실화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전봉준은 접주이기는커녕 동학교도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로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봉준의 출생지가 정읍이 아닌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마을이라는 것. 저자는 이기화 고창문화원장이 오랜 추적 끝에 이러한 사실을 밝혀냈다며 당촌 일대의 구전, 전봉준의 족보, 그리고 선대와 형제의 묘소를 추적하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한편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에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전봉준이 머물렀던 백양사 청류암에서 전봉준이 남긴 글씨를 찾아 책에 수록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전봉준이 처음 고부민란을 일으킨 1894년 1월이 동학혁명기념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2차 기포가 있었던 1894년 5월에 맞춰 기려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5공 시절 성역화 사업을 한다며 막대한 보조금을 내려보내는 과정에서 고창과 정읍 사이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져 이런 역사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이라도 여기에 동원된 학자와 정치인들이 정도(正道)로 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곡진하게 말했다.
'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 > 5.근대전쟁.동학.의병'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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