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5.근대전쟁.동학.의병

동학사 (2024) - 새 세상을 꿈꾼 민중을 기록하다

동방박사님 2024. 12. 2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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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모두가 하늘처럼 대우받는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
당사자의 눈으로 민중의 염원을 기록하다

한국사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위기의 순간엔 늘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앞장섰다. 

그중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구성원들이 ‘아래로부터의 변화’라는 경험을 쌓은 중요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이 두 사건에 동학(東學)과 이를 계승하는 천도교가 주축이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2024년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탄생한 지 200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지 13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맞춰 동학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 오지영의 『동학사』가 〈규장각 대우 새로 읽는 우리 고전〉의 복귀와 함께 출간되었다. 

기존에 출간되었던 『동학사』가 원문을 옮겨 적고 간단한 주석을 다는 데 그쳤다면, 이 책은 그간 근대 사상가들의 움직임을 추적해 온 김태웅 교수(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가 원문을 쉽게 풀어 옮기고 각각의 부분에 해설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목차
간행사 ‘규장각 고전 총서’ 발간에 부쳐
해제 동학의 꿈과 농민의 투쟁을 읽는다

서문
저자의 서문
추천자의 서문

제1장 동학의 시작

1 도의 시창
2 도의 문답
3 유, 불, 선과 우리 도
4 포덕과 조난
5 신라 시대의 예언
6 선생 부친의 내력
7 선생 모친의 내력
8 선생의 비범하게 타고난 자질
9 선생의 특이한 지조
10 선생과 이인
11 선생의 도력에 죽은 사람이 부활하다
12 도의 제도
13 말 발이 움직이지 않다
14 깊은 개천에 말 정강이가 빠지지 않다
15 용담정 나무 위에 선녀가 하강하다
16 화를 피해 남원 은적암에 가다
17 도의 깨달음을 시험하다
18 묵념하면서 병을 다스리다
19 머리 위에 상서로운 기운
20 대구 감옥에서 나온 담뱃대
21 주문과 시, 잠, 필

제2장 도의 계승과 동학농민전쟁

1 도의 계승
2 신미사변
3 태백산공
4 개접과 유적
5 강서와 설교
6 신원운동
7 상소 한 묶음
8 보은 회집
9 석불 비결
10 이조 말엽의 사태 변화
11 종친과 척당의 세력 싸움
12 과거에 급제한 벼슬아치의 협잡과 탐관오리의 행악
13 전라 각 군의 민란
14 동학란과 고부 함락
15 동학군과 전라 감영 군대의 접전
16 동학군과 서울 군대의 접전
17 장성 접전과 전주 함락
18 동학군과 서울 군대의 강화
19 서울 군대와 청·일병의 동학 토벌
20 동학군의 재도거사
21 남북접 쟁단(爭端)
22 유도 수령 이유상이 동학군에 투합
23 토벌대장 김윤식이 동학군에 투합
24 청국 패잔병이 동학군에 투합
25 강진, 장흥의 급보
26 공주 접전
27 패전 후문
28 동학군 대장 전봉준 등이 경성에 압송
29 전봉준 선생이 13세에 지은 백구시
30 동요
31 사지에 들어갔다가 겨우 살아 나옴
32 동학당을 진멸하던 자들
33 김윤식과 이유상의 말로
34 동학당 수령 탈망자
35 투합된 청병의 하락
36 승정원일기초
37 해월 선생, 변을 당하다

제3장 천도교로의 전환과 민회운동

1 의암 선생과 민회운동
2 천도교 출생
3 일진회와 천도교 분립

제4장 교단의 분열

1 교회 분립 후 교회 상태
2 성미법 실현
3 구(龜), 의(義), 송(松) 삼암(三菴)의 전말
4 구암 김연국이 천도교 대도주에 취임
5 춘암 박인호가 천도교 대도주에 취임
6 공동전수심법
7 천도교와 기미사건

제5장 천도교 혁신운동

1 천도교 혁신운동
2 천도교의사원 초창설
3 혁신과 복구운동의 발생
4 의사원후원회 조직
5 의암 선생 사망 시의 상장 시비
6 천도교 혁신과 신문
7 합동설이 또다시 유행하다
부(附) 동학 각 파 일별

저자 소개
저 : 오지영 (吳知泳) 
한국 근대 개혁기·일제강점기의 사상가, 종교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호는 원암(源菴)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전라도 고창 출신으로 익산 민란을 주도하였고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 

1920년대 초반, 인맥과 파벌 중심의 중앙집중제에서 벗어나 지방 교구 중심의 자치적 운영을 실현하고자 천도교 혁신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손병희의 반대와 기존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에 그는 천도교 혁신파 인사...

역 : 김태웅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학문 연구와 교육 현장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한국 근대사를 자료에 입각하여 탐구할 수 있는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근대편』을 펴냈다.

 또한 한국 근대 재정사에 관심을 기울여 『한국근대 지방재정 연구』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와 근대의 지방재정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특히 근대 개혁을 지향하고 추진했던 사상가, 정치가와 학자, 교육자에 주목하여 박은식의 『한국통사(...

책 속으로
그러나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사료 비판 작업이 본격화되는 한편 한국 사회의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오지영의 『동학사』에 대한 주목할 만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선 『동학사』에서 기술된 사실의 오류와 과장 등이 지적되었다. 

또 학계 일각에서는 『동학사』는 가공의 저술로서 책 제목 그대로 ‘역사 소설’에 지나지 않다는 혹독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폐정개혁 12개조’를 오지영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하였다.
--- p.14

예컨대 최제우가 산업과 장사, 무술 연습, 한량과 교류하였던 모습을 통해 그가 당시 일반 서민들이나 서얼들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오지영은 최제우가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현실 생활에서 민중의 고통을 몸소 겪으면서 문제의식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p.58

바람과 비 서리와 눈 지나간 뒤에 風雨霜雪過去後 / 한 나무에 꽃 피면 만 그루에 봄이로다 一樹花開萬樹春
--- p.154

최시형은 민중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통속 위생과 생활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전파하여 민중들의 위생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1886년 6월 실제로 전국에 콜레라가 만연할 때 많은 동학도들이 죽음을 면했다.

오지영의 이러한 기술은 과장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학 교단의 이러한 대책은 훗날 많은 민중들이 치병을 위해 입도하는 요인이 되었다.
--- p.237~238

공자의 학이 아니라도 도가 된 것이 하나둘에 그치지 아니하거늘 전혀 거론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 동학에 대하여만 공격 배척하기를 마지아니합니다. 

심지어 서학이라고까지 지칭하나 우리 스승은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배웠으니 동을 어찌 서라고 합니까?
--- p.245

오지영은 동학도의 동향만 유의하지 않고 반대쪽이라 할 정부와 유생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 규장각을 방문하여 그들의 동향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서술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이 그것이다. 그리고 장문의 기사를 일일이 옮겨 적고 간행본에 포함하여 출판하였다.
--- p.268

학정이 날로 자라고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여 군신, 부자, 상하의 본분이 무너지고 말았다. 

소위 공경 이하 방백, 수령들은 국가의 위난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다만 자기만 살찌고 재산만 모으기에 간절하여 관리를 가려 뽑는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저자와 같았다.
--- p.317

여기에는 삼정의 문란을 비롯하여 양반 토호의 횡포, 공사채 수탈, 천민 차별 등이 개혁 대상이었다. 

특히 “토지는 평균 분작으로 할 일”은 일찍부터 개혁적 유학자들이 주장한 이래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의 토지개혁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군이 지주들의 토지문서를 빼앗으면서 토지 사유를 부정하고 있었다.
--- p.357

오지영의 이러한 기술은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군 구스노키 비요키치 상등병의 일지를 분석한 박맹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죽이는 방법으로 현장에서 즉각 ‘총살’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돌살’과 ‘타살’, 심지어 ‘소살’마저 거리낌 없이 자행하였다.
--- p.417

이어서 오지영은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할 때 집행 총순으로 있던 강 아무개가 전봉준으로부터 받은 구술 내용을 소개하면서 전봉준의 당당함과 담대함을 전한 다음, 

전봉준 개인의 약사를 기록한다. 이때 최제우, 최시형에게만 붙였던 ‘선생’이라는 호칭을 전봉준에게도 붙였다. 전봉준에 대한 존경과 함께 그를 최제우, 최시형의 위상만큼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428~429

새야 새야 녹두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 장사 울고 간다
또 한가지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새야 새야 팔왕(八王)새야 / 네 무엇하러 나왔느냐 / 솔잎 댓잎이 푸릇푸릇 / 하절(夏節)인가 하였더니 / 백설(白雪)이 펄펄 휘날리니 / 저 건너 청송(靑松) 녹죽(綠竹)이 날 속인다
--- p.437

해월 선생 생전 시에 구암, 의암, 송암 등 3인에게 합심동력(合心同力)하라는 부탁은 다만 일시적 언사나 문자에 그치고 말았다. 

선생이 변을 당한 후 그날부터 3인은 고사하고 2인도 합심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패망한 도를 부활하자는 의견이 서로 달라 그리되는 것이다. 

의암은 시의를 따라 문명개화를 하여야 된다 하였고, 구암, 송암은 이것을 반대하였다.
--- p.504

“우리는 어느 때까지라도 도에 위배되는 자를 모두 섬멸하고 말겠다. 

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로서 수백만 인 가운데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와 수백만 대중의 피땀을 빼앗아다가 저 혼자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자와 인내천평등을 말하면서 저 혼자 왕 노릇을 꾀하는 자는 다 없애버리고 말 것이다.”
--- p.590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천도교연합회의 동지 명단을 자랑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최동희는 보이지 않는다. (…) 천도교연합회는 공산주의 혐의를 제기하는 내, 외부 세력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최동희와의 관계 역시 비공개로 전환시켜야 했던 것은 아닐까.
--- p.607

출판사 리뷰
생생하고 정확한 기록을 남기려는 저자의 노력과
역해자의 철저한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사료적 가치

저자 오지영은 익산 지역에서 동학농민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동학이 천도교로 전환된 이후에도 혁신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20년대 만주에 있는 기간 동안 『동학사』의 초고를 작성하고, 귀국 후 수정을 거쳐 1940년 영창서관에서 이 책을 정식 간행하였다. 

그가 이 책에서 동학의 내부자로서 기록을 세세히 남긴 덕분에 동학 지도자들의 발언과 토지 분작, 천민의 처우 개선 같은 농민들의 구체적인 요구 사항들을 알 수 있다. 

물론 동학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여럿 있지만, 『동학사』가 동학 창시와 농민전쟁의 과정을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중 폐정개혁안은 이 책에만 남아 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동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까지 채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우리가 동학농민전쟁의 상황을 동학 농민군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사료이다.

이뿐만 아니라, 오지영이 전봉준을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와 동등한 반열에 올렸던 이유, 

당시 떠돌던 여러 전설을 수집하여 실은 취지, 일제의 검열 속에서 기록하고 누락한 것 등 그 행간을 읽으면 당시 상황을 더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근래 여러 연구자에 의해 이 책은 사료로서 결함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작성 시점이 농민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라는 점, 저자가 제목에 ‘소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개인의 시점에서 기록되어 오류와 과장이 섞여 있다는 점 등 여러 한계가 지적되었다.

이 책의 역해는 이러한 한계를 염두에 두면서 작성되었다. 

역해자는 기록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동시대 동학에 대한 기록들부터 최신의 연구 성과들까지 두루 살피면서 앞서 제기된 비판들에 대해 재고한다. 

특히 만주에서 작성된 초고본과 귀국하여 고쳐 낸 간행본을 꼼꼼히 비교하여, 오지영이 『승정원일기』와 같은 타자의 기록을 대거 참고하여 객관성을 확보하였으며 농민전쟁 현장을 답사하고 당사자와 후손들을 만나 후일담을 전해 들으면서 자칫 잊힐 수 있었던 사실들을 남기고자 노력했음을 밝힌다. 

또 토지개혁을 포함한 폐정개혁안이 농민전쟁 당시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후대의 조작이라는 비판에 대해, 동학이 유학 내부의 토지개혁론 계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이며 당대에 충분히 등장할 수 있는 주장임을 확인한다.

최제우 탄생 200주년, 동학농민전쟁 130주년에 다시 읽는
새 세상을 꿈꾸는 민중들의 현재 진행형 역사

광복 이후 한국에서 동학농민전쟁은 한편으로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이었고,

 한편으로는 독재에 맞서 민중과 민족의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들의 사상적 연원이었다. 

이 때문에 『동학사』는 한때 널리 읽히는 책이었으나, 1987년 이후 점차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동학사』에서 오지영이 회고하는 동학의 역사는 어쩌면 계속 실패해 온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가 1940년 이 책을 출간할 당시에도 동학농민전쟁은 이미 50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건을 건조하게 나열하지 않고, 당시 민중의 생생한 증언으로 그들의 꿈과 노력을 전하려고 했던 것은 그 일을 과거의 것으로 끝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동학의 출발점이자, 당시 민중이 염원했던 모두가 존중받는 세상은 두 세기를 넘은 오늘날 우리 역시 바라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바람과 비 서리와 눈 지나간 뒤에, 한 나무에 꽃 피면 만 그루에 봄이로다”라는 최제우의 시처럼, 오지영과 증언자들은 독자들과 함께 봄날을 기다린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0228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