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동북아역사 (2024~) [해설서]/5.한일관계 (교류사)

[웹북] 대마도정벌 (1389박위. 1396김사형. 1419이종무.)

동방박사님 2024. 11. 22. 07:23
728x90

대마도 정벌

제1차 대마도 정벌 (第一次對馬島征伐) / 전기 왜구의 일부

날짜 1389(창왕 2) 음력 2

장소 일본의 기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의 부속도서

결과 고려의 승리

교전국

고려 / 무로마치 막부 왜구

지휘관

조선 박위(朴葳)김종연(金宗衍) / 최칠석(崔七夕) / 박자안(朴子安)

대마도 무로마치 왜구

병력

군함 100척 이상 병력: 10,000명  / 불명 (대마도)

피해 규모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음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제2차 대마도 정벌 (第二次對馬島征伐) / 전기 왜구의 일부

날짜 1396(태조 5) 음력 12

장소 일본의 기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의 부속도서

결과 미상

교전국

조선 / 무로마치 막부 왜구

지휘관

조선 5도병마도통처치사 김사형(金士衡)도병마사 남재(南在) / 병마사 신극공(辛克恭) / 체찰사 이무(李茂)

대마도 무로마치 왜구 / 병력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이 때 동원된 5도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나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점을 주목해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사형이 130일에 돌아올 때까지 약 2개월간의 사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3차 대마도 정벌 (第三次對馬島征伐) 전기 왜구의 일부

날짜 1419(세종 1) 음력 619일 / 장소 일본의 기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의 부속도서

결과 조선의 승리 / 교전국 조선 / 무로마치 막부 왜구

지휘관 / 3군도통사 유정현(柳廷顯) / 3군도체찰사 이종무중군절제사 우박(禹博이숙무(李叔畝황상(黃象) / 좌군도절제사로 유습(柳濕) / 좌군절제사로, 박초(朴礎박실(朴實) / 우군도절제사 이지실(李之實) / 우군절제사,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 항복

병력 전함 227, 군사 17,285 미상 / 피해 규모 정확히 알 수 없음 불명

적병 114명을 참수, 21명을 포로로 했으며,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전기 왜구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던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대마도)을 정벌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고려 창왕 2) 박위가 이끌었으며, 2차 대마도 정벌은 1396(조선 태조 5)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제3차 대마도 정벌은 1419(세종 1)에 이종무가 이끈 정벌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일본어: 応永外寇)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일본어: 糠嶽戰爭)이라고 하였다.

배경

쓰시마는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있어 중개를 맡는 특수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그 토지가 협소척박(狹小瘠薄)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하므로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米穀)을 받아갔다. 또 조선에서도 쓰시마 섬을 우대하였으며 쓰시마는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 때에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게 되었다.

1차 정벌

1389(창왕 2) 음력 2월에 박위가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구출하였다.

2차 정벌

1396(태조 5) 음력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3차 정벌

원인

1418(태종 18), 대마도에 큰 흉년이 들어 기근이 발생하자, 대마도인들이 명나라 해안으로 약탈을 가던 도중에 조선의 서천군(구 비인 庇仁)과 해주(海州) 해안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조선은 새 도주인 소 사다모리가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논의하였다. 드디어 1419(세종 1) 69, 상왕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선포하였다.

경과

상왕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 의정부 참찬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명하고, 우박(禹博), 이숙묘(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7천 명을 거느리고4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출병을 지시한 세종은 태종과 함께 한강 두모포에 거동해 연회를 베풀며 출정식을 갖는다.

1419(세종 1) 음력 6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 정벌을 시작한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철수시킨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전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결과

대마도주가 고려국이 아닌 조선국에 굴복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명나라의 일본 정벌 차단 외교

2009319일 한국역사연구회 학술 발표회에서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발표하는 이규철 가톨릭대 강사는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우선 기해동정 이전 10년간 왜구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꼽는다. 고려말부터 태종 초기까지 기승을 부렸던 왜구의 침입은 태종 9(1409)부터 크게 감소했다. 10년 만의 왜구 피해에, 그것도 대마도가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출정 명령 4일 만에 65일분의 군량과 1만 7000여명의 병력을 준비한 대목도 이전부터 대마도 정벌을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조선의 피해가 뜸했던 때, 왜구의 주요 활동 무대는 명나라 연안지역이었다. 명나라는 일본 쇼군을 통해 왜구를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원도의에 이어 등극한 원의지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자 일본 정벌을 계획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명나라가 일본 정벌에 나서면 명나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온 태종으로선 이에 개입하지 않을 명분이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결국 조선은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막으려면 명의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대마도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대마도 원정군이 대규모 부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회피한 것도 정벌의 목적이 왜구의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격이란 추측을 뒷받침한다. 조선은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일본과 대마도와의 관계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갈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이 강사는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해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대외 목표인 북방지역, 특히 여진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라는 일거양득을 취했다고 파악한다.

박위 장군

출생일 미상 / 출생지 밀양 / 사망일 1398년 / 사망지 한성 / 국적 조선 / 경력 우달치, 경상도상원수, 친군위 도진무

박위(朴葳, ?~ 1398)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고려말 신흥무인 중 1인.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고 1389년 대마도 정벌을 했다. 밀성박씨 정국군파의 시조이다.

생애

우달치로 등용되어 우왕 때 김해 부사가 되었고 1387(우왕 13)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동래성을 축성하였다. 요동 정벌 때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몰아냈다.

1389년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전함 100척을 인솔하고 대마도를 쳐서 왜선 300척을 불태워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그 후 판자혜부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백(忠義伯)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豊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 정국군(回軍功臣 靖國君)이 되고, 조선 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때 밀성(密城:지금의 밀양)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398년 이방원의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참찬문하부사 겸 의흥친군위 도진무(參贊門下府事 兼 義興親軍衛都鎭撫)로 숙직 중 쿠데타군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살해당했다.

가족관계

7대조 박을재(朴乙材):삼사좌윤, 밀직부사, 밀성박씨 삼사좌윤공파 시조

조부 박천명(朴天命): 전법판서

아버지 박광후(朴光厚): 보문각대제학 증 정승

동생 박천(朴蕆): 대광보국숭룩대부 영의정, 구산박씨 시조

아들 박기(朴耆): 자헌대부 이조참판, 오위도총관, 낙향 후 고향 밀양에서 변계랑과 함께 후학양성을 함, 신남서원에 아버지 박위와 함께 배향됐다.

손자 박대생(朴大生): 가선대부 황해도병마절도사

손자 박현생(朴賢生): 좌리공신

손자 박효생(朴孝生): 집현전학사, 단종폐위와 사육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세조의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 사육신을 기리는 시를 써 단종 충의록에 전해진다.

신남서원 경보당

고려 말기 대마도정벌과,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운 정국군 박위와 조선 초기 문신인 박기(朴耆) 부자를 기리는 서원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이종무 장군

이종무(본명:이순신, 李從茂, 1360~ 1425)는 조선 초기의 조선전기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된 공신이자 무신이다. 이을진의 아들로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였으며 세종 때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안대군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고,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찬성사에 이르렀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가 장천군으로 개봉되었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개요

고려 공민왕 91360년에 장천 부원군 이을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1397년 옹진에서 만호(萬戶)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정안대군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그 뒤 안주도병마사(安州都兵馬使), 안주절제사(安州節制使)를 거쳐 의정부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한다.

대마도 정벌

세종 원년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섬을 정복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하여 1419년 음력 612일 주원방포(현 추봉도)를 기착지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원년 음력 619일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하여 다시 쓰시마섬으로 향하였다. 당시 총 227척의 규모로 출정을 하였으며, 617일 출발하여 바람(마파람) 때문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620일 오시에 쓰시마섬에 도착하여, 두지포에 내려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으며, 중국인이 포함된 포로를 구출하였다. 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은 끈질기게 죄를 물었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다.

생애 후반

그러나 같은 해 119일 죄를 사하기 위해 종군하려는 김훈과 노이를 추천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당한다. 김훈과 노이는 무재가 뛰어나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해 종군하려 하였고, 이종무는 이를 세종에게 간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 등은 불충한 자를 종군시켰다고 하여 이종무와 김훈, 이적 등을 처단할 것을 간하였으나 세종이 거부를 하였고, 이종무는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며 탄식을 했다. 그 후 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142065일 풀려나 서울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출발하여, 이듬해 14242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다시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사후

1425년 음력 69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세종은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617일 내린 교서에서 세종은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라는 표현으로 비통함을 표시하였다.

이종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197595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아버지 이을진(李乙珍, 고려 후기의 무신)

아들 이승평(李昇平)

아들 이덕평(李德平)

아들 이사평(李士平)

이종무함

19955181200톤급의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국산 잠수함 이종무함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수중 최고 속도는 22KN이며, 어뢰와 기뢰를 장착하고 2개월 이상 단독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평가

이종무는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우왕 때 벼슬을 하여, 창왕, 공양왕까지 고려조 마지막 네명의 왕을 경험하였고,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기 4대왕을 모신 무인이었다. 66세의 일기동안 모두 8대에 걸친 왕을 경험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안정된 대일관계를 마련하였다.

기타

아버지인 문신 이을진에 이어 장천부원군의 작위에 습봉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종실록 287(142569). “장천 부원군 이종무의 졸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17(1419619). “이종무가 다시 대마도로 향해 진군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17(1419619). “대마도에 도착하여 성과를 올리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17(1419825). “이종무를 군으로 봉하고, 정역·이중지·정경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1(1419822). “우정언 이견기가 이종무 등의 치죄를 청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617(14191117). “사간원에서 이종무 등을 처단하기를 청하다.”. 조선왕조실록.

봉군을 세습받는 것

Sources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