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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젊은 날 다산이 감추었던 행간을 풀어내자
비로소 온전한 그의 시대가 보였다.”
고전학자 정민 교수가 세밀한 독법으로 밝혀낸 다산 정약용의 일기에 숨은 진실
다산에게 일기란 무엇이었는가? 왜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 나열했는가?
이 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33세 다산이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몰려 지방으로 좌천된 후 겨우 상경했다가 다시 외직으로 밀려나기까지.
2년간의 일기 〈금정일록〉 〈죽란일기〉 〈규영일기〉 〈함주일록〉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다산이 언표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천주교를 둘러싼 시대적 맥락과 치밀하고 세심한 독법을 통해야만 일기에 숨겨진 다산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학자이자 정치가, 신자이자 배교자였던 ‘인간 다산’의 복잡한 내면을 생생하고도 정교하게 복원한 역작. 마침내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만난다.
목차
서문
백문백답을 열며
001 다산의 4종 일기, 어떤 글인가?
002 4종 일기의 작성 시기와 정리 시점은 언제였나?
003 다산의 일기를 어떻게 읽을까?
004 젊은 날의 다산은 어땠나?
금정일록
005 [금정일록]의 기사와 동선은 어떻게 짜였나?
006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과 [금정일록]은 어떤 관계가 있나?
007 다산과 한영익은 어떤 관계였을까?
008 박장설의 상소는 왜 문제가 되었나?
009 다산은 왜 하필 금정으로 좌천되었을까?
010 정조가 제시한 다산 좌천의 이유는?
011 수원유수 조심태가 다산에게 한 이야기의 의미는?
012 다산은 왜 이승훈을 ‘이형’이라고 불렀을까?
013 당시 금정역의 건물 구성과 환경은 어땠나?
014 당시 다산에게 주어진 금정찰방의 역할은?
015 관찰사 유강에게 보낸 편지 속 ‘즙민지방’은 무슨 뜻인가?
016 다산이 홍주목사 유의에게 보낸 편지의 의미는?
017 채씨 집성촌과 다산 주변 채씨의 그림자를 어찌 볼까?
018 8월 5일 다산이 이삼환과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은?
019 이인섭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020 당시 호남에서 벌어진 선동의 내막과 내용은?
021 석문 진사 신종수와의 교유는?
022 다산이 검거한 천주교인 김복성의 실체는?
023 김복성과 금정 역졸들의 천주교 조직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024 다산이 당시 금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일은?
025 이익운은 8월 17일에 왜 다산에게 시를 보냈을까?
026 다산이 한강동과 천방산의 한산이씨 일문을 방문한 목적은?
027 다산은 홍주목사 유의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028 다산과 방산 이도명의 갈등과 충돌 내막은?
029 오서산 일원의 유람 목적은 무엇이었나?
030 다산과 이삼환이 주고받은 두 번째 편지의 행간은?
031 북계 진사 윤취협을 찾은 목적은 무엇이고, 한백원과 함께한 백제 유적 여행은 어땠나?
032 공주에서 만난 오국진과 권기는 어떤 사람인가?
033 ‘성주산의 일’은 무엇을 말하나?
034 장령 이유수와 이일운의 잇단 방문과 관찰사가 보낸 답서의 내용은?
035 이존창의 검거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나?
036 윤규범의 시와 이익운의 편지에는 어떤 행간이 있나?
037 이기경은 왜 난데없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038 다산의 답장은 왜 그토록 격렬했나?
039 다산이 이삼환에게 보낸 편지의 맥락은?
040 공주 창곡 관리의 난맥상을 고발한 장시의 내용은?
041 강학회 직전에 이도명은 왜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나?
042 서암강학회의 일정과 일과는 어땠고, 분위기는 어떠했나?
043 서암강학회의 참석자는 누구며, 어떤 성격의 모임이었나?
044 [서암강학기]는 어떤 내용이고, 왜 썼나?
045 이승훈은 어째서 [서암강학기] 참석자 명단에서 누락되었을까?
046 이광교가 보내온 편지와 다산의 답장은 무슨 이야기를 담았나?
047 [도산사숙록]은 어떤 글이고, 왜 썼나?
048 [도산사숙록]에서 다산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반성했나?
049 존덕성 도문학 공부에 관한 논의가 왜 자꾸 나올까?
050 다산은 왜 11월 윤취협에게 편지를 보냈고, 편지의 좌명은 누구인가?
051 강이원에게 보낸, 윤기환에 대한 다산의 청탁 편지는 어떤 맥락에서 나왔나?
052 강학회 이후 지은 시의 분위기는 어땠나?
053 11월 27일에 이승훈에게 보낸 편지의 의미는?
054 이치훈은 어떤 사람이었나?
055 이삼환의 다산에 대한 평가는 어땠나?
056 이삼환이 ‘지방지술’을 특별히 말한 이유는?
057 다산은 왜 역촌 부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나?
058 이가환과 주고받은 편지의 맥락은?
059 허적의 관작 회복 소식에 다산은 왜 이렇게 기뻐했나?
060 다산이 채제공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 속내는?
061 어느 따스한 겨울날의 기억은 왜 새로웠을까?
062 이 시점에 다산은 왜 관찰사 유강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063 포폄제목과 이정운의 시를 본 다산의 소회는?
064 마침내 상경하게 된 다산의 감회는 어떠했나?
065 다산의 금정 시절은 그에게 어떤 기억을 남겼을까?
066 다산은 왜 이존창 문제로 이익운 형제와 충돌했나?
067 이승훈에게 보낸 연말 편지에는 다산의 어떤 마음이 담겼나?
죽란일기
068 [죽란일기]의 주요 내용과 당시 다산의 상황은?
069 다산은 왜 오태증의 규개일 기사를 불쑥 실었을까?
070 윤규범에 대한 다산의 애틋함의 실체는?
071 정조가 다산에게 중화척을 내린 뜻은?
072 왜 중간을 건너뛴 채 대보단 제사 문제로 넘어갔을까?
073 꽃 없는 봄 이야기와 책봉 회갑례 기사의 의미는?
074 김종수는 왜 갑자기 금강산 유람을 떠났을까?
075 김상우가 보내온 시 2수의 의미는?
076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재변에 대한 정조의 반응은?
077 군영 상번 문제를 둘러싼 이주국과 윤숙의 공방 내막은?
078 이승훈의 석방 소식을 다산은 왜 뒤늦게 짤막하게 실었을까?
079 느닷없이 강세정의 편지를 인용한 의도는?
080 [죽란일기] 끝에 인용된 시는 왜 제목과 창작 시기를 바꿔놓았나?
081 왜 [죽란일기]는 3월 말에 멈췄나?
규영일기
082 [규영일기]와 1796년 11월 16일 규영부 교서로 들어가게 된 전후 사정은?
083 《사기영선》 편찬과 제명 과정에 얽힌 이야기는?
084 다산은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했나?
함주일록
085 [함주일록]을 따로 묶은 이유와 ‘함주’의 의미는?
086 다산은 왜 이 시점에 [변방소]를 올렸을까?
087 다산의 [변방소]에 대한 정조와 대신들의 반응은?
088 목만중의 칭찬과 홍인호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어떤 의미였나?
089 23일의 해제 조처와 26일 어용겸의 송서 사건 맥락은?
090 조진관의 홍낙안·이기경을 품자는 말에 이익운은 왜 발끈했을까?
091 [변방소]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이 있었던 대목은?
092 심환지는 왜 다산을 두둔했나?
093 곡산부사 이지영 전최 평가 수정의 행간 의미는?
094 민종현은 다산에게 무엇을 물었나?
095 판서들과의 대화에는 어떤 맥락이 담겨 있나?
096 훈련대장 이경무의 서학에 대한 언급은 어떤 의미인가?
097 이병모는 왜 임금 앞에서 다산을 비난한 뒤 다산 앞에서는 변명했을까?
098 어째서 심환지는 다산 앞에서 공치사를 하지 않고 딴청을 부렸나?
099 곡산으로 떠나는 다산의 심경은 어땠나?
100 다산에게 일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부록
비방에 대해 변명하며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문
도산사숙록
주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정민 (鄭珉)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 지성사의 전방위 분야를 탐사하여 한문학 문헌에 담긴 깊은 사유와 성찰을 우리 사회에 전해온 인문학자이자 고전학자.
저서로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살핀 《비슷한 것은 가짜다》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과 문헌을 파고든 《호저집》 《고전, 발견의 기쁨》 《열여덟 살 이덕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미쳐야 미친다》, 한시의 아름다움을 ...
책 속으로
다산은 왜 이 기록들을 남겼을까? 이 일기는 무슨 이유로 문집에서 전부 빠졌나?
일기에 어떤 구체적인 의도를 담았던가? 그의 의도는 어떻게 읽을 수 있나?
다산의 4종 일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글쓴이의 내밀한 독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산은 일기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팩트만 제시한다.
다산의 의도는 팩트를 선별하고 배열하는 시선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
다산이 일기 속에서 하고 있는 말과 하고 싶었던 말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액면 그대로 읽으면 의도에서 멀어지므로 세심한 독법이 요구된다.
일기에는 전체의 의도가 있고, 선택된 각각의 에피소드가 그 의도를 뒷받침한다.
등장하는 많은 인물도 그날 어쩌다 만난 사람이 아니다.
인용한 글도 다 뜻이 있다. 의도 안에 수렴될 수 있는 사람과 공간과 사건만 선별해 무심한 듯 기록했다. 하나하나는 따로 놀지만, 전체 구성으로 보면 의도된 배치다.
---「003 다산의 일기를 어떻게 읽을까?」중에서
젊은 날의 다산은 이런 일에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산은 [방산 이도명에게 답함]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한 번 더 밝혔다.
세상에서 자신을 두고 비방이 난무하나,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님을 서두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 이도명이 도문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답답함을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다산과 이도명은 두 차례에 걸쳐 날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 일은 당시 성호 유저 정리를 일종의 전향 선언의 상징적 행동으로 갈음하려 했던 다산의 행보에 대해, 이도명으로 대표되는 지역 사림 일부에서 강력한 반발과 거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다산의 강학 모임을 주선하려 했던 계획은 처음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028 다산과 방산 이도명의 갈등과 충돌 내막은?」중에서
다산은 9월 19일에 ‘성주산의 일’로 순영에 보고서를 올렸다.
여기서 ‘성주산의 일’이란 이 지역 천주교 지도자인 이존창의 검거와 관련된 일을 가리킨다.
그간의 탐문으로 이존창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보고와 일의 진행 경과 및 체포 계획을 설명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1795년 9월, 1791년 이후 4년째 잠적 중이던 이존창을 검거한 당사자가 정약용이라는 사실은 그간 교회사 연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선명하게 이름이 명시된 기록이 없는 데다 다산의 일기에서마저 이존창의 이름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성주산의 일’이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뭉뚱그려 말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천주교와 관련된 일을 언급할 때는 늘 이렇게 오리무중의 화법을 썼다.
---「033 ‘성주산의 일’은 무엇을 말하나?」중에서
말이 간청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으니 네가 살려면 나의 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줘야 한다’는 뉘앙스였다. 반대급부는 무엇이었을까?
다산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추고, 그의 좌천을 끝내며, 나아가 이 돈으로 해묵은 원한을 빚갈음하겠다는 뜻이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결혼식이 끝난 뒤에 보내줘도 괜찮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편지에서 이기경은 노골적으로 다산의 조건 없는 투항과 굴욕적 거래를 요구했다.
다산은 이기경의 이 야비한 편지를 굳이 일기에 모두 옮겨적었다. 명백한 협박과 회유의 증거를 기록으로 남겨두겠다는 뜻이었다.
---「037 이기경은 왜 난데없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을까?」중에서
[도산사숙록] 정리는 천주교도 검거와 봉곡사 강학회에 이어 금정에서 다산이 수행해야 할 세 번째 숙제였다.
앞서 금정 도착 직후인 8월 7일에 이인섭에게 받은 편지에서, 정주의 글을 부지런히 읽고 깊이 믿어 그 가르침에 합치되기를 구하되, 그 모범을 퇴계에게서 찾으라는 주문을 실행에 옮긴 것이기도 했다. (…)
[도산사숙록]이 자발적으로 쓴 반성문은 아니었다. 금정으로 내려오면서 의도적으로 진행된, 면죄부를 얻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진지한 학문적 성찰에 다산의 훌륭한 글솜씨가 얹혀 훌륭한 한 부의 저술이 되었지만, 애초의 의도 자체가 순수하지는 않았다.
---「047 [도산사숙록]은 어떤 글이고, 왜 썼나?」중에서
그는 금정에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평소의 신념과 배치되는 행동을 했다.
주변 사람을 끌어들여 진실을 맹세하며 들러리로 세웠다.
목적을 달성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를 회유하다가 뜻 같지 않을 경우 편지를 써서 압박하고 으름장을 놓았으며, 눈속임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중앙과도 긴밀한 네트워크를 가동해서 상황을 선제적으로 장악했다.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 다산은 자신의 생애에서 금정 시절을 가장 부끄러워했을 것 같다.
---「065 다산의 금정 시절은 그에게 어떤 기억을 남겼을까?」중에서
다산은 [죽란일기] 끝에 시 [일찍 일어나 감회를 읊다]를 적으며 마무리 지었다.
정작 이 시는 《다산시문집》 권2에 ‘도산 퇴계 선생의 유서를 읽다가’라는 다른 제목으로 버젓이 실려 있다.
시문집의 편차 구성으로는 1795년 11월 말경에 지은 작품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산은 여기서 제목을 바꾸고, 창작 시기도 금정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에 쓴 작품인 것처럼 바꿔놓았다.
이렇게 시의 제목과 창작 시점을 바꿔 대미를 장식함으로써 [금정일록]과 [죽란일기] 전체를 퇴계에 대한 존모로 마무리 짓는 효과를 가져왔다. (…)
이 같은 작위적 배치는 다산이 이 일기를 끊임없이 외부 독자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작성했다는 또 다른 방증으로 읽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일기의 매 단락은 의도적 배치에 따른 의미를 지속적으로 외부로 향해 발신하게 되고, 독자 또한 그 의미의 추이에 집중하게 만든다.
---「080 [죽란일기] 끝에 인용된 시는 왜 제목과 창작 시기를 바꿔놓았나?」중에서
그의 일기는 이 같은 안간힘의 결과라는 점에서 모순의 덩어리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시기의 다산은 천주와 군주 사이에서 군주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신앙의 불씨가 재처럼 식어버린 것은 아니어서, 끊임없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켰다. (…)
내가 이렇게 다산 일기의 속살을 읽은 것은 다산을 위선자로 몰고 가거나, 신앙에 대한 정체성 문제를 양단간에 갈라보려는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을 한 번 더 밝혀둔다.
다산의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일부 부정합과 첨예한 갈등 속에는 다산과 그 시대가 맞닥뜨렸던 거대한 모순이 담겨 있다.
다산의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는 그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18세기 조선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보여준다.
---「100 다산에게 일기는 어떤 의미였을까?」중에서
출판사 리뷰
*** 최초 완역, 상세 해설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다산과 18세기 조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역작
다산 정약용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하고 긴장이 높았던 시절의 기록.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아닌 임금과 천주 사이에서 절박하고 아슬아슬했던 30대 다산이 남긴 일기 4종이 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독법과 풀이를 통해 드디어 세상에 공개된다.
18세기 조선 지성사를 깊이 탐구해온 정민 교수는 다산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담은 일기 〈금정일록(金井日錄)〉 〈죽란일기(竹欄日記)〉 〈규영일기(奎瀛日記)〉 〈함주일록(含珠日錄)〉을 국내 최초로 주석을 붙여 완역하고, 스스로 묻고 답하는 백문백답의 형식을 통해 다산과 그의 시대가 감춘 진실을 추적했다.
일기 본문과 함께 《다산시문집》에 실린 편지·시문, 《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와 각종 상소문 및 척사 기록, 족보 등을 종합 검토함으로써 역사적 사실과 일기 속 정황을 교차 검증하고, 다산이 언표하지 못한 의도와 속내를 실증적으로 파헤친다.
이 세밀한 독법으로 “봉폐된 한 시대와 뜨거운 질문으로 맞섰던 한 위대한 영혼의 내면을 훑고 지나간 진실”이 마침내 드러난다.
“이 4종 일기는 모두 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당시에는 피차 건곤일척의 승부였기에 말 한 마디에 가문의 명운과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때문에 이 시절의 다산의 일기에는 세밀한 독법이 필요하다.
일기 속의 무심해 보이는 기사 하나하나에 모두 숨은 행간이 있다는 뜻이다.” _서문에서
이 4종의 일기는 다산의 문집에는 모두 누락되고 없다.
이 일기들은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천주교와 관련된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지목해 조정에서 처벌 논의가 치열하고 뜨거웠던 시기의 기록들이다.
금정일록〉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에 연루된 33세의 다산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던 시기를, 죽란일기〉는 1796년 금정에서 겨우 상경한 뒤 실직 상태에 있던 명례방 시절을, 〈규영일기〉는 같은 해 규영부 교서관으로 복귀했을 당시를,
함주일록〉은 이듬해인 1797년 외직인 황해도 곡산부사로 밀려나기 직전까지를 담은 기록이다.
특히 분량이 가장 많은 〈금정일록〉은 다산의 75년 생애에서 밀도와 긴장이 가장 높았던 5개월을 다룬다.
다산은 왜 이러한 일기를 남겼으며, 무슨 이유로 문집에서 빠졌을까?
일기에 감춰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정민 교수는 신간 《다산의 일기장》에서 다산이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행간에 숨겨두었던 다산과 천주교에 얽힌 속내를 찾아 추적한다.
그리고 ‘정면돌파’ 끝에 마침내 한 ‘진실’에 가닿는다.
“다산의 완결성과 순정성에 바치는 경배는 지금까지의 학술적 성과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산이 모든 면에서 위대하다고 외치는 작업은 그동안 너나없이 해왔다.
더 이상 무결점의 위인전은 필요치 않다.
이제는 다산과 그의 시대를 더욱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대면할 때가 되었다. 나는 그와 그의 시대를 육성으로 만나고 싶다.” _서문에서
100개의 질문과 100개의 답변으로 만나는
학자이자 정치가, 신자이자 배교자였던 ‘인간 다산’의 진실
거대한 진실은 수면 아래 심층부에 숨어 있다
오랜 시간 다산을 연구해온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파란》 등을 저술해 역사적·문화적·개인적 맥락에서 다산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되살려왔다.
이어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등 조선 후기 서학 연구에 매진하면서 다산이 초기 천주교회의 신부였으며,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킨 장본인이자 교회 지도자 이존창을 검거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신간 《다산의 일기장》에서 저자는 책략가 다산을 발견한다.
일기 속 다산은 예민한 대목에서 말을 얼버무렸고, 어떤 때에는 말할 만한 내용조차 침묵했으며, 대체 왜 들어갔는지 종잡을 수 없는 내용들을 끼워넣었다.
일기 4종은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인 텍스트로서, 서학과 관련한 처벌 논의와 상소 공방이 거셌던 당시 정국의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고, 치밀하고 세밀한 독법으로 접근해야만 다산의 속내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다산이 지방 말단 관리로 내쳐진 이유와 그를 좌천시킨 정조의 본심, 천주교도를 검거해 비방에서 벗어나려 했던 다산의 노력과 속마음, 같은 남인과 날을 세우면서까지 성호 이익의 유저(遺著)를 정리한 젊은 날 다산의 강파르고 직선적인 성정 등 다산이 스스로 검열하고 은폐한 행간까지 찾아내 생생하고 정교하게 한 인물을 복원한다.
이 시기에 다산이 남긴 〈서암강학기〉 〈도산사숙록〉 〈변방소〉의 저술 배경과 의미 또한 새롭게 밝힌다.
“다산은 젊은 날뿐 아니라 생애를 통틀어 천주교 문제를 배제하고는 그 정체성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것이 작업에 임한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미리 정해둔 의도가 있을 수 없고, 있을 리 없다.
팩트로 제시해도 사람들은 통념으로 굳어진 허상에만 신뢰를 보낸다.
나는 그동안 그런 허상들과 줄곧 싸워왔다.
앞에서의 싸늘한 눈빛과 뒤에서 떠드는 이야기에는 개의치 않겠다.
내가 가닿고 싶은 지점은 진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_서문에서
정민 교수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무결한 위인 다산이 아니라 뾰족하고 거침없으며 모순적인 젊은 날의 다산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다산이 천주교인인지, 배교했는지를 밝히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문헌을 연구하는 고전학자로서 다산이 남긴 글을 읽고 그 안에 가려진 진실을 찾아낼 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다산에게 일기는 어떤 의미였는가?
다산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는가?
다산의 일기는 일상의 단상이나 개인적 소회 대신 객관적 사실로만 이루어져 있다.
어느 날 받은 편지 한 통, 무심하게 언급한 조정 소식 등은 특별한 주제로 귀결시키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천주교 문제로 좌천당한 다산의 정치적·정략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는 천주교 혐의를 벗고 결백을 입증할 알리바이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래서 객관적 동선과 대화, 주고받은 문서를 기록으로 남겨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훗날을 위한 증언으로 삼았다.
다산이 하고 싶은 말은 오히려 중간에 인용된 상대의 편지나 시문 속에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즉 다산의 의도는 그가 이런 팩트들을 선별하고 배열하는 시선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치밀하고 세밀한 독법으로 일기의 이 같은 전략적 배치와 계산된 글쓰기를 파악해야 다산 스스로 검열하고 은폐한 행간에서 천주교 배교에 대한 이면과 그의 복잡한 내면 갈등을 읽어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글에서 굳이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성과를 거뒀다.
반대로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는 만큼만 행간이 보이는 독서여서 글쓴이의 속마음에 가닿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기를 읽는 내내 한 시대를 온전히 이해하고 한 인간의 내면을 깊이 살피는 일이 참으로 쉽지 않음을 절감했다.
마치 곳곳에 비밀 기관을 매설하고 암기(暗器)를 감춰둔 캄캄한 지하 갱도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_서문에서
금정으로 쫓겨난 후 천주교 지도자 검거에 앞장서기까지 했지만 아무도 다산의 진실성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여야만 했다.
다산의 일기는 이러한 안간힘의 결과라는 점에서 모순덩어리다.
천주와 임금 사이에서 엇갈리는 다산의 행보는 그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18세기 조선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보여준다.
즉 다산의 모순은 시대의 모순과 다르지 않다. 다산의 일기를 통해 다산과 18세기 조선을 더욱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책이다.
마침내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만난다
다산을 지방 말단 관리로 내친 정조의 본심은 무엇이었는가?
1795년 초 다산은 정3품 관리로서 정조의 화성 행차를 모시는 등 왕의 측근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정조는 다산이 성인을 비방하는 글을 읽었으며 기이한 문장을 추구하고 글씨체를 고치지 않았다며, 그를 충청도 금정의 역참을 관리하는 금정찰방으로 좌천시킨다.
이는 사실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다산을 잠시 지방으로 보낸 것이었음을 일기의 면면을 살피면 알 수 있다.
당시 주문모 신부를 검거하는 데 실패한 후 천주교 세력의 배후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잇달았는데, 이때 정약용이 표적이 되었다.
정조는 문체와 서체를 이유로 다산을 견책함으로써 그가 천주교 서적을 가까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학죄인은 아님을 분명히 하고, 그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남해나 함경도 오지가 아닌 충청도로 보낸 것 또한 다산의 좌천이 일종의 여론 무마용이었음을 방증한다.
금정으로 좌천된 다산이 천주교도를 적극적으로 잡아들인 이유는?
찰방의 주된 직무는 역참 시설과 그곳의 마필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이 금정으로 떠나며 쓴 시와 도착하자마자 받은, 일기에 실린 편지 등을 보면 정조가 그에게 내린 실제 임무는 천주교도 교화와 검거였음이 확인된다.
실제로 다산은 부임 18일 만에 인근 천주교 세력의 중간 리더인 김복성을 체포했고, 이어서 지도자 이존창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주문모 실포 사건에 연루되어 금정까지 내쫓긴 다산으로서는 천주교 관련 혐의를 벗을 결정적인 성과가 필요했고, 정조에게는 그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일 명분이 필요했다.
즉 천주교도 검거는 정조가 다산에게 내린 첫 번째 숙제였으며, 다산은 하루라도 배교를 입증하고 임금 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다산은 왜 같은 남인과 날선 공방을 주고받으면서까지 성호 이익의 유저(遺著)를 정리했는가?
금정에 내려간 다산이 성호 이익이 남긴 초고 상태의 저서를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고자 했을 때 성호우파 남인 일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성호의 종손인 이삼환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명망 높은 선비인 이도명은 날선 편지를 보내며 강학회를 반대했다.
같은 남인인데 그들은 왜 다산의 행보를 못마땅해했을까?
다산이 자신들을 이용해 천주교 혐의에 대한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산은 어렵게 이삼환 등을 설득해 강학회를 열어 〈서암강학기〉를 정리했고, 이어서 퇴계 이황의 편지를 읽고 감상을 적은 〈도산사숙록〉을 썼다.
저자는 이 두 저술이 다산 스스로 서학을 버리고 정학(正學)으로 회귀했음을 공언하기 위한 글이었다고 말한다. 천주교도 검거에 이어 사실상 정조에게 제출하는 반성문이었던 것이다.
중앙 복귀가 눈앞이었는데 다산은 무엇 때문에 관직을 거부했는가?
1795년 말, 천주교 지도자 이존창을 체포한 공로로 마침내 상경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다산은 이를 복귀의 명분으로 삼기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정조의 명을 받은 관찰사가 여러 차례 설득하는데도 다산은 강경했다.
실상 몇 년간 애를 써도 찾지 못한 이존창을 다산이 불과 한 달 만에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존창이 자수에 가깝게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다산이 천주교 비선을 통해 이존창과 접촉한 후 주문모 신부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하다며 그를 설득했으리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사실 이존창과 다산은 한때 교계에서 함께 활동했던 사이라 서로를 잘 알았다.
그러니까 다산은 이존창 검거를 자신의 복귀와 맞바꾸는 데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저자가 다산의 마음속에 일말의 신앙이 남아 있었다고 보는 이유다.
정조와 자신을 비방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다산이 올린 상소문은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다산은 금정 좌천 후 2년여 뒤에야 동부승지로 제수되었다. 이때 다산은 관직을 사직하는 상소문 〈변방소〉를 올렸다.
이 글은 서학의 원죄 때문에 벼슬에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천주교와 결별했음을 천명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한 조정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명문이라는 칭찬이 이어지는 한편 다산의 파직을 청하는 등 반발도 심했다.
결국 정조는 논란을 이기지 못하고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로 떠나보냈다.
일기에는 〈변방소〉에 관한 조정 대신들의 반응이 녹취록처럼 기록되어 있다.
칭찬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조정의 여론이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몇몇 비난에 대해서는 자신을 두둔한 다른 대신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다산은 객관적 사실만을 기술하면서도 일기의 행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의도를 숨겨놓았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798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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