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5.서울역사박물관

서울살이 2 (내집마련의 꿈)

동방박사님 2019. 12. 22. 10:15
728x90

내 집 마련의 꿈

우리말 "집'에는 물리적 공간인 "주택"과 보금자리인 "가정'이란 뜻이 담겨있다. 즉, 거주할 집을 마련하는 일은 곧 안정된 가정에 대한 소망이었다. 특히 서울의 지방출신 이주민들에게 서울살이의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은 가족들이 등 붙이고 누을 방 한칸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많은 가옥들이 파손되었던 1950~60년대에는 한옥의 문간방이나 문간채를 빌려 살았다. 1070~80년대에는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의 배경인 양옥집 반지하 셋방이 등장했고, 아파트 시대에는 너도나도 주택청약적금을 들었다. 도한 일요일 저녁 TV에서 들리는 '준비하시고, 쏘세요!,구령에 주택복권 당첨의 희망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경제개발기의 서울, "잘살아보세"의 외침 속에서 사람들에게는 예전의 내집 마련의 꿈을 넘어 아파트가 재산증식의 가장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서울 주택보급률 96%시대, 현재 서울가족에게 집이란, 아파트란 어떤 의미 일까?   


서울  주택의 변천사





전국주택실태조사 (제1차지구 집계결과)

당시 서울에 건축되었던 주택의 대표적인 형태를 정리한 도면집 1962년




lCA 주택건설원조자금 융자 신청서 (1958)

전쟁 이후 페허가 된 지역의 주택건설을 위하여 미국 국제협조처인 lCA 자금 지원을 지원하는 신청서


서울시 용산구 무허가 건축물 등록필증 (1965)








아파트 분양 전단지

1970년대 중반 서울시내 안파트의 분양안내서


신 반포 아파트 분양계약서

반포동 잠원동 일대에 1차부터 28차까지 건축된 신반포한신아파트의 분양계약서로 당시 전용면적 86.81제곱미터의 주택가격은 10,500,000원 이었슴


가족이 모이는 풍경




부엌에서  주방으로


연탄불과 양은냄비

연탄은 석탄이나 코크스, 목탄등의 가루를 점결제와 섞어 원통형의 모양으로 만든 난방용 연료이다. 원할한 원소를 위해 위아래로 통하는 여러개의 구멍을 뚫어놓아 "구멍탄"으로 불렸다. 위생적이고 편리한 연탄이었지만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연탄가스로 인한 사망률은 제1종 제2종 전염병을 모두 합친 사망률보다 높았을정도로 심한 사회 문제였다.




배우고 경쟁하다 (교육)


오랜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자녀의 입신양명에 대한 바람이 강했전 서울 가족은 2세교육에 열렬한 관심과 노력을 투자하였다.해방이후, 현실은 암울했다. 의무교육으로 인해 아동의 취학률은 폭증 했지만 교실과 교원의 부족으로 2부제, 3부제 교육을 해야 했고, 교사 1명이 100명 내외의 학생을 가르쳐야 했다. 현재 교육환경은 크게 개선되어, 서울시내의 경우 학급당 학생 수 24.7명, 교사 1인당 학생수 12.9명이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과 교육 여건 개선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커진 사교육 시장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잦은 진학제도의 변천등 서울의 학교교육이 정상화 되었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에나 지금이나 친구들이 함께 배우고 경쟁하던 학교에서의 추억은 서울 내기에게도 평생 잊지못할 소중한 자산이다.


두발 교육의 자율화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당복에서 시작된 교복은 해방 이후에도 학교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획일화되고 차굥이 강화 되었다. 남자 중. 고등학생들은 삭발을 하고 검은색의 교복과 교모 운동화를 착용하였다.

여학생들은 단발머리를 하고 남색스커트에 흰색컬러가 있는 정장형태의 교복을 입고, 지정된 학생용 구두를 신고 다녔다. 1982년 1월4일 문교부(현 교육부) 학생들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책임의식을 기르기위해 중고등학생에 대한 두발 규제와 교복을폐지했다. 이조치에 따라 두발은 1982년 9월부터, 그리고 교복은 1983년  신입생부터 자율화 되었다. 하지만 두발의 자율화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고, 이후 교복을 다시 착용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된 두발과 교복의 자율화는 이시대 교육계의 희망과 한계를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사연 많은 콩나물 학급


한 반에 80명, 2부제 수업

광복 직후 그리고 전후 베이비붐 현상이 나타나면서 초등학교 학생 수는 급속하게 증가했다,초등학교 취학률의 급증은 여러문제를 야기하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교실과 교사의  부족이었다. 특히 서울의 학급당 학생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큰 차이를 보였다. 1947년 9월 취학 가능한 서울시내 미취학 아동수는 2만 8천명 이었으며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종로를 비롯한 중심지역에서는 2부제 수업을 그리고 주변지대였던 동대문, 성동, 영등포지역 학교들은 3부제 수업을 해야했다. 학급당 학생수는 8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른바 코남물 교실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콩나물 교실은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때의 교실

1970년대 서울의 초등학교 교실 모습과 2019년 서울의 초등학교 교실 모습이다. 그때의 교실과 현재의 교실을 비교해 봤을 때 구조와 크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때에 비해 학급당 학생수, 교사 1인당 학생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때에 비해 학급당 학생수,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현재 서울의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수는 23명, 교사1인당 학생 수는 14.7명 정도이다. 



학교는 학생들과 교직원의 건강을 보호하고 유지. 증진시키기 위하여 건강서비스와 보건교육을 제공하고, 교육환경을 관리하는 보건 사업을 실시한다. 1960~70년대 정부에서 장려하는 정책들은 학교에서 보건사업으로 실시되었다. 그중 "전국쥐잡기 운동"과 "혼분식장려운동"이 대표적이다.

1960년대 쥐는 양곡의 손실과 위생의 문제로 인해 박멸의 대상으로 여겨져 시나 군 단위로 쥐잡기가 이루어졋고, 1970년  전 국민운동으로 커졌다. 학교에서 실시한 쥐잡기운동은 하갱들이 숙제로 쥐고리를 잘라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정부에서는 밀 소비를 촉진시키고 부족한 쌀을 대신해 혼분식을 장려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도시락를 싸온 학생들에게 실시되었다. 학교는 학생들의 도시락 곡식비율을 쌀 70% 보리30%로 혼식하게 하였고, 혼식비율을 확인하기 위해 도시락을 검사하기도 하였다. 


치열한 입시전쟁 - 무즙파동과 창칼파동

초등학교의 급증은 중학교 입학에 비리와 혼란을 가져왔다. 소위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초등학생이 밤샘 과외를 했고 주소지를 가짜로 옮겨 "학구제 위반" 현상도 나타났다. 1964년 서울시내 일류중학교 입학시험 과학문제의 정답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른바 "무즙 파동"은 당시 커다란 화제였다. 문제 하나가 중학교 당락여부를 좌우하는 상황이다 보니 학부모들의 소송가지 이어졌다. 엿만드는 과정에서 당화를 돕는 첨가물을 묻는 문제의 정답을 확인하기 위해, 학부모들은 법원에서 직접 사연을 보냈고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며 교육청 앞에서 농성을 했다. 1967년에는 중학교 입시 미술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창칼파동"이 벌어졌다. 조각칼 중 창칼을 잡는 자세를 묻는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일부 학부모들이 소송을 제기 했지만 패소 했다. 중학교 입시에 대한 문제가 속속 드러나자, 1969년부터 서울시내 중학교 입학은 무시험 진학제로 바뀌었고, 서울 시내 일류중학교 다수가 페교되었다.




사이다와 김밥 먹는 날

소풍은 학생들에게 봄, 가을에 자연관찰 등의 야외 학습기회를 제공하는 교육활동이다. 서울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소풍장소는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등 궁궐, 식물원이 있던 남산, 그리고 교외에 있던 동구릉이나 서오릉과 같은 왕릉이다. 운동회는 학생들만이 아닌 가족과 동네 이웃들도 함께 참여하여 지역유대와 공동체 의식을 기를수 있는 중요한 행사 였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운동장에서 장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달리기와 단체경기를 했고, 오랫동안 연습했던 체조, 부채춤, 매스게임 등의 공연으로 가족과 이웃들에게 응원과

박수를 받았다. 이런 학교행사 날 빠질수 없는 것이 바로 도시락과 음료수였다. 야외용 도시락에 김밥을 사오는 것이 대새였고, 음료수로는 청량음료 사이다와 콜라가 인기였다.



방학을 보람있게

방학은 여름, 겨울 및 학기말에 실시하는 학교의 휴가로 더위와 추위를 피해 학업을 쉬는 기간이다. 과거 방학 기간 동안 학생들은 농번기에 부족한 일손을 도와주고, 일고 싶었던 책을 읽거나 여행을 가고, 신체를 단련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에는 주로 물놀이를 하고, 겨울방학에는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면 눈싸움과 썰매를 즐기며 놀기도 했다. 또한 방학기간 동안 학교에서 내준 방학 숙제를 했고, 중.고등학생들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보충학습의 시간도 가졌다.  1990년대 후반에 오면서 전인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지며, 방학 중에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자기 개발에 힘쓰는 것이 중요해졌다.












가족을 위해 일하다 (생업)


출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 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 밤 늦게까지 꺼지지 않은 사무실조명, 일자리를 찿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붐비는 새벽 인력시장, 밤과 새벽을 밝히는 동대문 의류시장과 농수산물 도매시장 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 서울의 항상 바쁘고 붐비는 도시이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확장되고 성장하였던 서울에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시민들의 모습,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공간들을 살펴보면서 기억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서울의 산업 및 직업변화


서울은 대한민국의 사회,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한국경제의 변화를 선도한 경제 중심지이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1950년대에도 서울은 관리직, 전문기술직, 사무직, 생산직 등의 비중이 다른지역과 비교하여 월등히 높았다.1960년대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보다 낳은직장과 교육의기회를 얻기위해 전국 각지로 부터인구가 빠르게 유입되었고 서울의 생산지과 사무직의 비중 또한 증가하였다.1970년대 이후 중공업 정책과 제조업 지방분산 으로 서울의 제조업 비중은 줄어 들었고, 1980~90년대에 금융업, 서비스업, 부동산, 임대업, 통신업 등으로 산업 변화가 이행되면서, 생산직은 줄어든 반면에 전문기술직, 관리직, 사무직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 하였다. 2000년대에는 여성 취업자 수와 전문직의 비중이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나 관리직, 생산기능직 비율에서는 남성이 높고, 서비스직에서는 여성의비율이 높은 기본적인 특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월간 시민버스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운송사업조합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로, 버스안내양 관련기사 및 정보가 실려 있다 1973~74년



버스 회수권. 토큰

승하차 시간을 줄이기 위해 헌금대신 서울시내버스에서 통용되었던 회수권과 토큰이다.





서울 시민의 성장


지난 1백 년 동안 서울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00여년 20만 명 정도가 살았던 서울에는 현재 50배에 해당하는 1천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한다. 지방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대부분은 한양사람의 후손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있다. 파리와 뉴욕에 사는 "파리지앵"과 '뉴요커" 는 그들만의 도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서울 사람들도 "서울내기"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 보다는 그들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귀속감을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해방이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새로운 "서울내기"의 등장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 > 5.서울역사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전차  (0) 2019.12.27
서울생활사박물관 (노원구)  (0) 2019.12.22
서울살이  (0) 2019.12.22
서울생활사 박물관 (서울풍경)  (0) 2019.11.03
한강의 다리 사진전  (0) 2019.03.09